소설리스트

미궁기담-257화 (257/813)

〈 257화 〉 251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이실리테가 가져온 외투는 유르파의 손재주가 여실히 드러나는 일급품이었다.

장신구나 보조 장비 및 생활 마도구, 마도기 같은 소형 제품을 제작하는 인기 제작자의 심미안은 범인에 비해 월등한 점이 있다.

그러한 심미안이 손재주와 결합하면 비록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의복 정도는 수려하게 뽑아낼 수 있다는 뜻. 더욱이 환인에게 홀랑 빠진 유르파는 그가 입을 의복도 손수 제작하기 위해 재봉술마저 익히고 있으니…….

=주인님.=

“음.”

환인은 이실리테의 시중을 받아 외투를 입어보고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현대에서 이벤트성 50% 할인으로 오더메이드 코트(니오네브레스로 트립할 때 입고 있던 코트)를 주문해서 입어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착용감과 일체감이었던 것.

=유리 언니가 오울링에서 산 외투를 수선한 거예요. 마음에 드시나요?=

“좋군.”

외투는 중세 시대풍 흑색 코트였는데 어쌔신 후드 같은 것도 달려있어 외모를 숨기기에도 적합했고, 거기에 무난한 고급스러움이 착용자의 신분을 상당히 드높아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 환인과 썩 잘 어울렸다.

=어, 도령도 나가?=

외투를 받아 입고 나갈 채비를 하자 안느도 찾아와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너도 외출할 생각인가.”

=어어. 속옷을 사……으흐흐흠, 아무튼 나가려고. 도령은?=

“저녁까지 마을을 둘러볼 생각이다. 그전에 급한 일이 아니라면 넌 유르파의 옆에 있어주면 좋겠는데.”

=응? 그거야 괜찮긴 한데, 왜?=

“유르파를 홀로 두는 것은 걱정되어서.”

환인의 짧은 대답에 사정을 대강 이해한 안느가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율이 언니는 내가 지킬게. 도령도 조심해서 다녀와.=

“그래.”

환인은 이실리테를 수행으로 삼아 돌심장 호텔을 나섰다.

이실리테의 차림은 약간 하늘거리는 느낌의 남색 가죽 모험가 슈트, 자신은 흑색 후드 코트였기에 마을에 이슈로 돌고 있는 영혼사 일행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관심을 받지 않고 4시간가량 마을의 1/3 정도를 둘러본 환인은 어째서 비자룩스가 광산 마을이라고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마을의 서편 공업 지역이 광상?과 연결되어있는지 길게 깔린 레일을 따라 광산차가 각종 광물과 석탄 등을 나르고 있었으며, 벽이 없는 건물에서 수많은 용광로가 후끈거리는 열기를 뿜어내며 광물을 녹여내고 있었던 것.

그런 공업 지역 외곽에는 일종의 공장처럼 보이는 대장간이 빼곡히 늘어서서 수많은 장인이 철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아~ 피곤해 죽겠네. 부장언니, 퇴근길에 맥주 한 잔 어때요?=

=목구멍에 낀 쇳가루 좀 씻어내게 고기도 곁들어서!=

=알았어, 알았으니까 빨리 쇠나 두들겨, 이년들아! 이거 다 못하면 오늘은 철야니까!=

=히익~, 철야 싫어!=

“…….”

크고 작은 대장간에는 남자와 여자가 반반 정도로 일하고 있던데 레일을 따라 오가고 흙 묻은 광물을 분류하고 옮기는 광부는 죄다 여자들뿐이다.

환인은 그 점에 약간의 부조화를 느꼈다.

심각한 것은 아니고 한국에서의 교육과 지식이 광산과 제철 일은 남자의 고된 업무라는 이미지가 박혀있기 때문이었다.

=아씨 존나 무거워!=

=이 시발년들아! 애 낳을 때 힘은 다 어따 팔아먹었어!? 힘줘서 밀어 좀!=

=낳을때 다 썼으니 없지! 힘 좀 쓰게 애 다시 넣어주던가!=

=맞아맞아. 아니면 뒤에서 그 고기 막대기로 좀 밀어주던가? 그럼 힘 좀 날 거 같은데.=

=이 미친년들 진짜…….=

=프하하핰!=

=깔깔깔!=

석탄 가루를 뒤집어썼는지 까맣게 보이는 늑대족의 남자의 말문이 막히자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호탕하게 웃어젖힌다.

거친 일을 하기 때문일까. 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이지만 그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이런 분위기는 마을 전체에 퍼져있었다.

상점 지역도, 주택 지역도, 공업 지역과 미관, 방화, 방재, 취락 지역 같은 곳을 오가는 사람들도 남녀 구분, 남녀 차별 같은 거 없이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 생활하는 건강하고 활기찬 마을.

도시가, 국가가 얼마나 건강한지 보려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층을 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비자룩스는 어느 마을보다 훌륭한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환인은 영혼을 많이 보지 못했고 본 영혼들도 전부 평범했다.

가끔 억울함을 품은 영혼이 있었지만, 광산 사고 등 불의의 사고로 인한 사망자의 영혼이었지, 살해당했다거나 범죄에 연루되어 죽은 영혼은 없었던 것.

=알드… 그 남자는 자기 마을에서만큼은 얌전히 있었나 보네요.=

“그래. 영주가 마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 영주의 아들이라 해도 내키는 짓을 저지르지 못한 거겠지.”

환인은 바로 옆의 건물 외벽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틀림없다. 이 벽은 콘크리트다.

비록 현대의 매끈한 시멘트 콘크리트가 아니라 큼지막한 바위와 돌멩이가 곳곳에 박혀있는 투박한 물건이지만, 이런 걸 마을 전체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마을에 풀어 베푼다는 뜻이니까.

=그런 훌륭한 영주의 자식이 악독한 살인귀라니…….=

“호부견자라는 고사성어가 있는 이유겠지.”

=아… 그런 건가요?=

“고난과 시련은 사람을 담금질한다. 하지만 모진 풍파를 학습하지 못한 자식들은 부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약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알드헬름은 그러한 사례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선민사상이 극에 달해 죄책감이 결여되어 패악질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권력을 휘두르는 인간말종. 혹은 환인 자신과 같은 사이코패스.

둘 중 하나겠지만 어느 쪽이든 환인에게는 상관없었다.

며칠 뒤 시체로 변할 인간에게 더 이상 신경 쓸 이유가 없으니까.

반년 전, 카턴에서 자신에게 극도의 불쾌감을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살생부의 죽일 놈에 등극한 알드헬름.

보복에 최소 몇 년은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파르히스트를 떠나자마자 우연히도 행적을 붙잡을 수 있었고 그 결말을 코앞에 둔 상태지만, 환인은 속이 시원하다던가 후련하다는 감정은 일체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알드헬름을 암살하고 난 이후 대처의 선택을 위해 비자룩스의 분위기를 알아보고 정보를 수집할 뿐이다.

‘여기까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일단 보복 대상을 알드헬름으로만 한정하면 되는 분위기군.’

처음에는 마을 상황을 보고 음울하고 좌절이 가득할 경우 비자룩스를 통째로 쓸어버릴 생각까지 했었다. 크라버리에 하려 했던 실험을 비자룩스에서 실행할 생각이었던 것.

하지만 마을이 이토록 정상이라면 굳이 대참사를 일으킬 이유가 없다.

추정 인구 3만에 달하는 마을이니 그간의 경험에 빗대어보면 수십에서 수백의 영혼은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마을의 1/3을 훑었어도 영혼은 열둘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이라면 혼재를 만들어낼 여건도 되지 않고, 무엇보다 이런 마을에 혼재가 갑작스레 나타나면 여자친구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질 것이다.

자신이 혼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고 그 점을 나쁘게 보지 않는 그녀들이지만,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 혼재를 만들어내 평화를 해치고 쑥대밭으로 만드는 행동은 그것과 궤를 달리하는 행위니까.

“그만 돌아가지.”

=네.=

노을도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기에 돌심장 호텔로 돌아온 환인은 로비에서 웃는 낯으로 서 있는 총지배인의 모습에서 초조함을 읽었다.

=아! 영혼사님, 오셨습니까.=

환인은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추론해내었다.

=마을 구경은 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말씀 주셨다면 안내자를 붙여 드렸을 텐데요.=

“사람 사는 모습을 둘러보는 작은 취미일 뿐이니 괘념치 마시길. 그보다 절 찾아온 손님이 계신 가봅니다.”

=네? 아, 네. 영주 성에서 첫째 도련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안느 기사님께서 첫째 도련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까.”

예상대로였기에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곧장 객실로 올라갔고,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했다.

=자기 왔니?=

=어. 도령 어서 와.=

“음.”

자신이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안느와 유르파가 웃으며 일어나고, 그녀들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얀 동물 뒤통수도 1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다.

=으, 헝. 여, 영혼사님을 뵈앱숩니닷!=

그리고 혀가 제대로 꼬인 발음으로 휘청거리며 허리를 꾸벅, 숙이다가 쿠당탕 소리와 함께 앞으로 자빠지는 북극 여우 남자.

입고 있는 옷의 핏이 빈틈이 없는데다 질감도 상당히 고급스럽다.

이 세계에서는 핏이 타이트할수록 부자들의 옷이라는 게 상식으로 퍼져있다. 그걸 생각해보면 종족 회귀를 하려는 것처럼 으에에, 바닥을 기어 다니는 이 남자가 첫째 도련님이라는 거겠지.

힐끔 탁자를 보자 술병 일곱 개가 굴러다니고 있다. 안주도 없이 깡술을 마신 모양새. 도수가 높은 술인지 여기까지 강렬한 주정이 느껴진다.

=으어어. 벼기, 벽, 이 일어났, 떠러질거 가태.=

그 주정뱅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안느가 한 손으로 남자의 목 뒤 옷깃을 잡아 고양이처럼 들더니 의자에 앉힌다.

“영주성에서 나온 분이 이분인가.”

=응. 도령이 나가고 30분쯤 뒤에 왔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했는데 괜찮으니까 기다리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더라.=

=나쁜 사람 같지도 않아서 일단 술자리를 소소하게 마련해봤어.=

그러며 찡긋, 귀엽게 윙크를 날리는 유르파.

=제, 제셔엉함뉘드아아. 이샤, 인…사룰…… 드려야, 헤끅.=

앉아있음에도 상체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남자는 일말의 이성이 남아있는지 취한 것을 사과하며 환인에게 계속 인사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중이다.

안느가 다가와 남자를 힐끗거리며 속삭였다.

=여기 영주님의 장남이자 제1부인인 아두실의 첫째 도령이래. 이름은 에사르트고 우릴 성에 초대하고 싶다는 영주의 전언을 가지고 찾아왔어. 그래서 술을 먹이면서 살살 정보를 긁어내 봤는데…….=

“그 결과는?”

=슬쩍 지나가는 말로 성의 분위기를 물었는데 며칠 전에 만났던 상단 행수 여자 말대로 성안의 분위기가 어둡대. 가문의 치부가 될 일이라 만취해도 대답하기 어렵다며 계속 사과하더라.=

“…….”

=우리한테 계속 미안해하고 수치스러워하는 느낌이던데 비자룩스 성주 혈족이 우리한테 미안해할 일…… 하나뿐이지?=

“저 도련님의 성향은 어땠지.”

=일단 하는 말에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어. 술버릇을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잖아. 그래서 일부러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먹였는데 인성은 평범하게 착한 거 같아.=

“그렇군. 우선 정리 좀 하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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