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 250 광산 마을 비자룩스
* * *
밤새 하얀 눈이 내려 세상이 새하얗게 물든 아침.
하얀 입김을 훅훅 뿜어내며 일어난 여자들은 남자친구가 핏빛 위상석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것도 그렇고, 어딘가 모르게 피곤해하는 느낌.
지난 밤이 상당히 춥기도 했기에 식전으로 뜨거운 수프를 만든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두 손으로 건네주며 물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피곤해 보여요.=
“……음.”
대답도 2초 정도 늦고 내용도 짧다.
진짜 피곤한 거였어?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여자 친구들은 처음 보는 환인의 모습에 눈을 끔뻑이다가 환인에게 뜨거운 수프를 건네주고 돌아오는 이실리테를 붙잡았다.
=이슬아. 어제 도령이랑 교대할 때 뭔가 이상한 점 없었어?=
=……시간이 되어서 주인님이 깨워주셨고, 불침번 교대하고, 주인님은 비상이한테 등을 기대고 주무셨고…… 평소랑 다른 건 없었는데.=
=근데 왜 저렇게 피곤해하지? 가서 물어봐야겠…… 아야야! 귀, 귀 잡아당기지 마아!=
=가만히 있어. 주인님이 말 안 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실 테니까.=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환인이 피곤해하는 이유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세 번이나 시더의 몸 안에 사정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환인은 멍석에 말려 몇 시간이나 두들겨 맞은 수준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느꼈던 것.
어째서 여자들이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섹스하면 그대로 기절해버리는지, 그 이유를 간접적으로 이해한 환인은 앞으로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할 때면 좀 더 그녀들의 상태에 신경 쓰겠다고 다짐했다.
뜨거운 수프로 체온을 올리고 가벼운 대련으로 몸을 추스르고 이실리테가 준비한 아침으로 속을 채운 환인은 겨우 컨디션을 평소로 맞출 수 있었다.
‘지독한 피로감이었어.’
환인은 정상이 된 사고력으로 몸 상태가 왜 그렇게 엉망이 되었는지 분석했다. 그리고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시더에게 흡수한 영기가 문제였다.
‘한기 때문이겠지.’
사람은 차가운 바닥에서 자고 일어나면 입이 돌아간다고들 한다. 시더와 귀접을 하며 몸에 냉기가 침투한데다 막대한 쾌감으로 신체 밸런스가 일시적으로 무너졌다면 그 피로가 설명된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자면 시더의 영기를 흡수함으로써 한기가 늘어나며 기존의 익숙한 루틴, 살아있는 사람의 영기 흡수 훈기 증가에 적응한 육체가 정반대인 한기의 침범 한기의 증가 현상에 익숙하지 못해 일어난 일인 거겠지.
물론 평범한 사정의 스무 배는 될 것 같은 쾌감도 어느 정도 지분은 차지하겠지. 더욱이 어젯밤은 역대 급으로 추웠다. 밤에 눈까지 내렸으니…….
=봐봐~ 이럴 때 마차가 있으면 얼마나 편해. 이게 눈이 아니라 비였으면 큰일이었다니까.=
=확실히…….=
하얀 눈밭에서 입김을 호~ 호~ 뿜어내며 안느가 마차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유르파가 거기 홀랑 넘어간데다 이실리테도 자신을 힐끔거리며 고민에 잠겨있을 무렵.
환인은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비자룩스를 응시하고 있는 시더를 살폈다.
‘외관상 변화는 없군. 이실리테와 안느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니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시더의 행동도 지난 14일(오울링에서 대기 8일, 오울링에서 비자룩스로 이동하는데 6일)간 보아왔던 반응하고도 다른 점이 없으니 정신적인 변화도 당장은 두드러지지 않겠지.
그렇다고 팔다리의 검붉은 기운이 흐려진 것도 아니니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힘과 관련된 변화인가.’
확인을 위해서는 검증이 필요한데…… 비교할만한 표가 없어 즉각적인 피드백이 어려우니 아쉬울 따름이다.
환인은 다시 시더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녀는 알드헬름의 목을 치고 나면 망설임 없이 성불할 것이라고 90% 이상 확신 중이다. 그녀가 성불하기 전까지 이 사항을 확인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디 흔한 영혼과 거래 계약을 맺어 실험을 진행해봐도 되겠지만, 만약 힘의 성장 폭이 예상이상이라면…….
“…….”
어젯밤 그 강렬한 쾌감의 경험이 환인의 시선을 역하트 모양의 엉덩이 골짜기에 집중하게 한다.
자신의 시선이 시더의 음부를 쫓고 있는 것을 깨달은 환인은 비자룩스에 눈을 고정하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영체 안에 사정한 정액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영체에 분해 능력이 있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정액에 무언가 초 현상적인 요소가 끼어든 건가?
환인은 생각을 이어가며 기성품 마차를 구매할지, 아니면 주문 제작을 할지, 주문 제작한다면 어떤 기능을 넣을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여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출발하지.”
=어어.=
=네.=
=응~.=
눈이 쌓여 하얗게 변한 들판을 한참 달려 점심을 조금 넘긴 시각에 도착한 비자룩스는 소도시 웨이포드의 절반 정도나 되는 규모의 번창한 도시였다.
웨이포드와 차이점이라면 산자락에 세워져 지형상 계단형 도시가 되었고, 지반의 문제인지 3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아예 없다는 점, 그리고 건물에 목재가 거의 사용되지 않아 단단한 돌의 도시처럼 다가온다는 점이다.
어떤 건축 자재를 사용했는지 진주색으로 빛나는 5m 높이의 매끈한 성벽을 바라보며 평거식 형태의 성문으로 다가간 환인은 생각보다 멀쩡한 검문을 받게 되었다.
=산의 마을 비자룩스에 어서 오십시오. 많이 추우실 텐데 이쪽으로 오셔서 불 좀 쬐시죠.=
날씨 탓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지, 통행이 거의 없는 성문에 도착한 환인은 성문 병사의 배려로 화톳불 가에 섰다.
여자 친구들은 신분패를 들고 검문소로 향한 상황.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마을이라 하기에는 너무 크고 웅장한 도시군요. 산의 도시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하하하.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마을의 칭찬에 추위로 빨개진 여병사의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진다. 갈색 늑대 귀가 쫑긋거리고 조금 뭉친 털의 늑대 꼬리가 좌우로 붕붕 흔들린다.
착용한 방어구는 재질로 추측하기에 돌인데 무겁고 둔한 모습이 아니라 철판을 여러 겹 덧대 제작한 중갑옷 느낌이 강하다.
저런 것을 제식으로 채용하다니, 제작 기술이 뛰어나다는 방증이겠지.
‘그래서 알드헬름이 신기술을 만들어냈다며 주목받았을 테고.’
환인의 예의에 병사는 한층 부드러워진 태도로 말을 걸었다.
=모험가분들은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파르히스트에서 오울링을 거쳐오는 길입니다만…… 소문에 모험가는 반기지 않는다고 들어 긴장하던 차라 조금 당황스럽군요.”
=아……. 그 소문은 와전된 거에요.=
“그렇습니까?”
=예. 전대 영주님 치세 시절에는 패악을 부리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너무나도 많았거든요.=
여자 병사의 이야기가 자그마한 입에서 흘러나온다.
당시 마을의 상권은 부패한 외지인들이 태반을 장악한 상태였다. 단시일에 이루어진 부패가 아니라 족히 50년은 이어져온 상습적인 악습, 악폐였던 것.
그 결과 상권은 물론 마을 주민들의 생계마저 위협당하기 시작했고 주민들의 고통과 신음이 커지자…….
=보다 못한 전대 영주님께서 칼을 빼 드셨죠. 하지만 오랜시간 마을을 좀먹어가던 건달 양아치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고 무력 면에서도 영주님 가문을 웃도니 전대 영주님은 크게 고심했어요.=
자칫 무력을 잘못 행사하면 마을의 무뢰배들과 전면전이 벌어져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입히게 된다.
더욱이 당시 조직 폭력배들과 양아치들은 인근 마을, 도시와도 거래 유통을 맺어 마을의 부를 유출하는 동시에 강한 유대를 맺어나가고 있던 시기였기에 함부로 조직과의 전쟁을 일으켰다간 타 마을과 도시의 개입을 허용하게 될 판.
=영주님께서는 큰 결단을 맺어 주도의 성궁에 간절한 탄원서를 올리는 한편 마을을 도와줄 무력을 직접 찾아다니셨어요.=
그렇게 마을 조직 양아치들과 연대를 맺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 소도시 크라버리의 호족을 찾아가 일단의 상호 보완 계약을 맺었다고.
이후 크라버리의 하급 기사단과 하급 술법단의 병력 및 당시 크라버리의 영주가 지원해준 7급 직업자 1명을 대동, 환향한 전대 영주는 그 무력을 바탕으로 마을의 쓰레기들을 추방하고 축출하고 감옥에 가두어 일벌백계를 보여주었다고.
=그 이후 마을을 정화하고 예전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만 꼬박 40년이 걸렸어요. 이 기간에 마을에는 유랑, 방랑 직업자들의 방문은 거절되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들어온 사람들 또한 삼엄한 감시 속에서 활동할 수 있었죠. 그 이유가…….=
“같은 상황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였겠군요. 그 조직이 쓸려나가며 생긴 공백에 새로운 조직이 들어서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 잘 아시네요! 그렇게 40년이 지나고 마을이 안정되고 나서야 방랑 직업자들의 방문 제약이 완화되기 시작했죠. 그 후 마을은 끊임없이 발전했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10년 전부터 방문 제약이 완전히 사라진 거고요.=
환인은 말 많은 병사의 이야기와 시더가 알려준 정보 속에서 현재 비자룩스 상거래 시장이 어떻게 기업형으로 재구성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당시 비자룩스는 시장의 60%가 조직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사태가 끝난 후 마을의 주력 산업 절반이 증발해 시장은 물론 사업 자체가 허공에 붕 떠버려 마을의 수익이 마이너스를 밑도는 상황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자율과 자주에 맡기면 언제 철광 산업이 원상 복구되어 궤도에 오를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산업을 빠르게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또 이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장장이를 고용하고 대장간을 만들고 시스템을 개편하다 보니 철광 산업 전반이 영주 직할로 변해버린 거겠지.
막상 해보니 결과도 나쁘지 않았을 테고.
=마을이 빠르게 정상화될 수 있었던 것은 비자룩스의 난이 끝난 후 전대 영주님과 성혼하신 영주 부인님 덕분이었죠. 엘 메일로 님이 아니었다면 비자룩스는 아직도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 일로 비자룩스와 크라버리는 몇 가지 사건을 거치며 돈독한 사이가 되었고 전대 영주는 당시 크라버리 영주의 정실 부인 소생의 자녀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 영주도 크라버리 영주의 혈족을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병사의 TMI에 환인은 미묘한 거슬림을 포착했다.
“혹시 알드헬름 르마리테 님의 모친이……?”
=모험가님도 아시는군요?! 맞아요. 알드헬름 님은 스타에타 님의 차남이시고 굉장한 천재시죠! 이 성벽도 알드헬름님의 기술을 적용해 만들었는데 대포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수준이에요. 굉장하죠?!=
알드헬름이 만들어낸 기술은 마을의 자랑이라며 헤헤 웃는 여자 병사와 반대로 환인의 뒤에 서 있는 시더는 한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환인은 시더에게 진정하라며 다독이는 한편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레스=벡슬은 크라버리의 직계 말단 호족. 알드헬름=르마리테는 크라버리 영애의 자식.
둘 다 사이코패스 성향이 짙다. 이 공통점이 단순한 우연일까.
성문을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덕분에 본의 아니게 충분한 정보를 얻은 환인은 저 앞 마을 안쪽에서 한 무리의 상인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수다쟁이지만 친절한 병사에게 살짝 목례했다.
“바쁘실 텐데 제가 예의 없이 너무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즐거웠는걸요.=
어어이, 멈춰.
이히히힝~ 푸르륵
이번 상행은 자네들인가?
어어. 안스트를 들렀다가 요우산치를 지나쳐서 돌아오는 일정이야.
짐말을 맨 짐마차 다섯 대와 수십 명의 사람들로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는 성문 앞.
환인은 다른 병사들이 상단 행렬을 검사하는 걸 보고서야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 병사가 상급 병사였다는 걸 눈치챘다.
여기에 여자친구들이 다른 병사와 돌아오니 성문 앞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남녀할 것 없이 그녀들에게 쏠린다.같은 여자들의 시선마저 잡아끄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미모가 가진 힘이다.
=그런데 모험가님은 이 시기에 어떤 용무로 비자룩스를 찾아오신 건가요?=
때마침 여자 병사의 시의적절한 질문에 환인은 속으로 웃으며 후드를 벗었다.
“비자룩스의 방문 목적은 영혼의 순례입니다.”
=……어, 예?=
“미흡하나 영혼의 길을 걷고 있는 환인이라고 합니다.”
인랑족 병사의 얼이 빠진 반문에 대답하며 두 손을 깍지 낀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쏘았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회백색 빛의 물결. 성문 근처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물론 성벽 안쪽의 거리를 바삐 오가던 사람들마저도 움직임을 멈추고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어……?=
=펴, 평온의 파동?=
=영혼사님이다!=
=아우라가 없잖아? 아니 없으시잖아?=
=무휘광이신 영혼사님도 계셨나?=
삽시간에 소란이 번져나가고 경비초소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달려나온다.
눈 앞의 여자 병사가 어버버거리는 것을 보고 작게 웃어준 환인은 그 소란에서 신경을 거두고 저 멀리 산 중턱의 고성, 그 첨탑 끝에 펄럭이는 비자룩스의 깃발을 바라보다가 후드를 다시 덮어썼다.
=여, 여기입니다.=
경비초소장이 안내해준 곳은 외벽이 회색 대리석으로 말끔하게 뒤덮여있고 유리로 이루어진 창문이 빼곡하게 붙은, 현대에 버금가는 디자인의 3층 호텔이었다.
소란이 벌어지자 경비초소에서 황급히 튀어나온 경비초소장은 자신이 마을을 안내해주겠다고 나섰지만, 환인은 부드러운 어조로 거절하며 비자룩스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여관이나 호텔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영혼사님을 그리 대접하면 영주님께서 경을 치실 겁니다…….=
“그때는 제가 가드너 씨에게 부득불 요청했다고 말씀드리시면 됩니다.”
마을을 안내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최종 목적지는 영주 성이 될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영주성으로 안내할지도 모르는 일.
환인은 영주의 관?에서 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좋은 일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알리바이를 위해서는 밖에 따로 머무르는 것이 낫다.
=으으.=
회색 인견족의 경비초소장이 =으으.= 울상을 지었지만, 환인은 마음을 돌리지 않고 통유리로 만들어진 정문을 지나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아니나다를까 로비도 외관만큼이나 화려하기 그지없다.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내부는 수십 개의 램프 조명등과 샹들리에로 눈이 부실만큼 밝았고, 로비 소파에 앉아있거나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면면도 하나같이 부유하다.
그리고 그런 로비 한복판에 모여 있는 일단의 사람들.
=돌심장 호텔을 방문해주신 영혼사님 일행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미리 소식을 전해 받았는지 검은 바지 정장을 입은 인묘족의 여자 총지배인이 관리자들과 함께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해왔다.
호텔 로비 문밖은 이미 모여든 인파로 바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고 호텔 로비에서 휴식하고 있던 투숙객들과 방문객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환인은 자연스럽게 총지배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체크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일행은 세 명에 쿠에가 네 마리입니다.”
=바라시는 객실의 형태가 있으십니까?=
“스위트 룸이면 좋겠군요.”
살짝 고개를 끄덕인 총지배인이 약간 긴장된 얼굴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본 호텔은 영혼사님 일행분들께 일체의 시설 이용과 숙박을 무료로 제공해 드리며 최선의 시중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부심과 프로 의식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부디 다른 분들과 같은 대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그, 그러나…….=
“무료 숙식을 바랐다면 염치없이 영주님의 성문을 두드렸을 겁니다. 비자룩스를 다스리시는 현명한 영주님이시라면 방랑하는 노숙자 몇 명에게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베풀어도 티 나지 않을 만큼 부자이실 테니까요.”
환인의 부드러운 말에 총지배인이 멍한 표정을 지었고,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바라보던 투숙객과 손님들은 격조 높은 재치에 감탄했다는 얼굴로 작게 탄성을 질렀다.
“영혼의 순례자들에게 보이는 경의라면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니 부디 제의는 거두어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총지배인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시, 실례 많았습니다. 영혼사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환인 일행이 안내받은 스위트suite 룸은 방이 다섯 개, 거실과 주방, 식당, 욕실과 화장실에 서재와 집무실까지 들어있는 호텔 최고등급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었다.
=와, 좌식이잖아? 오랜만이다~.=
객실은 놀랍게도 온돌이 채용된 좌식 생활 기반의 인테리어였다.
현관 출입구도 작은 원룸 크기였고 사이드 룸도 붙어 있어 갑주 착용자가 탈착을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배려도 갖추어져 있었다.
전신판금갑옷을 입은 안느가 사이드 룸으로 먼저 들어가고 환인도 부츠를 벗고 거실로 들어간다.
“……놀랍군.”
여기서 좌식 온돌 문화를 접할 줄이야.
확실히 오울링을 나와 남하할 때부터 날씨가 상당히 추워졌다. 사시사철 따뜻하던 열대 지방에서 온대 지방으로 들어선 느낌.
이렇게 추위와 한파가 몰아치는 곳이라면 온돌 문화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황금색 대리석 바닥에서 따뜻한 열기가 올라오는 것에 미묘한 향수를 느끼던 환인은 총지배인과 이야기를 마치고 다가온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주인님. 최대 할인율을 적용해서 1박에 1은화로 책정되었다고 총지배인 분이 알려주셨어요.=
“원래라면 1박에 10은화는 들었을듯한 인테리어와 구조인데.”
웨이포드에서 백려강과 레심이 머무르던 객실에 버금가는 수준의 호화로움이다.
바닥은 고급스러운 금색 대리석 타일이며 벽은 달도 뜨지 않은 밤하늘 같은 검은색에 은하수가 스며든듯한 대형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구는 모던한 내장재에 어울리는 순백색과 베이지색으로 이루어져 있고 조명도 샹들리에가 아니라 현대적인 감각의 벽등이 실내를 밝히고 있다.
[와! 욕실도 되게 커! 우리가 전부 들어가도 되겠네!]
구세의 빛을 벗고 들어온 안느는 욕실부터 확인하는지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행에 땅신 교단의 종교인과 영도의 순례자 이중 할인, 고등급 모험자의 숙박 할인과 몇 가지 할인 항목을 더 붙여서 90% 할인을 적용했다고 이야기했어요.=
역시 숙박비가 1박에 10은화였나보군.
방은 5개가 전부 크기가 달랐다. 가장 큰 방은 당연히 환인의 것으로 정해졌고 가장 작은 방은 유르파가 가져갔다.
=언니, 큰 방도 남는데 왜 다락방 같은 걸 써?=
=난 좁은 곳이 안정되거든. 그래서 여기가 좋아.=
=그래? 흠, 이슬아. 우린 그냥 같은 방 쓰자.=
=응.=
여자 친구들이 벗은 갑옷을 정리하고 평상복으로 환복하고 짐도 푸는 사이 환인은 비상과 쿠에들을 보러 갔다.
마구간도 세 종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쿠에들만 수용하는 구간은 깨끗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쿠에 전용에 고급 호텔답게 시설도 어지간한 주택만큼 깔끔했다.
쿠우~.
“그래.”
쿠르티, 쿠핀, 쿠라와 함께 깨끗하고 잘 마른 짚단 위에 앉아있던 비상이 다가와 안겨들어 여긴 깨끗해서 좋다고 운다.
챙겨야할 부하가 생겨서일까. 이제 같은 방에 있겠다고 떼쓰지 않는 비상을 보며 환인은 피식 웃었다.
‘역시 사회화 교육은 동족들과 함께 지내야 생기는 거군.’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일주일간 이동하느라 깃털에 묻은 흙먼지를 꼼꼼하게 닦아주던 환인은 냉랭한 표정으로 다가온 시더에게 시선을 주었다.
비자룩스에 도착하자마자 시더를 보내서 마을 분위기와 영주성을 살펴보라고 지시했었는데, 그사이 모두 살펴보고 온 모습이다.
환인은 시원한 듯이 푸르르 몸을 터는 비상에게 말했다.
“혹시 문제가 생기거나 필요한 게 있거든 안느를 불러라. 귀가 좋으니 여기서 불러도 들릴 거다. 만약 누가 너희를 몰래 데려가려 한다면 내가 책임질 테니 걷어차서 뼈를 분질러도 좋다.”
쿠에~.
알겠다며 우는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마구간을 나오자 뒤따라온 시더가 입을 열었다.
「영혼사님의 예상대로 고성이 비자룩스 가문의 성이었습니다.」
‘성에 영혼의 접근을 막는 장벽이나 조치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깥 성벽처럼 안쪽 성벽도 진주색이었고 성을 둘러싸고 있었으니 함정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겠지요. 성에서 곧 초대가 나올 테니 조바심내지 마시고 기다리십시오.’
술법이 온갖 장소와 기상천외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세상이다. 영혼의 접근을 막는 기술이나 영혼을 공격하는 장치가 없다고는 못한다.
예시로 볼것도 없다. 자신만 해도 영혼을 공격해 소멸시킬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영도가 그러한 대? 영혼 조치를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예, 영혼사님.」
‘다음으로, 마을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마을의 대로를 통해 돌아오며 소문에 귀를 기울여본 결과 간간이 비자룩스 가문을 걱정하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문 병사의 이야기대로 현 비자룩스 영주는 진실되고 슬기로운 사람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영혼사님이 유포한 소문이 비자룩스에도 도착해있었습니다. 오울링의 상급 영혼사님이 오늘 도착한 영혼사님이 아닐까 추측하는 이야기가 다수였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오울링에서처럼 마을을 감시해주십시오. 다수의 병력 이동을 중점으로 4급 이상 직업자의 수상한 거동을 감시하면 됩니다.’
「예, 영혼사님.」
마침 회색 후드 망토를 벗은 차림으로 검은 외투를 들고 다가오는 이실리테를 발견한 환인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