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54화 (254/813)

〈 254화 〉 248 비자룩스로 가는 길

* * *

순식간에 날아서 다녀온 시더는 여전히 알몸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으로 정찰 결과를 입에 담았다.

「비자룩스 상단은 아닙니다. 마차에 채워진 비자룩스 특산물을 생각해보면 비자룩스와 거래 계약을 맺은 인근 도시의 중대형 상단이며 거래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근처에 도시라면 라드세아 평원 동부의 헬루멘, 아니면 남부의 안스트다.

“식량을 납품하고 금속과 무기를 떼오는 길이겠군요.”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대답하는 시더에게 분노가 슬금슬금 끓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원수인 알드헬름의 마을과 거래하는 상단이라니, 생각만 해도 창자가 꼬여 참기 힘든 느낌이 들지 않을까.

“진정하십시오. 현시점에서 죽어도 되는 인물은 알드헬름 뿐입니다.”

「……예, 영혼사님.」

강제력을 발휘하지 않았음에도 시더는 진정하고 환인의 뒤에 섰다. 평소보다 복종심이 높아진 모습이다.

‘방금 전투 때문인가.’

현재 시더에게는 알드헬름을 죽이는 것이 지상 제일의 과제다.

여기서 자신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알드헬름을 죽이고 말빈에게 평화를 줄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지니 믿고 따르려는 마음이 강해지는 거겠지.

환인은 저들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고고하게 선 대장 흡혈마의 영혼, 적색 아우라에 둘러싸인 영혼을 바라보았다.

칼날 멧돼지처럼 영혼에 아우라를 감싼 모습.

류히와 아이들은 칼날 멧돼지를 성수라고 불렀다. 안느는 저 대장 흡혈마를 악수라고 불렀다.

칼날 멧돼지도 자신을 보자마자 공격해왔고 대장 흡혈마도 마찬가지인데 둘의 차이에 뭐가 있는지 환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산거북도 성수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성수에 대한 개념이 정확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어쨌든 일단 대장 흡혈마 영혼을 회수할 생각으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여러 번 강제력으로 지시를 내리자 그제야 못마땅한 투로 다가와 푸르륵­ 소리 없는 투레질을 한다.

영혼의 격이 높아서 그럴지도 모르겠군. 거기와 비교하면 자신의 격은 높지 않은 거고.

…… 음?

환인은 놓치고 있던 것을 눈치챘다. 혹시 강제력이 잘 통하지 않는 영혼을 강령하면 그 부작용과 후유증을 겪는 게 아닐까?

어쩐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대장 흡혈마와 시선을 마주하고 영혼 구슬로 만들려 하자 재차 투레질한다. ‘감히 날 휴대하겠다고?’ 같은 의사의 표현이다.

“영혼 구슬로 변해라.”

그러나 환인이 의지를 세워 강제력을 재차 발산하자 푸르륵­ 짜증 내는듯한 투레질과 함께 탁구공만 한 적색 구슬로 변했다.

환인이 살해하고 회수한 사람의 영혼과 같은 붉은색이 아니라 루비에 가까운 붉은 색이다. 그런 악수의 영혼으로 만든 구슬을 보자마자 환인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영혼 구슬 보유량이 48개를 넘었을 때 생긴 능력으로 이 구슬을 가지고 저주를 걸 경우, 상대의 신체에 영구적인 피해를 남긴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

게임이라면 ‘상대방의 근력, 체력, 순발력의 20%가 영구적으로 감소됩니다.’ 같은 문구가 나타났을 것이다.

‘굉장한 효과로군. 아우라를 두른 영혼이라서인가.’

60시간밖에 휴대할 수 없는 게 아쉬울 지경이다.

강령을 하면 어떤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도 기대되지만, 대장 흡혈마의 혼을 강령했다간 100% 부작용과 후유증을 겪을 것 같다. 저주로 밖에 쓰지 못하겠지.

아쉽지만 강령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왼팔의 빛의 건틀릿에 집어넣었을 때 짐마차 여섯 대가 도착해 환인의 앞에 멈추어 섰다.

푸히히힝­ 푸르르륵­

워~ 워어어.

마차는 전부 스사의 짐마차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외관이면서 모두 같은 사이즈에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공장도 없는 이 세계에 통일된 디자인이란 곧 거대 자본을 뜻한다. 시더가 다른 도시의 중형 이상 상단이라고 짐작한 이유도 그 때문.

비상의 등에서 그 행렬을 둘러보던 환인은 가장 선두 마차의 마부석에서 내린 회색 무릎치마 차림의 여자가 망설임 없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인우족人??일까. 키는 160cm 정도에 소뿔 같은 것이 머리에 나 있다.

색이 너무 진해서 젖은 지푸라기 같은 색의 금발이 어깨에 닿고 있었는데 신분이 낮지 않은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찰랑인다.

이 세계에서 머리 손질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다.

상대의 신분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머리카락의 끝을 보는 것과 복장을 보는 것이니 말 다한 수준.

거기에 신발도 장딴지를 전부 덮는 고급 가죽 부츠였고 위에 걸친 회색 조끼도 마수 가죽 제품이다.

허리에 부담이 갈 정도로 육중한 젖가슴을 출렁이며 다가온 여자는 환인과 열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서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귀하신 분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중급 도시 헬루멘의 대형 상단, 이어크레드의 행수 위샤라고 합니다.=

정중한 예의에 환인도 비상의 등에서 내려 위샤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영혼의 길을 따라 순례 중인 환인이라고 합니다. 저쪽은 제 동료들입니다.”

=…예, 예? 어…… 예?=

위샤는 순간 당황해서 눈썹을 들어 올려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수식어는 영혼사들만 사용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우라가 없는데? 거기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하는 중에 영혼사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영혼사 사칭? 하지만 녹색 쿠에를 타고 다니면서 수십 마리의 마수 떼를 학살할 수 있는 사람이 영혼사를 사칭한다고?

왜?

세상에 가장 들통나기 쉬운 거짓말이 영혼사 사칭이다. 그리고 6급 직업자 두 명을 동료로 데리고 다니고 녹색 쿠에를 타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허술할 리 없으니 영혼사가 맞겠지.

위샤는 논리적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미묘한 불신이 그녀의 눈빛에서 드러났다.

망원경으로 눈앞의 남자가 녹색 쿠에를 타고 블러디 호스와 싸우는 걸 봤기에 틀림없이 무휘광의 술법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위샤의 태도를 읽은 환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평온의 파동을 쏘았고, 사방을 뒤덮는 회백색 빛의 파동에 위샤가 기함을 질렀다.

=히에엑! 실, 실례했습니닷!=

위샤가 그 큰 젖가슴이 요동칠 정도로 허리를 직각으로 꾸벅꾸벅 숙여댄다. 위샤 뿐만 아니라 행렬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들도 놀라 환인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의도했던 환인은 작게 웃으며 위샤의 어깨를 잡고 사죄를 멈추게 했다.

“이해합니다. 저 역시 무휘광의 영혼사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위샤 씨도 의구심을 품을 만 하지요.”

=아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영혼사님을 함부로 사칭하는 불경한 인간은 없으니까요! 당연히 영혼사님이라고 생각했어요!=

환인은 대답 없이 작게 웃을 뿐이었다.

이제 저들이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이런 소문을 퍼트릴 테지. =이봐, 저번 상행 때 내가 뭘 본지 알아? 무휘광, 아우라가 없는 영혼사님을 봤다고! 믿어져? 무휘광의 영혼사님이라니!= 이렇게.

어쨌든 그 덕분에 한결 진정한 위샤는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놀란 가슴을 추스른 뒤 아주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혹시 사냥하신 흡혈마 무리의 가죽과 부산물…… 아니아니, 흡혈마의 사체 통째로 저희 상단에 파시는 게 어떠세요? 가격은 후하게 쳐 드리겠어요.=

“통째로 말입니까?”

환인은 이실리테가 열심히 가죽을 벗기고 부산물을 채집 중인 흡혈마의 사체에 시선을 돌렸다.

번개에 지져진 게 몇 마리.

불에 타고 익어버린 게 몇 마리.

다리가 왕창 부러지고 골통이 박살 난 게 몇 마리.

무형의 폭발에 휘말려 가죽이 뜯어지고 손상된 게 몇 마리.

목이 잘리고 허리가 절단된 게 몇 마리.

솔직히 말해서 상품 가치를 상실한 게 대다수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외관이 멀쩡한 대장 흡혈마뿐.

“제가 영혼사여서 일부러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을 매입하시려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아아아, 아닙니다! 결단코 아니고 말고요! 네, 저렇게 타버리거나 번개에 지져진 것도 얼마든지 채산성을 낼 수 있습니다요! 이어크레드의 가죽 세공사들은 솜씨가 비범하거든요! 네!=

“그렇습니까?”

=넵!=

단호하게 대답하는 위샤지만 그녀의 시선은 선 채로 죽어있는 대장 흡혈마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원래 목적은 대장 흡혈마의 사체였겠지. 적당히 구슬려 대장 흡혈마의 사체만 가져가려던 위샤는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고 이하 생략.

“음.”

그렇다는데 뭐라고 할까.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 환인은 유르파에게 대장 흡혈마의 가죽과 부산물이 마도 제작에 필요한지 물었다.

=흡혈마 가죽은 그 특성 탓에 방어구로 굉장히 주목받아. 무두질한 뒤에 적당하게 처리하면 원소 내성이 상당히 증가하거든.=

“유르파의 특기 분야와 맞지 않는 소재라는 거군요. 그러면 이어크레드 상단에 모두 넘기겠습니다.”

=응응. 잠시만~ 저 행수랑은 내가 이야기해볼게?=

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훗, 웃은 유르파는 살짝 긴장한 위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더니 곧 흡혈마 사체가 쌓여있는 곳으로 가서 조금 격렬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결과.

=43마리의 흡혈마 사체는 마리당 일괄 9은화로 매입하겠습니다. 대장 흡혈마의 사체는 306화로 셈하며 나오는 위상석은 전부 영혼사님께 양도해드릴게요. 괜찮으신가요?=

“좋습니다.”

불로소득이라는 느낌이 적지 않다. 원래는 가죽만 적당히 챙긴 뒤 나머지는 다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실제로도 이실리테의 무두질 숙련도가 낮은 탓에 챙길 걸 다 챙겨도 2금화는 받을 수 있을까 싶던 상황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만족스러운 거래가 되었을까. 위샤가 한층 긴장이 풀린 얼굴로 찬사를 쏟아냈다.

=정말 대단하세요. 멀리서 영혼사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는데 녹색 쿠에를 타고 저공비행을 하며 영혼술을 쏟아내시는 모습은 정말이지 신대의 천성사 같았다니까요? 전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술법사도 아니면서 저 악수를 몰아붙이다 검은 섬광을 날려 꿰뚫는 그 강력! 크으~.=

“동료들이 다른 흡혈마들을 맡아준 덕분입니다. 저 혼자였다면 어려웠겠지요.”

위샤의 호들갑에 환인이 작게 웃으며 대답하자 절대 아니라며 눈을 크게 뜨고 부정한다.

=저 플레인스워커 놈이 라드세아 평원을 돌아다니며 악명을 떨친 게 무려 10년이에요! 많은 사람이 퇴치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을 정도라고요?=

“정말입니까? 그렇게 강한 개체로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만.”

=어휴, 영혼사님이 대단하셔서 그런 거예요. 플레인스워커는 생명력 갈취를 범위로 써대서 숫자로 밀어붙일 수 없는 부류였던데다가 자기가 위험하다 싶으면 저 준족으로 쏜살같이 도망쳐버리거든요. 예에, 엄청 영악한 놈이었어요.=

얼마나 영악한지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귀신같이 눈치채고 바람처럼 도망쳐버리고, 약하더라도 숫자가 자신들보다 많으면 상대하지 않고 유유히 피해버렸다.

부하를 돌격시켜놓고 튀는 것도 서슴지 않을 정도.

함정을 파고 유인해도 통하지 않고 적당한 직업자 파티를 섭외해 토벌을 진행해도 저 광역 생명력 갈취 아우라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놈이었느냐면요, 한 번은 평원을 지나던 호족 일행이 공격받는 일이 있었어요.=

그에 격노한 가문에서 보복으로 추살대를 조직했지만…….

=짐작 가세요? 무려 두 달을 도망쳐 다녔어요. 그냥 도망만 다닌 게 아니라 추살대가 보는 앞에서 똥… 으흠, 변을 싸지르며 도발까지 해댔을 정도로 우롱하는 수준이었대요.=

결국 추살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플레인스워커의 악명은 더더욱 높아졌다는 이야기에 환인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라면 준비와 전술의 부족으로 실패한 것과 다름없다.

조인족을 수색 및 몰이꾼으로 채용하고 병력은 생명력 갈취를 염두에 둬서 1:1로 싸울 수 있는 실력자들로만 모집, 차근차근 몰이사냥만 해도 사냥할 수 있을 테니까.

=사실 저희가 저어쪽에 멈춰있던 것도 플레인스워커가 저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서였어요. 부하가 43마리나 되는 데다 이쪽의 짐수레를 끌고 있는 말이 12마리나 됐으니까요.=

“흡혈마의 번식은 말을 통해서도 가능한가 봅니다.”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후 환인은 이실리테가 상단의 인원들과 어울려 흡혈마의 사체를 해체하는 걸 구경하며 자신과 인맥을 맺고 싶어 하는 느낌의 위샤와 적당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떤 북쪽의 마을에서 혼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

어떤 촌락에는 매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사람이 계속 나와 결국 촌락이 사라졌다는 이야기.

어떤 마을에서는 악령이 나타났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상급 영혼사님이 해결해주시고 떠났다는 이야기.

=매년 이런 흉흉한 이야기가 하나씩은 꼭 들리니 평범한 서민들은 참 살기 팍팍하다니까요. 그래도 영혼사님 같은 분들이 계셔서 살아갈 희망이 생기기도 하지만요.=

“…….”

처음과 마지막 이야기는 왠지 자신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며 환인은 자신의 경험을 조금 풀어놓았다.

웨이포드에서 슬럼가의 악당 영혼을 꾸짖어 혼내서 성불시킨 이야기, 어느 촌락의 효심 깊은 딸이 아비를 걱정해 성불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이야기, 죽고 난 뒤 여동생 같은 아이의 처지가 걱정되어 오랫동안 쫓아다닌 소녀의 이야기.

위샤는 혼자 남은 아빠가 안타까워 성불하지 못한 딸의 이야기에 눈물을 글썽이며 코를 훌쩍였다.

=너무 슬픈 이야기에요……. 아내도 잃고 딸도 잃은 남자가 가족을 잊지 못해 혼자 살아간다니, 그 남자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나 봐요.=

“예. 그래서인지 다음 마을에는 어떤 슬픈 사연을 가진 영혼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어둡습니다.”

=아. 영혼사님께서는 비자룩스로 가시는 길이시죠? 거긴 괜찮으실 거예요. 그곳 마을의 영주님은 어질고 현명한 분이시거든요.=

“……그렇습니까?”

=네에! 그런데 요즘은 뭐 문제라도 있는지 분위기가 좀 어두우셨지만…… 그래도 다른 마을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환인은 비자룩스의 좋은 점을 늘어놓는 위샤의 이야기를 한귀로 듣고 흘리며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겼다.

비자룩스의 영주는 어질고 현명하다니. 자식 농사를 망친 전형적인 인물인가, 아니면 관리를 철저히 해서 일말의 빈틈도 드러내지 않는 용의주도한 인간인가.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40명 정도가 달라붙은 덕분에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흡혈마의 해체와 정리가 끝났기 때문.

인부들이 부산물을 짐마차에 싣는 것을 본 환인은 그들이 작업을 마치고 모였을 때 일부러 평온의 파동을 한 번 더 발사했다.

내심 자신의 이름과 평판을 널리 알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실제 평온의 파동은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기에 환인의 행동은 수상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예상 밖으로 감동한 위샤는 무려 50은화라는 거금을 기부라는 명목으로 환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고맙습니다. 이어크래드의 위샤 씨가 기부하신 금액은 다른 촌락과 마을의 영혼을 성불시키는 데 사용될 겁니다.”

=옙! 저,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헬루멘에 오신다면 저희 이어크래드 상단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극진하게 모실 테니까요.=

“기억해두겠습니다. 그럼 가시는 길 조심히 돌아가시길.”

=넵넵. 영혼사님의 영혼 순례길에도 짐승신님의 축복과 가호가 언제나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흙먼지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떠나가는 상단 행렬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여자 친구들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도령. 보니까 평소와 다르게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더라?=

“난 주로 듣는 쪽이었다만.”

=흐응~? 호옥시…… 도령은 거유가 좋은 거야? 멀리서 보니까 그 여자 가슴이 이슬이보다 더 크던 거 같던데.=

으흐흐, 장난기 가득한 웃음에 환인도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살을 살짝 꼬집어주었다.

“비자룩스의 정보를 조금 얻었다. 진위여부는 도착한 뒤 직접 알아봐야겠지.”

=그랬니? 어떤 정보였는데?=

“비자룩스의 영주가 어질다는 이야기더군요. 위샤 씨는 영주와 직접 거래를 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녀의 표정과 말에 거짓말은 없었습니다.”

유르파와 안느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생각에 잠겨 든다.

그 사이 이실리테가 작은 주머니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주인님. 여기 회수한 위상적이에요.=

흔한 색의 1급 4개와 2급 2개.

이것만으로도 116은화이니 흡혈마 무리를 해치우며 8금화가 넘는 수익을 올린 셈이다.

유르파가 작게 감탄했다.

=운 좋은 사람은 길을 가다가도 돈을 번다더니 그게 자기였구나?=

마수 떼를 잡자마자 적당한 상단과 마주쳐서 부산물을 고스란히 판매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있고 크게 손상된 사체도 일괄적으로 9은화에 사들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옆에서 자기랑 행수가 나누는 대화를 살짝 엿들었는데 블러디 호스 우두머리가 평원에서 유명한 악수였나봐. 아마 토벌되었다는 증거로 활용하기 위해 일종의 상징성까지 포함해서 가격을 치른 거라고 봐야 할 거야.=

=아.=

환인은 점보다 작아져 가는 이어크래드 상단의 행렬을 바라보다가 흡혈마 44마리 분의 피로 붉게 물든 벌판을 한 번 보고 비상의 등에 올라탔다.

그걸 신호로 여자들도 대화를 멈추고 쿠에의 등에 오른다.

“그럼 출발하지.”

쿠우~.

환인은 비상이 알아서 나아가도록 두고 조금 더 묵직해진 돈주머니를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힘과 능력이 있다면 돈은 자연히 따라온다.

‘이러니 술법과 위상석이 부여된 장비가 고가로 형성되어있는 거겠지. 그것들을 사용하는 직업자들의 몸값도.’

무역 회사를 다닌 경험 탓에 라드세아의 시장 형성과 자금의 흐름이 어떤지 약간 궁금증이 생겼지만, 말 그대로 약간이었기에 환인은 금방 털어내고 대장 흡혈마와 싸운 경험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후.

환인은 벌판 한가운데서 저 멀리 지평선 끝에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장엄한 산맥과, 그런 산자락의 골짜기에 세워진 계단형 도시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비자루크스 산맥과 자신 사이에는 누런 들판과 황야뿐.

원근 효과의 거리감 인지를 도와줄 표식이 거의 없었기에 환인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냥 보기에는 몇 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지만 아무리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는 모습에 인지 부조화가 일어난 것.

=이정도면 거의 이틀은 꼬박 가야겠는걸.=

=산을 보고 있자니 막 어지러운 느낌이야…….=

유르파가 신음을 흘리자 안느가 히히 웃으며 조언해준다.

=사이에 작은 언덕이나 숲 같은 게 있으면 좀 나을 텐데 그런 것도 없고~ 여기부터 저 산맥까지 지대가 조금 낮아지기까지 해서 착시가 더 심할 거야. 계속 보고 있으면 멀미가 올 수 있으니까 산 쪽은 되도록 보지 마.=

=으응. 그래야겠다. 뭐…… 착시는 착시고 풍경은 굉장하네.=

심플한 표현이지만 그래서 유르파의 의견에 동감하는 이실리테였다.

산맥이 시야 끝에서 끝까지 이어져 고개를 돌려도 그 끝이 안 보일 정도였으니까.

산꼭대기에 하얀 눈이 내린 것을 보던 안느가 말했다.

=남부로 계속 내려와서 그런가 날씨가 점점 더 쌀쌀해지는걸. 여기서 더 남쪽으로 내려갈 때는 장작을 좀 더 많이 구해놓는 게 좋겠어.=

=밤바람도 점점 싸늘해질 테니까 바람막이를 구해야 할지도 몰라. 아니면 마차를 사거나.=

=어? 마차?! 찬성! 마차 사는 거 찬성! 도령도령, 우리 마차 사자. 응? 응?=

환인의 곁에 바짝 붙은 안느는 차마 갑옷 때문에 환인을 끌어안지는 못하고 애교 가득한 모습으로 마차를 사자며 졸라댄다.

그 모습에 이실리테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안느 너, 쿠에 타고 가는 게 지루해서 그러는 거지.=

=며칠씩 시간을 버리는 건 너무 아깝잖아.=

=그렇다고 마차를 사? 마차를 사면 마을에 들를 때마다 쓰는 마차 보관 비용도 그렇고 신경 써야 할게 많아져. 마차 내구도 관리라던가 부서질 때를 대비해서 부속품을 챙겨야 하는 점이라던가. 마차가 생기면 당연히 이동 속도도 느려질 테고.=

=그만큼 쓸모가 많잖아! 밤에 바람도 피할 수 있고!=

=바람 막는 건 쿠르티들이랑 같이 붙어 자는 거로 충분해.=

=우와, 이슬이 완전 구두쇠!=

=네가 낭비벽이 있는 거겠지.=

=아니거든!=

또다시 아웅다웅하는 이실리테와 안느를 작게 웃으며 구경하던 환인은 여기서도 보이는 비자룩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더에게 시선을 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더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영체다.

‘흠…….’

환인은 시더를 통해 한 가지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때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

지금 시더의 상태를 보면 마을에 들어설 경우 정신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하겠지. 확인하고자 한다면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다.

“…….”

환인은 결정을 내렸다.

영기 흡수와 관련해서 귀접을 시험해봐야겠다.

[비자루크스 산맥 풍경]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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