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247 비자룩스로 가는 길
* * *
비자룩스로 향하는 길은 녹색과 갈색이 섞이거나 번갈아 나오는 들판의 연속이었다.
지도의 축척을 신용한다는 전제하에 들판의 넓이가 한반도만 한 평원.
환인 일행은 길을 따라 남하를 계속하던 중 지평선 쪽에서 무언가 한 무리가 질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두두두두두
=오? 야생마 무리인가.=
=저… 저거 야생마가 아니라 블러디 호스 무리잖니! 마수 떼야!!=
=뭣?!=
=주인님!=
그래서일까, 삼림형 미궁을 탈출하며 보았던 흡혈마가 무리 지어 들판을 달리다 이쪽을 발견했는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진군해왔다.
=숫자가 족히 40마리야! 유리 언니, 뒤에서 애들 지켜! 이슬아!=
=응!=
쿠르티와 쿠핀의 등에서 뛰어내린 이실리테와 안느가 그쪽을 향해 달려간다.
환인은 그런 둘에게 하급의 정령 강령을 걸어주고 비상의 등에 올려진 짐가방을 풀어서 땅에 떨어트린 뒤 천칭을 꺼내 들었다.
“비상, 우리는 저쪽으로 갈까.”
쿠우?
“유르파와 아이들을 노리고 옆으로 새는 것들을 막아야지.”
쿳!
40마리에 이르는 흡혈마 무리의 절반은 앞으로 나서는 이실리테와 안느를 향해 돌진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우회해서 유르파와 쿠에들을 노리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환인은 그렇게 우회하는 쪽을 향해 비상과 함께 달렸다.
“날아라.”
쿠엣~!
환인의 박차에 비상이 크게 울며 날개를 활짝 펼치자 발아래에서 녹색 광풍이 일어나 순식간에 10m 높이로 날아오른다.
삽시간에 높아진 고도.
높이의 차이 덕분에 전장을 한눈에 확인한 환인은 20마리의 흡혈마를 상대로 대활약 중인 여자친구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쪽을 향해 화살촉 모양으로 달려오는 흡혈마들을 눈에 담는다.
“…….”
환인의 주변에 소리 없이 여섯 발의 영혼 화살이 여섯 개의 패널 화살과 함께 나타났다.
봉처럼 매끈한 천칭이 휘둘러지자 영혼 화살 여섯 발이 선두의 흡혈마 네 마리를 노리고 쏜살같이 날아간다.
그리고 환인 외에 볼 수 없는 화살은 그대로 흡혈마의 눈과 앞다리의 무릎에 적중해 큰 상처를 입혔다.
푸히히힝!
프르륽?!
쿠에에엑!
콰직, 투둑 쿠과가각!
공격에 적중당한 흡혈마들은 달리던 가속도와 체중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자빠지며 무섭게 굴렀다.
다리가 부러지고 목뼈가 꺾이며 한 마리가 단숨에 죽고 세 마리가 거동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넘어지며 뒤따라 달리던 흡혈마들의 장해물이 되었다는 것. 환인은 잠시 정체되어 뭉쳐진 흡혈마 무리를 향해 4중첩의 영혼 폭발 6개를 2개씩 나누어 날렸다.
쿠과과과과광!!
땅을 진동시키는 굉음과 폭발.
충격과 소음, 고통에 휘말린 흡혈마들이 혼란에 빠져 날뛰며 동료들에게 뒷발차기를 먹이고 서로 엉켜 넘어지고 난리가 일어난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유지한 네 마리가 하늘에 떠있는 환인과 비상은 무시하고 유르파와 쿠르티, 쿠핀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흠.”
처음에는 영혼 화살을 날려 흡혈마들의 생식기를 통해 내장을 터트리려 했지만, 유르파가 빗자루를 꺼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곤 최하급 정령 구슬로 저주만 내렸다.
「꺄하하하~!」
「씡나!」
「꺄아아~!」
푸히히힝?!
케헥! 케헤엑!
즉시 환각을 일으켜 앞발을 들고 몸부림치고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허공에 뒷발차기를 마구 날리고 쓰러져 게거품을 물며 간질을 일으키는 흡혈마들.
고개를 돌린 환인은 거친 녹색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비상에게 명령, 혼란에 빠진 흡혈마 무리로 향했다.
그리고 방벽의 사정 범위 내에 들어온 흡혈마들을 단검 모양으로 만든 패널을 조작.
쉬쉬쉭 푸슉, 푸우욱
끄르르렉.
키히히히힝!!
여섯 자루의 단검이 종횡무진 움직이며 정확하게 흡혈마의 입속으로, 눈 속으로, 귀 안으로 파고들어 숨통을 끊는다.
쿠쾅! 쿠구구구……!
그 순간 이실리테와 안느가 흡혈마 무리 절반과 부닥친 곳에서 커다란 화염 폭발이 일어났다.
진주 귀걸이 덕분에 위력이 크게 늘어난 레드릭의 화염 강타다.
너울거리는 화염의 기운 속에 네댓 마리의 흡혈마가 몸에 불이 붙어 날뛰고, 다른 세 마리의 흡혈마는 등 허리뼈, 다리뼈가 박살 나고 곳곳에 화상을 입은 모습으로 쓰러진다.
=으랴압!!!=
꾸우웅!!
이어 안느의 기합과 함께 쿵!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지며 하얀빛이 헤일로처럼 땅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그 난폭한 빛의 확장에 멀쩡히 서 있던 흡혈마 일곱 마리의 다리가 그대로 박살 나며 땅에 고꾸라진다.
폭발의 충격에 쓰러져있던 흡혈마들은 뇌와 내장이 단숨에 곤죽이 되어 꾸역꾸역 피와 내장 조각을 토해내며 죽었다.
=어딜 다가오는 거니!=
쫘자자자작!
끼기기겍게……!
푸그그극……!
유르파 쪽도 사태가 해결되어간다.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른 유르파가 환각과 간지러움에 게거품을 물고 난동을 부리는 두 마리를 향해 부적을 찢어 벼락을 뿌리고 있었던 것.
“…….”
자신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한 환인은 고개를 돌려 흡혈마 시쳇더미 너머, 혼자 고고하게 서 있는 붉은 흡혈마를 응시했다.
흡혈마 무리의 대장인지 덩치도 일반 흡혈마보다 1.5배는 더 큰데다 가죽도, 갈기도, 꼬리털에 발굽까지 온통 붉은색이다.
파닥파닥 날고 있던 비상이 처적, 땅에 착지하자 환인은 천칭을 집어넣고 흑창을 꺼내 들어 무감정한 목소리로 비상에게 말했다.
“가자.”
쿠엣!
환인을 등에 태운 비상이 바람처럼 질주하자 흠칫 놀란 거대 흡혈마가 눈에서 혈기를 줄줄 흘리기 시작하더니 맞서 돌진을 개시한다.
두두두두두……!
쿠허허허허헝!!
전차가 달리듯 지축을 울리는 소리. 말답지 않은 우렁찬 포효.
그 순간 대장 흡혈마의 몸이 붉은 아우라로 뒤덮였고 그보다 수십 배는 더 넓은 범위를 적색 빛이 잡아먹는다.
‘저건?’
쌍둥이산의 칼날 멧돼지 영혼에 둘러진 것과 흡사한 아우라에 환인의 눈빛이 변했다.
=도령! 악수야!!=
악수??. 성수의 대척점에 있는 괴물인가.
안느의 외침을 들은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비상. 저 빛에 닿으면 안 될 것 같다.”
쿠엣!
환인의 부름에 바람을 이용, 180도 턴을 하며 관성조차 거스르고 반대쪽으로 튀어 나가는 비상.
크허어어엉!!
어딜 도망가냐는 듯이 뒤쫓는 대장 흡혈마와 그 앞을 달리는 비상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자신의 뒤를 쫓는 두목 흡혈마를 주시하던 환인은 적색빛에 닿은 흡혈마의 사체가 미이라처럼 쭈글쭈글해진 것을 발견했다.
생기 흡수의 아우라인가.
약간이지만 재미를 느낀 환인은 5초 이후의 미래시, 악수가 우직하게 돌진해오는 환영을 보며 강제력을 담아 말했다.
“와라.”
마흔셋의 흡혈마 영혼이 환인의 부름에 날아온다. 크기와 투명도, 선명도를 보면 중하급 수준.
그중 한 마리의 영혼으로 대장 흡혈마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커허허허헝!!
위상력이 깃든 포효로 저주를 뿌리쳐버렸다.
‘놀랍군. 낮은 등급의 영혼 저주는 위상력의 요동으로 털어버릴 수 있나.’
좋은 걸 알았다. 그리고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군.
씩 웃은 환인은 두 손을 맞잡고 평온의 파동을 쏘아보았다. 파악 회백색의 빛 물결이 퍼져나가 적색 빛의 아우라와 상충을 일으킨다.
치직 치치칫
“흠.”
푸르륵?!
회백색 빛과 적색 빛이 마찰을 일으키자 움찔 놀란 대장 흡혈마의 돌진 속도가 약간 느려졌고, 미소를 머금은 환인은 영혼 폭발을 세 번, 대장 흡혈마에게 터트려 신경을 분산시켰다.
콰과광!!
동시에 폭발을 뚫고 대장 흡혈마에게 쇄도한 얄팍한 패널 화살 두 자루.
……쿠와아아아악!!!
먼지의 커튼 너머로 대장 흡혈마가 양눈을 잃고 울부짖는 것이 들린다.
예상대로 적색 빛의 아우라는 물질적인 방어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비상, 한 번 더 날 수 있겠나.”
쿠엑~!!
당연하지!
비상이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날개를 퍼덕이자 발밑에서 또다시 녹색의 돌개바람이 일어나 비상과 환인을 순식간에 10m 높이로 띄워 올렸다.
동시에 환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비상은 몸을 반쯤 선회시켜 환인이 창을 던지기 용이한 각도를 만들어준다.
그런 비상의 옆머리를 다독여준 환인은 먼지 구덩이 속에서 미쳐 날뛰는 대장 흡혈마를 응시했다.
크워허어어엉!!!
‘몸 밖으로 나온 자신의 피도 흡수하는 건가.’
발광하는 대장 흡혈마의 눈이 휑해졌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다.
영혼 폭발의 난폭한 파동에 찢어졌던 가죽이 아문 것을 보면 재생 효과는 있지만 눈알 같은 복잡한 기관을 재생할 정도의 격은 아닌듯하다.
그럼 뇌가 헤집어지면 죽겠지.
환인은 하급 바람의 정령을 자신의 몸에 강령, 흑창에 바람을 한껏 밀어 넣는 동시에 왼팔을 뻗어 모든 흡혈마의 영혼을 영혼 화살과 영혼 폭발로 장전시켜 마구잡이로 날렸다.
쐐애애액… 쿠구구궁 쿠과과광 콰과과과!
융단 폭격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대장 흡혈마를 영혼의 폭발이 뒤덮는다.
환인은 그 와중에 미래시로 온몸을 뒤트는 대장 흡혈마의 움직임을 간파, “흡!!” 오른팔에 온 힘을 담아 흑창을 번개처럼 쏘아 날렸다.
씼!
압축된 바람을 머금고 섬전처럼 날아간 녹흑색의 창은 대장 흡혈마의 텅 빈 왼쪽 눈구멍에 박혀 들다 못해 뒤통수로 날이 삐죽 튀어나왔다.
날의 끝에서 뇌수와 피의 혼탁액이 뚝, 뚝, 떨어진다.
폭발이 흩어지고 대장 흡혈마의 몸부림도 멈추었다. 반경 10m 정도를 뒤덮었던 적색 빛과 대장 흡혈마의 몸을 감싼 적색의 아우라도 천천히 사라져간다.
…….
조용해진 사위. 머리에 창이 박힌 채 대가리를 들어 아직 하늘에 떠 있는 환인과 비상을 한 번 쳐다본 대장 흡혈마는…….
……푸르르륵.
짧은 투레질을 끝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와, 얘 서서 죽었네. 이 기백 뭐야.=
=악수잖아. 음…… 주인님의 그 영혼 폭발에 휩쓸렸는데도 가죽이 멀쩡하네.=
=그거 재생한 거야. 보니까 죽어서도 터진 상처가 아물더라. 적색 빛이 생명력 착취 효과였던 거 같은데 우리끼리 싸웠으면 엄청 고생했을 듯.=
=우리는 근접밖에 못 하는 바보 전사들이니까…… 안느, 구경 그만하고 흡혈마 시체 좀 이리로 가져다줘.=
=응. 타거나 지져진 흡혈마도 가져와?=
=무두질 연습해야 해. 다 가져다줘.=
=알았어.=
안느는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불타고 으깨지고 터져 죽고 지져져 죽은 흡혈마의 뒷다리를 잡아서 이실리테에게 질질 끌고 갔다.
그러면서 유르파와 함께 비상의 등에 다시 짐을 싣고 있는 환인을 힐끔거렸다.
‘아까 도령 엄청 멋있었지…….’
녹색 기운에 감싸여 하늘을 나는 비상, 그 위에 회색 후드 망토를 펄럭이며 영혼 화살과 영혼 폭발을 난사하고 다변성 방어 장치를 어지럽게 놀리는 그 모습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영웅의 자태였다.
특히 대장 흡혈마와의 짧은 전투는 판단력이란 바로 이런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전투를 회상하며 안느의 작은 가슴이 콩닥거리고 있을 무렵.
=……?=
안느의 비상한 청각에 마차와 말발굽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앞뒤 길을 두리번거리며 기다란 귀를 토끼처럼 쫑긋거리던 안느는 이내 비자룩스로 가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고, 정신을 집중해서 눈에 위상력을 그러모으자 시야가 확대되며 길을 따라 다가오는 일단의 짐마차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도령. 누가 오는데? 짐마차 여러 대랑 말하고 사람들이 보이는 거 보면 상단 같아.=
“…….”
영혼 시야를 켜고 눈에 힘을 준 환인도 짐마차를 볼 수 있었다.
스사의 짐마차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그보다는 좀 낡아 보이는 느낌. 천으로 짐만 덮은 짐수레도 섞여 있다.
‘비자룩스에서 오는 상단인가.’
환인은 시더를 불러 저들의 신분이나 소속을 알아보고 오라고 지시 내린 뒤 길에서 비켜나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