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52화 (252/813)

〈 252화 〉 246 비자룩스로 가는 길

* * *

오울링을 나온 뒤 길을 따라 들판을 나아가던 중 점심 휴식 시간에 안느가 물었다.

=도령. 이대로 비자룩스를 방문해도 괜찮아?=

=그러게. 알드헬름이 미쳐서 병력을 동원해 잡으려 들지도 모르잖니. 호족인데다 군대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우려를 드러내는 안느와 유르파에게 작게 고개를 저은 환인은 구름이 담담히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말빈 쪽을 통해 파르히스트에 제가 비자룩스로 향한다고 알리기도 했고, 틈틈히 상급 영혼사가 비자룩스를 찾을 거라는 소문도 퍼트렸으니까요.”

이 정도만 해도 더 이상 권력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찾아온 영혼사를 극진히 대접해서 상처 없이 보내주어야 할 지경이다.

마을 안에서, 도시 안에서 영혼사가 살해당했다거나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 나면 그 즉시 전 세계의 공적으로 지목받게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영혼사가 상호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라면 대도시를 다스리는 호족 앞에서도 안전하다 볼 수 있다.

“더욱이 알드헬름은 영주도 아닌 일개 직계일 뿐, 군대를 동원할 권한도 없겠지요. 있다 하더라도 그 숫자는 적을 테고 방벽이 있어 더 이상 숫자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날개가 달린 조인족이나 플라비우스를 제외하면 사람의 공격은 2차원 평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점프 공격이나 하늘을 공격하는 식으로 z축 일부에 공격 범위를 펼칠 수는 있지만, 그게 z축까지 기동 범위가 넓어졌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환인은 패널을 발판 삼아 z축의 공간기동도 가능해졌고 패널의 공격으로 10m 반경이지만 공간의 제약마저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패널이 여섯 개.

인간이 상대라면 패널을 검이나 창, 단검, 화살 등의 형태로 잡을 필요도 없다.

사람은 의외로 약하다. 패널을 바늘처럼 만들어 눈알을 꿰뚫고 뇌를 헤집거나 귀에 집어넣어 휘젓거나 갈비뼈 사이로 찔러넣어 심장을 찌르기만 해도 죽는다.

무엇보다 이렇게 작고 얇게 만들면 패널에 가해지는 부하도 적어져 기동 시간도 늘어나게 되니 일 대 다수의 대인전에 무지막지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긴. 인간 철벽인 안느도 도령을 어쩌지 못할 정도니까 5급 미만은 떼거리로 몰려와도 무섭지 않겠네.=

“전부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들이 마련해준 선물 덕분입니다.”

환인의 꿀을 바른 듯한 달콤한 속삭임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여자친구들은 그 이야기에 수긍했다.

말도 안 되는 방어술에 말도 안 되는 공격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벽이 생긴 뒤 이실리테와 안느는 아무리 힘을 합쳐 협공해도 환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대련이라 접근이 용이함에도 이 정도다. 실전이었다면 전투 시작과 동시에 귓구멍으로 뇌가 파헤쳐져서 죽거나 방어가 비교적 허술한 사타구니를 통해 침이 들어와 심장을 찔려 죽겠지.

그만큼 침으로 변한 패널의 움직임은 은밀했다.

“그러니 비자룩스에서 활동을 걱정할 일은 없다.”

환인의 확답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안심했다.

단단하고 아늑하게 지어진 집안에서 창밖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것을 구경하는 듯한 안도감이었다.

오울링을 나온지 이틀째에 두 갈래로 나뉘는 포인트에 도달했다.

지도의 마을 위치에 따르면 남쪽으로 뻗은 길이 비자룩스로 가는 길이지만, 지도의 축척이 말도 안 되게 컸기에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환인은 시더에게 물었다.

“비자룩스로 가는 길을 아십니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이쪽 길이 비자룩스로 가는 길입니다.」

시더가 가리키는 쪽은 역시 남쪽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수만, 수십만 번 사람이 오간 듯 자연스럽게 생겨난 흙길에 올라 일행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야트막한 산을 지나고 바짝 마른 듯한 자갈 바닥의 강줄기도 건너며 길을 따라 나아가던 환인은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늦봄의 기후가 초겨울로 점프한 느낌.

밀림이 존재하는 율캄 근방이 열대지방이었다. 거기서 2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내려왔으니 열대지방을 벗어나 온대 지방에 들어섰다고 봐도 되겠지

=완전히 겨울이네 겨울.=

안느는 아무도 없는 벌판에서 속옷 차림으로 미리 준비해둔 방한복을 입는 이실리테와 유르파의 나신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유리 언니는 처음 만났을 때는 포동포동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군살이 많이 빠졌네, 이슬이는 여전히 예쁘고.

=안느 아가씨는 옷 더 안 입니?=

=보온 기능이 붙은 아이템이 있어서 괜찮아.=

=어머. 그 비싼 걸 하고 있어?=

상시 유지되는 효과는 그게 마도구든 마도기든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특히 보온 효과라면 보통 매개체를 기준으로 일정 온도를 반경 1m 정도에 뒤덮는 식인데 1~2급 위상석으로는 고작 몇 주 정도밖에 유지 못하며, 몇 달에서 몇 년을 유지하려면 4~5급 위상석을 써야 하는 매우 사치스러운 아이템.

=아, 마도구는 아니고. 엄마가 생일 선물로 선물해준 정령석의 목걸이야. 엄마 부탁을 받은 정령이 더울 때 시원하게 해주고 추울 때 따뜻하게 해줘.=

=와, 그거, 신기하다. 좋겠네~ 부럽다~.=

=분해나 해체 안 하고 구경만 하는 거라면 나중에 보여줄게.=

=정말이니?! 응응, 절대 안 건드리고 구경만 할게!=

여자친구들이 환복을 마치고 환인도 한층 옷을 두껍게 입은 뒤 다시 비상의 등에 올라 출발하자 여자친구들도 제각기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할 때면 각자 하는 일이 다르다.

유르파의 경우에는 무념무상, 빨리 여행길이 끝나고 마을에 도착하길 바라면서 멍하니 쿠라의 등에 실려 간다. 속도가 좀 느리면 책을 꺼내 읽기도 한다. 멀미 때문에 길게 보진 못하고 보다가 쉬고 보다가 쉬고 반복한다.

안느는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꼬고 꼼지락거리면서 여행자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지루함이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는 타입이다. ‘걸어가면 덜 지루할 텐데.’ 같은 잡생각은 덤.

이실리테는 환인과 비상의 바로 뒤를 따르며 고지식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주변을 경계한다.

환인은 언제나처럼 수행과 훈련의 연속이다.

비상의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속에서 하급 정령을 발견할 때마다 족족 불러들여 영혼 구슬로 만들며 여러 가지 훈련을 병행한다.

위상류를 자각하며 움직이는 훈련.

전투로 한정된 단기 미래시를 평상시에도 쓸 수 있게끔 하는 훈련.

기척 감지 훈련.

눈뜨고 감각을 확장하는 훈련.

영혼 구슬 핸들링으로 정령들과 관계 개선 시도.

여기에 방벽 조작 훈련이 더해졌다.

방벽의 패널 여섯 개를 불러낸 뒤 영혼 방패도 3장을 전개해 동시에 다루고 방벽의 패널을 단검이나 화살 등으로 변화시켜 목표물로 삼을만한 게 있다면 던져서 맞추는 훈련도 한다.

이런 훈련을 매일 매시간 해나가던 환인은 점차 방어구 확보에 대한 마음가짐이 변화하고 있었다.

아렐=케드윈 백천 근위무사단장을 만난 경험에 기척 감지와 감각 확장 기술이 더해진 마도기­방벽이 생기자 방어력의 확보보다 신체를 강화해주는 마도기를 구해 신체 능력을 올리는 쪽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라면 마도기­방벽을 사용한 여자친구들과 대련 결과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매일 아침저녁 이실리테와 안느, 비상과 1:1로 대련해준 뒤에는 일 대 다수를 상정한 대련을 진행하는데…….

=이씨!=

안느는 분함에 모진 소리를 내지르며 옆으로 돌아오려는 패널 단검을 향해 천벌의 망치를 휘둘렀다.

그러자 거기에 맞아줄성 싶냐는 듯이 슬쩍 물러났다가 쏜살같이 구세의 빛이 가리지 못한 빈틈으로 찔러온다.

기겁한 안느가 위상력으로 기파를 펑, 터트리는 동시에 환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3개의 창, 도끼, 철퇴가 안느를 위협하듯 쉭쉭거린다.

기가 막힌 안느가 이실리테 쪽을 보니 대검과 양손 도끼 모양의 패널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는 게 보였다.

=진짜아.=

안느는 기가 막혔다. 환인의 주변을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무기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마치 머리 넷 달린 히드라와 싸우는 기분이다.

이래서는 안돼. 시간만 끌다간 또 진다.

=이슬아!=

=익, 응!=

휙, 10미터 밖으로 후퇴한 두 사람은 입술을 앙다물고 완전 무장 차림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최종 보스처럼 우뚝 서있는 환인을 앞뒤로 포위한다.

=이얍!=

=하앗!=

그리고 동시에 달려드는 두 사람.

하지만 단기 미래시 덕분에 앞서 돌진해오는 안느의 이동 방향, 공격 궤적이 5초 앞까지 보이는 데다 기척 감지로 등 뒤의 이실리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까지 느껴지는 마당이다.

자동 방어 기능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공격이 닿질 않을 정도인데 직접 패널을 다루기 시작하면 오히려 맞는 것이 이상할 지경.

이실리테와 안느의 협공에도 기척 감지와 감각 확장 기술 덕에 방벽의 방어 기능과 공격 기능을 익숙하게 다뤄 둘을 무난하게 상대할 수 있게 되었기에, 방어력보다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쪽에 눈이 가는 것이다.

=윽?=

눈을 현혹하는 패널의 움직임에 문득 패널 하나가 줄었음을 깨달은 안느지만 늦었다.

직후 발밑이 크게 울렁여 땅에 무릎과 손을 붙이고 말았고, 그렇게 드러난 목덜미, 가랑이 사이, 뒤통수를 패널 무기가 쿡쿡쿡 찔렀다.

=악! 꺅?! 으가~!=

그리고 패널 방패 두 개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이실리테는 안느를 무찌르고 합세한 패널을 더해 여섯 개를 보곤 망연해졌다가 패널 방패의 몰매를 맞고 쓰러졌다.

=아, 진짜.=

=하아, 후우, 후으.=

저녁 훈련에서 어제처럼 손 쓸 도리 없이 패한 안느는 푸하,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실리테도 땀을 흠뻑 흘린 모습으로 레드릭에 기대 숨을 가다듬는다.

=씨이…… 진짜 불공평하네. 도령만 세상 혼자 다 가진 거 같아.=

날이 갈수록 기술의 차이가 역력해졌기에 며칠 전부터는 위상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이실리테와 완전 무장 차림으로 환인과 붙고 있었다.

그럼에도 빈틈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 상황에 안느가 주둥이를 댓 발은 내밀고 투덜거리자 환인이 웃으며 안느의 볼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친구들을 가졌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과 다름없지.”

=…치, 치사해…….=

대련에서 무력하기 그지없이 패배한 자신에게 화났던 안느는 환인의 달콤한 속삭임에 투정 부리려던 마음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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