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244 교상 마을 오울링
* * *
환인의 방을 찾은 아가씨들은 때마침 방을 나서던 환인과 마주쳤다.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뿐인 가벼운 옷차림에 안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 밤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야?=
“비상이 심심하다고 울더군. 잠시 놀아주러 간다. 그런데 너희는 어딜 가는 거지.”
=우리가 볼 사람이 도령밖에 더 있어?=
으흐흐, 얼굴값 못하는 헤픈 웃음에 환인도 피식 웃었다.
=비상이한테 가기 전에 잠깐 우리한테 시간 좀 내주는 게 어땡?=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부리는 모습이 평소와 이질감이 심하지만, 외모가 워낙 사기적이다 보니 그마저도 잘 어울린다.
“들어와라.”
할 일 없이 찾아오진 않았을 테지. 여자 친구들과 방으로 들어온 환인은 무슨 일로 온 거냐고 물으려다 유르파가 쑥스러워하며 내민 고급스러운 포장 상자에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건 뭡니까.”
=안느 아가씨와 이슬이 아가씨의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빚어낸 선물이야.=
=만드는데 유리 언니의 노력과 고생이 엄청나게 컸어.=
“…….”
그녀가 등 뒤에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은 눈치챘는데 갑자기 선물이라니. 환인은 상자를 응시하다가 두 손으로 받았다.
“조금 당혹스럽군요. 이건 언제 준비한 겁니까.”
=설계도 같은 준비는 아가씨들이 토너먼트 훈련을 하고 있을 때부터? 본격적인 제작은 아가씨들이 토너먼트 상금을 가져온 뒤부터지만. 자자, 보기만 하지 말고 얼른 열어보렴!=
130금화를 전부 쏟아부은 선물이라고?
유르파의 재촉과 이실리테, 안느의 기대감이 깃든 눈빛을 받으며 환인은 탁자에 상자를 올리고 비단 같은 재질의 포장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리고 드러난 흑갈색 상자. 신기하게도 편백나무처럼 심신을 안정시키는 향긋한 냄새가 피어난다.
상자를 열자 비단 완충재와 함께 팔뚝 보호대 형태의 브레이서에 머리핀 비슷한 게 눈에 들어왔다.
비단을 완충재로 쓰다니, 어지간한 호족들이 선물을 주고받을 때 쓸법한 수준이다. 포장에만 은화 단위를 쓰지 않았을까.
포장의 호화로움에 속으로 작게 감탄한 환인은 이어 브레이서에 시선을 주었다.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검은색 금속광택의 브레이서는 팔뚝 전체를 뒤덮는 팔찌 형태였다.
안쪽 피부와 닿는 곳에는 벨벳만큼이나 부드러운 감촉의 안감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매듭을 위한 끈이 안 보인다.
그보다 브레이서에 새겨진 무늬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검은색 금속 표면에 새겨진 선을 따라 푸른빛이 옅게 반짝이고 있었던 것.
“화려하면서도 심플한 디자인이군요. 금속 질감인데 금속도 아니고 안감도 평범한 가죽이 아닌 것 같고……. 이 핀은 어디에 쓰는 겁니까?”
=그건 브레이서랑 세트야. 우선 착용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싱글벙글 웃으며 환인의 반응을 즐기던 유르파가 브레이서를 들고 환인의 소매를 걷어 오른쪽 팔에 끼운다.
그러자 헐렁하던 브레이서가 차라라락 쇳소리를 내며 스스로 크기를 줄여 환인의 팔에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손목 위쪽에서부터 팔꿈치 아래까지 빈틈없이 감싸는 형태. 팔뚝을 돌려보고 팔목을 움직여봐도 걸리적거리는 게 없다. 과장 보태서 착용감이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다.
‘무게도 종이처럼 가볍군. 따로 신체 능력이 상승하는 느낌이 없는 걸 보면 액티브 스킬 계통의 아이템인가.’
=브레이서는 크기 조절 기능에 보온, 보습, 부식 내성, 내구 강화, 내구 회복의 기본 기능이 새겨져 있어. 팔뚝에 차도 되고 위팔에 껴도 돼. 그리고 이 핀셀이 중요한 건데. 자기, 잠시만.=
검지 길이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핀을 집어 든 유르파가 환인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가져다 댄다. 그러자 금속이 살아있는 것처럼 관자놀이에 착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동시에 환인은 착용한 브레이서에 정신이 연결되는 감각을 느꼈다.
매우 익숙한 감각이다.
이건 설마?
환인이 정신을 브레이서에 집중하자 브레이서의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작은 빛을 내더니 그 즉시 환인의 몸 주변에 희뿌연 방패 6개가 둥실 떠올랐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안느의 부무장인 카이트 실드, 광휘의 빛에 맞먹는다.
역시, 영혼 방패를 다루는 감각과 일치한다.
=어, 어머?=
=오?=
이제 마도기의 사용법을 알려주려던 유르파는 방패를 생성해내다 못해 이리저리 수족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입을 살짝 벌렸다.
뭐, 뭐지? 저 익숙한 패널 컨트롤은 하루 이틀 써서는 나올 수 없는 숙련도인데?
=자기, 혹시 다변성 방어 장치를 써본 적 있니?=
“없습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흠.”
이 마도기의 이름이 다변성 방어 장치인가.
다변성???이라는 말은 많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뜻.
형상에 정신을 집중하자 역시나 희뿌옇고 반투명하던 방패가 찰흙처럼 뭉개지더니 여섯 자루의 창과 검으로 변했다.
고족의 저택이라지만 그렇게 넓지 않은 방 안, 벽이나 천장에 실낱같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방안을 종횡무진 움직이는 여섯 자루의 창검에는 이실리테와 안느도 아연실색했다.
이건, 이건…….
=도령한테 방어구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왠지 엄청난 무기를 만들어준 거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기분 탓은 아닐 거야. 나도 그런 기분이니까…….=
환인은 다변성 방어 장치를 한 번 펼쳐본 뒤 무척이나 흡족해졌다.
모양도, 형태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방어용은 물론이고 공격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공방 만능의 마도기다.
다만 여섯 개 중 마음에 들 만큼 움직이는 것은 세 개가 고작. 나머지 세 개도 손발처럼 다루려면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거기에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도,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정신 집중이 꽤 필요하다.
방패로 만들어내는 것은 영혼 방패를 써본 덕에 변화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부담이 없지만, 검과 창으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정신력이 상당히 든다.
‘여기에 영혼 방패 세 개를 더 붙이려면…… 부단한 수련이 필요하겠군.’
다변성 방어 장치의 유용성을 간파한 환인은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여자친구들에게 미소지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선물이군요. 고맙습니다, 유르파. 그리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이런 선물을 생각해주어서 고맙다. 잘 쓰지.”
=아? 어어. 헤헤, 마음에 든다니까 다행이다.=
=아니에요, 주인님. 이건 안느가 생각해낸 선물이에요. 토너먼트 우승 상금으로 받은 100금화도 모두 사용했고요. 저는 옆에서 조금 보탰을 뿐인걸요.=
=어? 아냐! 이슬이도 상금으로 받은 거 전부 썼고 유리 언니도…….=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서로에게 공을 떠넘기는 세 여자친구를 환인은 두 팔 벌려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는 방어 장치의 제대로 된 스펙 테스트가 힘드니 정원으로 나가지. 유르파, 마저 설명을 부탁합니다.”
=으응? 응!=
저택 앞 정원으로 나간 환인은 수건으로 비상의 깃털을 닦아주며 스킨십을 한 뒤 유르파의 설명을 들으며 다변성 방어 장치의 성능 테스트를 진행했다.
=도령의 관자놀이에 붙인 건 핀씰이라고, 일종의 정신파 감응 방출 장치야. 그게 있어야 브레이서에 새겨둔 여섯 개의 핀패널을 다룰 수 있어.=
“두 개가 세트군요.”
=응. 사용법은 자기가 나보다 더 잘 아는 거 같으니까 넘어갈게. 기능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만 기억해두면 돼.=
브레이서에 핀씰은 위상력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핀패널pinpanel을 만들어 조작하는 마도기다.
위상력의 충전은 가만히 놔두어도 주변의 위상력을 포집해서 충전하지만, 브레이서에 손을 올리고 위상력을 넣어도 충전이 된다.
=충전량 확인은 패널 스크래치로 확인할 수 있어. 빛이 나지 않으면 위상력이 바닥난 거고 위상력이 가득 차면 선을 따라 빛이 일정 속도로 반복해서 빛을 내.=
“가동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위상력이 가득 찬 상태에서 6개를 동시에 격렬하게 움직이면 1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가만히 놔두면 24시간에 걸쳐 회복되는데 위상력이 많이 퍼져있는 장소라면 충전 속도는 더 빨라질 거야.=
“패널을 하나만 쓰면 6시간을 다룰 수 있는 겁니까?”
=소비는 중첩될수록 가중되는 법이니까, 하나만 다루면 8시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참고로 충전은 방어 장치를 사용 중에는 회복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하나의 패널을 꺼내 최대한 멀리 보내 봤다.
‘거리는 10m가 한계인가.’
10m 거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맴도는 패널을 단검 투척하는 것처럼 날리자 화살처럼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투척도 되는군요?”
=어, 어? 그게 되네……?=
왜 되는 거지? 얼빠진 유르파의 반응에 피식 웃은 환인은 브레이서의 빛이 살짝 감소한 것을 확인했다.
패널을 회수하지 못하면 에너지 회수도 안되나보군.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단검을 꺼내 패널을 방패 모양으로 만들어 때려보았다.
카각 상당한 반발력이 느껴졌지만 단검의 날은 멀쩡했고 방패도 멀쩡하다.
단검을 빠르게 휘둘러 20번 정도 찌르고 베었더니 브레이서의 빛이 약간 더 흐려졌다.
“좋군요. 살짝 비껴치면 위상력 소비가 줄어드니 각도만 잘 맞춘다면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한 번은 막겠습니다.”
환인은 마지막으로 지면에서 30cm 높이에 패널 실드를 눕혀 그 위에 올라타 보았다.
=오? 거기 위에 올라탈 수도 있어?=
=와.=
=저, 저런 기능은 생각 못했는데…….=
“올라타니 위상력의 소비가 급격해지는군. 가득 채워도 10분을 못 버티겠어.”
그렇다 해도 이 기능만 제대로 활용한다면 추락사할 일은 없겠지.
환인은 크게 만족하며 여섯 개의 패널을 꺼내 야구공 크기로 뭉친 다음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말했다.
“잠깐 대련해볼까.”
=좋아!=
안느가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만 꺼내 들고 먼저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그동안 환인과 대련하며 대인전 실력을 상당히 끌어올린 자신이다. 쉽게는 당해주지 않…….
=아잇, 진짜! 으으익!? 악!=
…으려고 했는데, 환장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안느는 오랜만에 뼛속 깊이 체감했다.
세 개의 패널 볼이 관절을 두들기며 자세를 잘 잡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움직이기도 어렵게 만든다.
물론 자세만 흔들지 않는다. 나머지 세 개는 눈으로 좇기 힘들만큼 빠르게 직선 이동을 하며 이마를, 뒤통수를 때린다.
그렇다고 패널 볼에 신경 쓰면 본체에서 동전이 날아와 목이나 머리, 명치 등을 때린다.
동전이 아니라 단검이었다면 목과 머리에 단검 자루가 돋아난 모습이 됐겠지.
그렇다고 본체를 향해 달려들면 패널 볼이 오금이나 무릎 옆을 때려 자세를 무너트리고 그 틈을 노려 본체의 창이 찔러 들어온다.
상처를 무릅쓰고 어찌어찌 접근해도 본체는 패널 볼을 밟아 하늘로 훌쩍 도망가서는 머리 위로 검과 창을 무수하게 던진다.
멀리 있으면 멀리 있는 대로 맥없이 죽게 되고 가까이 붙으면 또 가까이 붙는 대로 죽게 되고.
방심하면 사타구니라던가 정수리라던가 겨드랑이를 패널 볼이 쿡, 찌르고 가버리는데 그게 날붙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안느다.
=항복!=
5분 동안 이뤄진 대련에서 안느를 족히 20번은 죽인 환인은 드물게 흡족함이 드러나는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다.
“이거 정말 괜찮군요. 마음에 쏙 듭니다.”
=잘됐네. 아, 방어 장치를 임시로 방벽이라고 불렀는데 자기가 짓고 싶은 이름이 있으면 지어도 돼.=
“방벽입니까? 괜찮군요. 앞으로 이 마도기의 이름은 방벽이라고 하겠습니다.”
방벽??.
막는 벽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공격과 유틸성도 상당하지만, 그녀들의 주목적이 자신에게 뛰어난 방어력을 갖춰주기 위함이니까 방벽이라는 이름도 마음에 드는 환인이었다.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처음 보는 환인의 강한 감정 표현에 놀라워하면서도 기뻐하는 한편, 근처에 주저앉은 안느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5분 동안 환인에게 무기 한 번 휘두르지 못해 아이가 떼 쓸 때처럼 주저앉아 넋이 나가버린 안느.
=우리가…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달아줬어……. 날개를…….=
=…….=
=…….=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 안타까운 모습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이실리테와 유르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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