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 237 교상?上 마을 오울링
* * *
「윽…… 크읏…, 흐으르으으…….」
환인은 반쯤 혼재화한 상태에서 겨우겨우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시더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검붉은색은 또 처음이군.’
몸 곳곳이 물에 떨어트린 잉크처럼 검붉게 번져간다. 영기 같은 거무죽죽한 일렁임이 영체에서 아우라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영혼의 겉모습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저 색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검은색은 악령, 붉은색은 혼재이니 두 가지가 섞였다고 보면 되는 건가.
「아, 아아아아……!」
개량 한복 느낌이던 옷이 마치 부식해서 사라지는 것처럼 떨어져 나가고 약간 육덕진 알몸이 드러나더니 그 몸에 갖가지 상처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유두와 유륜이 너덜너덜해지고 음모 한 올 없는 매끈한 음부가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헐어간다.
이어서 쩌억, 무언가에 깊이 찔린 것처럼 벌어지더니 내장이 주르륵 흘러나와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복부에 멍 자국이 생기다가 급기야 스크래치 같은 상처가 깊게 새겨졌고 손톱이 빠지더니 몸 전체가 걸레처럼 망가진 모습이 되었다.
무수하게 겁탈당한 흔적 위에 새겨진 혹독한 고문의 흔적.
카턴 마을의 검은 영혼 여자처럼 살해 당시의 흔적이 몸에 새겨진 것을 환인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응시한다.
「아아아아…… 흐아아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유령처럼 흐느끼는 시더는 육체가 아닌 정신적인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였다.
‘혼재화에 악령화가 더해진 모습이군. 원한이 죽은 당시의 모습을 영체에 반영하는 거 같은데…….’
소리에 비물리적인 영향까지 생기는지 시더가 흐느낄 때마다 환인은 약하지만 위상류가 자극받는 것을 느꼈다.
위상류가 자극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공격이라는 뜻.
옆을 보니 환인의 여자들이 혼란에 빠진 것처럼 허둥거린다.
=어, 어떻게 해?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악령으로 변하는 거 같은데, 도령?=
=음파 공격처럼 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어……. 자, 자기야?=
「아아아악…! 하아아아악…!」
점멸하는 형광등처럼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모습으로 고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시더. 그 소리에 여자 친구들이 깜짝 놀라는 걸 들으며 환인은 강제력을 담아 말했다.
“냉정해지십시오.”
「…아아아악?! …흐아아아…… 으으으흐…….」
“이성을 유지하십시오. 여기서 당신이 혼재가 되면 그로 인한 피해와 원망은 말빈이 모두 뒤집어쓰게 됩니다.”
「……아으, 으으으아… 아, 마르…… 내, 아들……!」
아들을 언급한 것이 역시나 특효약이었다. 금방이라도 귀곡성을 터트리며 흑화할 것 같던 시더가 즉시 정신을 차린다.
끔찍한 고문과 학대의 흔적으로 가득하던 몸이 조금씩 매끈하게 변해가고, 분노와 원한에 침잠된 부분이 손과 발끝으로 보내지는 것처럼 이동한다.
하지만 그 정도가 한계였다. 몸의 상처는 다 사라지지 않았고 검붉은색의 이동도 확산하다가 축소되길 반복하며 이동을 멈춘다.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시더가 몸을 웅크렸다. 미치지 않게 이성을 억지로 붙드는 모습이다.
쉴 새 없이 몸을 떨며 신음과 고통 그 사이의 소리를 내는 시더의 모습에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쏘았다.
파아아앗…….
회백색의 안개 같은 빛무리에 휩싸인 시더의 모습이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몸의 떨림은 사라졌고 몸을 뒤덮은 상처도 깨끗하게 지워졌다.
아우라처럼 흘러나오던 검붉은 영기도 그 수준이 매우 완화되었고 흑점처럼 몸을 뒤덮은 반점도 팔다리 끝으로 이동하더니 알몸에 검붉은 스타킹과 웨딩 장갑을 낀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울분이 모두 정화되지 않는지 팔다리가 검붉은 기운으로 옅게 물든 상태이며 살해당할 때 무엇하나 걸치지 못해서인지 정신을 차렸음에도 알몸이다.
「영혼사님…….」
으르렁거리며 웅크린 몸을 펴는 시더. 흐릿한 검붉은색 아지랑이가 그녀의 영혼을 뒤덮고 흐늘거린다.
그 때문에 물방울 모양으로 처진 젖가슴과 무모증의 음부가 그대로 드러났음에도 수치스러워하긴커녕 분노를 불태우며 말했다.
「영혼사님. 난, 나는 이대로 성불할 수 없어……. 그 개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마르가 평온한 삶을 살 수 없다면 나는……!」
혈색 대신 검붉은 기운으로 립스틱을 바른 듯한 입술 사이로 얼음처럼 차가운 숨결이 쏟아져나온다.
“시더.”
「맞아…. 영혼사님은 그 개자식을 죽일 거라고 했었지? 나도, 나도 도와줄게. 그 개자식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내 혼이 소멸해 신들의 정원으로 가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어……!!」
씹어먹듯이 내뱉으며 헉헉거릴수록 시더의 혼을 휘감은 검붉은 영기의 일렁임이 강해진다.
환인은 시더가 더 원한에 잠겨 들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단, 우리 근처에서 대기하다 제가 조력을 부탁할 때만 움직이는 것이 조건입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상황에 개입한다거나 행동하는 것은 금지하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할게. 아니,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혼을 비수로 사용해 그 개자식에게 파멸을…… 내려주세요…….」
“물론입니다. 대신 알드헬름의 목숨을 끊는 것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고마워요…….」
=…….=
=…….=
환인의 여자들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복수를 맹세하는 시더의 변화에 압도된 것처럼 입술도 달싹할 수 없었다.
시더는 오울링의 상공에서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지켜볼 것을 환인에게 지시받고 하늘로 올라갔다.
별채의 앞뜰에서 작은 점으로 보일 만큼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올라간 시더를 바라보던 안느는 생각이 많아진 얼굴로 서성이다가 중얼거렸다.
=기분이 싱숭생숭하네.=
시더의 분노는 안느로서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배 아파 낳은 도령의 아이가 말빈과 같은 상황에 부닥치면? 자신도 저러지 않을 거란 확답은 못 할 것 같다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이상한 점 하나가 안느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든다.
‘시더의 그 모습은 반쯤 악령이 된 증거야.’
환인과 대화 끝에 시더가 저런 모습이 되었지만, 그것은 환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안느였다.
도령이 없었어도 시더는 혼재가 됐을 테니까.혼재란 감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영혼의 오염, 그녀가 겪은 일은 오히려 혼재가 안되는게 이상할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악령은 다르다.
무엇을 말하랴. 특이점이란 힘, 에너지를 뜻한다. 위상력이 충만한 곳에서 감정적으로 타락한 영혼이 악령이 되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시더가 그러한 특이점을 발생시켰다면…….
‘도령의 영기가 그 역할을 한 게 아니었을까?’
도령은 순수 영혼사가 아니다. 이블팩션 쪽의 직업인 강령사가 합쳐진 혼합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을 다루는 강령사이니 악령화도 일으킬 수 있는게 아닐까? 어쩌면 혼재화도??
‘아냐아냐!’
뇌수가 귓구멍을 통해 빠져나오지 않을까 싶을만큼 고개를 붕붕 흔든 안느는 그 생각을 즉시 접었다.
영혼사인 도령이 영혼을 혼재로 유도한다고? 말도 안 돼.
……안될 게 있나? 알드헬름 같은 인간이 사람들을 재미 삼아 살해하고 재산을 빼앗으려 살해하는 일도 벌어지잖아. 그거야말로 혼재를 만드는 행위와 다를 게 뭐지?
오히려 환인의 행동은 영혼으로 벌을 내리는 징벌의 측면에서…….
약효를 과대하게 발생시키면 그것도 독약이 된다.
독약도 잘 사용하면 치료약이 된다.
약초도, 독약도 사람이 쓰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독약으로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게 아니라 알드헬름 같은 악당을 치는 데 쓰는 거라면…….
쿠에들을 보살피던 이실리테는 땅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안느를 보곤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안느, 무슨 생각 해?=
=……응? 어, 도령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 그리고…… 혼재를 만들어내는 것도, 혼재를 치료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뭔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네.=
마도기를 제작할 만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나무 그림자 아래 앉아 마음을 다스리던 유르파가 그 대화를 듣고 말했다.
=안느 아가씨는 시더가 저 모습이 되도록 자기가 유도했다고 생각하는 거니?=
=…모르겠어. 도령은 영혼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는 영혼이 결정하는 거랬잖아. 그런데 도령의 이야기에 시더가 저렇게 된 걸 보니까…….=
=혼재를 만들고 치료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말은, 그래서 한 거구나. 자기가 그런 능력을 나쁜 일에 쓰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냐. 도령이 왜 그러겠어? 파르히스트 성주도 도령이 탐나서 초대할 정도였잖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데 굳이 고생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그런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할 거라곤 생각 안 해.=
무엇보다 도령은 원래 자기 세계로 귀환하려고 종족 연합 주도로 가려 하잖아. 혼재나 악령을 만들어낼 이유가…….
……응? 잠깐, 도령이 원래 세계로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
악령과 혼재 같은 것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안느가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야, 야야. 이슬아, 유리 언니. 큰일 났어, 큰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뭐가 큰일이라는 거니?=
=도령이 만약 자기 세계로 귀환한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돼? 우리도 도령 따라갈 수 있는 거야?=
=……?!=
=……!=
이실리테와 유르파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자신의 여자들이 세상 심각한 얼굴로 긴급 토론에 들어간 것을 모르는 환인은 말빈의 저택에서 말빈과 헬리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것은 시더의 정보를 취합해서 도출해낸 결론입니다. 확률은 무엇보다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혼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스림의 미궁에 대한 존재를 눈치챈 알드헬름이 말빈 님의 팔촌이신 미리암 님을 유혹, 정보를 알아내고 살해한 뒤 오울링을 삼키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면…….=
“이야기의 앞뒤가 맞아떨어집니다.”
환인은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어 어깨를 떠는 말빈을 잠시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헬리사에게 물었다.
“그보다 아직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이걸 질문해도 괜찮은 부류인지…… 외국인인 저로서 판단하기 조심스럽군요.”
=괜찮으니 의문이 있다면 걱정 마시고 여쭈어주십시오. 성심성의껏 아는 한도 내에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헬리사의 대답에 환인은 조금 전, 시더와의 대화 중 일부를 떠올렸다.
‘시더.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알드헬름이 오울링에서 저지른 일 같은 게 비교적 흔하게 벌어지는 겁니까?’‘그게 아닙니다. 호족이 고족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일이 흔히 벌어지는지 묻는 겁니다.’
시더와 대화할 때는 알드헬름이 오울링에 손을 뻗는 이유에만 집중하느라 해당 부분은 대충 넘어가 버렸다.
나중에 다시 확인할 수 있겠거니 싶어서였다.
그러나 환인이 추리해낸 전말에 시더가 격노하며 반쯤 타락해버려 이야기가 어정쩡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앞으로의 여정에 매우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수집해왔던 일부 개연성 쪽에 의문이 조금 들고 있었기에 헬리사에게 다시 질문을 넣었다.
“헬리사. 고족은 라드세아에서 고귀한 신분이 아닌 겁니까?”
=…네? 아, 영혼사님은 아직 라드세아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신가 봅니다.=
“라드세아에 도착한 지 이제 10개월 정도 지났습니다만, 줄곧 유랑 중인지라.”
확실히 영혼사는 줄곧 방랑하며 성불행을 이어가는 순례자들.
헬리사는 고족에게 있어 조금 아픈 부분이었지만, 환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고족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루크랑 국가 라드세아의 역사에 빗대어 설명하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진다.
글로 쓴다면 1만 자에 가까운 계급의 역사?史.
그걸 모두 들은 환인은 한 단어로 요약했다.
‘고족은 유산 계급이군.’
유산 계층, 근현대에 들어 귀족과 평민의 사이, 재산이 많고 그런 재산으로 부를 쌓아 올려 특권을 누리는 계급을 칭하는 단어다.
라드세아에서는 분류가 필요한 장소 대부분에 등급제를 쓴다.
1급이 제일 낮고 10급이 제일 높다. 그리고 호족에도 1급부터 10급까지 등급제가 적용되어있지만, 고족은 그런 게 없었다.
애초에 환인은 자신이 고족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었기에 `고족 = 호족보다 한 단계 낮은 귀족`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덕분에 개운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알드헬름은 같은 귀족 살해를 저지른 게 아니었다. 이 사건이 알려진다면 호족 사회에서 손가락질받고 지탄받을지언정 범죄자로 분류되진 않겠지.
아니, 말빈의 팔촌 조카될 사람을 데리고 와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한다며 오울링에 여러 가지를 투자한다면 가끔가다 할 수 있는 실수 정도로 취급받지 않을까.
‘웨이포드 같은 도시에서도 범법자라곤 해도 사람을 고문해서 껍질을 벗겨 죽일 정도이니…….’
살해로 인한 혼재의 발생도 나름의 대처가 존재한다. 윤년마다 찾아오는 승령천제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영혼사를 섭외해 데려와 성불행을 진행해도 되는 일이니까.
약간의 평판 감소와 지출쯤이야, 돈이 무한정 샘솟는 것과 다름없는 미궁을 가진 오울링을 삼키는 거에 비하면 값싼 비용이다.
환인은 머릿속으로 라드세아의 상식에 몇 가지 글귀를 더 추가한 뒤 말빈을 보았다.
좀전의 진실에서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 가셨는지 눈빛도 맑아졌고 떨림도 없어졌다.
“그럼 이야기를 좀 더 진행해볼까요. 헬리사, 말빈이 신변을 의탁할 수 있는 호족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배경 하나 만들어놓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지만 환인은 놀라거나 한숨짓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제대로 된 뒷배가 있었다면 알드헬름이 그런 식으로 대놓고 행동하지도 않았겠지.
“말빈.”
=네, 네. 영혼사님.=
“제가 당신과 헬리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 하나를 권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 이외에는 당신과 헬리사가 평온하게 살아갈 방법은 없다고 봐도 될 겁니다.”
자신이 알드헬름을 죽인다 해도 비자룩스 가문은 오울링을 향해 마수를 계속 뻗칠 거다. 오히려 상급 영혼사인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니 자식이 죽은 원한을 루브이주 가문에 쏟아붓겠지.
=그, 그게 뭔가요?=
환인은 품에서 시두르가 준 루비 브로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말빈과 헬리사의 시선이 루비 브로치로 향한다.
“파르히스트 성주이신 펜리 후스티오 파르히스트님의 모친, 시두르 님께 받은 루비 브로치입니다. 그분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릴 수 있는 일종의 소원권이라 보아도 되겠지요.”
=헉!=
=……!=
“이것을 가지고 파르히스트를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스림 미궁을 성주님께 진상하며 신변의 보호를 부탁하십시오. 영역의 가장자리이긴 하나 오울링도 파르히스트의 권내입니다.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면 성주님도 두 분을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하, 하지만 오울링은 선조님들이 대대로…… 아얏!=
=이런 귀물을 일면식도 없는 저희에게 쓰시겠다니요. 영혼사님께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거두어주십시오.=
말빈의 허벅지를 꼬집어 입을 다물게 한 헬리사가 루비 브로치를 손수건에 감싸서 환인에게 다시 돌려준다.
=영혼사님께서 말씀해주신 것만으로도 저희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변종 스림의 미궁은 말씀대로 가치가 뛰어난 미궁. 대대로 루브이주 가문의 남자들이 들어가 매년 쓸 만큼만 사냥하고 봉인하길 반복한 미궁입니다.=
그 때문에 미궁도 거의 성장하지 못하여 이제 2급에 불과한 수준. 관리하기도 편할 테니 미궁째로 마을을 펜리 성주에게 상납한 뒤 보호를 부탁할 거라고 말하는 헬리사다.
말빈도 뒤늦게 선조의 땅 운운하면서 미적거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헬리사와 함께 머리를 숙였다.
환인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릅니다. 고족이 7급의 고위 호족과 간단히 독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건 여러분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파르히스트 성주님과 직통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장이 될 겁니다. 말빈의 안전을 바란다면 받으십시오.”
=그, 그러나…….=
“절 걱정하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슬쩍, 품에서 백금 징표를 꺼내 살짝 보여주고 집어넣자 헬리사만 크게 경악한다.
“아시겠지만 비밀입니다. 저는 중립으로 있고 싶은지라.”
=네, 네! 물론입니다. 무덤에 들어갈때까지 평생 비밀로 간직하겠습니다!=
=……??=
맹하게 눈만 끔뻑이는 말빈이 살짝 못미덥지만, 그의 옆에는 헬리사가 붙어있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토록 말빈 님을 신경 써주시다니, 정말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헬리사의 시선을 받은 말빈이 눈치껏 두 손으로 루비 브로치를 공손히 받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영혼사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루브이주의 35대 가주이자 오울링의 고족인 말빈 루브이주,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영혼사님께 백배 천배 갚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잊으셔도 괜찮습니다. 빈말로도 여러분들의 앞에 펼쳐진 나날이 지평선까지 뻗은 대로처럼 평탄할 거라고 못할테니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환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위령제의 준비가 끝난 다음 날.
마을 사람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시작되었다.
식의 진행은 사전에 이야기를 나눈 대로였다. 하얀 일라일 꽃으로 뒤덮인 임시 광장, 그리고 그런 광장을 둘러싼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
마을 사람들은 단상 주변에 모여있는 영혼을 힐끔거렸다.
평온의 파동을 맞고 영기도 약간 주입받아 비교적 멀쩡한 상태인 87명의 영혼들.
=으스스할 정도로 영혼이 많구먼.=
=이 위령제도 영혼사님이 생각해내셨다지?=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릴 무렵 메이드 복이 아닌 상복 같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헬리사가 단상에 올라간다.
제단 앞의 단에 선 헬리사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위령제를 지내게 된 까닭(이미 마을 사람 전원이 알고 있지만), 그리고 위령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안내가 이어진 짤막한 개회사를 읽었다.
그후 긴장해서 뻣뻣해진 경비대장이 단상에 올라 사건의 개략적인 보고를 읊었고, 다음으로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말쑥한 모습의 말빈도 단상에 올라 죽은 자를 향한 묵념을 진행한 뒤 추모사를 낭독했다.
조용한 광장에 말빈의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광장 한구석에 모여있던 환인의 여자들이 작게 속삭였다.
=위령제가 끝난 뒤에 말빈하고 헬리사는 파르히스트로 떠나는 거야?=
“그래. 경비대장을 임시 대리인으로 내세워놓고 그저께 우리를 막아섰던 여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날 거다.”
=멜빈 씨가 떠나면 마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변종 스림의 미궁을 바치고 파르히스트의 휘하로 들어가면 비자룩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야. 사도를 파견해서 섭정하고 주인이나 당주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 말빈 씨와 헬리사 씨가 파르히스트를 나오지만 않으면 목숨이 위협받을 일은 없겠지?=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추모사 낭독이 이어진 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줄 서서 단상 앞의 제단에 마련된 향 그릇에 향을 하나씩 피우기 시작했다.
가늘고 긴 향이 조용히 타들어 가며 연기를 한 줄기씩 피워올린다.
87개의 향 그릇에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향을 피우니 향 그릇당 서너 개의 향이 꽂히며 가녀린 연기가 하늘로 천천히 올라간다.
마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죽음에 명복을 빌고 있음을 느꼈을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영혼들은 눈물을 흘리다 하나둘 성불하기 시작했다.
환인이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며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당신들을 살해한 알드헬름은 응당의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우오…… 영혼들이 성불하고 있어!=
=새끼야, 목소리 낮춰…!=
마을 사람들이 작게 탄성을 지르다가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올리는 걸 보며 환인은 평온의 파동을 천천히 발사했다.
87개의 향 그릇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연기와 아련하게 퍼져나가는 회백색 빛의 파동.
그리고 하얀 빛무리로 변해 하늘로 승천하기 시작하는 영혼들이 뿌리는 덧없고도 슬픈 빛 가루.
위령제가 끝나고 모든 향이 사그라졌을 때 광장에는 한 명의 영혼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
87명의 영혼을 성불시키고 그들이 남긴 빛 구슬을 전부 수거한 환인은 영혼 구슬 보유 개수가 4개 더 늘어 60개 된 것을 알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