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 235 교상?上 마을 오울링
* * *
=그건…….=
시선을 받은 이실리테가 약간 곤혹스러운 얼굴로 어물거렸다.
그게 환인의 눈에는 생각을 정리하고 할 말을 다듬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다려줄 겸, 1년이 다 되어 가는 이 세계 생활로 얻은 지식을 종합해봤다.
루크랑 족 남자와 여자는 외관과 신체 구조로 인한 차이, 역관절이라던가 날개, 모피의 방한 효과 등 이러한 점에 따른 차이는 있을지언정 신체 능력을 점수로 합쳐 총합을 내면 전체적으로 차이가 없는 편이다.
개체 간의 강약 차이는 어느 종이든 존재하는 편이고.
이점은 직업자로 각성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자의 인구수는 남자보다 3배가량 많다. 독립심이나 자립심도 남자와 비교해 뒤떨어지지 않는다.
사회에 여자들이 진출한 분야도 많고 다양한데 기본적인 인구의 차이가 있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 아기를 낳는 것은 여자. 낳은 아기를 키우는 것도 여자. 나가서 돈을 버는 것도 여자이고 남자가 하는 일은 여자도 모두 할 수 있다.
환인이 보기엔 모계 사회가 성립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즈음 생각의 정리가 끝났는지 이실리테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용병단에서 일할 때 들은 거라 진위는 알 수 없지만요, 남자들이 대우받는 건 짐승신님의 모습이랑 관련되어있는 것 같아요.=
=아, 교단의 신학 시간에 들었어. 짐승신님의 본모습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산보다 크고 거대한 늑대시지만, 가끔 드러내는 모습은 루크랑 남자들처럼 짐승의 모습이라고. 혹시 그거 때문이야?=
안느가 늘어놓은 이야기에 이실리테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랑 남자는 짐승신님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것으로부터 태어났고 루크랑 여자는 짐승신님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에서 자라났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루크랑 남자는 짐승신의 후예이기에 짐승신과 흡사한 모습을 띠고 있지만, 루크랑 여자는 티끌도 안되는 양만 몸에 깃든 불완전한 존재기에 귀와 꼬리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 불완전한 여자는 완전한 남자를 따르는 게 정상이라고 했어.=
=진짜? 그게 사실이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네.=
그때까지 가만히 듣기만 하던 유르파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이슬이 아가씨만 괜찮으면, 술법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걸 이야기해줄까 하는데, 나머지는 내가 말해도 될까?=
아무래도 루크랑이 아닌 흡정족인 자신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네. 저도 정확한 이유가 궁금해요.=
허락받은 유르파가 안경을 꺼내 쓰더니 주머니에서 노트 같은 걸 꺼내 파라락 펼친다.
=먼저 이슬이 아가씨가 들은 내용은 신학교리서에서 본 거랑 거의 같아. 땅신 교단에 짐승신님의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이어서 유르파가 해준 보충 설명은 진화론을 역행하는 내용 그 자체로 다윈이 무덤을 박차고 뛰어나올 내용이었다.
=짐승신 교단의 교리서는 무수히 많은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짐승의 시초가 되는 분을 짐승신님이라고 정의해. 그리고 루크랑 남자는 까마득한 옛날, 짐승신님이 대적자와 싸우면서 대지에 뿌려진 그분의 흔적에서 태어났다고 적혀있어.=
싸우다 흩뿌려진 털에서, 부러진 발톱 조각에서,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서, 잘려 나간 근육에서, 힘줄에서, 눈과 코, 귀, 입, 이빨, 꼬리 등에서 태어났으며 그에 걸맞은 종으로 탄생했다고.
하지만 여자는 원래 땅에서 살아가던 종족이 루크랑 남자들과 결혼하면서 피가 섞였기에 지금과 같은 루크랑 남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살던 곳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군.”
=도령네 신화는 어떤데?=
“신학적으로 접근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되어있다. 하느님이 흙을 빚어 남자를 만들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지.”
=헉, 진짜?=
=그건… 또 굉장한 이야기네.=
하느님이 신님으로 번역되어 들린 걸까. 굉장히 놀라는 두 아가씨에게 환인은 차가운 지식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전혀 다르지. 인간은 약 600만에서 700만년 전 유인원과 흡사한 종이 여러 차례 종족적으로 진화하고 또 갈라져 마침내 인간이 되었다는 설이 진리로 채택되었다.”
=……치, 칠백만 년?=
숫자로 셈하기 어려울 만큼 까마득한 시간에 여자들이 경악하는 것도 잠시, 안느와 유르파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납득한다.
=왜 종족 연합이 도령네 세계의 사람들을 데려와 한데 모으는지 이해했어. 이 진화론이라는 거, 밖에서 함부로 꺼냈다간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루크랑족 남자들로 치면 인견족은 개가 조상이고 인서족은 시궁쥐가 조상이라는 말이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과학이라는 건 신을 부정하는 측면의 성향이 강하니까.”
그러나 진화론은 지구의 일이고 이 세계에는 술법과 신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유르파가 말한 내용이 진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루크랑 남자와 루크랑 여자 사이에서 태어나는 여자는 짐승귀와 짐승 꼬리만 달려있고 남자는 빠짐없이 이족보행 짐승의 모습을 하지 않는가.
인마족처럼 일부 예외가 있긴 해도 이상한 일이다.
환인은 주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부계 사회라는 것은 풍습에 종족 단일 종교의 사상이 융합되었기 때문인 거군.”
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 시대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신과 종교과 관련된 문제는 곧 진실이자 진리로 취급받는다.
저렇게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하니 불합리한 처사에도 여자들이 레볼루숑을 일으키지 않는 거겠지.
안느가 기막히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말한다.
=어쩐지 별 볼 일 없는 남자도 여자한테 강하게 나간다 싶더니. 유리 언니, 루크랑 남자는 그런 사상을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르치는 거야?=
=이 사상은 루크랑 사회에서 수천 년 묵은 거목처럼 깊게 뿌리 내린 사상이야. 그런데도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이 정상적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남자의 수가 워낙 적은데다 게으르고 나사 빠지고 못난 주제에 근로 의욕도 없는 인간들은 밖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래. 그런 인간들은 여자한테 들러붙어 등골만 빨아먹고 정상적인 남자는 그나마 바깥 활동이나 사회 활동을 하니 겉만 봐서는 무난해 보이는 거지.=
‘확실히.’
환인이 만난 루크랑 남자들은 다들 외부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유르파의 저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보다는 평소 털털한 느낌의 유르파답지 않게 신랄한 독설을 내뱉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한이 쌓인 듯한 모습.
여자, 그것도 이종족인데다 서큐버스와 비슷한 종족인 유르파가 그런 루크랑 족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환인은 그녀가 받았을 종족 박해와 차별을 상상하다가 선베드에서 일어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남은 시간은 알아서 하고, 혹시 모르니 만일을 대비해 체력은 온존해두도록.”
=네.=
=엉.=
“이실리테, 어제 하지 못한 목욕을 하고 싶군. 준비해주겠나.”
=네, 주인님.=
그녀들과 이런저런 흥미로운 잡담을 나눈 덕에 정신적 피로는 거의 해소되었다. 이제 뜨거운 물에 목욕한 뒤 잠깐 낮잠을 자고 나면 컨디션은 원상태를 회복하겠지.
영혼을 살피는 것은 그 뒤에 하자.
환인은 별채 안뜰을 서성이는 비상과 놀아주며 목욕 준비를 기다렸다.
목욕 도중 이실리테를 잡아끌고 난입한 안느와 함께 뜨거운 물로 피로를 푼 환인은 그녀들을 좌우에 끼고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취했다.
좌우에 반라로 안겨있는 여자 친구들의 따스한 체온, 그리고 땀이 살짝 나려 하면 불어와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
짧지만 달콤한 수면으로 컨디션을 회복한 환인은 회색 후드 망토를 쓰고 오울링 마을의 영혼을 찾아다녔다.
원한을 가진 영혼이 아닌 일반 영혼을 성불시키기 위해서다.
이미 자신이 상급 영혼사라는 사실은 마을 전체에 퍼진 상황. 이 정도는 조금 부족하다. 자신의 명성이 마을을 넘어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자신에게 가해질 위해의 수준은 반비례해서 낮아질 것이다.
‘반대로 위해가 가해진다면 그만큼 강도가 높아질 테지.’
세계적 언터처블의 대명사인 영혼사, 그것도 상급 영혼사를 공격하려는 인간이라면 그 반작용을 무마하거나 억누를 힘이 있는 개인/집단이라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만한 힘이 있다면 영혼사가 사망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지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내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내 적이 될 자들에게는 압박이 된다.’
마을 사람들의 공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섬 쪽 마을과 다리 쪽 마을을 모두 둘러본 뒤에는 경비대의 작은 보트를 빌려 다리 아래 교각도 전부 살폈다.
그 결과 마을에 영혼은 총 95명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중 87명이 살해당한 원혼이라는 걸 확인했다.
호위를 명목으로 동행하던 너구리 귀에 너구리 꼬리의 여자 경비대장이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이, 이상하네요. 그때 그놈에게 죽은 사람은 120명 정도인데 원혼은 87명뿐이라니…….=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이 원혼으로 남을지 남지 않을지는 피해자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산자인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일이지요.”
=아……!=
환인은 그 후 8명의 영혼을 모아 성불행을 진행했다.
다른 마을과 촌락에서처럼 가족과 대면시킨 뒤 영기를 흘려 넣어 본인 확인을 시키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영기를 약간 밀어 넣어 모두가 볼 수 있게 해놓은 뒤에 진행한 성불행이었다.
덕분에 효과는 대단히 좋았다.
=허억! 여, 영혼이야! 영혼이 보여!=
=세상에…… 진짜 대단한 영혼사님이셨구나…….=
=오오오, 짐승신님, 부디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어 극락왕생하도록 평온을…….=
=그런데 저 사람은 그, 중앙섬에 사는 욜로 씨네 집 둘째 마누라 아녀?=
=맞아. 4년 전에 수장식을 했던…….=
영혼을 성불시킬 때마다 환인의 뒤를 따라다니던 수백 명의 마을 사람이 보내는 경외와 흠모의 시선이 실시간으로 강해졌던 것.
「사랑한다, 나의 아이들아…….」
=편히 성불하세요 아버지. 여동생과 가족들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이렇듯 살해당한 영혼을 제외한 8명의 영혼을 성불시킨 뒤에는 자신의 그림자를 밟을세라 극도로 주의하는 마을 사람들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며 원한에 잠긴 영혼을 통해 몇 가지 테스트를 진행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그, 으으으.」
“당신은 사람입니다. 원한을 잊으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분노에 잠겨 사람으로서의 이성만큼은 놓지 말아주십시오.”
「끄… 으그그으…… 그, 그놈. 씹어먹을 그 개자식…… 끄극!」
이러한 테스트로 인해 환인은 성불행에 도움 되는 테크닉을 습득할 수 있었다.
강제력을 통해 약간이나마 이성을 일깨운 뒤 평온의 파동을 쏘면, 아무리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의 영혼이더라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 대화가 가능하게 변하는 것이다.
이 테크닉이 혼재에게도 통할지 의문이지만, 과도한 정신적 충격으로 이성을 놓아버린 영혼에게 손 쓸 방도가 생긴 것만큼은 두말할 것 없이 오울링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지.
그즈음 해가 저물어 노을이 지고 있었기에 환인은 경비대장의 호위를 받으며 여관으로 돌아갔다.
위령제의 준비는 하루하고 반나절이 걸렸다.
말빈은 경비병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섬 동쪽 방앗간 앞의 공터를 깨끗하게 청소한 뒤 강변에 흐드러지게 핀 일라일 꽃을 뿌리째 뽑아와 꼼꼼하게 심었다.
사람들이 오갈수 있도록 돌판을 구해와서 마을 사람들이 향불을 피울 길을 만들었으며 목수와 석공을 불러 제단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만들었다.
동시에 마을의 나이 많은 지식층을 모아 개회사, 추모사를 작성했고 향과 향 그릇도 죽은 사람들의 숫자만큼 마련해 제단 위에 올렸다.
그사이 환인은 살해당한 영혼을 하나도 빠짐없이 정신을 일깨워 위령제를 치를 장소로 모았다.
간간이 영기를 밀어 넣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환인을 고통에 신음하는 영혼을 찾아 성불행을 이어가는 혼의 순례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는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처음에는 은근슬쩍 남들 모르게 별채를 찾아와서 공물을 두고 간다던가 마을 사람들이 귀한 식자재로 요리를 만들어 조심스럽게 바치더니, 점심 즈음이 지났을 때는 대놓고 여관 별채 앞에 함을 설치했다.
공물은 모두 함에 넣고 가라는 의미였는데, 환인이 설치한 게 아니라 마을의 목수가 뚝딱 만들어낸 것들이다.
이렇게 상자가 만들어지자 마을 사람들이 두고 가는 물건의 질과 양이 대폭 늘었다.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약초, 보약으로 분류되는 숲꿀, 강에서 출토되는 희귀한 보석 원석이나 귀금속들.
=헉, 세상에! 방금 저 할머니 영지를 넣고 가신 거 같은데?=
=뭐? 영지? ……아까 어떤 사람은 달그림자 풀 한 다발을 두고 가더니…….=
=달그림자풀?! 그램당 1은화나 하는 거잖아!=
이런 상황에 그나마 내성이 있는 이실리테는 그러려니 했지만,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안느와 유르파는 이래도 괜찮은 건가 약간의 걱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도령 도령. 저 사람들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지금까지 함에 들어간 재료의 값만 따져도 70은화는 넘을 거 같은데…….=
오후가 늦은 현재 설치된 공물함은 세 개. 잠시 후면 네 개째가 설치될 느낌이다.
환인은 안느에게 빌린 땅신 교단의 신학서를 읽다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저들의 공물은 다른 영혼들의 봉양에 쓰인다. 그걸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으니 성의껏 함을 채우는 거지.”
=그, 그런가?=
하지만 함이 두 개 이상 설치될 거라고는 환인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안느를 지목해서 말했다.
“이대로 가면 함이 계속 설치될 것 같으니 세 번째 함이 채워지면 나가서 그만 사람들을 돌려보내도록 해라. 함이 비어있으면 사람들이 계속 채우려 할 테니 말이다.”
=응, 알았어.=
재산에 여유가 되는 대로 내놓는 것은 상관없지만 살림을 축내면서까지 ‘성의’를 받아내는 것은 명성의 측면에 좋지 못하다.
이만한 마을의 규모라면 함 3개 정도가 적당하겠지.
그리고 다음 날.
위령제 준비가 거의 끝났을 무렵 말빈과 헬리사, 그리고 시더가 찾아왔다. 시더에게 총량의 10%나 되는 영기를 불어넣은 지 30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환인 님.=
눈가에 운 흔적이 있는 말빈과 그의 뒤에서 말빈을 자상한 얼굴로 바라보는 시더와 헬리사.
환인은 대강의 사정을 파악하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작별 인사를 나누셨습니까.”
=네. 엄마…,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돌아가신 분과는 헤어져야 하는 것이 순리니까요. 저에게는 그 이별이 남들보다 조금 일찍… 훌쩍. 찾아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과는 다르게 말빈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글썽거렸고 입 주변이 삐죽거린다. 하지만 말빈은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훌쩍, 코를 삼킨 말빈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환인 님의 은혜로 어제 하루 어머님과 대화하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어요.=
“…….”
잠시 격려해줄까 생각하던 환인은 헬리사가 말빈의 옆에 서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시더의 자리를 대신하는 동시에 옆을 지켜줄 사람을 얻은 듯하니 위로는 필요 없어 보였기 때문.
하지만 힘내라는 말 한마디 정도는 괜찮겠지.
“힘내십시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당신은 모친께서 바라는 훌륭한 주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넵. 감사합니다.=
다시 허리를 숙인 말빈은 편히 쉬시라고 말한 뒤 헬리사와 함께 별채를 나섰다.
문지방을 넘기 전, 말빈이 찔끔 흘린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헬리사의 표정은 어머니와 아내를 반반씩 섞은 그것이었다.
시더의 젖자매라고 했으니 그녀에게 있어 말빈은 조카나 다름없었을 터. 그런데도 저런 관계가 된 것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환인은 말빈과 헬리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옆에 서 있는 시더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 전말을 이야기해주실 마음이 드셨습니까.”
「응. 당신이 궁금해할 법한 정보, 알드헬름과 비자룩스에 관한 것을 아는 대로 말해줄게.」
마을에서 소문을 수집한 정도로도 밑그림을 완성할 수는 있지만, 그런 밑그림에는 신빙성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퍼트리는 입소문과 루브이주 가문이 해주는 이야기가 같을 수 없다.
루브이주 가문의 전 주인, 시더=루브이주가 해주는 이야기라면 어디선가 모르게 줄곧 느껴지던 괴리감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환인은 줄곧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알드헬름이 아무리 호족 직계라지만, 오울링을 다스리는 루브이주 가문도 고족 가문이다.
1. 호족 가문이 고족 가문을 상대로 그저 유흥 삼아, 재미 삼아 패악질을 저지를 수 있는가?
2. 몇 발 양보해 패악질을 저지를 수 있다고 해도 고작 마을 주민 하나가 달려와 부딪쳤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 백수십 명과 고족을 고문하고 살해할 수 있는 건가?
그동안 알게 된 이 세상의 흐름, 굴러가는 꼴을 생각하면 둘 다 아니다.
환인은 여자 친구들도 시더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그녀의 어깨를 잡고 영기를 약간 흘려 넣어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