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38화 (238/813)

〈 238화 〉 232 교상?上 마을 오울링

* * *

이 세계, 니오네브레스는 개인의 무력이 국가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을이나 소도시를 초월하는 일은 종종 발생한다.

권력을 동원해 행사하는 무력 같은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개인이 육체적, 신체적으로 확보한 힘을 뜻한다.

실제로 각 주도에만 존재한다는 9급 직업자는 약간의 지원을 받으면 소도시 하나쯤은 홀로 박살 낼 수 있으며 그와 관련된 문건까지 남아있다.

물론 전면전으로 두드려 부수는 게 아니라 기습과 테러를 위주로 하지만 아무튼.

인구가 800도 넘지 않으며 가장 강한 직업자가 4급 정도인 마을이라면 전투 쪽 7급 직업자가 홀로 부술 수 있다.

7급 직업자는 비교적 흔하다. 도시 규모라면 최소 1명 이상은 존재할 정도.

그럼에도 타운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니오네브레스에 이종족이 국가로 인정되는 것은 단 네 개뿐이며, 이블팩션이라는 인류의 적과 소규모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데다 고등급의 직업 범죄자는 4개 국가 지도부가 공유해서 현상금을 올리고 그 해악질이 심각할 경우 공동의 적으로 지정해 추살대를 편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등급의 직업자들은 가급적 범죄를 저지르려 하지 않는다.”

엽사 조합이 일종의 현상금 사냥꾼과 비슷한 일도 한다는 것을 듣고 갈롯에게 함정술 교육을 받으며 얻어낸 정보다.

=한 번 추격이 시작되면 온갖 술법과 주술로 특정 범죄자를 찾아내고 추적하니까…….=

안느가 덧붙이는 이야기에 창가에 서서 달빛을 반사하는 검푸른 강물을 응시하던 환인이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영혼사의 존재다.”

아무리 범죄를 들통나지 않고 완벽하게 저지른다 해도 범죄의 강도가 강할수록 사건 현장에 영혼이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현장에 남은 영혼은 무엇보다 확실한 범죄의 증거가 된다.

윤년마다 돌아오는 승령천제, 혼재의 발생을 억누르기 위해 시행되는 국가적 풍습이 있는 만큼 비상식적으로 영혼이 많다거나 하면 그에 대한 조사와 추적이 발생하기 마련.

환인도 이제 안다. 영혼사가 이 세계에서 범죄 억제력 역할도 겸하고 있다는걸.

영혼사는 3급부터 영혼을 아주 흐릿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되고 4급부터 미약하게 소통이 가능해진다. 3~4급을 일반적으로 영혼사라고 지칭한다.

5급이 되면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영혼을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게 된다. 영혼이 가진 힘을 일부 빌릴 수도 있다.

6급부터는 영혼의 기억을 일부 볼 수 있고 초혼??, 영혼을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끔 손을 쓸 수 있는데 이때부터 상급 영혼사라고 지칭된다.

그러니까 상급 영혼사가 아닌 3급의 일반 영혼사가 오울링에 오더라도 일이 커진다는 뜻이다.

대화는 하지 못해도 살해당했다는 의사는 읽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개체수가 최소 70 이상이니까.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유르파가 아, 짧게 탄식을 흘리며 물었다.

=자기가 말한 죄가 없다는 거, 그 마르테라는 인간이 법을 악용한 거구나.=

“예.”

환인은 미망인 여자 영혼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영혼사님이셨구나……. 놀랐어. 밤손님처럼 움직이는 영혼사님이라니.」

“이 땅의 주인 모르게 알아봐야 할 일이 있어 부득이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

“…….”

환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여자 영혼이 한탄을 끄집어내지 않는 데서 절대 가볍지 않은 내막이 있음을 직감했다.

자신이 말을 걸지 않으면 여자 영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

“제 이름은 환인입니다. 저 멀리 중부 올조트의 호수에서 여정을 시작해 웨이포드와 파르히스트를 지나 여기에 도착했지요. 귀부인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후후. 죽은 사람에게 귀부인이라는 말은 분에 넘치는걸. 그냥 시더라고 불러줘.」

뒤가 살짝 비쳐보이는 여자 영혼, 시더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더 묻지 말아 달라는 진한 슬픔이 묻어나는 표정.

여기서 물러날 거면 찾아오지도 않았다. 환인은 시더의 곁에 서서 팔짱을 끼고 건너편 강가의 공동묘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시더. 이 마을에서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혼이 80명 이상입니다. 그리고 이 언덕 위의 호화로운 저택에는 고족 한 명만 살고 있더군요. 이 이상한 상황에 영혼사인 제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위에 집에 사는 아이들은 관계없어. 오히려 피해자니까.」

“…….”

「이 일은 영혼사님이랑 관계없는 일이야. 그러니 그냥 지나가길 바라. 영혼사님을 생각해서 하는 조언이야.」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군요.”

강제력을 써서 진실을 말하게 한다면 간단히 해결되지만, 어둠의 정령 건이 있다 보니 강제력을 남발하는 것도 어떨까 싶은 환인이다.

시더의 복장을 살펴본다.

색감은 알 수 없지만 복식에서 약간 동양의 색채가 느껴지는 옷차림은 흔히 볼 수 없는 부류.

다른 다섯 영혼들과 비교해봐도 외모에서부터 말빈=루브이주와 관계된 인물이라는 게 느껴진다. 더욱이 저택에서 사는 사람을 보호하는 듯한 발언까지.

만약 그 말빈과 친인척이고, 지금 보여주는 태도가 자신의 짐작대로라면 다른 영혼을 일일이 찾아다닐 이유는 없어진다.

강제력을 쓰는 건 최후의 최후로 미뤄둔 환인은 시더의 앞으로 세 걸음 걸어 나간 뒤 품에서 파르히스트 성주의 백금 징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시더를 응시하며 손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아? 그건 파르히스트 백곰의 표식……. 설마 영혼사님의 후견인이 펜리 후스티오님이셨어?」

“알고 계시군요. 그럼 이것도 아시겠습니다.”

이번에는 시두르의 루비 브로치를 꺼내 보여주자 시더의 눈이 큼지막해지며 두 다리를 땅에 내딛는다.

그 태도의 변화에 환인은 약간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영혼에게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슬픔에 잠겨있는 당신이나 살해당한 원한으로 구천을 헤매는 듯한 분들에게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니 펜리 성주님께 연통을 하나 넣을까 합니다. 이 마을에 수상한 살인 사건이 대규모로 벌어졌으며 그건 루브이주 가문이 관계되어있는 듯 하다고 말입니다.”

「그, 그래서는 안 돼…!」

날아오다시피 몸을 던지며 환인이 쥐고 있는 백금 징표와 루비 브로치에 손을 올리는 시더. 눈물과 함께 간곡한 표정을 드러내며 애원한다.

「진짜… 그래서는 안 돼……. 영혼사님도 위험해질 게 틀림없어. 그래서 말 안 하는 거야…….」

자신‘도’. 이 단어 선정에 환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더의 신분, 이토록 대량의 영혼이 발생한 이유, 그럼에도 마을의 분위기는 평범하며 말빈의 태도도 범상한 것.

두 가지 가설이 대두된다.

하나는 권력다툼으로 인한 살육이지만 이쪽일 가능성은 낮다. 이 코딱지만 한 사회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면 마을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절대 형성될 수 없으니까.

‘다른 하나는 보다 높은 신분이 개입한 게임. 이 경우에는 유희라고 하는 게 옳겠지.’

그 대상은 필시 파르히스트의 성주에게 버금가는 신분의 인간일 것이다. 그보다 신분이 낮거나 만만했다면 자신에게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시더가 자신을 걱정한 데서 그녀의 성품은 선한 쪽이며, 덕분에 자신의 상상이 더욱 사실에 근접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환인은 자신의 손을 덮다시피 한 시더의 반투명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시더. 당신은 말빈 루브이주와 어떤 관계입니까.”

숨을 쉬지 못하는 영혼이면서 숨이 가쁜 듯 허덕이던 시더는 시선을 내리깔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 아이는… 내 자식이야……」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겁니까? 어째서 당신을 비롯해 80이 넘는 영혼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는 겁니까.”

「…….」

그 이상은 말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시더의 행동에 환인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반응에서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 갑니다.”

「영혼사님….」

“저는 상급 영혼사입니다. 한 가지만 솔직히 대답해주시면 당신과 말빈이 다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드리겠습니다. 영혼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한차례 크게 동요하는 시더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환인이 물었다.

“마르테라는 이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처음 들어봐.」

역시 가명이었나. 환인은 수첩을 꺼내 마르테라는 이름을 댄 여우 남자의 인상착의와 체격 등을 그린 몽타주를 보여주며 아는 인물이냐고 물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시더의 표정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으니까.

“그 후 시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후환이 두려워서겠지. 사건이 커진다면 가문에 피해가 갈 테니까.”

마르테라는 가명을 사용한 그놈은 호족 가문의 일원일 것이다.

취미는 고문과 살인, 강간 같은 것들일 테지. 카턴 마을에서 혼자 활동한 것을 보면 100% 지능범이며 그것은 오울링에서 저지른 짓에도 통용된다.

아니, 오울링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그놈이 지능범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하지만 무엇일까.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느껴진다.

‘단순한 재미로 고족이 다스리는 마을에서 고족을 포함한 80명을 살해한다고?’

그런 짓은 길레스=벡슬도 안할 것이다.

생각에 잠시 잠겨있던 환인은 안느의 토할 것 같이 역겨워하는 목소리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느는 역겨움, 짜증, 분노, 환멸, 심란함 등을 드러내는 얼굴로 으르릉거렸다.

=최악이야. 유희를 즐기려고 그 먼 카턴 마을까지 가서 그 짓을 저질렀다고?=

=파르히스트 대축제에 참가하는 김에 카턴 마을에까지 간게 아니겠니? 그리고 파르히스트에서 사귄 여자를 그곳에서 살해하기에는 치안이 훌륭하니까 일부러 카턴까지 간 거라던가.=

그럴싸한 추리를 해낸 유르파에게 이실리테와 안느가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는다.

=미궁에는 못 들어가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거라면 왜 마을로 간 거지? 들판에서 일을 해결해도 되는 거 아냐.=

“그놈에게는 이상성욕이 있는 걸로 보인다. 남에게 자신의 여자를 강간시켜서 흥분하는 성욕. 여자를 난도질하고 해체하며 흥분하는 성욕.”

=우웩…….=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하는 안느는 진심으로 역겨워 보였다. 유르파도 검회색이 되어가는 가지런한 눈썹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중얼거린다.

=으응…… 그 마르테라는 쓰레기는 어떤 수를 썼길래 마을에서 80명이나 되는 사람을 살해하고도 사건으로 비화시키지 않은 걸까?=

“시더는 말하지 않았지만 짐작 가는 건 있습니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을 꼽자면 마을의 누군가가 그자에게 작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놈은 마을의 고족까지 싸잡아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사건을 크게 키워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합법적으로 살해한 겁니다.”

=…연좌제였네.=

“예.”

이 세상에는 연좌제가 버젓이 존재한다. 그런 마당에 돈과 힘과 권력이 충분한 호족이 마음먹는다면 별 볼 일 없는 마을의 인구 1/10 정도는 간단히 죽여버릴 수 있겠지.

호족에게 말대꾸? 너 사형.

호족에게 분노를 드러내? 너 사형.

호족을 의심해? 너 사형.

호족을 공격해? 너 사형.

사형. 사형. 사형. 사형. 사형.

오울링의 고족 가문이 한 명을 빼고 다 죽은 이유는 아마도 시더가, 혹은 시더의 남편이 부디 참아달라고 나섰다가 괘씸죄 같은 트집이 잡혀 살해당했을 것으로 본다.

시더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혹독하게 살해당했을 거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봤을 뿐이지만 시더는 성격도 올곧았고 외모 또한 유르파와 비슷할 정도의 미녀였다.

환인은 여자를 해체하는데 흥분하고 살인에 흥분하고 여자가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인간이 마르테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런 인간은 대게 뛰어난 능력을 갖췄거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일수록 비례해서 쾌감을 강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 그자에게 시더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겠지.

생각하던 환인은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에 멈칫했다.

격렬한 쾌감을 이기지 못해 벌벌 떨며 눈물과 침을 흘리며 자지러지는 여자 친구들. 그 모습을 보면서 흥분하는 자신.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자신도 그런 놈으로 변할까 하는 생각에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

시험삼아 그녀들을 해체하는 장면을 떠올려본 환인은 자신도 놀랄만큼 지독한 불쾌감을 느꼈다.

아직은 괜찮은 것 같군.

조심해야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이실리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님.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우선은 내일 말빈을 다시 만나 살해당한 영혼들을 위한 위령제를 제안할 생각이다.”

일단은 영혼부터 정리해야지. 솔직히 말해서 언제 혼재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가급적 빨리 그들을 성불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전이나 그 후에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소문도 수집해 정보를 모아 불확실한 밑그림도 완성해야 하고.

원한을 가진 영혼은 성불시키기 까다롭지만, 소멸 당할래 성불할래 이지선다를 내놓고 너희 복수는 언젠가 내가 꼭 해주겠다고 약속하면 얼마간의 영혼은 성불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성불 못하겠다고 버티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수단을 동원해야 할 테고.

다음 날.

여관 별채를 차지하고 있던 상인들이 오전에 떠나갔다.

여관 주인이 가족을 총동원해 별채를 청소하고 침대 시트도 갈고 부산을 떠는 사이 환인은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밑그림의 빈 곳을 채우기 시작했다.

시더를 통해 마르테 그놈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건 확정했다. 결과를 확인했으니 이제 과정을 채울 차례.

“마을에 텁텁한 분위기가 감돌더군요. 분위기는 평화롭지만, 주민분들의 눈빛에는 불안이 깃들어있는 것 같던데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신지……. 아, 이 술은 제가 사는 겁니다.”

=헐? 으허허. 뭐 이런 걸 다~.=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거요? 외지인인 거 같은데 괜히 마을 헤집어놓을 생각일랑 말고 그냥 가시오.=

“주인장. 여기 술 한 통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돼지 바비큐도 주십시오.”

=뭐가 궁금하시오? 아, 우리가 좀 불안한 거 같다고 했나? 그야 당연하지.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말이야. 웬 정신병자 새끼가…….=

검은색 후드 망토를 쓴 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여관 안의 주당들을 상대로 술과 안주를 시켜주며 마을의 정보를 수집했고.

“귀여운 아이들이구나. 이건 파르히스트의 과자인데 좀 먹어보겠니? ……아저씨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그냥 마을에 있었던 이야기만 조금 해주면 된단다.”

=마을에 큰 난리가 났을 때요? 우웅. 그땐 엄청 무서웠어요. 엄마도 무서워하고 집 밖에서 비명이 엄청 들려서…….=

=나쁜 사람한테 어른들이 많이 죽었어요…….=

=물 위에 뜬 집도 다 없앨 거래요.=

마을을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혹시 몰라 챙겨뒀던 과자를 뿌려 마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응? 바깥의 공동묘지를 보시겠다고?=

=당신, 뭐 흑술사나 어둠술사 같은 건 아니죠?=

“일라일 꽃이 저토록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은 처음 보는지라.”

=뭐 그렇긴 하지. 그런데 자연스럽게 핀 게 아니라 우리가 심어놓은 거라 특별한 건 없을 텐데.=

“하하…….”

=……원칙적으로는 문을 나서면 끝이고 들어올 때 다시 통행세를 받아야 하지만 이번은 봐 드릴게요. 대신 우리 시야에 벗어나지 말고 근처에서 구경해요.=

“고맙습니다.”

남녀 경비병에게 허락받아 공동묘지를 뒤덮은 일라일 군락을 살피는 척, 대화할 이성이 남아있는 영혼을 찾기도 했지만, 죽을 당시의 분노와 공포에 이성이 닳아서 사라졌는지 제대로 된 소통은 불가능했다.

강제력 없이는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었던 것.

‘평온의 파동과 강제력을 쓰면 이야기를 할 수 있을듯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이성을 깨운 뒤 이야기를 들을 것은 없다. 간단한 사전 조사로 전체적인 그림은 완성했으니까.

덕분에 자신의 가설이 다시 한번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많던 영혼을 만들어낸 좆털(마을 사람 발언)만도 못한 씹새끼(마을 사람 발언)들은 어디 높은 신분의 쓰레기(마을사람 발언)이었다는 것.

마을에서 대학살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수상 가옥에 살던 빈민 아이가 마르테와 부딪친 것이 발단이었다는 것.

빈민 아이를 두들겨패고 걷어차는 와중에 달려온 아이의 엄마가 바지 밑단을 붙잡고 제발 살려달라고 울부짖자 수십 은화짜리 옷을 더럽혔다며 재산상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베어 죽인 것.

대낮 마을 도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미처 제대로 된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빈민들이 악을 품고 달려든 것.

그런 자들을 잔인하게 베어 죽여 사태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경비병들이 들이닥친 것.

경비병들이 자신을 범법자 취급하는 것에 신분을 밝힌 쓰레기들은 감히 자신들을 공격한 자들을 거느렸다는 이유로 오울링의 주인인 루브이주 고족 가문, 배경 없고 힘도 없는 주인에게 책임을 지고 배상하라고 요구한 것.

그 배상 요구가 과했기에 반발한 루브이주 가문의 인원을 무슨 무슨 죄라고 하여 동행하던 직업자들을 투입해 루브이주 가문을 제압하고 마을 광장에서 지독한 고문을 시행하고 참살한 것.

이 부분에서 환인은 저번에 들은 이야기와 모순되는 점이 있어 여자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런 게 버젓이 시행될 정도로 호족의 권위와 위세가 막강한 건가. 시민과 주민은 주도의 비호를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호족에게는 서민들의 즉결처분 권한이 있지만 그게 이렇게 마구 살해하고 돌아다녀도 되는 일은 아닐 텐데…… 알려지면 호족들 사이에서도 품위 없다고 천대받을 테고…….=

=주인님이 그… 선민 사상? 이라는 걸 알려주셨잖아요. 많은 호족과 고족이 그런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용병으로 활동할 때도 많이 봤어요. 저게 정말 죽을 죄인가 싶은 걸로 즉결처분하는 호족이요.=

=내가 플뢰족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루크랑족은 좀 극단적인 종족이야. 라드세아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용광로처럼 마구 섞여서 혼돈 속의 질서가 유지되는 거지.=

여자 친구들의 발언, 특히 안느의 발언이 환인에게 와닿는 설명이었다.

혼돈 속의 질서. 악한 인간들만 존재한다면 애초에 국가가 유지될 수도 없을 테니 선과 악이 적절히 섞여 있다는 거겠지.

“엉망진창이군.”

=…….=

=…….=

아무튼, 망종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이 지나갔음에도 마을이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일단 희생자가 대부분 교상 마을의 하층민이라 할 수 있는 섬 동쪽의 나무판자 수상 가옥의 주민들이었다는 것과, 오울링의 주인인 루브이주 가문의 일원이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그 ‘책임’이라는 명목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후자가 특히 중요했다. 마을 주민들의 시선에 루브이주 가문의 행위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마을을 살린 귀족적인 모습이었으니까.

어쨌든 한순간에 마을 인구의 1/10이 증발했지만 큰 혼란은 없었다.

현대에서 1/10의 인구가 없어진다는 것은 멀쩡한 시계에서 톱니바퀴 하나를 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다.

그러나 중세 시대상, 거기다 노동자 대부분이 1차 생산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울링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것이 인력 감소로 수확기 추수에 조금 지장이 생기는 수준.

살해당한 수상가옥의 주민들 대부분이 전문직 종사자가 아닌 단순 노역자였던 점도 한목했다.

가장 큰 문제라면 대규모 살인과 고문 현장을 보게 된 이들이 마음속에 크고적은 PTSD를 앓게 되었다는 점일까.

청소가 끝난 별채로 입주한 환인은 이실리테가 준비한 점심을 들면서 말했다.

“소문 수집은 끝났으니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한 뒤 말빈을 찾아가겠다.”

밑그림은 완성했지만 뭔가 미묘한 점이 느껴지는 것은 여전하다. 이건 말빈에게 정체를 밝힌 뒤 추가적인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해소되겠지.

꿀과 견과류를 뿌린 과일채소 샐러드를 찍어먹던 안느가 흐흥, 기분좋은 콧소리를 내며 감상을 말한다.

=으응. 역시 이슬이 요리가 최고야.=

=여관 주방장 솜씨가 나쁜건 아니었지만……. 비교 대상이 너무 나빴어.=

쿠엣!

여자 친구들과 비상의 이야기에 환인은 아침에 먹은 것을 떠올렸다.

매우 짠 스튜와 염장한 고기인지 미각이 마비될 정도로 짠 고기에 소시지. 부숴서 스튜에 적셔 먹어야 될 수준의 흑빵들.

그게 나쁘지 않았다고?

가리는 음식이나 편식하지 않는 환인이었지만 그 음식은 결코 나쁘지 않다는 말로 표현할 것이 못 됐다. 오죽하면 이실리테가 아침 식사를 따로 장만하려는걸 말린 일을 후회했을까.

차라리 취두부가 낫지.

그 후 두어 시간 휴식을 가진 환인은 말빈=루브이주를 만나기 위해 여자 친구들을 대동하고 저택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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