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35화 (235/813)

〈 235화 〉 229 교상?上 마을 오울링

* * *

망토를 벗어 벽걸이에 걸어놓은 환인은 물결이 아니라 파도치는 거대한 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만약 이 도시가 자신의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곳이라면…….

그렇게 잠시 있다 보니 여자 친구들이 짐가방을 들고 우르르 방으로 들어왔다. 이실리테는 어디 갔는지 안보이고 안느와 유르파 둘 뿐이다.

=도령도령. 옆방 열쇠 줘.=

짊어진 여섯 개의 가방 중 세 개를 내려놓은 안느는 환인에게 열쇠를 건네받은 뒤 유르파가 든 가방도 뺏어 들어 옆방으로 건너가 버린다.

=아으으.=

갑자기 빈손이 된 유르파는 작게 앓는 소릴 내면서 두 개의 침대 중 하나에 뻗어버렸다. 회색 후드 아래로 회색 머리칼이 흘러나와 하얀 침대보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다.

작은 손으로 허릴 콩콩 두드리던 유르파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탈것을 타고 여행다운 여행을 했더니 삭신이 쑤시는 거 같아~.=

“카턴에서 파르히스트로 올 때는 어떻게 온 겁니까.”

=중간까지는 아기 돼지의 마차를 빌려서 타고 왔고 그 뒤에는 부유 빗자루를 타고 날아왔지? 쿠에를 타고 며칠씩 걸려 이동한 건 수십 년 만이야.=

“그렇습니까. 체력 단련을 해두어서 다행이군요.”

=아하하. 안느 아가씨 말대로 하체를 조지지 않았으면 삭신이 쑤시는 게 아니라 골병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네.=

화보 모델처럼 침대에 누운 유르파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는다. 그때 옆방에 가방과 주머니를 모두 내려놓고 돌아온 안느가 후드를 벗으며 탄식을 터트렸다.

=도령, 큰일났어! 방에 욕실이 없는데 어떡하지!?=

=성수포 만들어둔 거 아직 많지 않니? 아니면 물을 떠 와서 몸을 닦아도 되고.=

유르파의 대꾸에 안느는 약간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음… 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데……. 도령은 목욕하고 싶지 않아?=

자신보다 더 목욕을 좋아하는 환인이다. 어쩌면 자신이 바라는 대답을 해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물은 안느는 실망했다.

“상관없다.”

조금 전에 주변을 살필 때 여관 뒤뜰에 우물을 봤다. 자기 전에 머리 감고 몸은 성수포로 닦는 정도면 충분하다.

환인의 대답에 안느는 울상으로 유르파를 덮쳤고, 유르파는 백수십 킬로그램의 압박에 켁 비명을 토해내며 죽는다고 신음을 흘린다.

그 순간 후드 망토를 가지런히 팔에 걸고 방에 들어온 이실리테가 두 명이 침대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보곤 작게 으르렁거렸다.

=먼지투성이 망토를 걸치고 침대에서…….=

흠칫.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망토를 벗는 두 사람. 이실리테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환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여관 주인에게 물어봤는데 별채를 차지한 상인들은 내일 아침에 마을을 떠난다고 해요. 별채 하루 이용료가 35동화라고 하길래 먼저 예약을 걸어놓고 왔는데, 괜찮을까요?=

“대실료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군.”

=네. 하지만 시설은 파르히스트에서 머물렀던 집과 비슷해요. 방이 4개에 주방 하나, 거실 하나, 마굿간과 대형 욕탕이 있어요.=

대형 욕탕이라는 말에 안느의 길고 하얀 귀가 쫑긋하는 것을 본 환인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내일 나가면 바로 들어가지.”

환인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하자 뺨을 살짝 붉히며 좋아하는 이실리테다. 유르파를 뒤에서 껴안는 채 그걸 바라보던 안느는 도령한테만 천사라며 작게 투덜거렸다.

=아무튼 도령. 이제 뭐 할 거야?=

“밤에 공동묘지를 찾아갈 예정이다. 혼자 다녀올 테니 편히 쉬어라.”

서로를 돌아본 안느와 유르파는 고개를 끄덕이곤 옆방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실리테는 넘어가지 않고 성수포를 가져오며 말했다.

=주인님. 몸 닦아드릴게요.=

서서히 노을이 질 무렵 환인의 방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느와 유르파는 노크한 뒤 용무를 먼저 말하는 식이다. 이렇게 문만 두드리지 않는다.

힐끔, 창가 의자에 앉아있는 환인을 쳐다본 이실리테는 허리춤의 단검을 만져서 확인하고 문을 열였다.

‘하녀?’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치마에 하얀 에이프런을 입은 단정한 옷차림의 회색 머리 하녀였다.

메이드복 차림의 여자는 이실리테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울링 마을의 고족이신 루브이주님을 모시는 헬리사라고 합니다. 연락도 없이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이실리테는 환인이 책을 덮고 이쪽을 보는 것을 확인하고 눈앞의 하녀에게 물었다.

=고족님의 하녀분께서 무슨 용무이신가요?=

=주인님께서는 저희 마을을 방문해주신 성직자님과 그 일행분을 저택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하십니다. 부디 시간이 되신다면 만찬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어라 말하려던 이실리테는 환인이 다가오는 소리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헬리사는 앞에 선 타종족의 무직자 남자가 성직자 일행의 리더임을 깨닫고 재차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초대인지라 조금 당혹스럽군요.”

=송구스럽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즐기시기에.=

“…동료들의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초대를 수락하여주시길 바라며, 1층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헬리사는 다시 허리를 숙인 뒤 소리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이실리테가 조금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복장을 보니 방금 그분은 6년의 정식 교육받으신 하녀분이네요.=

“네가 전에 입었던 정식 하녀복과 다르던데.”

남자들이 하녀복에 흥분한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온 이실리테가 자신 앞에서 검은 스커트를 살랑거리던 것을 말하자 뺨을 살짝 붉히며 대답한다.

=정식 하녀 자격증을 딴 하녀 의복은 그 외 하녀복이랑 조금 달라요. 속살을 약간도 보여주지 않는 그 복장이 하녀 자격증을 가진 하녀만 입을 수 있는 하녀복이거든요.=

“일종의 자격증인 셈인가.”

그때 가볍게 차려입은 안느와 유르파가 기다렸다는 듯이 넘어왔다. 문가에 서서 대화를 나눠서인가, 옆방에서 모두 들은 눈치다.

=그런 하녀를 정식으로 고용했다면 꽤 수준 높은 고족이겠네.=

=도령, 뭐 수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어? 음흉하게 보였다던가 꿍꿍이가 느껴졌다던가.=

이실리테를 뒤에서 허리만 살짝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올린 안느가 환인에게 물었다.

“그런 느낌은 없었다.”

=흠. 그러면 식사 초대를 받아들일 거야?=

“안느 널 초대하는 것 같은데 네 생각을 들어보고.”

=도령이 정해. 도령 결정에 따를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하는 안느. 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느와 유르파에게 말했다.

“그럼 예절에 맞을법한 옷을 갈아입고 와라. 유르파도 차려입고 오십시오.”

=응.=

=그럴게~.=

파르히스트 성주가 초대했을 때 입었던 정장을 생각한 환인은 고개를 젓고 평범하지만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든 의복을 걸쳤다.

이실리테도 바지를 벗고 치마 형태의 모험가 복장으로 갈아입었는데 환인은 그녀가 소울파이어의 기사검을 맨 소드 벨트를 차는 걸 물었다.

“그 검은 뭐지.”

=레드릭을 가져가지 못하는 장소가 있을 것 같아서 제 용돈으로 한 자루를 챙긴 거예요. 아무 무기가 없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부산물 장비를 처분할 때 미리 한 자루 빼서 용돈으로 대금을 채워 넣고 수리했다는 이야기.

“말했으면 한 자루를 챙겨주었을 텐데.”

=그, 무기로 쓸 게 아니라 보여주기식 겉치레용이라서 그랬어요…….=

겉치레용이라고 해도 소울파이어의 기사검은 뛰어난 무기다.

애초에 기사검이라는 분류 자체가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사용하는 장검과 대검 사이, 한손과 양손 모두 사용하는 것을 가정해 제작하는 무기이며,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이어서 기사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다 보니 소재도 비싼 합금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외관도 미려하게 제작한, 실질적으로 마도기를 제외한 일반 무기 중에서는 최고가를 달린다.

수십 킬로그램의 통짜 철을 사용한 수 미터짜리 레드릭과 비슷하게 50은화나 하는 것이다.

수리비를 물어본 환인은 기사검의 가격에 수리비까지 포함해 공금에서 은화를 꺼내주고 말했다.

“파티 활동 중에 사용할 물건이라면 공금에서 꺼내쓸 수 있으니 앞으로는 물어보고 행동하도록 해라.”

=네, 주인님.=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안느와 유르파도 넘어왔다.

안느는 호박색에 은실과 견장이 조금 멋있게 부착된 바지 제복을 입었고 유르파는 검은색으로 레이스를 겹겹이 붙여 만든 약간 하늘거리는 느낌의 로브 드레스를 입고 왔다.

특이사항이라면 안느도 허리에 진압봉 비슷한 손잡이 둔기를 달고 있는 점이다.

“유르파도 허리에 무기로 보이는 스틱 하나는 착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분쟁이 일어날 거라고 보는 거니?=

“그건 아닙니다.”

세상에는 상대를 외모, 생김새가 아니라 몸에 걸친 것을 보고 판단하는 부류도 있다.

오울링의 고족이 그런 부류라면 잘 차려입은 외모는 상당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잘 차려입은 복장은 상대에게 여러 가지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으니 해서 나쁠 일은 없다.

여자 친구들은 환인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무언가 일이 벌어질 듯한 느낌인데…….

환인이 켈틱 돌도끼를 꺼내 허리에 차는 것을 본 여자들은 그 느낌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제각기 나름의 준비를 더 한다.

마지막으로 환인만 회색 후드 망토를 걸치고 여자 친구들과 1층으로 내려가자 저녁 식사를 위해 모여있던 여관의 손님들이 순간 숨을 죽이고 일행을 쳐다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이런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고등급의 모험가였기 때문.

=우왓. 언니, 저기 중간에 여자 둘 엄청 예뻐!=

=그러게. 헬리사 님보다 더 예쁜거 같지 않아?=

외모에 신경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튼, 여관 주인에게 5동화를 건네며 비상과 쿠에들의 식사를 풍성하게 부탁한다고 하자 여관 주인이 긴장한 얼굴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여관을 나오자 입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헬리사가 허리를 꾸벅 숙인다.

“저희 일행은 네 명입니다.”

=네. 이쪽입니다.=

헬리사는 말이 이끄는 마차로 일행을 안내했고,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역시 섬의 1/5을 차지하는 북쪽 언덕이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환인은 언덕길 중간에 사용인의 집인지 작은 집 서너 채와 그 사이로 등대처럼 우뚝 선 감시탑을 보게 되었다.

꼭대기 층에 환히 켜진 불빛과 불빛 너머로 어른거리는 사람 그림자.

“…….”

꽤 넓은 언덕 꼭대기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린 환인 일행은 방만 16개가 넘어 보이는 2층짜리 바로크 양식 저택을 목격했다.

잘 가꿔진 나무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저택. 작지만 동상까지 집 앞에 세워진 제대로 된 저택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 노을에 새빨갛게 물든 오울링의 전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위치로 따지나 집의 수준으로 따지나 명불허전 이 세상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고족의 주거지다.

헬리사를 따라 포장된 돌길로 올라선 환인은 안주머니에 넣어둔 파르히스트 성주의 백금 징표를 만지작거렸다.

이 징표를 쓰면 어지간해서는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립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특정 고위 호족의 호의를 받고 있다는 티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막말로 파르히스트 성주와 적대 관계나 정치적 라이벌인 성주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러나 이 마을이 보복 리스트 2위(1위는 자신을 소환한 인간, 혹은 집단)에 당당히 랭크된 인간과 관련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결정을 망설이게 한다.

그때였다.

“……?”

환인의 시야에 영혼 하나가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남서쪽 벼랑으로 걸어가는 것이 들어왔다.

=…손님?=

뒤에서 부르는 헬리사를 무시하고 그 영혼을 따라간다.

저쪽에서는 안 보였는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영혼은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환인은 작은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가 한 단 아래에 툭 튀어나온 작은 정원 같은 것을 발견했다.

아니, 정원이 아니라 묘지였다.

가족묘처럼 납골당 형식으로 되어있는 묘. 그리고 그 주변에 모여있는 열두 명의 영혼들.

“…….”

고개를 든 환인은 건너가야 할 강변 쪽으로 시선을 들며 영혼 시야를 켰다.

약 700여 미터 떨어진 강변, 적지 않은 논밭이 펼쳐진 건너편의 한곳에 또 다른 공동묘지가 있고 거기에도 어림잡아 마흔에 가까운 영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령. 무슨 일이야?=

가까이 다가온 안느를 돌아보자 그녀의 등 뒤 저쪽에서 유르파와 이실리테가 헬리사를 붙잡고 이것저것 묻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헬리사가 이쪽으로 못 오게끔 붙잡고 있는 모습.

“영혼이 많군.”

=많아? 얼마나?=

“우리가 들어온 관문 쪽 공동묘지에 서른 가량. 바로 밑 묘지에 열둘. 저 건너편 강변 공동묘지에 마흔가량.”

총합 팔십이 넘는 숫자에 안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정도 마을이면 인구가 800명이 채 안 될 거야. 그런데 인구의 10%나 되는 영혼이 있다고?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감정 없이 작게 웃은 환인이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대부분 살해당한 영혼으로 보인다.”

=……미친.=

눈을 감았던 안느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도령, 그냥 뜨자. 식량도 20일분은 더 있으니까 다음 촌락이든 마을이든 도착할 정도는 충분해.=

“…….”

=그정도 영혼이면 이 마을에 뭔가 있다는 뜻이야. 저기 집으로 돌아가는 마을 사람들 표정 보여? 얼굴에 그늘 없이 다들 평화스러워. 마을 주민들이 모르는 일이 벌어진다는 거,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야.=

“아니면 마을 구성원 모두가 한패일 수 있겠지.”

=아~ 그건 심각한 쪽이라 일부러 말 안 한 건데. 아무튼 고족이 얽혀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응? 도려엉.=

환인은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들어가지.”

아~ 진짜. 안느는 답답해서 속으로 짜증을 부렸다.

이 남자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나? 아무리 신의 기술을 지녔어도 모든 상황에 완벽하게 대처하기는 힘들 텐데 자기가 무슨 드래곤 통뼈도 아니고.

콱 기절 주문을 걸어버린 뒤에 그냥 끌고 가버릴까? 아니 위상류 때문에 기절도 안 통할 텐데 그냥 뒷목을 때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

“일단 짐작 가는 것은 있으니 날 믿어다오. 무모한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안느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영문을 몰라 우물쭈물하는 헬리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오렌지색으로 물든 하늘과 강, 그리고 마을이 무척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졌습니다.”

실제로도 해가 지평선으로 넘어가며 바다 같은 강, 그리고 낮은 언덕이 반복되는 초록색 땅과 양떼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이 노랗게 덧칠된 경치는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이 정도로 선명한 노을빛은 1년에 몇 되지 않으니까요. 손님께서 놀라신 것도 이해합니다.=

헬리사는 드러나지 않게 안도하며 환인 일행을 저택으로 안내했다.

저택 내부는 웨이포드에서 머물렀던 호텔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환인의 여자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저택 내부를 대충 훑었다.

내부 인테리어에 놀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환인을 지키기 위해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다.

지구인인 환인은 당연하고 이실리테도 환인과 함께 다니며 화려한 인테리어는 충분히 보았다. 안느는 애초에 파르히스트의 5성급 호텔에서 장기 투숙할 정도의 부자이고 유르파도 재산만큼은 안느에게 뒤지지 않는다.

수많은 마도구 램프, 마도구 샹들리에가 저택 내부를 대낮처럼 밝히고 커다란 유리창이 노을지는 바깥 풍경을 담고 있음에도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헬리사는 그런 환인 일행을 보며 눈빛이 살짝 변했다.

서쪽 관문의 경비병이 아름다운 플뢰 6급 성직자가 찾아왔다고 보고했고, 호기심이 생긴 주인님이 그들을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

그리고 그들이 투숙했다는 여관을 찾아갔는데, 헬리사는 그때부터 연신 놀라고 있었다.

파티의 구성도, 파티 멤버의 외모도, 복식과 장비도, 능력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같은 여자도 반해버릴 만큼 아름다운 여자들을 거느린 게 무직자인 남자라는 것이었다.

묘하게 기품있고 세련된 복장과 행동거지. 품위 있는 말투. 호화로움에 익숙한 듯한 모습까지.

=응접실로 안내해드리고자 합니다. 그전에 편안한 휴식을 위해 무기를 맡아드리고자 하니…….=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행의 무기는 실기 사용의 의미보다 예식의 의미가 강한 장비이니까요.”

헬리사는 남자의 대답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남자의 외모와 분위기 탓도 있지만, 분명 무기를 맡아놓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당혹스러운 이유를 핑계로 무기의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손님들이 무기를 착용한 채 주인님을 만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름 정당한 이유…로 보일 만큼 예식적인 의미가 강해 보이는 무기를 강제로 받아 갈 수도 없는 상황.

손님이 거부하였음에도 재차 요구하는 것은 결례다. 하지만 무기를 지니게 둘 수도 없는 것이 이쪽의 사정.

저택의 수석 하녀장인 헬리사가 당황에 빠졌을 때 그녀를 구해준 것은 저택의 주인이었다.

=헬리사. 되었으니 만찬 준비에 손을 거들어주겠나. 자네가 빠지니 준비가 자꾸만 느려지는군.=

=예, 주인님.=

살짝 부끄러워하면서 1층 복도로 사라져가는 헬리사를 짧게 바라본 환인은 2층 층계참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적색 여우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계단을 내려온 남자는 환인의 앞에서 가볍게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초대에 응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제가 교상 마을 오울링을 다스리는 고족, 말빈 루브이주입니다.=

남자는 검은 영혼 여자의 기억에서 본 마르테와 굉장히 닮은 인호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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