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227 오울링으로 가는 길
* * *
다행히 마을은 멀지 않았다.
언덕을 내려간 뒤 강을 따라 3시간 정도 달리다 보니 저 멀리 대교大?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
덩달아 굴곡진 평원 저 멀리 지평선 한켠, 길을 따라 이동하는 일련의 사람들과 상단, 마차 등도 보였다.
그것을 목격하고서야 환인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파르히스트 동문 쪽으로 난 길이 오울링과 연결되어있나 보군.”
즉, 자신들이 나선 남문은 크라버리로 가는 길이었던 것.
환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안느가 살짝 어이없어했다.
=와, 그럼 우린 길도 나지 않은 곳을 뚫은 거였어? 어쩐지 길이 험하더라!=
=좋게 생각하렴. 덕분에 오면서 짐승하고 마수 가죽이랑 뼈하고 고기도 얻을 수 있었잖니? 아이들이랑도 친해질 수 있었고.=
유르파가 웃으며 쿠라의 목을 긁어주자 기분 좋은 듯 쿠에~ 울면서 꽁지깃을 살랑살랑 흔든다.
그 말대로 안느와 유르파는 쿠핀과 쿠라하고 상당한 친밀도를 쌓을 수 있었다.
둘 다 기승 실력이 상당했기에 누군가를 태우고 달리는 걸 좋아하는 쿠에의 습성상 그런 두 명과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
일행이 그러고 있을 때 저 멀리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눈에 힘을 줘서 응시하던 이실리테가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주인님, 다리 위에 집이 있는 게 맞나요?=
“그래. 강 한복판의 섬에도 집이 몇 채 보이는군.”
다리 위에 집이라니?
호기심이 솟은 일행은 타고 있는 쿠에를 재촉해 좀 더 빨리 움직였고, 얼마 안 가 신기함을 감추지 못한 모습으로 다리를 열심히 구경했다.
특이하게도 오울링은 강변 마을이 아니라 교상?上 마을이었던 것.
강기슭에서 시작된 돌 재질의 커다란 다리가 강 한복판의 섬과 이어져 있고, 섬에서 다시 건너편 강기슭까지 다리가 이어져 있는데 그런 다리 위에 집이 2열로 빼곡하게 서있다.
안느가 손을 들어 햇빛을 막으며 중얼거린다.
=신기하네. 다리 위에 집이라니, 누가 저런 걸 생각한 거지?=
=아니 그것보다 태풍이 불거나 폭풍이 몰아치면 다리가 무너질 거 같지 않니……?=
=설마 그렇게 부실하게 지어놓으려고.=
아하하 웃는 안느에게 이실리테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나도 유리 언니랑 동감이야.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잖아. 저런 데서는 불안해서 못 지낼 거 같아.=
=그치? 강기슭에 땅이 험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살고 있다니?=
환인은 여자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다리와 그사이 한강의 밤섬만 한 크기의 섬을 살폈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영혼 시야를 얻은 후로 시력이 좋아졌기에 살펴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리는 바위와 돌을 깎은 뒤 쌓은 것처럼 보였다. 쐐기 모양의 돌을 아치형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 하중을 확실하게 계산했는지 다리 난간 쪽에 집이 빼곡히 줄지어있다.
다리 중간의 섬은 좌우 끄트머리가 솟은 초승달 형태였는데, 각각 언덕에는 감시탑이 세워져 있고 한쪽 언덕에는 저택 같은 것도 얼핏 보인다.
“작은 마을은 아니군.”
파악하기로 다리 위에만 건물이 100여 채 정도다. 섬도 작지 않으니 섬에도 집이 나름 존재하겠지.
섬의 옆에는 수상가옥 같은 것도 떠 있고 다리 끄트머리에는 관문 같은 것도 세워져 있는 데다, 관문 밖으로는 상당한 넓이의 논밭도 있어 어쩌다 보니 사람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 아닌, 본격적인 계획을 통해 세워진 마을이라는 느낌이다.
‘배도 있긴 하지만 상선으로는 안 보이는군.’
수상가옥 근처에 보트나 돛이 하나 달린 나무 요트가 있고 섬 주변에 배를 띄워놓고 고기잡이를 하는 것도 보이지만, 짐을 가득 쌓아서 강을 오가는 배가 없다.
“이런 거대한 강이면 다른 마을이나 촌락이 붙어있을 법도 한데 교역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군.”
지도에 따르면 이 강은 서쪽의 바다까지 수백 킬로미터나 이어져 있다. 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크라버리도 나온다.
수로를 이용한 무역이 크게 발달할 조건인데 왜 상선이 보이지 않는 걸까.
환인의 의문에 다리 위 마을을 쳐다보던 유르파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자기. 전쟁 때문에 일시적으로 교역이 멈췄을 수도 있어.=
“오히려 더 이해가 안됩니다. 전쟁을 치르려면 군이 소비할 군량과 군수품을 확보해야할테고 군사력 확충을 위해 뿌려지는 군비를 생각해보면 상인과 장사꾼들이 더 활발히 움직여야하지 않습니까. 이만한 폭의 강이라면 물자 수송을 위한 거대한 상선의 활용도…….”
이야기를 꺼내던 환인은 눈을 끔뻑이는 여자 친구들의 모습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직업자라는 특수병과가 존재하는 세상인 만큼 니오네브레스의 전쟁은 현대의 전쟁과 양상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도령네 전쟁은…… 학살전이 많은가 봐?=
안느의 질문은 몇 가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부류였다.
“직업자가 존재하지 않아 보통은 머릿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 여기서는 소규모 단기 결전으로 승부를 겨루는 게 보통인가.”
=응. 대체로 영주가 휘하에 지닌 군인하고 직업자들, 용병을 동원해 상대측 병력이랑 싸우지.=
“……이실리테는 용병으로 영지간 전쟁에서 활동했다 했었지.”
=네. 도시 간에 전쟁이 벌어져도 도시의 시민들은 보통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요. 영주는 직속 병력으로만 전쟁을 벌이기 때문에 많이 모여봤자 양측 합쳐서 5천 정도예요.=
“어째서지? 전쟁은 자고로 숫자의 폭력이 전부인 싸움이다. 파르히스트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크라버리의 영주도 징병 중이라고 들었다만.”
=그래서 미친 거지.=
안느의 냉랭한 대꾸에 이실리테도 고개를 끄덕인다.
=중부는 어떨지 모르지만, 남부나 북부에서 그렇게 징병하면 당장 폭동이 일어날 거예요. 도시는 영주의 것이지만 사람들의 목숨까지 영주의 것인 건 아니니까요.=
=중부도 마찬가지란다?=
=그런가요? 크라버리 영주는 정말 정신이 나가버렸나 보네요.=
“음…….”
여자 친구들의 대화에 환인은 위화감을 느꼈다.
니오네브레스의 주민은 자의식이 강한 건가, 아니면 자신이 지구의 지식으로 편견을 가진 건가.
“권력과 힘으로 민중을 핍박하고 억압해 원하는 것을 갈취하는 일은 흔하지 않은 건가. 영주가 폭력을 행사한다면 약자인 영민의 입장에서는 따르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있긴 하지만…… 흐음. 도령의 상식이랑 우리 상식이랑 뭔가 좀 다른 부분이 있는데 막상 설명하려니 입이 안 떨어지네.=
=성주는 성주고 우리는 우리니까…? 힘이라면 우리도 모을 수 있어서……?=
웅얼거리는 이실리테와 어떻게든 설명해보려고 더듬거리는 안느를 환인은 이해해주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실리테도, 안느도 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니까.
그나마 유르파가 지식층이고 공돌이와 흡사한 직업이라 그런지 나름 이해되는 설명을 꺼낸다.
=음~. 그러니까, 도시를 구성하는 건 영주가 아니라 도시민이잖니? 영주 없는 도시는 있을 수 있어도 시민 없는 도시는 있을 수 없으니까, 시민이라 해도 영주한테 꿀리는 건 없어. 그래도 오랫동안 일대를 다스려왔고 자기가 말한 대로 힘은 세니까 따르지만.=
“그러니까…….”
그러나 그것으로도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기에 환인은 강상 도시로 느긋하게 향하며 여자 친구들과 스무고개 하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30분 정도 이야기를 한 뒤에야 이 세상의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인식 구조를 대강 이해하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요약하자면 도시의 주인과 도시 시민의 관계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군.”
=어어. 맞아.=
환인의 지식에 있어 영지와 영민은 귀족인 영주의 소유물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호족, 고족과 시민의 관계는 그보다 가볍고 강제력도 덜한 일종의 계약 관계였다.
그런 임대인과 임차인도 주도의 왕과 교황이라는 테두리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이 짐승신 엠리간.
즉 임대인이 임차인을 함부로 대하면(징병, 징발) 임차인은 ‘좆같은 짓거리 하네!’하고 도시를 떠나버릴 수 있다.
물론 생활 기반이 모두 도시에 있다 보니 떠나기보다는 다른 수단(폭동)을 선택하는 일도 있다.
여기서 도시의 전력 분포를 보자면 약 45%는 성주 휘하 무력집단이 차지한다. 그리고 25%는 도시 내에 존재하는 각종 조합과 클랜, 길드 전력이며 나머지 30%는 시민과 민간 직업자들이다.
유불리를 따지면 당연히 1인 권력 집중 체제인 성주가 가장 강하다. 그만한 힘이 있다면 여러 조직이, 오합지졸이 모인 집단 정도는 힘으로 짓누를 수 있으니까.
실제로 힘으로 법에 저촉되지 않을 만큼 억압하는 영주도 많다. 이런저런 복잡한 인과가 얽혀있지만, 도시가 성장하는데 시민만큼이나 큰 역할을 한 게 영주이기도 하고 힘도, 돈도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제 마음대로 시민의 목숨을 다루는 짓은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주도??의 존재 때문이다.
주도의 힘을 따지자면 성도급 둘, 혹은 셋을 합친 정도지만, 루크랑 족이라면 주도와 그런 주도의 정점에 서 있는 왕을 존경하고 선망한다.
왕이란 곧 짐승신의 대리자이며 짐승신에게 모든 것을 일임받은 하나뿐인 존재이기 때문.
그렇기에 도시에 큰 분란이 발생하면 주도에서 왕의 이름으로 조사관을 파견한다.
파견된 조사관은 상황을 알아본 뒤 영주에게 문제가 있는 폭동이면 영주에게 조정을 권하고 시민들 측이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려 일으키는 난?이라면 시민들에게 중재를 권한다.
이것을 깊이 파고들면 사전 두께의 책자 수십 권이 필요해지는 복잡한 주제가 되니 이것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되돌려서, 결국 크라버리의 성주는 미쳐버렸다고 보는 것이 맞겠군.”
=응. 지금 크라버리 성주가 하려는 짓을 보면 전쟁의 불씨를 시민들에게 번지게 하는 행위니까.=
시민의 숫자, 인구는 중요하다. 국가의 힘이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 제대로 된 논밭 없이는 식량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속물적이지만 자신들의 풍요롭고 화려한 생활은 시민들과 영민들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기에 제대로 된 성주, 영주는 시민들에게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해 힘을 쓴다.
그런 흐름의 정점에 속해있는 것이 주도이며 왕이기에 큰 죄가 있지 않은 한 주도는 대체로 시민의 편이다.
즉, 크라버리의 영주가 전쟁을 위해 징병 중이라는 사실은 여러모로 화약고와 연결된 심지에 불을 붙인 행위나 다름없다. 자기 집의 화약고에 말이다.
=지금쯤 크라버리는 혼돈의 도가니일 거야. 이번 일이 어떻게 해결되더라도 크라버리는 끝이야. 어떻게 주도의 중재가 들어가서 전쟁이 멈추더라도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내려 한 성주를 시민들이 믿겠어?=
일행은 알지 못했지만, 크라버리에서는 이미 영주가 미쳤다며 대탈주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영주는 그런 시민의 이탈을 막기 위해 병력을 동원해 길목을 틀어막고 성문을 닫아 억압하며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잔인하게 살해하면서 공포를 퍼트리고 있었다.
그 소식은 파르히스트 측을 통해 주도에 들어갔고 주도의 성궁??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빠르게 움직이는 중.
“…….”
환인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저 적당한 수준에서 끝났을 문제였다.
파르히스트의 영애는 재수 없이 미궁의 성장통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알려졌을 것이고, 길레스=벡슬은 살인의 욕망을 맘껏 풀고 크라버리로 별일 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두 가지 흔적은 미궁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것이며 크게 화제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제하=메샤도 환인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자신이 크라버리에게 금전적인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을 일이었다.
그랬던 게 환인의 스노우 볼링으로 설산 꼭대기에서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처럼 사태는 급속도로 심각해져 갔다.
이 사태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는 이미 수백 명. 앞으로 그 몇십 배의 사망자가 발생할 예정이다.
전쟁의 불길은 크라버리와 파르히스트 뿐만 아니라 주변의 작은 마을과 촌락에도 번질 것이며 크라버리와 파르히스트 지역이 전쟁의 후여파와 크라버리에서 흘러나온 질 나쁜 난민으로 인해 향후 몇 년은 불안정하고 소란스러울 것이다.
“…….”
환인은 나름 수집한 정보 덕분에 완벽하진 않지만 일련의 흐름과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날 것을 읽었다.
크라버리의 성주는 편협하고 오만하며 시민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극도의 선민사상을 가졌다고 들었다. 그로 인해 크라버리는 도시 전체가 슬럼처럼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분위기에 휩싸인 지 오래인 상황.
당연히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질 나쁜 인간들이 라드세아 중부 전역에서 몰려들어 카르텔을 형성 중이며, 시민들은 그로 인해 고통의 신음을 지르고 있다.
자신의 도시를 그런 꼴로 만드는 성정에 모욕을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은혜는 잊어먹는 전형적인 소인배이자 모리배에다 철면피.
그런 성격과 행동력을 가진 성주가 파르히스트로 보낸 사절단이 입은 창피를 아무렇지 않게 여길까?
환인 자신의 판단대로라면 주도의 개입과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광증을 일으켜 병력을 이끌고 파르히스트를 공격하겠지.’
파르히스트가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면 평원에서 그 미친 군대를 틀어막겠지만, 그마저도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만약 파르히스트 군 측이 실수 한 번이라도 하게 되면 성도가 전장이 될 것이다.
평원에서 잘 틀어막더라도 한 줌의 병력을 놓쳤다간 크라버리 군은 테러리스트가 되어 파르히스트를 습격, 수백에서 수천 명의 사망자를 만들어낼 테니까.
“……흠.”
상상과 예측이 뻗어나가는 것을 적당한 선에서 커트한 환인은 저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논밭과 임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수천, 수만 명이 죽게 생겼지만 환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떤 사람이 산속 마을을 방문했다가 마을 구성원 중 하나인 산적에게 쫓겨 산속 깊은 곳에 들어오게 되었다.
환인은 남을 탓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움직였을 뿐.
그 사람은 살아남아 그곳을 떠났지만, 남아있던 불씨는 주변의 풀과 나무에 옮겨붙었고 이윽고 불길이 크게 일어 산을 뒤덮고 산속 마을까지 덮칠 상황이 되었다.
죄 없는 사람이 무수하게 죽어 나가겠지.
이 경우 누구를 탓해야 할까.
누구의 잘못일까.
환인은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움직였을 뿐.
여자 친구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자신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예측을 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걸 읽었지만, 그는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봤자 운이 좋으면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에 침울해하는 정도.
나쁘면 자신의 비인간적인 면모에 질색하거나 꺼림칙해 할 것이다.
환인은 그녀들이 질문할 여지를 일절 주지 않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다리 관문으로 향했다.
“…….”
힐끔, 북서쪽 하늘을 보았지만 더 이상 따라오는 조인족은 없었다.
* * * *
하얀색 모피가 특징인 백곰 남자, 파르히스트의 성주 펜리=후스티오는 조금 전 올라온 보고서를 차분히 응시하다가 내려놓았다.
그 청년, 내심 사윗감으로 점찍어놓았던 영혼사 남자.
그가 강변마을 오울링에 도착했다는 보고서는 펜리 성주의 마음에 진득한 아쉬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리도 빨리 떠날 줄이야.’
일부러 오래 머무르라고 미궁세 면제 혜택도 주었는데 설마 한 번 들어갔다 나온 뒤 곧장 떠나버릴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펜리 성주는 창밖을 내다보며 얼마 전 올라온 보고서를 떠올렸다.
단 세 명이 18층까지 도달.
술법 함정의 존재 탓에 16층과 17층을 오가며 5일간 사냥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
미궁에서 보낸 시간은 총 11일.
펜리 성주는 그가 미궁에 들어가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곤란함을 느꼈었다.
영혼사가 미궁에서 사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막을까도 생각해봤지만, 무사단장인 아렐=케드윈의 호언 장담, ‘그의 자질은 자신과 비등하다’는 이야기에 지켜보았다.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는 토너먼트의 우승자와 준우승자가 같은 파티원이며 그중 한 명은 땅신 교단의 6급 성투사였다는 점이 한몫했다.
그리고 11일 뒤, 위상석을 제외 약 30금화 어치의 부산물 수익을 올리고 나왔다는 보고에 펜리 성주는 더욱 큰 욕심이 생겨났었다.
기사단도 5급으로 5명의 조를 짜야 할 만큼 강해진 4계층에서 무려 일주일가량을 머무르며 사냥을 했다는 것, 그것도 6급 1명과 4급 1명으로 그만한 일을 해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증명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틀 정도 쉬게 한 다음 다시 성에 초대하여 이번에는 좀 더 긴밀한 인연을 맺을 생각이었는데….
=…….=
주도에서 날아온 한 장의 서신에 신경 쓰느라 적기를 놓쳐버렸다.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출발 준비를 끝마쳐 성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고, 불러들이기에는 늦었단 생각에 펜리 성주는 실력 있는 기사들에게 장거리 호위를 지시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안전을 핑계로 다시 파르히스트에 데려오라는 명령도 덧붙였는데 설마 가도를 벗어나 이동할 만큼 대범한 행적을 보일 줄이야.
이쪽이 호위를 붙일 걸 예상했던 건가?
펜리 성주는 평화로운 도시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이득과 손해의 계산이 빠르게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역대급으로 칭송받는 무사단장이 스스럼없이 자신과 비슷한 무의 재능이 있다고 선언한 영혼사 청년이다.
역시 포기할 수 없다. 그를 불러들여 친분을 쌓기 어려워졌다면 이쪽이 다가가면 될 일.
눈을 뜬 펜리 성주는 한쪽 벽에 시립 해있는 하녀에게 지시했다.
=둘째를 부르도록.=
청년의 다음 목적지는 아루루라는 꼬마 가이드 소녀에게 입수했다.
마침 자신에게는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아리따운 딸이 셋이나 더 있다.
그중 휘하 호족들은 물론 인근 도시의 영주 가문이 며느리로 탐낼 만큼 견실한 둘째라면 적어도 그 청년과 나쁜 사이는 되지 않을 터.
관두고 유랑을 떠날 생각이 가득한 무사단장도 그 청년이 성에 들어오면 생각을 바꾸겠지.
콰아아앙!!
비록 2급이라지만 엄연한 근접 직업자인 덕분에 염소 인간, 토리오=아필렉스=크라버리가 강하게 내려친 호화로운 책상은 굉음과 함께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특수목을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10금화 가치의 예술품이 장작 쪼가리로 변한 순간이었다.
=이 씨발 똥만 처먹고 사는 스림 같은 새끼들이!!=
감히, 감히! 감히이이!!
크라버리 영주는 광분해서는 박살 난 책상을 걷어차고 의자를 집어던져 책장을 부수고 유려한 도자기 꽃병도 후려쳐 산산이 조각내며 가주 집무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한동안 집무실을 쓰레기통으로 만든 크라버리 영주는 어깨를 크게 들썩이다가 으크으윽, 괴성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크라버리의 시내를 노려보았다.
가로로 갈라진 채 핏발 선 눈알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둡고 음침한 도시가 맺힌다.
끄웨에에엥!!
영주는 그곳에 사는 시민들의 분노와 원한에 찬 시선이 자신의 몸을 꿰뚫는 것을 느끼며 재차 광분 상태에 빠져들어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문 근처에서 가만히 서서 지켜보던 크라버리 기사단의 기사단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옆에 선 그랑고트 술법단의 단장에게 물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하지?=
=끝장이지 생각할게 더 있나요? 아, 목 매달려 죽긴 싫은데.=
멋지게 휜 산양 뿔의 끝에 방울을 매달아 여성스러움을 더한 술법단장이 작게 투덜거렸다.
그 투덜거림이 가슴에 사무친 기사단장은 반쯤 체념한 얼굴로 본심 100%를 입에 담는다.
=튀는 건 어때. 주도의 높으신 분들이 나름의 사정을 봐주지 않을까?=
=진심인가요? 먼저 실행해보신 뒤에 목이 잘린 다음 소감을 전해주세요.=
=……미치겠구만.=
자신은 물론 눈을 내리 깐 채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모습의 술법단장도 대를 이어 크라버리 혈족에게 충성을 바친 가문의 일원이다.
그런 충성의 증거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간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산적이 되는 거고 운이 나쁘면 기사의 충절을 더럽히고 모독한 자신에게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겠다며 방랑 기사들이 개떼처럼 모여들어 자기 대가리를 수훈으로 삼으려 들겠지.
자신에게 남은 길은 미쳐버린 영주님을 따라 정예 중의 정예인 파르히스트 기사단을 향해 부하들과 자살 돌격을 감행하는 것뿐이다.
운 좋게 그 전투에서 살아남고, 미친 영주님도 죽고 혈족도 전부 죽으면 광증이 유전병인 크라버리와 작별할 수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한 장의 구겨진 서신으로 향했다.
[……라수비탄의 왕이자 그분의 신실한 뜻을 따르며 뜻을 대신하는 자로서 명한다. 크라버리의 영주는 즉시 징병을 중단할 것이며 강제 소집한 영민을 해산하고 영민들과 이견 조율을 통해 영지를 안정시켜라. 이를 거부할 시 죄악의 업은 온당히 그대 가문이…….]
굉장히 호화롭고 찬란한 종이에 유려한 글씨로 이루어진 서신.
주도 라수비탄의 성궁에서 내려온 지시서이며 영주를 광분 상태에 빠트린 원흉이다.
기사단장은 서신이 사람이라도 되는 양 노려보며 어금니를 뿌득, 깨물었다.
=……싯팔, 꼴받는구만 진짜.=
친족의 사망 소식에 파르히스트로 보낸 사절단이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천대받았다.
이쪽은 사과조차 받지 못했는데 오히려 친족이 쾌락 살인범이었다며 파르히스트의 영애를 살해했으니 반대로 사과와 배상을 요구당했다.
크라버리 영주는 당연히 모욕받았다 여겨 펄펄 뛰며 전쟁을 부르짖고 징병을 강제했다.
그런 사태의 흐름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기사단장은 술법단장과 함께 몇 주에 걸쳐 영주를 설득해 근래에 겨우 말귀를 알아먹을 만큼 달래놓았었다.
며칠, 단 사흘 정도만 있었어도 징병을 풀 수 있었을 테고 영주님 몰래 적당히 식량을 풀어 영민들을 달래주면 큰 문제 없이 지나쳤을 텐데 저이 씨발 좆같은 서신이 다 망쳐놓았다.
진짜 사흘만. 고작 3일만 늦게 왔었어도 다 잘됐을 텐데……!
아니, 애초에 원흉은 길레스=벡슬 그 개씹꼴받는 정신병자 새끼 때문이다.
지랄할거면 일을 무마할 수 있는 여기서 할 것이지 좆빤다고 파르히스트에 가서 그 개지랄을 해대길 해대나.
=하아….=
=후우….=
자신들에게 남은 미래는 하나뿐임을 직감하고는 진득한 탈력감에 깊은 한숨을 동시에 내쉬는 단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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