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27화 (227/813)

〈 227화 〉 221 성도 파르히스트

* * *

환인은 책자를 엘메스의 앞에 내려놓고 여자 친구들과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유르파가 눈치껏 손가락을 튕겨 차음 결계를 친다.

“안느, 정보 제공으로 얻는 신앙 점수도 있나.”

=응? 어. 제공 정보의 등급에 따라 나뉘지만…… 왜? 혹시 도령이 가진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고 점수로 희귀한 소재나 무기 같은 거 구해보려고?=

“아니. 제공하려는 것은 비상과 관련된 거다.”

책자에 기록된 정보 등급은 5급.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지식은 곧 정보가 된다는 뜻이다.

엘메스가 가져온 책자를 읽고 알아낸 것을 이야기해주자 안느가 ‘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위상석을 먹고 성장하는 게 확실해진다면 가치 있는 정보로 다루어질 거야.=

“몇 점 정도지.”

=잘은 모르지만 열람에 18점이랬잖아. 일단 기록만 되면 그 정도는 될걸?=

“18점이라. 어느 정도 가치인지 알고 있나.”

=1점이 보통 20은화 내외로 평가돼. 교환 가능 품목은 교단에서 다루는 모든 분야, 무기랑 방어구랑 소비품, 각종 부산물과 희귀 금속, 보석 같은 거 전부 포함되고.=

18점이면 3.2금화인가.

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뒤뜰 정원, 따뜻한 햇볕 아래 쿠르티의 몸에 기대고 앉아 졸고 있는 비상이 보인다.

환인이 바라보는 곳을 본 유르파가 물었다.

=자기, 고민하는 게 있는 거 같네?=

“음……. 유르파와 위상류 훈련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하급 정령을 강령한 뒤 천칭으로 쓰는 속성은 그 순도가 꽤 높은 것으로 파악됩니다.”

설명하며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바람 속성의 하급 정령을 강령한 뒤 기술을 썼을 때 비상이 보였던 행동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바람을 쓰자마자 비상이 엉겨 붙으며 흥분하던 모습을 떠올린 안느와 이실리테가 눈을 끔뻑였다.

=응? 그건 그냥 도령이 같은 바람을 써서 좋아했던 거…… 아니었어?=

=저도 그렇게 봤는데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반대의 의견을 내놓자 환인도 긴가민가해졌다.

좋아서 엉겨 붙은 거라고 보기에는 접촉 강도가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는데.

“…….”

뭐, 그렇더라도 상관없다. 그래서 유르파를 데리고 온 거니.

“유르파. 속성의 순도도 측정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응.=

“책에는 녹색 쿠에가 최종 성장을 위해 순도 78wIN 이상의 속성이 필요하다고 되어있었습니다. 유르파가 바람의 순도를 측정해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측정기 가져올게. 잠시만 기다려주렴.=

유르파가 나가는 것을 본 환인은 왼팔을 뒤덮은 빛의 건틀릿에서 바람 속성인 하급 정령의 구슬을 꺼내 자신에게 강령을 펼쳤다.

두쿵­ 심장이 한 번 크게 뛰더니 펌프로 내보내는 것처럼 혈액이 빠르게 몸을 순환하며 체온이 훅훅 올라간다.

처음 강령했을 때는 견디기가 조금 힘들었고 체온 조절도 냉수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계속 강령을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져 지금은 스스로 체온을 좀 더 올릴 수도 있었고 내릴 수도 있게 되었다.

체온을 올리면 신체 능력이 소폭 더 상승하고, 당연히 신체가 받는 데미지도 더 높아진다. 낮추면 반대로 신체 능력이 소폭 감소하고.

천칭을 꺼내 쥐고 정신을 집중하자 척추를 기준으로 좌우를 흐르던 훈기와 한기가 징­ 울리며 천칭을 바람이 휘감기 시작했다.

천칭의 효과인 모든 속성 친화 효과 덕분에 한결 바람을 끌어모으기가 수월하다고 생각하며 바람을 다루고 있으니 그사이 자기 가방을 가져온 유르파가 휴대용 가이거 카운터와 흡사하게 생긴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잠깐만…….=

측정기를 환인이 손바닥 안에 모아놓은 바람에 가져다 대자 전면에 박힌 투명한 유리가 초록빛을 강하게 내뿜는다.

유르파의 회색빛 두 눈에 놀라움이 차올랐다.

=굉장해. 속성 순도가 80 이상이야.=

=헐, 그 정도면 자연력 수준 아니야? 어? 잠깐, 그럼 도령이 말한 게 맞나?=

=둘 다 아닐까? 비상이한테는 순수한 바람도 좋고 주인님도 좋고.=

=아.=

환인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위상석을 먹여 비상이 성장하는 것을 엘메스 신관의 참관 아래 진행해 정보를 제공해서 신앙 점수를 얻을지, 아니면 자신이 매일 꾸준히 바람을 만들어 먹일지.

“……유르파. 4급 위상석에 담긴 속성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습니까.”

=4급 위상석이라면 대충 7nd 정도인데 혹시, 자기의 바람을 비상이에게 주입해주려는 거면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어째서입니까.”

=42Wnd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양이거든. 태풍이 몰아치는 날 하루 동안 부는 바람 정도? 그만한 양을 짧은 시간 내에 충족하려면 7급 이상의 풍술사가 힘을 담은 마정석 수십 개를 모아놓고 여러 가지 소모품과 지원을 받아야만 가능한 정도거든.=

하지만 이번에는 풍술사의 도움을 얻을 수 없고 온전히 자기가 혼자 감당해야 하니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이유라면 괜찮습니다. 그만한 속성량이 한 번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니까요.”

=아~ 그런 거면 상관없겠네.=

“아무튼 먹이는 쪽이라면 4급 위상석이 6개는 더 있어야 하는 군요.”

4급 위상석 하나당 평균 7.5금화다. 바람 속성의 위상석이면 풍술사나 바람술사의 지팡이 재료로 애용되는 부류이기에 싯가에 따라 8~9금화를 오간다.

7개면 최소 56금화. 상당히 부담되는 가격이 아닐 수 없다.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상한이라고 알려진 교육받은 성체 회색 쿠에가 한 마리에 40금화일 정도니까.

“…….”

일단 자신이 매일 꾸준히 바람을 만들어 먹인다면 56금화라는 거금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45금화를 쓴다면 신앙 점수를 얻을 수 있으며, 이 경우 일반적으로 입수하기 어려운 소재도 신앙 점수를 소비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그걸 유르파에게 주면 그녀가 고급 마도구, 마도기를 제작해줄 테지.

=56금화면 그걸로 그냥 사고 남을 정도일걸?=

“그렇습니까.”

유르파의 판단에 환인은 후자, 자신이 바람을 먹여 키우는 것을 선택했다.

엘메스 신관이 책을 가지고 돌아간 뒤 환인은 곧장 뒤뜰로 나가 비상을 불렀다.

“거기 가만히 있어라.”

천칭을 들고 정신을 집중하자 환인의 몸 주변으로 녹색 바람이 일어난다.

“얌전히 있어.”

환인을 휘감은 녹색 바람에 비상이 꽁지깃을 세우고 다가오려 하는 것을 제지한 환인은 천칭을 쥐고 좀 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바람을 조종해 비상의 몸을 감싸게 하자 녹색 바람에 휘감긴 비상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는 것도 잠시.

화아아아악­

비상이 눈을 감고 날개를 활짝 펼치자 녹색 바람이 비상의 몸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음.’

훈기를 소모해 녹색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니 훈기가 1초에 1%씩 줄어든다. 어젯밤 이실리테와 안느를 안으며 100%가까이 채워놓았던 훈기가 순식간에 바닥까지 내려간다.

“오늘은 여기까지.”

예상 이상으로 빨리 줄어드는 훈기의 양에 1분 20초간 바람을 일으켰다가 거두자 깔끔하게 바람을 흡수한 비상이 환인의 몸에 엉겨 붙으며 꾸꾸 울기 시작했다.

꾸우! 꾸엣!

더! 더 줘!

“……이 이상은 무리다.”

오랜만에 훈기가 20%까지 내려가서일까, 아니면 라드세아가 열대 기후라서일까. 한기가 더욱 크게 체감된다.

환인이 조금 떠는 것을 본 유르파가 환인의 손을 잡고는 눈을 크게 뜨더니 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등이며 옆구리를 만져보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자기, 체온이 왜 이렇게 내려간 거니!?=

=어? 우왓 진짜잖아. 몸이 얼음장이야!=

“힘을 많이 쓰면 이렇게 됩니다. 좀 쉬다 보면 회복되니…… 후우, 이실리테. 따뜻한 차 한 잔 부탁하지.”

=네. 바로 내려올게요.=

이 오한을 밀어내는 것은 영기를 흡수하는 게 가장 좋지만, 이실리테와 안느는 어젯밤에 영기를 흡수할 수 있는 양을 전부 흡수했다.

유르파가 남아있지만, 그녀는 아직 관찰 기간.

=도령. 이리와.=

안느는 비상을 양지바른 곳에 앉힌 뒤 환인을 옆구리에 기댈 수 있도록 앉히고 자신이 그런 환인의 오른쪽 옆구리에 안겨들었다. 유르파도 눈을 반짝이고는 환인의 왼쪽 옆구리에 달라붙는다.

그리고 뜨거운 차를 가져온 이실리테에게 환인의 허벅지 위에 앉으라고 종용했다.

=도령 체온을 올리기 위한 거니까 얼른.=

=…….=

이실리테가 수줍어하며 조심스레 환인의 허벅지 위에 앉는다.

그렇게 등 뒤에는 체온이 높은 비상이, 좌우에 유르파와 안느가 붙어있고 무릎 위에는 이실리테가 빨개진 얼굴로 안겨있으니 세 명과 한 마리의 온기에 오한이 팔다리로 퍼질 새도 없이 사라져간다.

스읍­

유자 향이 가득한 차를 마시며 여자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오후에 아루루와 함께 밀짚색 쿠에를 구매하러 외출한 안느와 유르파는 각각 10살의 수컷, 8살의 암컷 밀짚색 쿠에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 두 마리가 부부라는 겁니까.”

=응. 쿠에를 타고 여행 다니는 게 취미인 노부부가 있었는데 더 이상 여행 다닐 수 없게 되어서…… 아직 한창 달릴 나이인데 도시 안에서 늙어가는 건 불쌍하다면서 우리한테 넘겨줬어.=

넘겨줬다니. 돈을 받지 않았다는 뜻인가.

야생 쿠에의 수명은 약 15~20년. 사육하는 쿠에의 수명은 30~50년 가량 된다. 10살이라면 말 그대로 전성기인 나이.

쿠우…….

쿠에….

유르파의 이야기를 들으며 두 마리를 살펴보던 환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어쩐지 두 마리의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특히 머리 위의 볕 같은 깃털이 특징인 수컷은 그 깃털이 뒤로 누울 정도로 기력이 없어 보였다. 계속 한 쪽 방향만 돌아보는 것도 그렇고 무언가 문제가 있는 모습.

안느가 보통 쿠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수컷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좀, 사정이 있는데 일단 이 아이들의 가격은 2금화 밖에 안 치렀어.=

“금화 2닢이라고?”

두 마리 다 덩치도 좋고 밀짚색 깃털도 윤기가 잘 흐르는 데다 잘 먹고 관리도 잘 받은 듯 발톱도, 깃털도 깔끔하기 그지없다.

마리당 6~7금화라고 해도 믿을 법한 우량품인데 두 마리 합쳐서 2금화?

=응. 그 노부부가 새끼일 때부터 키운 아이들이라서 가격보다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랐거든.=

“무슨 부탁이지.”

환인은 걱정하지 않았다. 안느도 그렇고 유르파도 금화 몇 닢에 허무맹랑한 조건을 받아들일 만큼 멍청하지 않으니까.

이실리테는…….

…….

선보고 후조치를 잘 따르니 제멋대로 바보 같은 선택은 하지 않겠지.

유르파가 암컷 쿠에의 목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자기의 여행이나 일정에 문제 될만한 조건은 아니란다? 노부부분들이 내민 조건은 두 개야. 하나는 이 아이들을 또 다른 가족처럼 아껴주길 바라신 것, 다른 하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이들을 더 키우지 못하거나 같이 다니지 못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팔지 말고 초원에 풀어달라는 게 조건이었어.=

환인은 자꾸만 한쪽을 돌아보는 두 마리, 쿠핀과 쿠라에게 다가갔다.

꾸우?

쿠……?

손을 두 마리의 머리로 뻗자 눈을 깜빡이던 두 마리는 고개를 내려 환인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린다.

순둥순둥하기 그지없고 사랑을 많이 받은 듯 사람을 한 치 의심 없이 믿는 모습.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우리의 다리가 되어줄 녀석들이니 아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요. 쿠핀, 쿠라. 앞으로 잘 부탁한다.”

환인의 이야기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비상이 환인의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쿠쿠! 운다.

그러자 비상의 몸에서 약한 바람이 훙­ 불어나와 쿠핀과 쿠라를 한차례 감싼 뒤 사라졌고, 두 마리는 고개를 잠깐 갸웃거리다가 비상의 앞에 머리를 낮추고 꾸우 울었다.

=어머나. 쿠핀이랑 쿠라가 비상이를 우두머리로 인정했나 보네?=

=뭐 그럴만도 하지. 비상이 싸움 실력이면 쿠핀이는 1분도 못 버틸테니까?=

머리를 치켜들고 으스대는 비상의 뒤로 쿠르티가 다가와 한쪽 날개를 펼쳐 비상의 몸에 덮어주자 네 마리의 쿠에가 쿠쿠, 쿠에, 쿠르릉 울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비상 덕분에 두 마리가 빨리 적응하겠군.’

두 마리를 맴도는 우울하고 기력 없는 모습도 어느샌가 사라진 모습. 이러면 큰 문제 없이 모레 출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환인은 안느에게 말했다.

오늘 쿠에들의 저녁은 잘 챙겨 먹이라고.

=주인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음 날 오전, 이실리테가 안느와 유르파를 데리고 여행 준비물의 구매를 위해 집을 비웠다. 짐을 실을 쿠에들도 함께 데리고 나갔다.

그후 외출 준비를 마친 환인도 비상과 함께 집을 나섰다.

목적은 바람의 하급 정령 확보와 어둠의 정령과 소통 시도, 그리고 몇몇 정보 수집.

‘어둠의 정령과 관계 개선이 시급하다.’

그저께 최하급 어둠의 정령을 핸들링할 때 보여준 하급 정령들의 호기심을 생각해보면 관계 개선의 자그마한 희망은 있다.

그리고 하급 바람의 정령이 많이 필요하다.

비상을 성장시키기 위해 어제만 해도 두 번이나 강령을 펼쳤고 아침에도 이실리테와 안느를 품으며 회복된 훈기로 또 강령을 펼쳤었다.

하급 바람의 정령이 다른 속성 정령에 비해 비교적 자주 보이는 점을 고려해도 훈기의 회복을 생각하면 하루 최소 2회, 많으면 3회를 써야 하는 만큼 확보할 수 있는 정령은 다 확보해야 한다.

「어? 어! 머야머야!」

집을 나서자마자 머리 위를 날아가는 하급 바람의 정령을 강제력으로 불러들여 영혼 구슬로 만든 환인은 그림자가 오랫동안 지고 있는 곳을 돌아다니며 하급 어둠의 정령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오전에 3마리의 어둠의 정령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나쁜놈이다!」

「우왕~ 나도 맞을 거야~.」

「친구 때리는 나쁜 놈!」

“…….”

아무래도 악명이 단단히 퍼진 듯 어둠의 정령은 환인을 보자마자 모습을 감추거나 쌩하니 도망쳤다.

도망가는 속도가 빨라 강제력으로 불러들일 틈도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환인은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다시 외출, 어둠의 정령을 찾아다녔지만…….

“……후우.”

이번에는 자신이 도시를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4시간 동안 단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주의하고 있다가 보이는 순간 강제력으로 불러들이려 했는데 아예 보이질 않으니 방도가 없다.

결국 성과는 하급 바람 정령 10마리와 파르히스트 근교의 정보, 크라버리의 동향 조금뿐.

꾸우~.

기운 내라는 듯이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비상을 쓰다듬어준 환인은 조금씩 노을이 지고 있는 붉은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자 깨끗해진 거실이 환인을 반겼다.

2달 가까이 머무느라 이것저것 채워지고 있던 거실이 처음 왔을 때처럼 기본 가구를 제외하곤 다 없어진 것.

=유리 언니. 옷 가방 다 쌌으면 이리 가지고 나와.=

=응~ 잠깐만~.=

그리고 거실 한쪽 여러 종류의 아공간 주머니와 아공간 가방이 쌓여있는 곳에서 안느가 아루루의 도움을 받아 가며 짐을 꾸리고 있었다.

=어. 도령 왔어? 나간 일은…… 잘 안됐나 보네.=

“아무리 생각해도 정령들의 의사소통 기구가 있는 것 같다. 오후에는 하나도 안 보이더군.”

=엉겁결에 한 대 때렸다가 골치 아프게 됐네. 밤에도 나가볼 거야?=

“어둠의 정령은 밤에 동화된 것처럼 안 보여서 찾기 더 어려울 거 같군. 당장은 해결 못 할 일인듯하니 천천히 진행해야겠지.”

안느의 뒤에 서서 꽉 끼는 반바지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하얀 엉덩이골을 감상하던 환인은 쌓여있는 가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팩 형태의 가방 세 개와 주머니 형태의 가방 네 개. 전부 아공간 주머니와 가방이다.

가방 두 개, 주머니 하나는 원래 쓰던 것들인데 나머지는 처음 보는 것들.

“못 본 가방들이군. 유르파가 제작한 건가.”

=응. 필요할 것 같아서 미리 만들어놨대. 이건 유리 언니랑 내 소지품 가방, 이건 도령이랑 이슬이 소지품 가방이고 이건 야영 도구 주머니, 이건 장비 손질 도구 주머니, 이건 애들 먹을 식량 주머니고 이것들은 혹시 마주치는 마수나 짐승, 괴수 부산물을 챙길 주머니랑 장작 주머니야.=

자신의 소지품이래 봤자 옷 몇 벌과 무기 몇 자루 뿐일 텐데, 하고 생각하며 가방을 열어 손을 넣은 환인은 손끝에 부드럽고 작은 천 조각이 닿는 걸 느꼈다.

손수건인가. 그걸 꺼낸 환인은 자기 손에 들린 청초하고 산뜻한 팬티를 보고 잠시 굳었다.

=……도령?=

“…….”

말없이 다시 집어넣은 환인은 주머니를 더 넓게 벌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이실리테의 옷 여러 벌과 다양한 브래지어, 팬티 같은 것들 사이로 자신이 이 세상으로 여행했을 때 입고 있던 정장과 코트 한 벌. 그리고 이런저런 소지품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하나를 꺼내자 안느가 호기심을 비추었다.

=그건 뭐야? 처음 보는 재질인데.=

=신기하게 생겼어요.=

물에 빠지고 액정이 박살 나 사망한 스마트폰을 안느와 아루루에게 넘겨주고 내용물을 마저 살펴본다.

이실리테가 넣어놓은 듯한 여분의 옷과 속옷, 부츠와 망토, 이전에 쓰던 후드 망토와 유리가 박살 난 시계,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분증과 신용카드 등이 들어있는 지갑.

아윅크 3급 호족 징표를 보곤 다시 집어넣는다. 이어서 꺼낸 것은 이엘카타가 보낸 편지 두 장.

“…….”

소문을 듣기로 미궁 사건이 끝난 직후 영혼사 일행이 떠났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아마도 지금쯤 영도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 외에 칸트위의 소개장과 시두르의 루비 브로치, 파르히스트 성주의 백금 징표도 나온다.

환인에게 망가진 스마트폰을 돌려준 안느가 그걸 보고 기막혀했다.

=도령. 어지간하면 백금 징표는 몸에 지니고 다녀. 그거 잃어버렸다간 큰일 난다?=

“……무게 감소 기능이 달린 작은 주머니 제작을 부탁해야겠군.”

용돈이 2금화 넘게 쌓였으니 이걸로 만들어달라고 하면 되겠지.

잠시 후 이실리테가 평소와 비교해도 풍성하고 다양해진 식사가 많은 술과 함께 거실 탁자에 차려졌다.

아루루와 작별을 겸한 파르히스트에서의 쫑파티였다.

=언니들이랑 오빠는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응응. 우리 잊지 말고 다음에 오면 또 도시 안내해 주기다?=

=네엥.=

훌쩍이는 아루루와 그런 아루루를 달래주는 여자 친구들.

환인은 오랜만에 마시는 증류주를 입 안에 흘려 넣으며 창을 돌아보았다.

하얀 달빛 아래 비상과 세 마리의 쿠에가 모여 산처럼 쌓인 과일과 쿠에 특제 사료를 맛있게 먹는게 보인다.

환인의 시선은 그 위의 밤하늘, 새하얀 달로 향했다.

“…….”

이런저런 크고 작은 일이 있었던 파르히스트의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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