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26화 (226/813)

〈 226화 〉 220 성도 파르히스트

* * *

복덕방 여주인과 함께 찾아온 아루루는 환인 일행이 며칠 뒤 떠난다는 이야기에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금색 강아지 귀를 축 늘어트리고 시무룩해진 아루루를 꼭 끌어안은 안느가 히죽 웃으며 아루루의 귀에 속삭였다.

=돈 막 쓰는 물주님들이 떠난다니까 아쉬운 거지?=

=안느 언니도 참. 그럴 리가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환인 님처럼 마음 씀씀이 넓은 분은 좀처럼 없으니까요!=

장난기 가득한 질문에 짐짓 섭섭한 척 말하다 히히 웃으며 급커브를 하는 아루루.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이제 12살 남짓한 아루루에게 이별이 익숙할 리 없으니까.

실제로도 예쁘고 마음씨 착한 오빠, 언니들이 떠난다는 사실에 굉장히 시무룩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러면 환인 일행이 곤란해할거라 생각해서 꾹 참는 것일 뿐.

그러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루루의 표정에 안느가 큰언니처럼 포근한 미소로 아루루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에구구, 우리 아루 진짜 섭섭한가 보네~.=

=언니도 참. 저 어린애 아니거든요!=

=응~ 나한테는 귀염둥이 어린꼬마야~.=

=이잇, 언니이!=

안느의 품속에서 아루루가 발버둥 치지만, 안느는 헤실헤실 웃으며 아루루를 인형처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즈음 복도 안쪽의 문이 열리면서 오후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던 유르파가 손에 목걸이 하나를 들고나왔다.

좀 전까지 목걸이를 제작하고 있었는지 루페 안경을 쓴 유르파가 환인에게 목걸이를 보여주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 부탁한 거 완성했어. 조금 커스텀 해봤는데 한번 봐주렴.=

“회색 위상석으로 만든 목걸이입니까.”

=응응. 약속어를 외워 효과의 발동을 on/off할 수 있도록 기능을 첨가했어. 이름은 마도기­보호, 어떠니?=

목걸이 자체는 은과 구리 합금을 소재로 제작했으며 손바닥 절반만 한 직사각형 부적처럼 생긴 펜던트에는 오리엔탈 드래곤이 새겨져 있었다.

눈여겨볼 점은 여의주로 표현된 2급 회색 위상석과 1급 갈색 위상석.

세공만 봐도 이런 장르에 취향을 가진 사람은 열은화, 천만 원 정도는 가볍게 낼 마음이 드는 품질의 작품이다.

“좋군요.”

=와, 유리 언니는 세공 실력도 대단하네.=

옆에서 아루루를 강아지처럼 끌어안고 구경하던 안느가 감탄하다가 목소리를 높여 이실리테를 부른다.

=이슬아. 잠깐 나와봐. 언니가 네 목걸이 완성했대.=

=벌써?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저녁을 준비하던 이실리테가 앞치마에 손의 물기를 닦으며 나온다. 그리고 환인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에도 범상치 않은 장신구로 보였던 것.

“걸어줄 테니 돌아서 봐라.”

=앗, 네…….=

부끄러워하면서도 뒤돌아서서 포니테일로 묶은 뒷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는 이실리테.

뽀얀 목덜미에 환인이 직접 걸어주자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환인과 유르파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런 훌륭한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유리 언니도 목걸이를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예의 바른 모습에 유르파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전투 시에만 쓴다면 10년은 족히 유지될 테니까 전투가 벌어지면 아끼지 말고 꼭 쓰도록 해. 약속어는 ‘경화’야.=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이실리테가 약속어를 외우자 희미한 회색빛이 이실리테의 하얀 피부를 한 번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이후 주기적으로 회색빛이 작게 반짝인다.

“발동 중인 것을 확인하긴 쉽겠군.”

=그러게. 거기다 아무리 온오프 기능을 넣었다고 해도 10년이나 유지된다니. 장난 아니네.=

온오프 기능이 마도구, 마도기를 오래 쓰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된 지도 오래되었다.

거기에 자체 수명을 늘리기 위해 좀 더 싼 위상석을 하나 더 붙여 온오프 기능의 에너지 충당에 사용하는 방법도 개발된 지 한참이다.

그렇다고 해도 2급 위상석의 위상력 함유량 한계 탓에 수명은 길어봤자 5년 정도. 그걸 2배 이상 늘렸다는 것은 그만큼 유르파의 마도 제작 기술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안느의 찬사에 유르파가 부끄러워하다가도 이게 기회인 양 환인에게 자기 pr을 한다.

=자랑 같아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요즘 들어 실력이 부쩍 오른 게 느껴져. 만드는 마도구나 마도기의 성능이나 수명이 이전에 비해 20% 이상 늘어난 정도?=

=오? 갑자기 왜 실력이 늘어난 건데?=

=자기를 만나기 전에는 조금, 실력이 정체된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자기를 만난 뒤로 뭐라고 해야 할까…… 한 꺼풀 벗은 느낌이라고 하면 어울리려나.=

그 대답에 안느가 으흐흐~ 웃으며 원피스의 얇은 안감 탓에 드러나는 몸매 이곳저곳을 훑는다.

=으흐흐흐. 어디가 한 꺼풀 벗겨졌길래 실력이 오른걸까아~?=

=……안느 아가씨는 정말 천사의 탈을 쓴 변태 아재 같아.=

외모는 여신이 강림한 것처럼 아름답고 청순하기 짝이 없는 플뢰인데 속에는 무슨 중년 대머리가 들어가 있는 것 같으니 원.

급기야 아루루를 놓아주고 유르파를 뒤에서 끌어안은 안느가 유르파의 골짜기를 더듬으며 =여기? 여기 콩껍질이 벗겨진 거야?= 변태처럼 속삭인다.

그에 유르파가 질색하며 버둥거리지만, 비술사의 평범한 신체 능력으로 6급이나 되는 안느의 손아귀에서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환인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얼굴을 붉히는 이실리테.

유르파에게 들러붙어 얼굴값 못하고 으흐흐 웃으며 그녀의 큰 젖무덤을 주물럭거리는 안느.

그런 안느의 손길에 몸서리치는 유르파.

소파에 앉아 세 여자를 구경하던 환인은 가까스로 안느의 마수에서 탈출해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방으로 도망치는 유르파를 응시했다.

이실리테와 안느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쩌다 그녀를 동료로 받아들이게 됐는데, 이제는 그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후회했을거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작게 웃음지은 환인은 수첩을 펴고 이후 예상 지출을 나열해보았다.

1. 술법 함정 교습 비용.

2. 자신의 무기 교체 비용.

3. 이실리테의 대검술 교육 비용.

4. 이실리테의 방어구 교체 비용.

5. 라수비탄에서의 생활 비용.

“…….”

현재 재산은 약 100금화.

여기에 안느와 유르파가 탈 밀짚 쿠에 두 마리를 구입 비용 10금화. 술법 함정술 초급을 익히는데 30금화가 든다고 했으니 이실리테의 방어구를 맞추는데도 30금화를 배정하면 남은 건 대충 30금화.

30금화로 6급이나 7급에게 통하는 무기를 장만할 수 있을까.

‘할 수 있기야 하겠지만 성능은 크게 기대할 수 없겠지.’

명품으로 알려진 마도 무기는 그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안느가 지금 쓰고 있는 천벌의 망치는 마도기 중에서도 4옵션의 최상급품으로 무기 자체도 희귀한 금속을 아낌없이 써서 만든 합금제다. 제값 주고 구매하려면 300금화가 훌쩍 넘어간다.

이실리테의 레드릭도 유르파의 감정에 따르면 소비자가격이 대략 50금화인만큼 30금화로 구한다면 정말 7급 이형종에게 상처만 겨우 낼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이런 저런 제약도 심할테고.

“…….”

뛰어난 무기가 있으면 좋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령과 영혼이 공급되는 곳이라면 영혼술로 싸워도 되니까.

무기 교체는 후순위로 밀어둔 환인은 이런저런 돈벌이 방법과 효율적으로 성불행의 대가를 뜯어낼 방안 등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 * *

거대한 아치형 창밖으로 지평선까지 펼쳐진 도시는 수목과 녹음, 눈부신 햇살과 어우러져 마치 천국 같은 평화로움에 감싸여 있었다.

그러한 풍경을 배경으로 호박색 바탕에 금실과 은실이 아름답게 수 놓여있는 제복 차림의 여자, 르아웬=아기오시스는 호박색의 웅장한 책상 앞에 앉아 서류 검토에 매진하고 있었다.

플뢰 종족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섬섬옥수가 깃펜을 쥐고 하얀 종이 위를 바삐 오갈 때마다 유려한 필체의 글귀가 종이의 빈자리를 채워나간다.

그런 잡티 하나 없는 하얗고 매끈한 손이 멈춘 것은 보좌관이 들어와 알류미늄 클립보드가 붙은 서류판을 내밀었을 때였다.

=아기오시스 예하. 라드세아에서 활동 중인 안느 경의 파티에 대한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이전 보고에서 추가된 점은?=

서류판을 건네받은 르아웬이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료가 한 명 추가되었습니다. 유르파 익스티나. 나이 71세. 흡정족 여성으로 카턴 마을 출신이며 성도 파르히스트에서 30년간 유학 및 부여술사로 활동하다 카턴 마을로 되돌아온 인물입니다.=

=…….=

=성향은 지식욕 7, 안녕 추구 3, 보신 2, 열정 4…….=

보좌관의 성향 나열이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서류판의 서류를 읽던 르아웬은 글귀 하나에 시선이 멈추었다.

=잠깐, 구세의 빛 사이즈 변경 요청? 이건 뭐지?=

=앤 경의 신체가 급격한 변화를 이룬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사이 7급을 달성하고 깨달음을 얻어 신성기사가 되었다는 건가?=

=아닙니다. 믿을 수 없지만 파르히스트 교구의 보고에 따르면 환인이라는 남자와 육체관계로 인한 변화로 추측됩니다.=

=교접한다고 신체 사이즈가 줄어들어? 영혼사와 교접에 그런 부차적인 효과가 있던가?=

=알려진 바로는 없습니다.=

르아웬의 그림 같은 연녹색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진다.

‘난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년은 대체 남정네랑 어떻게 놀아나고 있는 거야?’

입교 동기인 안느가 남자와 1도 인연이 없는 인생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녀였다.

그랬기에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보고에 =땅신님 맙소사.=를 외치고는 그 떡대를 여자 취급한 남자에게 마음속으로 축복까지 빌어주었던 게 얼마 전이었는데 신체 변화라니?

르아웬의 머릿속에 물음표의 폭풍이 몰아친다.

파라라락­ 서류를 넘기던 르아웬의 시선이 그 남자 친구라는 작자의 신상 명세란에 고정되었다.

파르히스트의 성주 혈족 영애 살인 사건에 연루된 남자. 영혼사로 판단되는 남자. 조금…… 아니, 상당히 잘생긴 외모에 상당한 수준의 창술사로 추측되는 남자.

225cm를 넘나드는 근육 거구가 패션모델 체형으로 바뀌는데 이 남자와 연관되어 있다고?

땅신 교단 본부가 안느의 트러블 중재 요청을 수락한 뒤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연루된 이 남자가 영혼사라는 보고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영혼사가 안느가 속한 파티의 리더이며, 후속 보고에서 안느의 남자 친구이기도 하고 성품과 성향도 좋은 편이었다는 점이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이후에 사례라며 50금화가 넘는 거금을 기부하는 것으로 인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런 남자와 섹스해서 신체가 변화했다는 주장이라니.

일반적이고 평범한 루트로 올라온 보고라면 그녀도 내용의 신빙성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올린 파르히스트 교구의 신전장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꽤나 수완가여서 10여 년 뒤면 주도 라수비탄 교구의 교구장이 될 거라 예측하는 인물.

르아웬=아기오시스의 미간이 지그시 좁혀진다.

‘그 말은 즉 진실일 가능성이 커. ……이상해. 한 명에게 이토록 많은 특이사항이 몰릴 수 있는 건가?’

영혼사로서의 능력. 성관계를 맺으면 신체를 조율해주는 능력, 여기에 무기술과 방어술의 달인이라는 관찰 보고도 있고 율캄 마을 이전의 행적이, 과거가 전혀 없다는 것도 그녀의 의문을 부추기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환인이라는 남자에 대한 조사가 올라올수록 의문이 깊어진다.

‘뭐야. 파르히스트 성주 성에 초대받았다고? 그 뒤에 성주 직속 밤그림자 부대가 남자를 암중 호위 중?’

르아웬은 미간을 좁힌 채 턱을 괴고 서류판이 환인인 것처럼 한참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남자에 대한 주시의 눈을 5급으로 올리고 시선을 떼지 말라고 해.=

=예. 그리고 안느 경에게 녹색 쿠에의 생육 과정에 대한 정보 공개 요청이 있었습니다.=

=검토해보고 문제가 없다면 불출을 허용하도록.=

=예.=

허리를 숙인 보좌관이 추기경 집무실을 나가고, 르아웬=아기오시스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패시지의 전경이 녹색 눈동자에 담기며 그녀의 정신을 평온으로 이끈다.

=안실라 이 미친년. 남자 친구가 생기자마자 연락 싹 끊고 남친이랑 물고 빨고 헬렐레하고 있다. 이거지?=

내가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르아웬의 눈에 질투란 이름의 분노가 불타올랐다.

=두고 봐.=

얼굴 맞대고 만나는 날, 그토록 아끼는 남친한테 그동안의 흑역사를 모두 까발려줄 테다.

땅신 교단 본단, 수백만 신앙인 중 오직 다섯 명뿐인 대지의 추기경 중 1인이자 75년 모태솔로 르아웬=아기오시스의 분노에 찬 다짐이었다.

* * * *

다음날.

=흐엣취!=

오전 훈련 일정을 끝마치고 수건으로 땀을 닦던 안느의 재채기에 이실리테가 눈썹을 찡그렸다.

=감기 걸렸으면 질병 치유 빨리 외워.=

주인님한테 옮기지 말고. 그 뜻이 담긴 이야기에 안느가 이상하다는 듯이 코밑을 훔친다.

=감기 아니거든? 갑자기 코가 간지러워져서…… 으헷취힝!=

재채기 할 때의 못생긴 얼굴을 환인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안느는 이번에도 수건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격한 숨결을 토해냈다.

=으어어.=

너무 격렬한 재채기를 해서일까, 머리가 띵하다.

나무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작게 신음을 흘리는 안느를 바라보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안느, 유르파.”

=응?=

=불, 헉… 불렀니~?=

타이트한 옷을 입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스쿼트를 하던 유르파가 환인을 돌아본다.

“오늘 시간나면 쿠에 시장에 가서 쿠에 한 마리씩 구매하십시오. 오늘과 내일 적당히 얼굴 익히고 모레 출발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알았어.=

=그럴게~. 후우, 후우우.=

그후 이실리테가 준비해준 아침을 먹은 뒤 잠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방문객이 찾아왔다.

똑똑똑.

안느는 탁자에 수많은 옷을 올려놓고 이실리테와 유르파 셋이서 살펴보는 중이었기에 환인이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

문을 열 자마다 자신을 보고 안색을 파랗게 물들며 도로 반대편으로 후다닥 도망가는 호박색 신관복의 여자.

유니콘 쪽의 피를 이어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하얀 머리의 땅신 교단 신관, 엘메스가 두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린 채 눈을 글썽거리는 것을 본 환인은 기분이 조금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다.

‘저 체질로 잘도 밖을 돌아다니는군.’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어놓은 채로 안느를 부른다.

“안느. 엘메스 신관이 오셨다.”

=뭐? 헐, 왜 걔가 온 거지.=

안느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소파로 가서 앉으니 문 쪽에서 작은 목소리의 대화가 오가고 잠시 후, 안느의 약간 언짢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유니콘 족이어서 그게 체질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말이야. 그래도 우리 도령을 무슨 오물 덩어리처럼 대놓고 피하면 기분이 안 좋거든?=

=죄, 죄송해요. 저도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환인 님이 나오시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그만……. 정말 죄송해요.=

=…에휴. 그래서, 집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아?=

=네. 환인 님께 사과도 드려야 하니까요…….=

=……들어와.=

안느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엘메스는 이실리테와 유르파의 따끔따끔한 시선을 받으며 환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제 행동에 기분 나쁘셨을 환인 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죄송합니다.=

“…….”

환인은 가타부타 대답 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엘메스를 응시했다.

집종촌이 아닌 여러 종이 함께 생활하는 곳에서는 보편적인 예의를 따르는 게 옳은 행동이다.

설령 자신의 종족 사이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해도 다른 종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일 수 있으니까.

즉, 멀리서 알게 모르게 피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게 혐오스러워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수줍어서인지 짜증 나서 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피하는지 알 방도가 없으니까.

하지만 코앞에서 질색을 드러내며 피하는 것은 예의를 넘어 근본적인 부분을 무시하는 행위다.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

그랬기에 엘메스는 환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에 합당한 성의를 보였다.

=안느 경께서 열람을 요청하신 녹색 쿠에 종의 자료예요. 5등급 자료 요청에 따라 5금화와 18점의 신앙 점수를 받아야 하지만, 사죄의 의미로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18점의 신앙 점수가 무엇인가 싶어 안느를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귓속말로 설명해준다.

=정식 신관이나 사제면 성실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가정에 한 달 1점의 점수를 얻을 수 있어. 이건 교단에서 배포하는 의뢰를 해결해도 올라. 견습은 한 달에 0.2점, 수습은 0.5점, 나 같은 외부 활동하는 자유 성투사는 매월 얻는 신앙 점수는 없지만 의뢰 해결을 통해 얻는 신앙 점수에 1.5배의 가산점을 받아.=

“5등급 자료 열람에 1년 6개월의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건가.”

=그건 몰라. 요청한 자료의 등급에 따라 필요한 신앙 점수에 차이가 있거든. 아무튼 신앙 점수는 중요해. 돈으로 환전할 수 있고 물건으로 교환할 수도 있고 정보 열람에서 진급, 예배, 순례 등 다양한 곳에 쓰이거든.=

즉 5금화와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사죄의 의미로 쓴다는 것이다.

그 정도 성의라면 무례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 환인은 엘메스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공책처럼 깔끔하게 마감된 얇은 책자를 받아 서 들자 엘메스가 이용 방법과 주의사항에 대해 알려준다.

=대서고의 정보는 문 외 불출이 원칙이에요. 그 원칙을 일부 예외로 둘 때는 일정 점수 이상을 지닌 교인의 요청이 있을 때죠. 그 때문에 예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요약하면 세 가지 정도다.

이 책자를 보는 것은 현재 파티 인원만 가능하다는 것.

책자의 내용은 이후 참가하는 파티원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것.

외부에 함부로 자료를 언급하면 열람을 요청한 신도의 신앙 점수가 크게 차감되며 차감될 신앙 점수가 없을 경우 최악에는 파문당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환인 님은 녹색 쿠에를 소유하고 있으신 만큼 그 제약은 약해질 거예요. 그렇지만 만약의 사태라는 것이 있으니 가능한 책자의 내용은 발설하지 않으시길 추천해드려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이 책을 펼치자 엘메스 신관은 환인을 힐끔거리다 슬그머니 이실리테와 유르파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중요한 내용이 아닌 일상의 안부 인사와 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다.

자신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한 작은 의도가 숨어있는 행동이었지만, 충분한 배상을 받았고 저 행동에 트집잡을 것도 없었기에 환인은 책에 집중했다.

[……하여 노을 쿠에의 최종 성장 방식으로 미루어보아 초록 쿠에 또한 최종 성장에 속성의 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14 니오네브레스력 55년 8월_ 야수 학자 콜렌=다그로프=몰조의 발표에 따라 초록 쿠에의 최종 성장에 일정량의 순수한 속성이 필요한 것이 확정됨을 기록한다.

#15 발표 결과에 따라 속성의 순도는 78wIN 이상이 필요함을 기록한다. #16 발표 결과에 따라 속성량은 42Wnd를 요구함을 기록한다.

조사 결과 타 속성에도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 효율은 미천하며 색에 어울리는 속성만이 뛰어난 효율을 보이는 것을 파악하였다. #17 속성량이 충족되는 즉시 최종 성장을 개시한다.

초록 쿠에의 성장은 최종 단계로 끝나지 않는다. 대륙 역사에 성수까지 성장한 초록 쿠에의 목격담이 존재하며…….

……

……

……해당 속성의 위상석을 먹이로 주어 진화를 유도했다는 사례가 존재한다.#24 이 부분은 검증 확인이 필요하다. ……

……

…….]

‘괜찮은 거군.’

엘메스가 가져온 책의 내용을 빠르게 머릿속에 담은 환인은 품 안에 바람 속성의 위상석만 모아놓은 주머니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느, 이실리테, 유르파, 잠시 이리로. 엘메스 신관님은 거실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약 10개월간 환인의 이동 경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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