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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22화 (222/813)

〈 222화 〉 216 성도 파르히스트

* * *

미궁 탐사 결산까지 마치고 나자 살짝 풀어진 분위기에서 다들 한 손에 찻잔을 들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 내 아우라가 조금 더 짙어졌어?=

=응. 이제 원숙한 4급 수준이야. 이번 탐사 정도를 두 번 정도 더하면 너도 5급이 될걸?=

=조금 얼떨떨해. 등급을 올리는 게 이렇게 쉽다니…….=

=너보다 등급이 같거나 높은 이형종을 많이 잡아서 그래.=

=그러려나. 그러면 이제 급수 검증받아야겠네.=

=응? 뭐야, 너 아직도 검정 안 받았어?=

=아직이 아니라 한참 됐어. 2급일 때 받고 그 뒤로 한 번도 안 받았으니까.=

=헐. 그동안 뭐 한 거야. 검증에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안느의 질문에 이실리테는 살짝 곤란함을 느꼈다. 시선을 찻잔으로 내리고 홀짝, 차를 마시며 얼버무린다.

=뭐 이것저것 바쁘기도 했고 딱히 안 받아도 불편한 건 없었으니까?=

=응? 아 맞아. 이슬이 아가씨는 자기 만나기 전에 도적이었다고 했지? 도적이라면 마을에 들를 수가 없었을 테니까 받기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이실리테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아항. ……음? 그러면 도령이랑은 어떻게 만난 거야?=

=그, 그건…….=

결국 기피하고 싶었던 주제가 나와 이실리테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힐끔힐끔,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환인에게 시선이 가는 걸 본 유르파가 어? 하면서 묻는다.

=설마 자기 주머니를 털려다가 도로 털린 거라던가?=

=…….=

흑역사를 정통으로 찌른 유르파의 짐작에 이실리테의 하얀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 옆에서 큭큭 작게 웃음 짓는 환인.

그걸 본 안느가 왁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프하하하하! 진짜 도령 주머니 털려다가 도로 털린 거야?! 대박~!=

=……! 아니야! 주인님이 아니라 그때 주인님을 따라다니던 상인이 있었는데 그 상인을……!=

이실리테는 필사적으로 변명하며 흑역사를 덮으려 했지만, 이야기가 나온 순간 게임은 끝난 거였다.

안느는 이실리테의 변명을 듣지도 않고 깔깔거리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고 유르파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웃음을 참으며 =뭐, 그럴 수도 있지. 응.= 하며 이실리테의 어깨를 토닥거려준다.

결국 이실리테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방으로 도망가버렸고, 유르파마저 웃음을 터트리며 두 여자는 한참 동안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저 주인님바라기인 이슬이가 설마 주인님을 도적질하려다 반대로 털렸다니!

겨우 웃음을 참은 안느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진짜 대단한 인연이네. 도령을 털려고 한 이실리테나 그런 이실리테를 데리고 다니는 도령이나…… 킥킥킥.=

=하지만 그만큼 이슬이 아가씨가 자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대단하다는 증거 아니니? 지금 아가씨를 보면 누가 도적이나 하녀라고 생각하겠어.=

=그건 그런데… 이거 유명한 영웅기나 모험담에 흔히 나오는 클리셰잖아. 도적이나 악당이 주인공의 위대함과 훌륭함에 교화 당해서 누구보다 열정적인 추종자나 동료가 되는 거. 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

두 아가씨의 입술 끝이 다시 씰룩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주제를 바꾸지 않으면 계속 이 이야기가 나올 듯한 분위기. 이실리테가 토라져 다음날 식탁이 부실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환인은 적당한 타이밍에 주제를 환기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대화.”

대화? 생각지도 않던 단어에 유르파와 안느가 서로를 돌아본다.

“나는 지금 고국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안느 너는 플뢰 어를 하고 있고 유르파는 루크랑 어를 하고 있지. 그런데 대화가 통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

어떤 이유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자 안느가 두 팔을 탁자 위에 올리고 살짝 상체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건 신님들이 축복을 내려서 그래. 서로 말이 달라서 대화하지 못해 종족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살육이 일어나니까 그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권능을 베푸신 거지.=

그런 종교적인 해석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를 듣고 싶은데.아니, 이 세상에는 신이라는 게 진짜 실존하는듯하니 그게 정설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안느의 대답에 그런가 보다 하던 환인은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는 유르파를 보자마자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신들이 긍휼하게 여겨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게끔 축복을 내린 거라는 말랑말랑한 이유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

환인이 유르파를 바라보고 있으니 안느도 유르파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유리 언니는 이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으, 응? 아니, 나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

=표정을 보면 전혀 아닌 거 같은데? 으흐흐, 말하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는 나쁜 언니는 내 손이 혼내줄 거야~.=

색을 밝히는 반대머리 중년 남자처럼 느끼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꾸물거리는 안느의 행동에 유르파가 질색하면서 환인의 옆으로 숨는다.

=알았어, 알았어! 말할 테니까 그거 그만해!=

그리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가 환인과 안느를 번갈아 본다. 그리고 한동안 고심하다가 안느에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이건 나도 들은 이야기인 걸 알아줘.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고, 술법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식견과 지식이 쌓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아는 이야기니까.=

=……뭘 이야기하려고 떡밥을 먼저 뿌리는 거야?=

=이건 사대신 교단의 주장이랑 반대되는 이야기라서 그래……. 그리고 안느 아가씨는 땅신님의 성투사잖니.=

“종교인 앞에서 종교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지.”

환인의 어시스트에 유르파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 막 땅신님은 존재하지 않고 이 세상은 거짓으로 이루어진 환상이다, 이 정도 수준만 아니면 토론으로 받아들일……. 뭐야, 진짜 그 정도 수준이야?=

=그럴 리가 있겠니?!=

고민하며 한숨을 내쉰 유르파는 환인을 돌아보곤 ‘자기만 믿을게.’ 눈빛을 보낸 뒤 입을 열었다.

그리고 흘러나온 이야기는 환인에게 있어 ‘신의 축복’ 같은 모호한 이야기보다 훨씬 설득력이 높았지만, 안느의 입장에서는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는지 표정이 굳어버렸다.

=아주 옛날 과거에 한 미치광이가 있었나봐. 신님의 존재는 믿지만 신님이 알려진 것처럼 사람들을 아끼지는 않는다고 주장하던 괴인이었대.=

그 괴인은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그리고 현시대 사람들도 역겨워할 주장을 펼쳤다.

니오네브레스는 신의 사육장이며 사람들은 신들의 먹이­영혼­일 뿐이라는 주장.

무수한 사람의 호통과 지적, 반대에 부딪힌 괴인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으레 그렇듯 근거를 모으는 행위는 점차 가혹해지고 잔혹해져 갔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는 이유는 신님들의 축복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 본연의 능력이라는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해부하기 시작한 거야.=

“통역 현상을 일으키는 내장 기관이 있다고 의심한 거군요.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기관이 몸에 있었고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느가 환인을 돌아보며 어? 소리를 냈다.

=맞아. 그 괴인은 족히 수백 명의 노예를 사서 배를 가르고 가슴을 갈랐어. 그리고 내장 기관을 하나하나 절제하면서 테스트한 거야.=

=…….=

안느의 표정이 적잖게 어두워진다.

=내장을 제거하고 포션을 퍼부어서 살리는 실험이 여러 차례 반복됐어. 와중에 필수적인 장기를 제거당해 즉사하거나 얼마 안 가 죽는 사람도 나오고 그랬대. 그러다 결국 찾아낸 거야. 괴인이 ‘마력 방출 기관’이라고 이름 붙인 기관을 말이야.=

“괴인이라 할만한 사람이군요.”

=으응. 아무튼 제거당한 사람은 불편함 없이 살았대. 위화감은 있지만 생활에는 변화가 없었어. 소통도 문제가 없었지.=

=그러면 괴인의 가설이 틀린 거 아냐? 그 장기가 제거되면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

=맞아. 보통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해.=

환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다르게 생각했다. 일단 자기 경험도 있으니까.

“그 기관은 만능 통역 장치 같은 거군요. 들리는 것을 해석하고, 말하는 것을 번역해서 내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맞아. 10명 중 1명이 그 기관을 가지지 못하면 무리에 변화는 없어. 하지만 2명, 3명으로 늘어나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언어가 다를 경우 서로와 소통할 수 없어지겠죠.”

=어…….=

어떻게 그걸 알고 있냐는 눈으로 돌아보는 안느에게 환인이 담담하게 대답한다.

“나는 다른 세계 사람이니까. 내가 사는 세계는 언어가 다르면 대화를 못 한다. 통역사라는 직업이 있을 정도지.”

=도령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까 우리 신님의 축복을 못 받았을 가능성……. 아니, 아니야.=

안느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유르파가 한 말과 환인이 해준 대답에서 이후에 벌어질 일을 짐작한 것이다.

=응……. 미치광이 괴인은 다른 사람을 더 해부해서 그 장기를 제거했고. 장기를 제거당한 사람들은 서로하고 대화를 못했……다고 적혀있었어. 괴인은 그걸 발표했고, 교단은 그 괴인을 신님의 영광스럽고 위대하며 찬란한 그 업적에 먹칠했다고 발표, 추살해버렸지.=

=…….=

입을 다물어버린 안느의 표정은 이때까지 본 적 없을 만큼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랬기에 유르파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환인을 힐끔거렸고 환인은…….

“안느, 너의 신앙은 이 정도 일에 흔들리는 수준인 건가.”

이대로 두면 유르파와 안느 사이에 서먹함이 발생할 거란 판단을 내리고 개입했다.

자신의 질문 탓에 이렇게 되었으니 수습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환인의 질문에 안느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아니야! 내가 비록 자유 성투사라지만 땅신님을 향한 신앙은 누구보다 굳건하다구!=

“그럼 된 거지.”

=……응?=

“진실은 때때로 쓰디쓴 현실 뒤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사람을 타락으로 유혹하지. 그 타락의 유혹은 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큰 법이다.”

환인의 청산유수에 안느가 눈을 끔뻑이기 시작한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신이 직접 권능을 뿌리고 축복을 내렸다고 성서에 적혀있었나.”

=아, 아니? 선인이 이것은 신의 축복임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라고…….=

“그러면 뻔하지. 신앙이 가득한 이가 진실이 아닌 자신의 사견을 주석으로 달아놓았을 테고 그게 대를 거듭해 내려오며 정사인 것처럼 탈바꿈되어 진실로 굳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환인의 해석에 유르파가 눈을 끔뻑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자기는…… 신학에 대해서도 지식이 있는 거니?=

환인은 작게 미소 짓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종교 관련의 발언과 주관은 언제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주제를 여자 친구와 나눌 생각은 없었기에 환인은 그럴듯한 발언으로 안느의 혼란을 날려버린다.

“제가 살던 세계에도 신은 존재하며 신의 말씀을 담은 경전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아집과 편견이 강해지며 보통은…… 어리석어지지요.”

여러 의미가 담긴 모호한 이야기. 해석하기에 따라서 수십 가지의 뜻으로 바뀌는 이야기에 안느와 유르파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안느, 너는 땅신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땅신님을 믿는 교단을 섬기느냐.”

=당연히 땅신님을 섬기지.=

“그러면 끝나는 이야기군. 너는 땅신님을 섬기는 자유 성투사이며 그 신앙은 올곧고 굳건하다. 거기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나.”

=어…… 없지? 응, 없어.=

“애초에 유르파가 말한게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다. 안느, 비사와 야사를 뒷이야기 취급하는 이유를 너라면 알거라 생각한다.”

=…….=

고개를 작게 끄덕인 안느는 한동안 복잡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다가 으음, 무릎에 손을 올리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난… 이슬이가 뭐 하고 있나 보러 갔다올게.=

뭔가 생각이 많아진 모습으로 걸어가는 안느를 바라보던 유르파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휴…… 고마워, 자기. 자기가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야.=

“안느 성격이라면 최악이라도 이단자라고 공격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조심은 해야겠지요. 그녀도 신실한 종교인이니까요.”

=으응. 명심할게.=

“저도 미안합니다. 이런 민감한 주제인 줄 알았다면 둘이 있을 때 묻던가 했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야~. 자기는 그런 걸 알 수 없는 처지잖니?=

“아무튼 앞으로 이런 민감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저에게 신호를 주십시오. 제가 적당히 자리를 정리할 테니까요.”

=응.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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