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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기담-220화 (220/813)

〈 220화 〉 214 성도 파르히스트

* * *

스르르르­

검은 영혼이 흘러내리는 듯한 벽을 통과해 나오자 강한 햇살이 망막을 강타해 눈을 아프게 만든다.

뀨잇.

=아으, 눈 아파.=

=으응….=

마악 입장하려던 파티와 시선이 마주쳤던 환인은 그들이 비켜주는 길을 따라 동료들과 내려왔다.

10일 넘게 침묵과 고요 속의 미궁을 돌아다니다 나오자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백색소음과 인기척이 살짝 반가운 환인이었다.

미궁 출입 관리병에게 다가간 환인은 절차에 맞춰 퇴장을 신고했고 내부에서 벌어들인 수익의 수수료를 내려 했지만.

“미궁에서 획득한 부산물의 세금은…….”

=아, 환인 님의 미궁세는 면제입니다. 바로 가시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십시오.”

병사에게 목례하고 돌아선 환인의 뒤를 따라붙으며 안느가 이실리테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놈님께서 혜택을 주신 걸까?=

=미쳤어?!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장난기 섞인 이야기에 기겁한 이실리테가 목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안느의 어깨를 탁탁 때린다.

=아야, 농담이야. 농담!=

얘는 해도 될 농담과 해선 안 될 농담도 구분 못하는 건가?

이실리테가 찌릿, 안느를 노려보고 있을 때 환인은 자신 앞에 모여든 꼬마매입상과 중개인들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간 뒤 유르파에게 부산물을 보여주고 그녀가 쓸 것을 챙긴 뒤 부산물 매매소에 방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빠오빠. 잠시만요, 딱 보니 큰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신 것 같은데요! 기껏 몸 무겁게 하고 다니실 필요 없이 저한테 중개를 맡겨주시는 게 어떠세요? 10퍼센트는 더 받을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수수료는 판매금의 5%만 받을게요!=

=형님! 저는 12퍼센트까지 더 받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수수료는 4%!=

=법사님법사님! 인기 없는 부산물이 있으면 저한테 넘겨주세요! 기존 시세에서 3퍼센트만 받고 매입해드려요!=

=저는 2퍼센트만 받을게요!=

꼬마 매입상과 중개인들은 환인을 놓치지 않았다.

척 봐도 숙련된 법사의 느낌이 풀풀 나는 복장. 마악 미궁에서 나왔다곤 믿기지 않는 깔끔한 상태인데다 짐꾼 대신 유색 쿠에를 짐차로 쓰고 있다.

거기다 일행은 무려 토너먼트 우승자와 준우승자!

틀림없이 고가의 부산물과 장비들을 챙기고 나왔을 텐데 잘만하면 단숨에 며칠 분 임금을 벌 기회가 아닌가.

그러나 이들 중개인은 말 그대로 판매를 중개해줄 뿐이다. 거기다 믿을만한가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

꼬마매입상도 마찬가지다. 1은화 짜리 부산물을 98동화, 97동화에 사가주니 시간 낭비하지 않고 빨리 팔아버리는 게 좋아 보이지만, 이들 꼬마매입상의 지갑은 얄팍하기 그지없다.

많이 사가봤자 2은화에서 3은화 정도밖에 안 되며 잘 팔리는 것만 가져가려 하고 잘 팔리지 않는 것은 후려치기도 한다.

쥐가 뜯어 먹은 생선 같은 꼴이 될 생각은 없었기에 환인은 달라붙으려 드는 하루살이들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봐 물러나게 만들었다.

=아깝다……. 하나만 잘 건졌어도 대박인데.=

=녹색 쿠에에다가 저 등에 짊어진 거 거의 다 아공간 주머니랑 가방이잖아. 깊은 데까지 내려갔을 테니까 부산물 뼈다귀 하나만이라도 건졌으면 최소 20동화는 챙겼을 텐데…….=

중개인과 꼬마매입상들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부산물 매입상들이 다가왔다.

=고객님! 무거운 짐을 귀엽고 사랑스러운 쿠에에게 짊어지게 하고 가격 잘 쳐주는 매매소나 상점, 대장간을 찾아다니는 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저 멀리 가실 필요도 없이 저희 남자의 강철집에게 넘겨주십시오! 공시가에서 수수료로 10%만 뗀 가격에 모두 매입하겠습니다!=

=어허 저 상도덕도 없는 새끼! 저희는 9퍼센트만 받겠습니다!=

=법사님, 우리 감옥 미궁의 뼛가루 조합은 이형종 부산물을 위주로……!=

이들은 꼬마 매입상과 다르게 지갑이 두껍고 많은 양의 부산물을 떼가지만, 수수료도 그만큼 더 많이 가져간다. 꼬마들이 1~3%를 가져간다면 이들은 7~10%를 가져가는 식이다.

“…….”

환인은 자신을 둘러싼 십수명의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화를 낼까 고민했다.

아무리 2달 가까이 미궁이 폐쇄되어 수입이 급감했다지만 팔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이렇게 들러붙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

보다 못한 안느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쿠웅!!

=이봐. 우리 도령이 짜증 내는 거 안 보여?=

등에 짊어진 천벌의 망치로 땅을 쿵, 내려찍은 안느의 행동에 매입상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물러난다.

그리고 그자리에 파르히스트 병사들이 다가와 안느를 붙잡았다.

=위력 행위로 기물을 파괴하시면 곤란합니다, 은빛 철벽님.=

=어? 앗, 아니 그게 아니라.=

=바닥도 파르히스트의 재산입니다. 파손한 광장 바닥 수복비 5은화를 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 구치소 내부를 구경하시겠습니까.=

=……낼게요.=

이게 아닌데, 하고 울상을 짓는 안느를 대신해 환인이 파티 공금에서 5은화를 지급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파티를 위해서 나섰다가 생긴 문제였으니까.

시무룩해진 안느를 토닥여준 환인은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이쪽을 바라보는 매입상들을 응시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환인은 이실리테와 안느, 비상을 불렀다.

그리고 짐에서 함정에서 회수한 쇠붙이 및 3계층 이하에서 획득한 휘어진 녹슨 철검, 쪼개진 청동검, 금간 청동방패, 구부러진 구리검, 우겨진 구리 방패, 갈린 철방패, 녹슨 사슬갑옷 세트 등, 무게만 따져도 족히 660kg에 달하는 것을 바닥에 쏟아부었다.

유르파가 가공 소재로 사용하지 않을 법한 것들이며, 집까지 갔다가 매매소를 찾아가는 시간과 수고, 매매소에 팔아서 벌어들일 수익 등을 계산해 여기서 팔아치우는 게 나을 것들이라 판단을 내린 소재다.

=!!=

=…!=

=헛!=

=오오오!=

철재나 금속을 매입하는 매입상들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진다.

“거기 당신.”

=옙, 고객님!=

“피차 서로 성가시게 굴지 맙시다. 혓바닥 놀리다 걸리면 우리는 벽 바깥의 대장간을 찾아가면 그만이니까, 아시겠지요?”

얼핏 나른하지만 왠지 모르게 목덜미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목소리. 지목받은 매입상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옙.= 짧게 대답했다.

“5%.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챙기십시오.”

5%…… 원래라면 8%를 받지만, 담비 머리 남자는 3%를 깨끗하게 단념했다.

이미 2달간 철재 공급이 중단돼 적지 않은 가격이 오른 상태다. 다들 철재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팔리는 것도 금방일 터.

담비 머리 남자는 수레를 끌고 와 무게를 재가며 계산을 마치고 입을 열…….

“철 174kg, 구리 35kg, 청동 24kg. 5%를 제하면 31.3은화군요.”

아니, 가격 상승분까지 꿰차고 있었어? 살짝 대금을 후려치려던 담비 머리 남자는 완벽하게 포기하고 환인이 부른 값을 순순히 치른 다음 수레를 끌고 사라졌다.

“다음.”

“22.4은화.”

“다음.”

“25.1은화.”

“다음.”

“13.2은화.”

철, 구리, 청동을 합쳐 660kg을 처분해 1금화에 가까운 돈을 벌어들인 환인은 이번에는 4계층의 해골 전사들에게서 회수한 녹슨 강철검과 녹슨 강철방패, 녹슨 강철 투구 17세트를 꺼내놓았다.

=어? 이것들은 처음 보는 장비들인데…….=

=뭐야. 똑같은 게 17세트나 되면 이형종이 떨어트리는 장비란 말이잖아.=

=어떻게 된 거지?=

수군거리는 매입상들을 바라보던 환인이 녹슬었지만 형태가 제대로 잡혀있는 강철검을 들어 마스터 토너먼트에 출전했던 어느 전사의 검격을 2차례 흉내를 내보였다.

스악­ 삭!

예리한 파공성, 누가 보아도 제대로 된 검격에 매입상들이 입을 다문다.

“4계층의 해골 전사에게서 노획한 장비입니다. 보다시피 강철이고 녹을 제거한 뒤 재조율만 하면 재판매가 가능한 수준입니다. 검, 방패, 투구 1세트에 20은화 받겠습니다.”

=내가 다 사겠어!!=

=미친, 양심 출타하셨나? 나는 1세트에 21 은화 내겠어요! 내게 팔아요!=

=댁도 마찬가지인 거 같소만? 여기 22은화요!!=

=23 은화!=

=23.5 은화…!!=

안느는 매입상들이 경쟁적으로 가격을 상회 입찰을 해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에 서 있는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도령이 상재도 있었어?=

=상재라기보다는…… 시세를 알아보신 다음에 사람들의 욕망이나 욕심을 찌르신 게 아닐까?=

=그럴지도…….=

결국 세트당 23.92은화, 17세트를 4금화(깨진 투구와 금간 방패가 있어 가격을 조금 낮추었다)에 모두 넘긴 환인은 마지막으로 소울파이어의 낡은 기사검과 철판 갑주 1세트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고대 기사검이잖아! 고대 기사 갑옷도 있어!=

=낡, 낡았는데?=

=아니 저건 멋스럽게 손때가 탄 거야. 상태도 굉장히 좋아.=

=어느 시대지?=

=그보다 저게 미궁에서 출토된 거라면……!=

=이, 이보시오! 그것도 4계층에서 나온 거요?!=

환인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흐릿하게 웃었다.

“파는 건 1세트입니다. 제시받습니다.”

무게 대부분을 차지하던 잡스러운 금속류 660kg과 해골 전사의 무구 17세트를 판매한 금액이 4금화. 그리고 소울파이어의 기사검과 기사갑옷 1벌을 판매한 금액이 1.8금화.

총 5금화 80은화를 챙긴 환인은 일행과 가벼워진 몸으로 미궁을 감싼 백원벽을 빠져나왔다.

‘시기를 잘 맞췄군.’

잡스러운 금속류와 해골 전사의 무구 17세트는 예상한 만큼의 수익이었다.

그러나 소울파이어의 기사검과 기사 갑주 1벌은 예상의 2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었다.

웨이포드에서 구매한 이실리테의 중철 대검과 마수가죽 갑옷 한 벌이 각각 50은화였고 파르히스트에서 교체한 상하의 사슬­철판 갑옷이 37은화였다.

방어구에 들어간 기술력(판금 및 사슬), 무구의 상태(약간 낡음. 고딕 느낌), 소재의 가치(강철에 일부 마수 가죽 보강) 등을 합산해 파르히스트 물가를 반영한 가격이 80은화 정도였는데 설마. 1금화 70은화가 나올 줄이야.

대로변으로 빠져나와 4인승 시중 마차를 호출해 대기하고 있으니 안느가 옆에서 묻는다.

=도령. 소울파이어의 장비는 왜 한 벌만 팔았어? 하나가 1.8금화면 꽤 비싸게 팔린 거 아냐?=

나머지 6벌을 전부 다 파는 게 좋지 않으냐고 묻는 안느에게 환인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꺼내놓은 이유는 시세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유르파에게 보여주고 부여 마법이 가능하다면 술법을 부여한 뒤 더 비싸게 매각할 생각이다.”

=응? 그래? 그럼 그냥 가서 얼마에 살 건지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닌가.=

“시세 정찰하러 온 협잡꾼 취급만 받으면 다행이겠지.”

금속 가격을 알아보러 다니던 중 대장장이의 망치에 얻어맞던 중개인, 꼬마 매입상을 여럿 보았다고 이야기해주자 이실리테와 안느가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저기, 주인님. 그럼 해골 전사의 무기랑 방패도 유리 언니에게 주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유르파가 마도 장비 생산 능력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생산성을 생각해보면 수고가 많이 드는 과정은 이득보다는 손해가 커.”

=아.=

그즈음 환인의 예리해진 감각에 몇몇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걸려들었다. 성주의 초대를 받은 뒤부터 주위를 맴돌던 호위 병력들이다.

‘우리가 미궁에 입장한 뒤로 매일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이래저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지만, 위협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쪽을 지켜주겠다는 의도인 만큼 환인은 그쪽으로 향하는 신경을 거두어들였다.

잠시 후 도착한 두 명의 인마족 여성이 끄는 시중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

가는 길 곳곳에 사람 영혼이 흐느적거리며 배회하는 것이 환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전해져오는 분노, 증오, 슬픔, 괴로움, 안타까움의 감정들.

축제 기간에 모종의 트러블로 살해당하거나 죽은 사람들의 영혼으로 보였다.

‘여자들이 대다수군.’

험한 꼴을 당하고 죽은 거겠지.

환인은 고개를 돌렸다. 살해당한 원한이 가득한 영혼을 구슬려 성불시키는 것은 성가시다는 것을 웨이포드에서 익히 겪었기 때문.

더욱이 성주의 시선이 닿고 있는데 엄한 활동을 할 생각은 없다.

느긋하게 나아가는 시중 마차 안에서 주변을 날아다니는 최하급 영혼을 불러들여 왼팔의 빛 장갑에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영혼 구슬이 채워질수록 빛이 조금씩 강해지는 것을 보다가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영혼 구슬 개수가 2개나 늘었다.’

토너먼트 3주 기간 동안 이실리테와 안느를 열심히 안으며 1개가 더 늘어 54개가 됐었다. 그런데 지금은 56개다.

미궁에서 야영할 때마다 이실리테와 안느를 짧게나마 안아서 늘어난 건가. 하지만 고작 10일 남짓한 시간에 2개나 늘었을 리가 없다.

‘이형종을 잡아도 영혼 구슬 용량이 늘어나는 거군.’

삼림형 미궁 바깥 외곽에 모여 살던 생물들은 이형종이 아니라서 영혼 구슬이 늘지 않았던 건가.

아니, 늘어나는 것이 류히 자매들을 안아 영기를 흡수하는 것과 겹쳤을 수도 있다.

앞자리에서 안느와 나란히 앉아 작은 목소리로 잡담을 나누는 이실리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아우라도 미궁 입장 전보다 조금 더 짙어졌다. 몇 번 더 미궁을 탐사하면 5급이 되지 않을까 싶은 수준.

환인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흔들림이 그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조금씩 풀어주고 있었다.

=흐으으읍­…… 하아아~ 역시 집이 좋아….=

집에 도착하자 안느가 기지개를 쭈우욱 펴다가 나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모습에 비상의 등에서 짐을 내리던 이실리테가 잔소리를 날렸다.

=안느. 짐부터 정리하고 씻어.=

=어어. 성수 목욕도 할 거지?=

=그건 나중에…….=

안느도 이실리테를 도와주는 중에 환인은 유르파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유르파. 접니다.”

덜컹, 우다다다­ 의자가 나가떨어지는 소리와 달려오는 소리.

벌컥.

이어서 문이 활짝 열리더니 회색 맥시 원피스를 입은 유르파가 환한 얼굴로 환인의 품에 답삭 안겨들었다.

=자기 왔구나!=

그녀를 두 팔로 받아 안은 환인은 이어진 유르파의 행동에 피식 작게 웃음을 흘렸다. 강아지처럼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것이다.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풍차처럼 붕붕 돌고 있지 않았을까.

만족할 만큼 환인의 체취를 흡입한 유르파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환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야기한 것보다 며칠 일찍 나왔네?=

“이런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공간 가방도 장작을 다 버려야 했을 만큼 부산물로 가득 채웠고 말입니다. 유르파는 별일 없었습니까.”

=응. 별일 없었어. 그 사람들이 집 근처를 계속 지켜주기도 했고. 자기랑 아가씨들은 어땠어?=

“이쪽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행이라며 환인의 대답에 빙긋 웃은 유르파는 안느와 이실리테에게 다가가서 짐 정리를 돕기 시작한다.

세 명이 붙자 미궁 탐사 뒷정리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유르파는 세 명의 11일 치 빨랫감을 세탁실로 가져가고 안느는 자신과 이실리테의 장구류를 챙겨 비상과 함께 뒷마당으로 나가 손질을 시작했다.

이실리테는…….

=주인님. 욕탕에 뜨거운 물을 채워놨으니 먼저 들어가셔서 피로를 푸세요.=

“그러지.”

환인을 먼저 욕실로 들여보내 놓은 뒤, 세탁물을 갖다 놓고 온 유르파를 끌고 안느를 찾아가서 속닥였다.

=유리 언니, 주인님의 마도기 제작 진척은 어떻게 됐죠?=

=우리가 일찍 나오는 바람에 시간이 좀 촉박하지 않아?=

파르히스트를 뜨면 고급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지니 그사이 어떻게든 자동 방어 마도기를 만들어놓아야 하는 상황.

언제 파르히스트를 뜰지 모르는만큼 빨리 완성시켜야하는데 유르파는 의기양양했다.

=우후후. 걱정 말렴. 혹시 이럴까봐 급행료까지 조금씩 줘가면서 재료는 모두 모아놨거든?=

=오, 그러면?=

=이슬이 아가씨가 준우승 상금 30금화를 더 보태준 덕에 시간을 많이 아꼈어. 마도기는 이제 50%정도 완성했구, 파르히스트를 떠나도 계속 제작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최고의 마도기를 만들어서 자기한테 들려줄 테니까!=

=다행이다. 우리가 일찍 나오는 바람에 유리 언니 계획이 어그러졌으면 어쩌나 했어.=

=힘들지 않았나요? 자동 방어 마도기 제작에 인식 저해용 후드 로브 제작에 파티 공금 활용에…… 할 일이 적지 않았을 텐데.=

이실리테가 걱정하자 유르파가 가슴이 뀽­ 한다는 표정으로 이실리테를 와락 끌어안고 그녀의 뺨에 자기 뺨을 비비적거린다.

=아휴, 우리 이슬이 아가씨는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이 언니가 또 이러네. 이실리테는 스킨십이 많이 고팠던 고양이처럼 달라붙어 오는 유르파에게 덤덤하게 말한다.

=보니까 멀쩡한 거 같네요. 이제 주인님이 욕탕에 들어가셨을 시간이니까 가서 주인님 목욕 시중 좀 들어주세요.=

=응? 정말?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거니?=

=저희는 미궁에서 주인님께 충분히 애정을 받았으니까요.=

=응! 나한테 맡겨주렴! 완벽하게 목욕 시중을 들 테니까!=

후다닥 집안으로 사라지는 유르파를 바라보던 안느는 이실리테의 갑옷을 마저 닦고 기름칠하며 피식거렸다.

=이슬아. 아까 세탁실 창문으로 내가 뭘 봤는지 알아?=

=뭘 봤는데?=

=유리 언니가 도령이 입은 셔츠에 얼굴을 묻고 킁킁 냄새 맡더라.=

=언니는 10일 넘게 주인님을 못 봤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래서 언니한테 주인님 목욕 시중을 부탁한 거야.=

=……아.=

이실리테의 마음 씀씀이에 살짝 감탄한 안느는 이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돗가로 다가간 이실리테가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물통에 담겨있는 물을 퍼올려 뒤집어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욕실 안 쓰고 거기서 씻어?=

=저녁 식사 준비해야 하는데 더러운 몸으로 식당에 들어갈 수 없잖아. 그렇다고 언니 시간을 뺏는 것도 미안하고.=

=으휴.=

고지식하긴. 그냥 잠깐 들어가서 도령한테 알몸 보여주고 자기 존재감도 알리고 그러는 거지.

작게 한숨을 내쉰 안느는 머리를 감기 시작하는 이실리테에게 다가가 등과 팔다리에 비누칠을 도와주었다.

와중에 이실리테의 젖무덤과 꼭지를 만지작거리며 사심을 채우다가 물벼락을 맞은 것은 다른 이야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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