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 213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화들짝 놀란 안느가 재빨리 주머니에 나머지 위상석을 쑤셔 넣고 비상의 부리를 두 손으로 벌린다.
=진짜 삼킨 거야?!=
꾸, 꾸우~
=안돼안돼! 퉤, 해! 퉤 뱉어!=
꾸엣! 퀙!
이 소란에 성수포로 손과 얼굴을 닦고 있던 환인이 고개를 돌렸고 이실리테도 국자를 내려놓고 다가와 물었다.
=비싼 거 삼킨 거야?=
=아, 아니. 1급 위상석이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위상석을 삼켰다니까?!=
=비상이 성격이면 실수로 삼켰다기보단 먹고 싶어서 먹은 걸 텐데.=
=어?=
태연한 이실리테의 반응에 얼이 빠진 안느는 바로 뒤에 다가온 환인을 돌아보곤 찔끔해서 죄인처럼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도, 도령. 미안해. 비상이한테 문제가 생기면 다 내 책임…….=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닌 사고에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고개를 푹 숙이는 안느의 어깨를 토닥여준 환인은 크고 예쁜 눈을 깜빡이는 비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비상도 환인을 바라보다가…… 강아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처럼 슬금슬금 시선을 피한다.
환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딱콩.
뀨엥!
천칭으로 비상의 머리를 두드린 환인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왜 먹었지?”
꾸… 뀨…….
딱콩.
뀨잇!
“안느는 네가 먹어버린 걸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데 너는 안느 탓으로 돌리려는 거냐.”
그러려고 하는 거라면 실망이다. 그런 뜻을 담아 차가운 눈빛을 하자 비상이 다리가 풀린 것처럼 풀썩, 주저앉더니 날개로 머리를 감싸고 꾸뀨, 큐잉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만 끔뻑이는 안느와 이실리테에게 환인이 비상에게 들은 것을 통역해주었다.
“위상석에서 맛있는 냄새가 자꾸 났다는군. 그런 상황에 안느, 네가 손바닥에 위상석을 올려놓으니 본능을 이기지 못해서 부리로 위상석을 가져갔고 네가 손을 뻗는 걸 보며 일부러 삼켰다고 한다.”
=…….=
=어…….=
이실리테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비상에게 나무라는 시선을 보내고 안느는 살짝 당황해서 어버버하다가 손을 들었다.
=비, 비상이가 위상석을 먹어서 어디 아프게 되는 건 다들 걱정 인하는 거야?=
=비상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자기가 먹고 탈 날 것 같은 건 절대 안 먹어.=
“그러니 위상석을 함부로 먹은 게 더 큰 문제지.”
1급 위상석의 가치는 평균 13은화. 이번 미궁 입장의 수익이 40금화로 예상되는 만큼 13은화는 얼마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별것 아닌 게 아니다.
가치가 얼마든 간에 ‘동료들과 함께 미궁에서 이형종을 사냥해 얻은’ 결과물이라는 게 중요하다. 그걸 대화나 상의도 없이 소비해버린 것은 심각하게 표현하자면 횡령에 가까운 범죄인 것.
=그, 그러면 날 혼내줘. 내가 비상이한테 보여주지 않았다면 비상이도 위상석을 먹지 않았을 테니까…….=
얼핏 들어보면 맞는 말이다. 비상이 똑똑하다곤 해도 짐승이니 안느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이건 비상이 평범한 쿠에였을 때의 이야기다.
고개를 숙여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다가 뺨을 살짝 어루만지며 고개를 들게 한다. 그리고 옆머리를 귀 너머로 살짝 넘겨주자 그 부드럽고 상냥한 터치에 안느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다. 따지자면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위상석을 날름 삼킨 이녀석 잘못이지.”
환인의 이야기에 날개로 머리를 가린 채 웅크리고 있던 비상이 움찔한다.
“비상. 고개를 들어라.”
…….
조금 꼬물거리다가 날개 깃털 사이로 환인을 올려보더니 샥, 눈을 가리곤 뀨 작게 운다.
환인은 날개 아래로 손을 넣어 화나지 않았다는 뜻을 담아 머리를 토닥거려주고 머리를 숨기고 있는 날개를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만들자 못 이긴 척 슬그머니 일어나는 비상이다.
그런 비상의 찹쌀떡 같은 볼을 잡고 눈을 마주한 환인이 조용히 말했다.
“초범이기도 하니 이번 일은 넘어가 주마. 하지만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저질렀다간…… 그땐 이번 일을 포함해 크게 혼날 줄 알아라.”
뀨, 뀨우.
“가서 안느한테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도록.”
뀨으.
잘못했어요 하고 환인에게 용서를 빈 비상은 안느한테도 다가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피웠다.
안느도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비상의 머리를 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런 비상과 안느를 바라보던 이실리테도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약간의 우려를 드러냈다.
=쿠에가 위상석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조금 걱정되긴 하네요.=
=으응. 혹시 잘못되면 어쩌지. 억지로 토해내게 해야 하나?=
=딱딱한 보석 같은 거니까 볼일 보면 빠져나오지 않을까?=
여자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위상석 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한 환인은 비상이 뭘 먹었는지 눈치챘다.
“먹은 건 녹색 위상석이군.”
만졌을 때 아주 희미하지만, 피부에 바람이 스쳐 지나가던 것이었음을 기억해낸 환인은 미간을 살짝 좁히고 비상을 응시했다.
환인의 시선에 또 혼나는 건가 싶어 뻣뻣해진 비상이 눈만 도록도록 굴린다.
“비상. 녹색 위상석을 먹은 건 우연이었나, 아니면 골라서 먹은 거냐.”
쿠, 쿠에.
“골라서 먹었다고…….”
바람 속성이 담긴 것으로 짐작되는 위상석이다. 그걸 바람을 다루는 비상이 먹은 것이 우연일까?
팔짱을 낀 환인은 안느의 품에 안긴 건지 안느를 품에 안은 건지 모르는 자세로 있는 비상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쿠에는 보통 10개월에서 1년이면 성체로 자란다고 하지. 비상과 만난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어 가는 중이고 마지막으로 성장한 것도 3개월이 넘었다.”
거기다 비상이 그동안 먹어 치운 식비를 따지면 50은화에 가까운 양.
“이제 그만 성체로 성장해도 될법한데 아직도 그대로라는 것은 다른 원인이 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거기다 평소 이실리테가 챙겨주는 식사, 나와 안느가 주는 간식 외에는 부리를 가져다 대지도 않던 비상이 위상석을 멋대로 삼켰지.”
=어, 도령은 비상이 마지막으로 성장하기 위한 다른 요소가 있고 그게 바람 속성의 위상석이라고 말하는 거야?=
“딱히 위상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바람이겠지.”
최하급 정령을 볼 수 있게 된 뒤로 풍수지리학적인 의미에서 물의 힘이 강한 곳, 불의 힘이 강한 곳, 땅이나 풀의 힘이 강한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환인이다.
그야 그런 장소에 그 속성과 비슷한 색의 정령들이 무더기로 모여있으면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없지.
환인은 위상석 주머니에 손을 넣어 또 다른 녹색 위상석을 꺼내 들었다. 무려 4급, 7금화가 넘는 것으로 이것도 바람 속성의 위상석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위상석을 꺼내 손에 쥐자마자 비상의 눈이 녹색 위상석에 고정되었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비상의 시선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평소 보이는 식탐이 아니라 뭔가 근원적인 욕망이 느껴지는 행동에 이실리테와 안느도 무언가를 느끼곤 작게 탄성을 질렀다.
=도령도령. 그럼 4급 위상석을 먹일 거야?=
“…….”
환인은 위상석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챙겼다.
눈앞에서 위상석이 사라지자 비상이 눈을 깜빡이다가 쿠삐~ 울면서 환인에게 엉겨 붙기 시작한다.
“지금은 줄 수 없다. 위상석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보를 수집한 다음에 결정할 테니 기다려라.”
끄응…….
=녹색 쿠에는 가장 희귀한 쿠에인데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얻을 수 있어도 가치가 높겠어요.=
=어, 걱정 마. 본단에 요청하면 자료를 제공해줄 거야.=
“본단이 그런 것도 알려주나?”
=신님들의 교단은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왔어. 각 본단의 대서고에는 니오네브레스의 역사가 모두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 희귀 쿠에의 생태랑 습성도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 정도인가……. 그럼 부탁하지. 요금이나 대금은 공금에서 제공하겠다.”
=응. 맡겨줘.=
10층의 막다른 방 11개 중 8개가 채워졌을만큼 사람이 많아졌음을 증명하는 걸까.
=안느, 일어나. 주인님 일어나세요.=
꾸우, 꾸웃.
이실리테와 비상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환인은 곧바로 문 앞에 여러 명의 인기척을 느꼈다.
침낭에 들어가 있던 안느도 비상이 부리 끝으로 목덜미를 쿡쿡 누르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킨다.
문에서 쿵!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였다.
덜컹, 쿵. 덜컹덜컹!
잠자리에 들기 전 구부러진 녹슨 철검을 꺼내 걸쇠에 걸어 임시로 잠금장치를 해놓았었다. 문이 흔들리며 그 철검이 걸쇠와 부딪치며 쇳소리를 낸다.
쿵쿵, 쾅 소리와 함께 철판과 리벳으로 보강해놓은 두꺼운 나무 문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씨발, 문이 왜 안 열리는 거야!]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환인의 눈이 급속도로 차가워진다.
들리는 말소리와 억양, 목소리에 깃든 짜증 섞인 감정에 대충 상황을 파악했지만, 맨틀을 뚫고 내려간 기분은 돌아오지 않는다.
환인은 손에 쥐고 있는 천칭을 한 번 보곤 주머니에 넣고 흑창을 꺼내 들었다.
[곰탱이 새끼, 덩치가 아깝다냥. 밥 먹은 거 다 똥으로 내보냈냥? 힘 좀 써봐라냥!]
[아 좀 닥치라고!]
쾅!!
걸쇠가 쨍! 소리와 함께 부서지며 걸쇠에 고정시켜놓은 녹슬고 휘어진 철검이 튕겨 나오는 것을 공중에서 잡아챈다.
그리고 반쯤 부서진 문이 벌컥, 열리며 눈앞에 반신 철갑옷의 인웅족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흑창의 자루로 뻑!! 소리가 날 만큼 목젖을 강하게 찍었다.
=꾸엑!!?=
목이 콱 꺾이며 목젖을 잡고 쓰러지는 인웅족의 멱살을 잡고 팔꿈치로 아래턱을 쾅 후려쳤다.
뇌가 흔들렸는지 인웅족 남자의 눈알이 회까닥 돌아가는 것을 보고 끌어당겨 방 안으로 집어 던지다시피 내동댕이쳤다.
와당탕!
=야, 야긴!?=
인웅족 남자가 삽시간에 제압당하자 뒤에 옹기종기 서있던 고양이와 개, 쥐, 토끼 귀를 한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쥐고 있던 각자의 무기를 치켜든 순간.
환인은 미래시를 볼 것도 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림자처럼 여자들의 사이로 숨어들었다.
=어?! 엇!=
=씨발, 뭐냥!?=
=잠, 잠깐!=
이어 환인의 자비 없는 손속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여자 넷.
가장 먼저 걸진 욕지거리를 내뱉은 고양이 귀 여자의 머리통을 자루로 내려치고 뒤에서 어버버, 제대로 상황 파악도 못 한 여자 셋의 명치와 복부를 걷어차고 후려쳤다.
터엉! 퍼벅, 쾅!
가장 먼저 정수리를 얻어맞은 고양이귀 여자는 눈알을 까뒤집으며 기절했고 옆구리를 걷어차인 개 귀의 여자는 통로의 벽에 부딪혀 쓰러져 꿈틀거린다.
가죽갑옷 위로 명치와 복부를 얻어맞은 쥐, 토끼 귀의 여자 둘은 가슴과 배를 부여잡고 고꾸라져 겔겔거렸다.
=끄으, 으으으…….=
=그에에….=
=우웨에에엑!=
다섯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무력화시킨 환인은 냉기를 풀풀 피우며 무기를 쥔 여자들의 손목을 짓밟고 걷어차 무장을 해제시켰다.
습격자들의 무기, 단검과 건틀릿, 철추와 철퇴 등을 발로 차서 방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쓰러진 다섯 명을 살펴본다.
다섯 명 모두 3급이다. 약한 뇌진탕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인웅족 남자는 전사, 머리를 맞고 기절한 고양이 귀는 엽사, 그 뒤에 토끼, 쥐, 개 귀의 여자들은 투사.
명치를 찍힌 가죽갑옷의 토끼 귀 여자가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에 신음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왜 우리를 공격하는…… 쿨럭. 공격하는 거……!=
환인은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흑창의 날을 토끼 귀 여자의 목에 들이밀었다.
“우리 야영지를 습격하려 한 것은 당신들입니다.”
인토족 여자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심장이 멎을듯한 살기. 거기에 감정이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 게다가 뭐? 습격? 우리가?
목을 찌를 듯이 다가온 흑창의 모습에 토끼 귀 여자가 부르르 떨었다가 방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야영 중이던 흔적과 붉은 대검, 은빛 워 해머와 초대형 타워 실드로 당장 공격할 듯한 여자 둘을 보곤 벌벌 떨면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죄……송해요. 허억, 헉. 야영지라니, 우… 우리는 몰랐, 몰랐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저도 당신들을 모두 죽인 뒤에 몰랐다고 사과하면 되겠군요.”
불문율까지는 아니지만, 미궁에서 다른 파티와 접촉은 권장하지 않는다. 거기다 전투가 가장 쉽게 일어나고 사망자가 자주 발생하는 것이 야영지에서 두 파티가 얽히는 경우다.
환인이 유리알처럼 눈동자를 번뜩이며 흑창을 내려찍을 듯이 치켜들자 토끼 귀 여자가 오줌을 지리면서 가슴팍의 고통도 잊고 넙죽 엎드려 소리쳤다.
=사사려주세욧!! 지쳐, 지쳐서 별생각이 없어서… 켈룩! 켈록켈록! 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자신을 당장이라도 죽일듯한 살기가 남자에게서 겨울 안개처럼 흘러내려 머리 위로 쏟아진다.
죽는다. 살기에 누구보다 민감한 인토족의 직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입 다물고 있다간 진짜 죽는다!
=지, 진짜! 진짜로 실수였어요!! 죄송합쿨럭켈럭! …죄, 죄송합니닷!!=
토끼 귀 여자는 두 손을 싹싹 빌면서 필사적으로 전투 의지가 없다는 걸 알리고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의 위상석 주머니와 돈주머니를 꺼내 벌벌 떨며 두 손으로 바친다.
=저희, 저희가…… 꿀꺽. 사냥하면서 모은 위상석들이에요. 이걸, 이걸 받고 부디 요, 용서해주세요…!!=
토끼 귀 여자, 루이사는 두려움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살기를 짙게 뿌리는 사람은 처음 봤다. 모르긴 몰라도 수십에서 수백 명은 담가봤을 테지. 평온한 목소리와 존댓말이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는 게 루이사의 공포심을 끝없이 끌어올리고 있다.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통에 빌빌거리던 개와 쥐의 귀 여자들도 그제야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고 루이사처럼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쿵쿵 찍으며 빌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여자들의 필사적인 사죄에 환인은 스윽, 시선을 돌려 인웅족 남자를 응시했다.
갈색 곰 머리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환인의 차가운 시선에 흠칫, 떨고는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고 성대가 상한 듯 탁하고 걸걸한 목소리로 용서를 빈다.
=사, 살려주십쇼. 잘못, 잘못은 제가…… 했, 했으니 저만 죽… 크헥! 켁.=
작게 피를 토해내는 인웅족 남자의 머리통을 바라보다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난입자를 응시하는 안느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자기 눈과 귀를 한 번씩 가리킨 뒤 난입자들을 지목하며 진실이라는 신호를 준다.
종족 재능을 썼다는 표시에 환인은 잠시 여자들을 바라보다가…… 아직도 손바닥 위에 작은 주머니 두 개를 올린 채 바들바들 떠는 토끼 귀 여자의 손등을 부츠 안쪽으로 턱, 걷어찼다.
주머니 두 개가 튕겨 올라가며 이실리테의 손안에 안착한다.
환인의 대응이 심각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자신의 파티 외에는 잠재적인 적이라 봐도 무방한 미궁 안이다. 그리고 이들은 야영 중인 곳의 문을 부수다시피 하며 열고 들어온 자들이다.
안에 다른 파티가 있는지 어떻게 알고?
주의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문틈으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봤을 것이다.
밤늦은 시각, 감옥 미궁은 인위적인 불빛이 존재하지 않는 곳, 거기다 비교적 헐겁게 잠겨있던 문.
이 세 가지가 의미하는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라면 그냥 일찍 죽는 게 낫다고 모험가나 탐험가 열이면 열 대답할 문제다.
환인도 안느가 종족 재능으로 진실 여부를 확인시켜주지 않았다면 망설임 없이 흑창으로 목을 쳤을 거다.
“당신들은 이번 일을 두고두고 반추하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겁니다.”
=네, 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창을 내린 환인은 아직도 기절해 뻗어있는 고양이 귀 여자의 옆구리를 뻑! 걷어찼다.
크엑!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고양이 귀 여자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어어 하다가 환인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양이 귀, 꼬리를 뒤덮은 털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곤 납작 엎드렸다.
=살려주라냥!=
환인은 그 모습을 얼어붙을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말했다.
“여기서 더 쉬는 것은 힘들 테니 야영지를 정리하지.”
=네, 주인님.=
=응.=
=그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살았다는 듯이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은 다섯을 뒤로하고 복귀 길에 올랐을 때 안느가 옆의 이실리테를 보며 물었다.
=등급은 3급이었지만 거기에 걸맞은 실력은 없어 보이더라. 촌락이나 마을에서 자경단, 순찰대를 하던 지인들끼리 대축제를 구경하러 왔다가 미궁에 들어온 느낌이었어.=
=오……. 그럴듯한 추리네?=
=아무튼 그 사람들은 오늘 도령을 만난 게 행운이었을 거야.=
조심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생존확률이 더 올라간다는 말과 똑같다. 이번에 크게 데었으니 조심성이 뼈에 사무치겠지.
이실리테가 주머니 두 개를 환인에게 내밀며 물었다.
=주인님, 교대하고 얼마 못 주무셨을 텐데 괜찮으세요?=
“밖에서는 깊게 잠들지 않으니 괜찮다.”
=하긴. 도령은 옆에서 살짝만 건드려도 눈을 번쩍 뜨니까……. 그보다 난 걱정 안 해줘? 나도 3시간밖에 못 잤는데.=
=……안느 넌 성투사잖아. 걱정이 왜 필요해.=
=도령만 걱정해주고, 이거 차별이야! 나도 걱정해줘!=
=너는 진짜…….=
안느와 이실리테가 작은 목소리로 또 투닥거리는 걸 들으며 환인은 주머니 두 개를 살짝 열어보았다.
은화와 동화가 약간. 그리고 1급과 2급 위상석이 각각 4개, 1개. 대충 1금화 조금 못되는 양이다.
그 파티는 짐도 가벼운 편이었지. 대충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돈도 별로 안 되고 무겁기만 한 부산물은 다 버린다. 그렇게 1계층에서 사냥하다 보니 너무 쉬웠겠지. 하지만 그만큼 사람도 많았을 테고, 사람을 피해 2계층으로 내려왔다가 2계층도 쉽다며 호승심이 생겨 3계층으로 내려가던 도중이 아니었을까.
3계층에서 부패한 인간 무리를 만나면 모두 목이 떨어질 것이 훤히 보였지만, 그자들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환인은 부수입을 주머니에 챙겼다.
그리고 6시간 뒤, 11일에 걸친 두 번째 감옥 미궁 탐사를 끝낸 환인 일행은 햇살이 쨍쨍하게 내려쬐는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