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212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감옥 미궁 지하 17층]
17층으로 올라온 일행은 1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달할 때까지 이형종과 마주치지 않았다.
=17층에는 이형종이 별로 없나? 한 마리도 안 보이네.=
“파르히스트 기사들이 돌아다니며 사냥하고 있을 것이고 우리도 내려오며 사냥한 것이 있으니까.”
함정의 종류는 대부분 파악했다. 술법 함정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확인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없다. 어제와 다르게 환인은 일행과 함께 17층의 구석까지 돌아다니며 이형종을 찾아 사냥했고, 그렇게 17층을 한 바퀴 돈 뒤에 16층으로 올라왔다.
16층에서도 한 행동은 같았다.
두개골이 두 개 달린 에틴 스켈레톤 두 마리, 해골 전사 세 마리, 소울파이어 한 마리, 쉐도우 두 마리, 미이라 투사 다섯 마리, 미이라 전사 네 마리.
이번에는 그녀들의 위상력 보존을 위해 환인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했기에 일행은 이형종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방에 돌아온 환인은 약간 늦은 점심 식사를 진행하며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한 뒤 16층을 배회하며 이형종을 사냥한다. 가져온 장작을 다 쓰거나 장작을 넣어둔 자리에 부산물을 채워 넣을 때까지 머문 뒤 복귀하도록 하지.”
=네, 주인님.=
=알았어.=
부산물을 얻는 족족 그 부피만큼의 장작을 버려야 할 테니 사냥은 길지 않을 것이다.
환인은 그때부터 적당히 휴식 시간을 가져가며 며칠간 16층과 17층의 이형종을 사냥해나갔다.
강화 계층의 특징일까. 계층이 다른 것도 아닌데 층별 등장하는 이형종이 약간 달랐다.
16층에는 주로 인간형의 이형종이 많이 출몰했고 17층에는 거대한 짐승 형태의 이형종이 자주 출몰했다.
종류로 나누자면 쉐도우, 그림자 인간과 올빼미곰 해골, 에틴 스켈레톤, 소울파이어, 해골 전사, 와이번 베이비 좀비, 우두?? 해골, 벌레곰 좀비, 시체 골렘 등.
=17층에서 만났던 해츨링 좀비는 희귀 이형종이었나 보네.=
=희귀 이형종이 그, 층에 아주 가끔 등장하는 이형종이지?=
=응.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나빴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며칠 뒤, 환인 일행은 16층의 희귀 이형종하고도 마주쳤다.
=맹금룡 해골?!=
17층에서 마주쳤던 붉은비늘 해츨링 좀비보다 조금 작은 해골. 공룡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벨로키랍토르의 골격과 흡사하게 생긴 해골용이었다.
끼에에엑!!
뼈대를 제외한 육체 자체가 없으면서 어떻게 포효를 지르는지 모르겠지만, 환인 일행을 발견한 맹금룡 해골이 포악한 울음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오직 공격 일변도의 살의.
=조심해!=
지난 며칠간 16층과 17층을 오가며 수십 마리의 이형종을 사냥한 이실리테는 그 경험을 통해 파티의 메인 딜러로써의 폼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미궁 경험이 없었지만 안느라는 뛰어난 버디buddy와 환인의 서포트 덕분에 빠르게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기습적으로 벌어진 전투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맹금룡 해골을 상대했지만, 맹금룡 해골은 그녀들과 상성이 좋지 않은 타입의 이형종이었다.
안느피셜에 따르면 맹금룡 해골의 등급은 해츨링 좀비와 마찬가지로 5급. 하지만 날쌔기가 해츨링 좀비를 아득히 능가하는 수준이었기에 민첩성과 순발력보다 근력에 집중하는 편인 이실리테와 안느는 날쌘 몸놀림의 맹금룡 해골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것.
안느가 공격할라치면 그 큰 덩치로 눈 깜빡할 사이 훌쩍 물러나고, 빈틈을 보이면 바람처럼 달려와 통나무 굵기의 다리로 걷어차거나 꼬리로 후려친다.
때때로 닭처럼 주둥이로 콱콱 찍어대고 짓밟기까지 해대며 촐랑거리니 속도가 느린 편인 중장 판금 투사와 양손 대검 전사로써 대응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쾅!
=윽…!=
급기야 울퉁불퉁한 꼬리뼈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이실리테가 바닥을 뒹굴었고, 방해꾼 하나를 쳐날린 맹금룡 해골은 그 즉시 안느를 향해 펄쩍 뛰더니.
끼에엑!
작은 앞발로 안느의 방패를 붙잡고 흔드는데 안느의 신형이 방패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익! 이, 이게?!=
당황과 빡침이 얼굴에 드러난 안느가 입을 앙다문다.
부우웅
수십 마리의 벌떼가 날아다니는 소리와 함께 안느의 은색 눈동자에서 호박빛이 흘러나오고, 동시에 그녀의 주변에 반딧불 같은 호박빛이 무수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멀찍이서 비상과 함께 전투를 지켜보던 환인은 그녀들의 불리함을 읽고 전투에 난입하려 했지만, 안느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그녀의 눈에서 사라지지 않은 투지를 읽고 난입을 보류했다.
쏴아아아
잠시 후 탄산의 기포가 끓는듯한 소리와 함께 호박빛 반딧불이 안느의 몸에 스며들더니.
=이슬아! 10초 뒤야!=
안느가 평소의 세 배에 달하는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가 안느의 변화에 눈을 크게 떴던 이실리테는 두 손으로 레드릭을 움켜쥐고 자세를 낮춰 맹금룡 해골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 후 벌어진 일은 호박빛에 둘러싸인 안느의 폭풍 같은 맹공이었다.
늘 느릿하고 묵직하게 움직이던 안느가 맹금룡 해골의 속도를 따라잡으며 왼쪽 다리를 집요하게 후려친다.
콰광! 쿵, 쿠구궁!
끼에에에엑!!!
쿠쾅! 꽈과광!!
맹금룡 해골이 도망치거나 회피하기도 했지만 의미가 없었다.
뒤로 물러나면 똑같은 속도로 따라붙으며 천벌의 망치를 휘둘렀고 점프하면 똑같이 점프해 망치를 휘둘렀으며 도망가면 뒤쫓아가며 정말 집요하게 무릎만 후려쳤다.
앞발톱으로 할퀴려 하면 성벽의 방패를 스몰 실드처럼 휘둘러 쳐내고 다리로 짓밟을라치면 잽싸게 피하며 왼쪽 무릎을 내려찍는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회백색의 뼈덩어리를 후려치고 몰아붙이는 호박색 빛의 기사.
콰지직!
끼이에에엑?!!!
10초동안 15대의 타격을 허락하고만 맹금룡 해골의 왼쪽 무릎이 결국 박살 나며 몸체가 기운다.
그와 함께 호박빛이 사라진 안느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성벽의 방패를 내세우는 동시에 맹금룡 해골의 거체가 굉음을 내며 땅에 쓰러졌다.
쿠궁!
암살자처럼 자세를 낮추고 있던 이실리테가 10m 가까이 뛰어오른 것은 그때였다.
=이야아압!!=
온 체중과 위상력의 반절을 레드릭에 담아 쓰러진 맹금룡 해골의 두개골을 내려친다.
꽈캉!!!
키에에에엑!!
하얀 빛에 뒤덮인 레드릭에 정통으로 강타당한 맹금룡 해골은 오른쪽 안와에서부터 광대뼈와 아래턱까지 박살나 발작하듯 난동을 부렸다.
물 위에 올라온 생선처럼, 사람에게 밟힌 지렁이처럼 미친 듯이 몸을 뒤틀고 펄떡이는 맹금룡 해골이지만.
쾅! 콰광, 콱! 콰드득! 빠각! 뻐벅!
놀랍게도 이실리테는 몸부림치는 맹금룡 해골의 전신을 되받아쳤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꼬리뼈, 다리뼈, 팔뼈, 머리뼈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죄다 후려치는 이실리테.
그 덕에 맹금룡 해골의 몸부림이 일시적이지만 멈추었고, 그렇게 발생한 빈틈을 노려 맹금룡 해골의 두개골에 떨어진 것은 맹렬한 빛을 내뿜는 천벌의 망치였다.
쿠우웅!!
끄로로로롥…!
클레이모어가 터진것 같은 진동과 충격음에 맹금룡 해골의 전신 뼈가 요동치듯 출렁였다.
뼈와 뼈의 이음새가 무너져 제대로 형상을 잡지 못하는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기회라는 듯이 쓰러진 맹금룡의 두개골을 몰아쳤고, 10초도 지나지 않아 두개골은 잘게 빻아진 뼛가루로 변해버렸다.
쿠궁, 터엉.
=흐악! 학! 하악…!=
방패를 놓치고 무릎을 꿇은 안느가 땅을 짚으며 죽을 듯이 헐떡인다.
=안느, 괜찮아?=
=……!=
대답할 힘도 없는지 비지땀을 뚝뚝 흘리며 겨우겨우 손을 흔드는 안느.
환인은 그녀의 뒤로 다가가 흉부 갑주의 이음새를 풀었다. 철컹, 터덩 갑옷이 떨어져 나가며 수증기가 훅 피어오르고 땀이 후두둑 떨어진다.
땀을 흠뻑 먹은 하얀 옷이 안느의 피부에 들러붙어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 자못 에로틱하다.
옷자락을 손에 쥐자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지만,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자락을 그녀의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이 보통은 불쾌할 법도 하지만, 어디서 꿀차를 탄 게 아닐까 싶은 달콤한 향기만 주변을 채웠기에 환인은 거리낌 없이 땀에 젖은 그녀의 드러난 맨살에 손을 올렸다.
원기 방출로 그녀에게 원기를 보내주자 도톰한 젖무덤이 출렁일 만큼 헐떡이던 안느의 호흡이 가라앉는다.
=후, 아아, 아아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숨넘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헐떡임이 멎어가고 약간 하얗게 질려있던 안색도 빠르게 제 색을 되찾았다.
이실리테가 물병을 가져와 건네주며 묻는다.
=아까 썼던 호박색 빛의 후유증이야?=
주저앉은 안느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다. 입가로 흘러내린 물이 쇄골에 떨어져 가슴골로 흘러내리지만 안느는 신경쓰지않고 물통을 반이나 비웠다.
그리고 후우, 숨을 길게 내쉬고 대답했다.
=어어. 일정 위상력으로 발동한 뒤 스태미너를 모두 쓸 때까지 이어지는 강화기야. 스테미너를 에너지 삼아서 힘이랑 순발력을 폭발적으로 올려줘. 대충 10초 정도.=
“자주 쓸 게 못 되겠군.”
=그렇지 뭐. 10초가 지나면 진짜 심장이랑 폐가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우니까.=
기운을 차린 안느는 몸을 일으켰다가 주르륵 판금 부츠의 이음새로 물이 흘러나오는 걸 보곤 얼굴을 확 붉히며 환인에게 손사래쳤다.
=이, 이거 소변 흘린 거 아니니까! 땀이 흘러내린 거니까!?=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일행은 며칠간 16층과 17층에서 사냥하며 시간을 보냈고 미궁에 입장한 지 10일째 되던 날, 모든 아공간 가방을 부산물과 이형종의 무구로 채울 수 있었다.
사람 모양의 그림자 인간이 소멸한 자리에 떨어진 하급 품질의 보석을 챙긴 안느가 환인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이걸로 주머니가 다 찼지?=
“그래. 생각보다 채우는 게 좀 늦었군.”
이실리테와 함께 벌레곰 해골의 뼈다귀를 주머니에 채워 비상의 등에 올린 환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돌아나가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려?=
“빠르면 이틀, 늦으면 사흘 정도겠지.”
=함정만 없으면 금방 올라갈 수 있을 텐데.=
“함정이 없다면 더 많은 파티가 4계층까지 내려왔을 거다.”
입장 7일째 되던 날,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한 다음 날 환인 일행은 파티 하나와 마주쳤었다.
짐꾼이 없는 6인 파티였는데 4명이 4급이었고 나머지 둘이 5급과 3급으로, 그들은 환인 일행을 보고 굉장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었다.
8일째 되던 날에는 파티 세 개와 마주쳤었고 9일 차에는 두 파티와 마주쳤었다.
오늘은 오전에만 세 파티와 마주쳤다.
그렇게 마주친 파티는 빠짐없이 환인 일행을 의심하고 경계했었다.
‘4계층이나 되는 곳에 6급과 4급, 무직자에 쿠에 한 마리인 파티이니 의심의 눈길을 보낼법도 하지.’
그들은 최소 6명이었으며 많게는 10명이나 됐었으니까.
자신과 다르면 배척하는 심리는 익숙한 환인이었지만, 마주치는 파티마다 노골적으로 경계하며 의심하는 꼴은 꽤 성가셨다.
=주인님. 다 챙겼어요.=
“그럼 올라가지.”
환인이 30kg 정도 되는 금속 부산물로 채워진 가망을 메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이실리테와 안느도 부산물이 가득 찬 주머니를 등에 짊어지고 환인의 뒤를 따른다.
15층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을 걷고 있으니 뒤에서 안느가 작게 푸념을 흘렸다.
=이제 미궁을 나갈 때까지 밤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야 하나? 으~ 나 추위에 약한데.=
=6급이나 되면서 엄살 피우지 마. 그리고 유리 언니가 춥지 말라고 체온 조절 침낭까지 챙겨줬잖아.=
=으휴. 이슬이 바보야. 이럴 때는 맞장구쳐야 도령이 “그렇게 춥나? 그러면 내가 체온으로 녹여주지. 이리 와라.”하고 꼭 안아줄 거 아냐.=
=……후우.=
=도령도령. 밤에 추우면 말해. 우리가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줄게!=
“…….”
당당하다고 해야 할지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되돌아 나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3계층에 나오는 이형종 중 위험한 것은 부패한 인간뿐. 나머지는 조금 단단하고 빠른 수준의 해골이나 시체일 뿐이었으니까.
문제라면 층을 되돌아갈수록 다른 파티와 마주치는 간격이 짧아진다는 거였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해골, 시체와 드잡이질을 벌이던 파티가 이형종보다 이쪽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 묘한 기류는 정말이지…….
=밥 먹은 게 체할 거 같은 기분?=
=그정도는 아닌데……. 아무튼 미궁 강도 이슈가 사라지려면 꽤 오래 걸릴 거 같아.=
파티들이 이토록 경계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성주의 셋째 딸 살해 사건의 장소라는 게 컸다.
지역 유지를 능가하는 유명인이 감옥 미궁 내에서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사람들이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되짚어 올라가는 층이 높아질수록 파티는 많아졌고 이형종 수는 적어졌으며 해제된 함정도 많았기에 환인 일행의 이동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던 것.
문제는 야영을 위한 장소를 찾던 중에 일어났다.
=…….=
“선객이 있었군요. 미안합니다.”
반나절 만에 3계층을 뚫고 2계층 10층에 도달한 일행은 야영을 위해 막다른 방을 찾았는데, 여덟 곳의 막힌 방에 전부 선객이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을 닫고 되돌아 나가고 있으니 안느가 한숨을 폭 내쉰다.
=우와아. 막다른 방 11개 중에서 8개에 이미 임자가 있다니, 이거 실환가?=
=거의 2달 가까이 미궁이 폐쇄되어있었잖아. 다들 주머니가 가벼워져서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이 몰렸나봐.=
안느가 신음을 흘리다가 자기 이마를 어루만지며 묻는다
=끄응……. 도령, 남은 방 세 개도 비어있을 거란 보장이 없는데 어떻게 할 거야?=
“음…….”
=뭣하면 그냥 밤새워서 올라가지? 오늘 밤만 조금 고생하면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거 아냐.=
꽤 유혹적인 제안이었지만 비상을 돌아본 환인은 고개를 저었다.
“비상이 등에 진 짐의 무게만 400kg에 가깝다. 24시간 동안 돌아다니면 비상이 못 버틴다.”
=아.=
꾸우~
자긴 괜찮다며 비상이 쿠쿠 울었지만, 환인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비상의 머리와 부리를 쓰다듬어주고 다음 막다른 방을 찾았다.
그리고 겨우 빈방을 찾을 수 있었다.
짐과 무기, 방패를 내려놓은 안느가 잽싸게 비상에게 다가가 머리며 목을 쓰다듬고 긁어주며 사과한다.
=비상아~ 언니가 미안해? 우리 비상이 짊어진 짐의 무게를 생각을 미처 못했네.=
쿠엣.
=도령, 비상이가 뭐래?=
“괜찮다고 하는군.”
=아휴~ 우리 비상이 착하기도 하지. 자, 이건 언니가 주는 선물.=
안느가 허리의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노란색 사과였다. 그걸 본 비상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날름 받아서 아삭아삭 씹어먹는다.
비상에게 사과의 뇌물을 바친 안느는 열선 플레이트를 내려놓고 식사 준비를 시작하는 이실리테에게 성수포 한 장을 받아 갑옷을 벗고 얼굴과 손을 닦기 시작했다.
=음~.=
관절과 관절에 피부가 쩝쩝 달라붙는 느낌이 자못 찝찝하다.
힐끔, 환인을 돌아보니 작은 주머니 여러 개를 내놓고 수첩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금전 관리인가?’
한동안 수첩을 들여다볼 것 같다. 안느는 식사 준비하는 이실리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방구석으로 이동해 옷을 훌렁훌렁 벗고 성수포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예술품처럼 늘씬한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몸을 닦는 안느의 대담한 행동에 식사를 준비하던 이실리테는 눈을 크게 떴다.
쟤는 부끄럽지도 않나?
그러다가 저런 자신감이 부럽다고 생각하며 눈썹 끝을 살짝 늘어트렸다. 자신은 주인님이 볼까 부끄러워 비상의 뒤에 숨어 몰래몰래 몸을 닦는게 전부인데.
=…….=
이실리테는 국자로 냄비 속의 스튜를 저으며 안느를 구경했다.
다리를 닦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최고급 실크같은 은색 머리카락이 사라락 흘러내리고 적당히 예쁜 가슴이 중력을 받아 살짝 늘어진다.
길고 곧게 뻗은 가느다란 다리도 그렇고 허벅지 사이 은색 음모도 어쩌면 저렇게 부드러워 보이는지.
가슴만 비대하게 큰데다 허리는 또 잘록하기만 해 이상한 자기 몸에 비하면 안느의 몸매는 같은 여자인 자신이 봐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안느가 빙그레 웃으며 ‘뭘 봐.’ 입을 벙긋거린다.
이실리테는 왠지 뜨끔하는 기분에 시선을 내리고 요리에 신경을 쏟았다.
그즈음 몸을 다 닦은 안느가 새 팬티와 옷을 꺼내입었을 때 환인도 고개를 들었고, 마악 옷자락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팬티의 흔적에 환인은 약간이지만 아쉬움을 느꼈다.
일상생활 속의 에로스를 놓쳤다는 아쉬움이다.
발가락까지 꼼꼼하게 닦은 안느가 환인의 옆으로 와서 앉으며 묻는다.
=도령. 이번 수익은 얼마 정도야?=
“대강 간추려서 계산해보면 40금화 정도 된다.”
수익 중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역시 1~4급의 위상석이다. 부피는 가장 작은데 40금화 중 25금화가 위상석의 수입이니까.
=와, 진짜 많이 벌었네.=
환인의 이야기를 듣던 안느가 손을 뻗어 위상석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를 열자 새끼손톱만 한 1급 위상석부터 손바닥 절반만 한 4급 위상이 한데 섞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것만 보면 형형색색의 예쁜 보석 같다고 생각하던 안느는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들이미는 비상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비상이도 여자아이라고 반짝이는 게 좋은 거야?=
쿠우~
=응? 위상석이 자세히 보고 싶어?=
좌라락 손바닥에 1급 위상석을 몇 개 쏟아내자 비상의 부리가 가까이 다가와 그중 녹색 위상석을 끝으로 물고 빼간다.
=어어? 안돼안돼. 그거 가져가면…… 앗!=
쿳? 꿀꺽.
=……어떡해! 도령, 비상이가 위상석을 삼켰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