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211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해치운 미이라 투사의 수갑과 각갑을 챙긴 일행은 다시 18층 계단을 향해 이동하며 몇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림자가 z축으로 일어선 것처럼 일렁이며 실체 없는 공격을 해대는 4급 이형종 쉐도우.
전갈을 200배 정도 키우고 꼬리를 하나 더 붙인 4급+ 이형종 언=데드 스콜피온.
몸을 뒤집은채 누워 팔다리로 기괴할 만큼 빨리 움직이며 음파 공격과 손톱 마비 공격을 하는 4급+ 이형종 역각귀??.
일반 파티였다면 마도기나 위상력으로만 피해를 줄 수 있는 쉐도우가 가장 난해했을 것이다. 평범한 무기로는 피해조차 줄 수 없으니까.
그러나 환인 일행은 전원 마도기로 무장하고 있는 데다 파티 리더인 환인은 위상류 체질로 상태 이상 공격과 위상력 일변도의 공격에 강한 저항을 지니고 있다.
언=데드 스콜피온과 쉐도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2~4마리씩 몰려다니는 역각귀였다.
동료들이 칠판을 긁는 소리에 가까운 음파 공격에 고막이 데미지를 입어 행동이 둔해지고 할퀴기에 당해 약한 마비 상태에 빠지는 일이 종종 발생한 것이다.
일반 파티였다면 다섯, 여섯 명이어서 위험부담이 적었겠지만, 환인 일행은 비상을 제외하고 3명 뿐.
여자 친구들이 약한 마비 상태에 빠질 때마다 환인이 나서서 역각귀를 모두 해치웠다.
=살살, 살살 흘려 넣… 흐꺗!=
=힉, 차, 차가워요….=
역각귀와 전투로 고막이 상한 그녀들의 귀에 스포이드로 범용 상급 회복 물약을 한 방울씩 흘려 넣어준 환인은 발을 동동 구르고 어깨를 움츠리며 얼굴을 찡그리는 여자 친구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18층 계단 앞에 도달한 환인은 잠시 휴식 시간을 선언했다.
안느는 앉기 편해보이는 바위 구조물에 주저앉아 성벽의 방패만 내려놓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에고고. 역시 강화 계층이네. 간만에 삭신이 쑤시는걸. 이슬이는 괜찮아?=
=응. 4급이 된 뒤로 재생력이 조금 더 늘어난 거 같아. 지금은 조금 지쳤지만 휴식하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좋겠다……. 난 힘이랑 체력에 몰빵 돼서 재생력이 엄청나게 낮은데.=
말하면서 자신을 계속 힐끔거리는 안느의 행동에 환인은 말없이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올리고 원기를 흘려 넣어주었다.
=아……. 남자의 원기 이건 귀한 거거든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드립에 환인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자 개구쟁이처럼 킥킥 웃는 안느다.
=그나저나 이형종을 10마리나 잡았는데 위상석이 하나도 안 나왔네. 실환가.=
=급이 높은 위상석일수록 잘 안 나오잖아.=
=그건 평범한 이형종 이야기야. 강화되어있거나 특이형들은 위상석을 더 잘 줘.=
=어느정도나?=
=……2… 100마리당 1개 정도?=
=앞에 200마리라고 말하려 한 거 아냐?=
=아무튼~ 5급 위상석 하나면 최소 30금화잖아. 이번에는 위상석이 잘 나오는 거 같아서 조금 기대돼.=
돈도 많으면서 왜 저러는 걸까. 칭얼거리는 것처럼 아쉬워하는 안느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바라보던 이실리테는 위상석위상석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안느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며 나무랐다.
=이상한 노래 그만해. 아까까진 안 그랬으면서 왜 갑자기 그러는 거야?=
=유리 언니한테 화장품 좋은 거 만들어달라고 하려면 용돈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 바디 로션 다 써간단 말이야.=
=너 돈 많잖아. 그걸로 만들어달라고 하지?=
힐끔,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는 환인에게 눈길을 준 안느는 이실리테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도 이제 용돈으로만 생활할 거야.=
=……갑자기?=
=그야 도령도 그렇고 유리 언니랑 너도 용돈으로만 생활하잖아……. 나만 막 돈 쓰고 다니니까 기분이 이상해서 싫어.=
=…….=
모르겠다. 이게 부자들의 서민 흉내라는 건가? 이실리테는 더 이상 안느에게 장단을 맞춰주지 않기로 하고 아까부터 호기심이 맴도는 것을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환인이 수첩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기에 재빨리 입을 뗀다.
=저, 주인님.=
“음.”
=주인님은 미래시를 얻으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아까 우리가 싸웠던 해츨링 좀비도 쉽게 이길 수 있는 건가요?=
“쉽지는 않겠지.”
비록 시각화가 3초~5초 정도밖에 이어지지 않아 완전무결한 대응과 공격은 불가능하지만, 한 곳만 꾸준히 공격하다 보면 언젠가는 뼈가 부서지는 것을 시각화가 보여줄 거다.
그러니까 미이라처럼 바싹 마른 탓에 몸 곳곳에 나 있던 비늘의 균열과 드러난 뼈 부분을 중점적으로 공략하면 홀로 사냥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분이 아니라 시간 단위로 사냥을 해야 할 걸로 짐작된다.
물론 이건 강령을 하지 않았고 영혼술을 쓰지 않았을 경우다. 언데드의 경우에는 빛에 약하니 빛의 하급 정령을 강령하고 빛 속성 공격도 더하면 사냥 시간은 더욱 단축되지 않을까.
해츨링 좀비 정도 되는 괴물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두 여자가 놀랐다는 듯이 크고 예쁜 눈을 깜빡인다.
=그러면 주인님은 무적이 된 건가요?=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시각화가…… 아니, 미래시는 소유자의 기초 전투 능력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크게 의미가 갈리는 힘 같아.=
안느의 대답에 이실리테가 ‘그런가요?’ 하는 얼굴로 환인을 본다.
“정확하다.”
=영혼술을 쓰지 못하는 지금 기준으로 도령이 상대할 수 있는 상한선이 딱 해츨링 좀비 같아. 해츨링 좀비보다 딱딱하거나 더 크면 미래시가 보이더라도 방법이 없겠지. 일단 무기가 박혀야 공략이든 뭐든 할 테니까.=
안느의 정확한 분석에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범위의 술법적인 공격에도 무의미할 테지. 찾아보자면 약점이 많은 능력이다.”
약점이 많다고? 안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환인을 바라본다.
=아니 그게 지금 말이야 방구야. 아까 미이라 투사 넷을 동시에 해치운 것만 봐도…… 그정도는 7급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구.=
“하지만 사실이지. 이 능력을 이실리테나 네가 가졌다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홀로 7급 이형종도 사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거야 만약의 일인거구. 아무튼 나가면 이번 전리품을 팔고 모아놨던 파티 공금으로 도령의 무기를 바꾸는 것도 생각해봐야겠어.=
거기에 유리 언니가 한창 만들고 있을 자동 방어 마도기까지 갖춰지면…….
서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히죽 웃는 여자 친구들을 환인은 의아해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슬슬 내려갈까. 18층 계단 앞에 함정 문이 하나 있으니 그것만 확인하지.”
=네.=
=응.=
18층으로 내려간 환인 일행은 계단 바로 앞 교차점에 포도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시체를 목격했다.
갓 살해당한 시체가 아니라 미궁이 생성해낸 것인 듯, 사막에 한 달 정도 방치된 것처럼 비쩍 마른 시체다.
=으음.=
“괜찮나.”
시체를 보자마자 신음에 가까운 숨을 흘린 안느는 환인을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괜찮아. 악취미적인 미궁 데코레이션이네.=
=미궁이 만든 장식이라구?=
=어. 이런 걸 보여줘서 미궁의 침입자들 정신을 약하게 만드는 거야. 도령, 미안한데 잠시 저 시체들을 공양해도 될까?=
“그렇게 해라. 전방에 큰 방이 있으니 이형종이 다가올 것도 염두에 두도록. 나는 북쪽 문을 살펴보지.”
=엉.=
주머니에서 주황색 날의 검을 꺼낸 안느는 시체가 매달린 끈을 끊은 뒤 한데 모은다. 그리고 투명한 유리병을 꺼내 안에 든 액체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푸른 불길이 확 피어오르며 시체를 태우는데 응당 발생해야 할 연기나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걸 지켜보던 환인이 물었다.
“뭘 뿌린 거지.”
=축성받은 대추나무 기름이야. 부정한 걸 태우고 정화하는 푸른 불길이지.=
“…….”
대추나무에서 식물성 기름을 뽑아냈다는 건가. 환인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현실에서도 여러 식물성 기름 추출법이 있으니 그중 일부가 이 세계에 전파되었다고 생각했다.
시체를 한데 모으는 걸 도와준 이실리테가 푸른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시쳇더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안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 시체들은 미궁이 만들어낸 거지?=
=맞아. 그런데 굳이 불태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한 거지?=
=응.=
=미궁은 자기 영역 내에 시체가 발생했을 때 그 시체를 흡수한다고 알려졌어. 그러니까 이 시체도 누군가의 죽은 뒤 모습이라는 거지. 그래서 불태워 정화하는 거야.=
=…….=
안느의 대답에서 무언가 불길한 것을 읽었는지 이실리테가 조금 얼굴을 찌푸린다.
그 모습에 안느가 아하하 웃으면서 이실리테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야기했다.
미궁이 출몰한 곳 주변의 땅이 비옥해지는 이유와 이런 죽은 자의 미궁이 쉬지 않고 이형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
=땅에 묻은 시체가 미궁으로 흘러 들어간다니……. 그럼 땅에 묻은 시체가 사라진다는 거야?=
=즉각적으로 사라지진 않아 대충 몇 년에 걸쳐 돌아가는 거지.=
‘그건 시체가 미생물로 인해 분해되는 현상일 텐데.’
옆에서 공양을 지켜보던 환인은 안느의 이야기에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럼 얼마 전에 있었던 셋째 영애의 장례식도 의미 없는 거 아냐?=
=그런 사람들은 신관이나 사제의 축복 속에 매장되니까 괜찮아. 문제는 그냥 땅에 묻힌 사람들의 시체인 거고.=
공양식은 끝난 듯 하다. 환인은 교차로의 북쪽 통로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멀지 않은 곳의 철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안느가 뒤에서 말했다.
=우리가 같이 가지 않아도 돼?=
“저 함정문 너머는 독방이다. 넓이도 넓지 않은 곳이니 대형 이형종은 없을 거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오는 비상을 물러서게 했다.
“비상. 너도 그녀들과 함께 있어라.”
큐우? 큐큣.
“함정이 발동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저기 가 있어.”
쿠우엣!
“내게는 위상류가 있지만 너는 없지 않으냐.”
……큐삣.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비상의 축 늘어진 꽁지깃을 보던 환인은 다시 함정문에 다가간다.
문은 겉보기에 리벳으로 보강된 철문이다. 잠금장치는 오래된 철문에 붙어있을 법한 걸쇠식.
짙은 청색으로 번들거리는 철문을 위아래 전체적으로 살폈지만, 일반적인 물리 함정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지도에는 함정문으로 표시되어있다. 바닥과 통로에 설치된 함정의 여부는 신뢰성이 제로지만 잠금문과 함정문, 비밀문의 위치 신뢰성은 지금까지 100%였어.’
그 말은 이 문에 술법 함정이 설치되어있다는 뜻이다. 문제라면 자신의 지식으로 함정 여부를 알아내기 어렵다는 것.
함정의 발동 방식은 뭘까. 문에 접촉했을 때? 문을 열려고 할 때? 아니면 접근하기만 해도?
위상류를 한층 단단히 만든 뒤 손을 천천히 문에 뻗는다. 물론 터치할 생각은 없다.
“…….”
아니나 다를까 문에 가까워질수록 위상류가 약간씩 자극받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술법 함정의 유무 확인은 이렇게 가능하군.’
그뿐이다. 영혼 시야로 문을 유심히 살펴도 보고 냄새와 모양을 재차 낱낱이 살폈지만, 술법이 설치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작게 한숨을 쉰 환인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조각 몇 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여자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녀들과 비상을 계단 쪽 통로로 몰아넣는다.
=왜?=
“폭발이 일어날지 모른다. 몸을 숨겨라.”
자신도 코너 안쪽으로 몸을 숨긴 환인은 돌조각을 던져 철문에 맞추었다.
탕
철문의 상단을 때린 돌조각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반응이 없다. 환인은 다시 돌조각을 던져 이번에는 걸쇠가 붙은 손잡이를 맞췄다.
탕 파지지지직!!
청백색의 아크 방전 현상이 일어나며 한순간 어둠을 밀어내다 사라진다.
환인의 머리 밑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안느와 이실리테가 그 방전을 목격하곤 작게 탄성을 질렀다.
저게 술법 함정이구나.
당하면 크게 다치겠어.
응. 손댔다간 나도 플뢰 통구이가 되겠는걸.
방전 현상이 완전히 가라앉은 뒤 다시 돌멩이를 던져 걸쇠를 맞추었다. 그러자 아크 방전 현상이 다시 벌어지며 철문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불길한 느낌에 환인은 재빨리 여자 친구들의 어깨와 넥가드 뒤쪽을 잡아당기며 코너 안쪽으로 깊숙히 몸을 숨겼고 그 순간…….
콰과과광!!
=우왓?!=
=꺅!=
문에서 전기 속성의 대폭발이 일어나 전기를 머금은 흙먼지가 통로를 덮쳤다.
쿠궁, 콰광, 작은 진동과 폭음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철문이 폭발하며 쇳조각을 날린 것으로 판단된다.
잠시 후 소리와 진동이 가라앉았을 때 환인이 비상을 불렀다.
“바람으로 흙먼지 좀 날려다오.”
꾸우!
비상이 녹색 날개를 활짝 펼치자 옅은 초록빛이 흘러나오며 강한 바람이 흙먼지를 건너편 방으로 날려 보낸다.
먼지가 사라진 뒤 슬쩍 통로 밖으로 고개를 내민 환인은 철문에 다이너마이트 수 킬로그램을 붙여놓고 터트린 것처럼 뻥 뚫린 철문을 볼 수 있었다.
통로를 나와 문이었던 것으로 다가가자 안느와 이실리테도 뒤따라 나오며 헐, 탄성을 질렀다.
=두 번 해제 실패하면 대폭발인 거야? 엄청 사악한 함정인데.=
“이런 즉발형 함정이면 오히려 낫다고 생각되는군. 멀찍이서 터트리면 해제되니까.”
=어… 그런가?=
수류탄이 터진 것처럼 엉망이 된 문 앞을 돌아본 환인은 철문이었던 것의 너머 방 상황에 음, 작게 신음을 흘렸다.
외눈 거인 해골 세 마리 중 두 마리가 두개골 여기저기에 쇳조각과 돌조각이 박힌 채 쓰러져있고 두개골이 멀쩡한 한 마리가 그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말없이 다가가자 외눈 거인 해골의 두개골을 어떻게 부셔야 할지 미래시가 보여준다.
파편이 스치고 지나간 듯 길다란 스크래치가 나 있는 부분을 천칭으로 내려치자 빠직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내려앉았고 외눈 거인 해골도 다시 무너져내렸다.
=도령, 술법 함정에 대해서 뭐 알아낸 거 있어?=
뒤따라왔던 안느가 환인이 외눈 거인 해골을 박살 내는 것을 보고 물었다.
“있다.”
=뭔데?=
“평범하게는 술법 함정의 유무를 알 수 없다. 위상류를 단단하게 하면 느껴지긴 하지만 굉장히 가까워야 한다. 바닥에 설치된 술법 함정을 감지하는 것은 무리겠지.”
=아. 그럼 탐사는 안 되겠네.=
조심스럽게 나아간다면 위상류를 이용해 편법으로 함정의 존재를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다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 지역 근처에 술법 함정이 있다면?
“그래. 돌아가야겠……?”
말하며 고개를 돌리던 환인의 눈에 북서쪽 구석 벽에 걸린 그을린 나무 방패가 들어왔다.
시선을 잡은 건 방패가 아니라 그 아래, 철문의 파편이 박힌 벽돌벽이었다. 여기저기 생긴 금 사이로 건너편의 공간 같은 것이 얼핏 보였던 것.
=왜 그래?=
“안느. 저 벽 너머에 공간이 있는 듯 하다. 안쪽으로 벽돌이 넘어가지 않도록 살살 때려봐라.”
=어.=
천벌의 망치를 세워 금 간 벽에 다가간 안느는 잠시 벽을 살펴보다가 망치를 내리고 틈 사이로 억지로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건틀릿이 벽을 긁어내며 자리를 만들고, 그렇게 생긴 틈에 힘을 줘서 당기자 벽이 부서지며 틈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안느의 앞에 드러난 것은 성인 남자 두 명이 들어갈 만한 공간과 녹슨 철제 상자였다.
=보물상자다.=
벽 안에 상자가 숨겨져 있다니, 거기다 철제 상자다. 목제 보물상자보다 등급이 한 단계 더 높은 보물상자!
약간 기대감을 내비치며 이제 어떻게 해? 눈으로 묻는 안느의 옆으로 가서 녹슨 철제 상자를 살펴본다.
위상류를 단단하게 만들어 넓적한 모양의 보물상자 뚜껑에 손을 올려봤지만 좀전의 함정문에서 느껴지는 것은 없다.
바닥과 벽까지 세심하게 살펴본 환인은 안느에게 말했다.
“꺼내지. 함정이 설치되어있을지 모르니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라.”
안느와 함께 철제 상자를 들어 꺼낸다. 통짜 강철로 만든 걸까. 무게가 말도 안 되게 무겁다.
=도령. 위층에 이런 장식물 많이 있었잖아. 거기에도 보물상자가 막 숨겨져 있는 거 아냐?=
“글쎄. 올라가는 길에 확인해볼 가치는 있겠지.”
녹슨 냄새가 물씬 나는 철제 보물상자를 평평한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자세히 상자를 살펴본다.
‘잠긴 보물상자군.’
상자 함정은 주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살상을 목적으로 보물상자를 잠가놓지 않고 오픈을 유도해 함정을 발동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보물 보호를 목적으로 내부에 함정을 설치한 뒤 상자도 잠가놓는 것. 이 경우 함정을 해제하지 않고 억지로 개방하면 높은 확률로 내용물이 망가진다.
철제 상자는 후자였다.
락피킹 세트에서 펜라이트 같이 생긴 초소형 빛 막대를 꺼내 열쇠 삽입형 잠금장치 안쪽을 비춰본다.
매우 얇은 실의 위치를 확인한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멋모르고 락픽을 시도하면 함정이 발동하는 구조다. 강하게 흔들거나 충격을 주어도 저 실이 끊어지며 함정이 발동한다.
‘폭발형인가 산성 역류형인가.’
스으읍 살짝 냄새를 맡아보자 톡 쏘는 듯하면서도 아릿한 자극이 콧속의 점막을 자극했다. 산성 물질 특유의 냄새다.
‘꺼낼 때 상자가 조금씩 흔들렸는데 실은 멀쩡하군. 실의 인장강도가 기본은 한다는 뜻.’
초소형 빛 막대 끝을 입에 물고 안쪽을 비추며 내시경 수술 도구 같은 것을 꺼내 한쪽 끝에 작업용 실을 연결한다.
그걸 자물쇠 구멍에 넣고 조심스레 움직여 함정 실에 작업용 실을 묶고 있으니 어느새 다가온 이실리테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 도와드릴 건 없나요?=
안느는 자신이 상자의 함정을 파악하는 사이 방을 나갔고, 교대하듯 이실리테가 들어와 위상석 탐지 도구로 외눈 거인 해골의 잔해를 훑었었다.
다시 나갈 줄 알았는데 옆에서 남아 지켜보고 있더라니.
“그래. 이 실 끝을 잡고 있어라. 잡아당기지 말고 밀어 넣지도 말고.”
함정 실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당긴 뒤 이실리테에게 쥐여주고 자물쇠 따기 도구를 꺼내 자물쇠를 딴다.
철컥, 찰칵 찰칵찰칵.
연필 굵기의 봉을 넣어 심을 누르고 핀 역할을 할 도구 네 개를 넣어 홈을 맞추자 차칵 작은 진동과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이실리테가 잡고 있던 실을 건네받은 뒤 보물상자 뚜껑을 천천히 열며 잡고 있던 실을 똑같은 속도로 밀어 넣자 뚜껑이 열리며 뚜껑에 함정실이 연결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함정 실을 잡은 뒤 뚜껑을 오픈하자 상자 안쪽 함정의 구조가 보였다.
녹색 액체와 은색 액체가 담긴 유리 플라스크. 두 개가 섞이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안쪽을 다 녹여버리는 식이다.
주재료인 녹색 시약을 들어 반대쪽 벽에 집어 던지자 챙강 소리와 함께 돌벽이 조금 녹아내린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실리테는 보물상자 내용물을 확인하고 작게 탄성을 흘렸다.
=금화에요, 주인님.=
안에 들어있던 것은 금화 3닢과 구리반지 하나, 약간 가공된 새끼손톱 크기의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세 알이었다.
“이 구리반지도 마도기겠지. 4계층의 숨겨진 보물상자라서 그런가 보상이 상당하군.”
내용물을 챙기고 이실리테와 함께 방을 나가자 단풍나무 기름을 시체 더미에 다시 뿌리던 안느가 돌아본다.
=어. 보물상자에서 좋은 거 나왔어?=
=금화 3닢이랑 보석 세 개, 구리반지 하나 나왔어.=
=구리반지는 마도기겠네. 횡재했는걸.=
“그 시체를 태우는 건 언제 끝나지.”
=이제 거의 다 됐어. 세 번째 기름을 뿌렸으니까 불길이 사그라들 때쯤이면 다 재가 될 거야.=
실제로도 푸른 불길에 뒤덮인 시체 무더기는 형태를 거의 잃고 까맣게 변해있었다.
=돌아갈 거면 올라가자.=
“끝까지 안 봐도 되는 건가.”
=응.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축성받은 기름으로 불태웠으니 미궁도 잿가루가 된 시체를 다시 재활용하지 못할 거야.=
푸른 불길을 약간 애잔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하는 안느. 과거에 마음의 상처를 입기라도 한 걸까.
푸른빛에 물든 안느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환인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 계단을 돌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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