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210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6일차 야영도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갔다.
=오늘도 습격은 없었네에에.=
체온 조절 침낭 아래에서 꾸물거리다 기어 나온 안느가 한껏 기지개를 켜며 말한다.
바들바들 떠는 몸짓에 바짝 늘어난 크롭티가 슬금슬금 움직이다 주르륵 말려 올라가 탐스러운 젖무덤이 드러났지만, 안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시 내리곤 하품했다.
=이만큼 별일 없는 게 특이한 거야?=
=응. 미궁을 배회하는 이형종이 공격해오는 게 보통은 당연하니까. 내가 겪은 최악은 하룻밤 새 6번 습격받은 거였어.=
=…….=
=자다 깨서 싸운 뒤 전투 흔적을 정리하고 흥분을 가라앉혀서 겨우 잠들었더니 또 습격해오고 그걸 정리한 뒤 잠들까 말까 할 때 또 습격해오고…….=
침낭과 모포를 개면서 그걸 상상해본 이실리테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안느도 후우, 깊은 탄식을 흘렸다.
=자다가 5번이나 깰 정도면 거의 못 잤을 거 같은데, 그날은 어떻게 했어?=
=다섯 번째 습격받았을 때가 새벽 정도였거든? 결국 다들 자는 걸 포기했는데 거짓말같이 습격이 딱! 멈췄지. 그날 하루 다들 짜증 내고 신경질 부리고 장난 아녔어~.=
=……정신 침해도 심각했을 거 같은데.=
=내 말이. 10일 일정이었는데 절반도 못 하고 나흘 만에 미궁 빠져나갔잖아.=
=탈취 마도구랑 기척 차단 마도구 덕분이려나……. 안느, 성수포로 얼굴 닦고 이부자리 정리해.=
=고마웡.=
=주인님, 여기 커피요.=
“고맙다.”
마지막 불침번이어서 비상의 옆구리에 편히 기대고 앉아 커피를 받은 환인은 꾸물거리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안느를 구경했다.
팬티 같은 짧은 회색 숏팬츠와 젖무덤만 겨우 가리는 쫀쫀한 노란색 크롭티를 입고 주섬주섬 모포와 침낭을 챙기는 슬렌더 체구의 은발 포니테일 플뢰.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동작 하나하나가 야하다.
허벅지를 벌릴 때마다 좁은 바짓가랑이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보지 둔덕이라던가 엉덩이골을 파먹고 있는 숏팬츠에 자다 깬 직후라서 그런지 크롭티를 살짝 밀어내며 존재감을 피력하는 젖꼭지, 살랑거리는 은발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등.
=손만 갖다 대면 촤작! 하고 저절로 정돈되는 침구는 개발 안 되려나.=
고양이처럼 엎드려 통통한 대음순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침낭을 접는 안느의 중얼거림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이실리테의 얼굴을 보았다.
둘 다 얼굴에 약간의 피로감이 묻어나고 있다.
“안색이 별로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환인의 커피 냄새를 킁킁 맡고 있던 비상이 작게 울며 고개를 기울인다.
쿠우?
나?
“저 둘 말이다. ”
어제는 체력과 위상력이 거의 바닥날 정도로 싸웠다. 회복이 덜 됐을 수도 있겠지.
실제로 안느의 하얀 허벅지와 옆구리, 가느다란 팔뚝에는 아직 멍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보통 자기 전에 남은 위상력으로 치료술을 써서 그날 있은 전투의 흔적을 치료하는데 어제는 그러지도 못할 만큼 위상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거겠지.
때마침 안느가 자기 허벅지와 옆구리의 멍 자국을 살피더니 이실리테에게 다가가 그녀의 셔츠 밑단을 훌렁 들어 올린다.
=꺅?! 뭐 하는 거야!=
=좀 벗어봐. 너도 어제 몇 대 맞은 거 봤다구.=
=괜찮아! 괜찮…… 으잇!=
바둥거리는 이실리테의 하얀 셔츠를 풍만한 젖무덤이 드러나도록 가슴 위까지 올리고 급기야 바지까지 무릎 아래로 내려버린 안느는 가벼운 치유 술법을 외워 손바닥에 빛의 물질을 생성해낸다.
그리고 그걸 연고처럼 손바닥에 떠서 이실리테의 골반에 난 멍 자국과 왼쪽 윗가슴골의 멍 자국에 발라주니 멍이 빠르게 사라졌다.
남은 것으로 자기 몸에도 발라 치료한 안느는 빨개진 얼굴로 옷차림을 바로 하면서 자신을 흘겨보는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그런 몸으로 오늘 싸우기 시작하면 여기저기 쿡쿡 쑤시는 것 때문에 움직임이 굼떠졌을걸?=
=난 재생력이 좀 있어서 이 정도면 금방 사라지거든!=
=그래서 안 고맙다고?=
=……고마워.=
=오냐.=
킥킥 웃는 안느와 뾰로통한 표정의 이실리테를 바라보던 환인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기도하듯 잡은 뒤 평온의 파동을 쏘았다.
모닥불로 인해 붉게 물든 감옥 같은 방 내부가 몸과 마음을 포근히 감싸는 회색 빛무리로 가득 차고, 어리둥절해하던 안느와 이실리테는 그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 이거…… 평온의 파동….=
=후아…….=
사람에게는 평온을 주고 죽은 자에게는 정화와 성불을 돕는 영혼사의 기술. 생각보다 효과가 더 큰것 같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 피로한 느낌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발그레하게 홍조가 든 호박색 머리카락의 극절 미녀와 은색 머리카락의 초절 미녀.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 폭의 그림 같다.
스마트폰이 멀쩡했다면 사진으로 찍어서 남겼을 정도다.
쿠엣.
“음. 그렇게 좋으냐.”
쿠우~ 쿠쿳!
“매일 써달라고……. 그것도 괜찮겠지.”
환인의 어깨와 목에 얼굴을 비비며 친밀감을 표시하는 비상에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이었다.
아침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고 16층으로 내려온 일행은 에틴 스켈레톤, 올빼미곰 해골, 버그베어 좀비 등을 해치우며 곧장 16층을 돌파해 17층으로 내려섰고.
=어어? 저거 해츨링인데 왜 여기 있는 거야?=
가장 가까운 63m*48m 정도 되는 넓은 방에서 시내버스 크기의 거대한 비늘 생명체와 맞닥트렸다.
도마뱀을 수백, 수천 배나 키운 듯한 외형. 옆구리나 머리 일부가 벗겨져 뼈가 드러난 모습은 파충류가 죽어 뼈에 가죽만 들러붙은 모양새다.
=좀비니까?=
=그런가?=
그런 괴물이 하나만 남은 회색 안구를 데굴, 굴려 환인 일행을 노려보았다.
쿠와아아악!!
썩은 내를 내뿜는 포효에 안느가 성벽의 방패를 내세우고 달려가며 소리친다.
=최소 5급짜리야! 화염 숨결이나 독 숨결을 뿜는 놈이니까 정면은 피해!=
=응!=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안느를 외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던 해츨링 좀비는 조그마한 짐승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푸욱 콧구멍에서 유독 가스를 내뿜으며 통나무 같은 앞발을 내려쳤다.
그것을 받아내기는 부담스러웠는지 횡이동으로 피하는 안느.
콰아앙!
앞발이 내려꽂힌 장소에 거미줄 같은 금이 만들어지며 땅이 살짝 흔들린다. 직후 안느가 성벽의 방패를 단두대처럼 내려찍어 헤츨링 좀비의 앞발가락 몇 마디를 끊어버린다.
그 피해에 해츨링 좀비가 크왁 턱뼈가 군데군데 드러난 아가리를 쫙 벌리며 물어뜯으려 한다.
투콱!
하지만 옆구리에 가해진 큰 충격에 밀려나며 헛입질을 하고만 해츨링 좀비는 고개를 홱 돌려 자신에게 타격을 준 이실리테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앞에 두고 드러낸 틈을 두고 볼 안느가 아니었다.
철컥 왼손의 방패를 팔뚝으로 옮기고 두 손으로 천벌의 망치를 움켜쥔 안느가 위상력을 주입, 전력을 다해 눈앞에 드러난 해츨링 좀비의 어깨를 내려찍는다.
투쾅!!
크우아아악!!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망치의 헤드에 적중한 어깨뼈가 움푹 내려앉고 앞다리가 덜렁거린다.
왼쪽 앞발의 기능을 상실한 피해지만 내버려두면 조금씩 재생하기 시작할 터.
안느는 재차 자신을 돌아보며 물어뜯기 위해 악어처럼 길쭉한 주둥이를 들이미는 해츨링 좀비의 안면을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로 후려치며 어그로를 끈다.
쾅, 콰광! 뻐걱!
해츨링 좀비의 주의가 온통 안느에게 쏠린 틈을 타 이실리테는 정신없이 너울거리고 휘둘리는 채찍 같은 꼬리를 주시했다.
저걸 내버려둔다면 이후 전투가 상당히 난잡해질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잘라버려야 한다.
이실리테는 조용히 꼬리를 응시하다가 기회가 왔을 때, 비늘 가죽이 벗겨져 뼈가 드러난 지점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레드릭을 내려쳤다.
뻐벅!
크에에엑!
고개를 번쩍 쳐드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한 바퀴 구르며 사지를 버둥거리는 헤츨링 좀비.
갑작스러운 사태에 안느가 힐끔 그쪽으로 시선을 주자 이실리테가 위상력에 뒤덮인 레드릭을 땅에 반쯤 꽂아 넣고 있었고, 그 옆으로 해츨링 좀비의 통나무 두께만 한 꼬리가 잘려 나뒹굴고 있는 게 안느의 눈에 들어왔다.
=잘했어!=
이후 전투는 비교적 수월하게 흘러갔다.
해츨링 좀비의 앞뒤로 붙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핑퐁하듯 어그로를 주고받으며 해츨링 좀비를 천천히 바스라트려나갔다.
물론 위험한 상황도 몇 번 벌어졌다.
이실리테가 뒷다리에 채이거나 안느가 돌진에 들이받혀 넘어질듯이 1미터 정도 뒤로 밀려났던 것.
그렇게 전투가 10분가량 이어졌을 때 상황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콰광!!
쿠오오오옷!!
안느의 망치에 정수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에 금이 가자 분노한 해츨링 좀비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아가리를 쩍 벌려 화염 숨결을 토해내려 한다.
그때 발생한 허점에 해츨링 좀비의 턱 밑으로 들어간 안느가 성벽의 방패를 두손으로 잡고 올려쳐 주둥아리를 닫게 만들었고, 화염 숨결 발사를 위해 해츨링 좀비가 움직임을 멈춘 사이 등을 타고 올라간 이실리테가 5m나 점프,
=이야압!!=
콰득!
레드릭을 내려찍어 해츨링 좀비의 두개골을 관통했다.
완벽하게 관통시키진 못했지만 정수리가 박살난 해츨링 좀비는 머리에서 시커먼 연기 같은 안개를 뿌리며 쿵, 쓰러졌다.
거체가 무너지는 것을 피한 안느가 후우, 짧은 숨을 내쉬며 해츨링 좀비의 머리에서 내려온 이실리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 공격 멋있었어.=
대검을 놓고 바닥으로 내려온 이실리테도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다가 안느의 손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안느가 천벌의 망치로 두개골에 금을 내놓은 덕분이야. 아니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거야.=
정수리에 2m가 넘는 대검을 꽂은 채 다시 죽음을 맞이한 헤츨링 좀비를 돌아보는 두 사람.
안느는 피식 웃으며 이실리테의 등을 토닥였다.
=넌 미궁 경험도 적고 이형종을 상대해본 적도 별로 없잖아. 이만한 일을 해낸 건 칭찬받아 마땅해.=
=……고마워.=
“…….”
환인은 그런 두 명을 지켜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그녀들에게 다가가 범용 하급 회복제를 건넸다.
뒷발에 옆구리를 차인 이실리테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뼈에 금이갔고 피하 출혈이 일어난 상태일 것이다.
수 톤의 강타를 정통으로 막은 안느도 속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은 상태일 거고.
“둘 다 고생했다.”
=응? 물약 아끼고 위상력으로 치료해도 되는데.=
“현재로서는 위상력이 더 중요한 자원이다. 회복은 회복제로 하지.”
고개를 끄덕이고 회복제를 마신 그녀들의 목과 머리에 손을 올려 원기 방출로 기력을 채워주며 묻는다.
“질병에 걸린 느낌은 없나.”
=어. 난 괜찮아. 이슬이도 괜찮아 보이네.=
레드릭을 회수하고 위상석 탐지 도구를 꺼내던 이실리테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걸 해츨링이라고 부르나. 종족은 용종인가.”
=진짜 용종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일단 학자들은 저것들도 용종이라고 결론을 내렸어.=
“음.”
=휴으. 비늘색을 보면 붉은비늘 같은데 17층에 이런 게 튀어나오다니, 여긴 진짜 장난 없네.=
환인도 말없이 레드 스케일 해츨링 좀비의 거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들이 싸우는 것을 보며 판단한 건데, 여기까진 자신도 어떻게 할 수는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이 이상 커지거나 이보다 더 등급이 높다면…….
‘무기를 바꾸지 않는 한 못 죽이겠군.’
불현듯 공격 능력의 부재가 아쉬워졌다.
몸 안의 훈기와 한기를 위상력처럼 다룰 수는 없는 걸까. 그녀들처럼 무기에 이질적인 힘을 담을 수만 있다면 공격력의 부재가 단숨에 해소될 텐데.
=위상석은 안 나왔어요. 안느, 이건 아마 온몸이 돈 덩어리겠지?=
=으음. 일단은 뼈도 무진장 단단하고 비늘도 튼튼하니까…….=
=다 들고 가는 건 무리겠고 일단 해체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자. 도와줘.=
=응.=
그렇게 안느와 이실리테가 한참을 낑낑거렸지만, 일행이 가진 날붙이로 비늘 가죽을 벗기는 것은 무리였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앞다리와 뒷다리를 부수다시피 해서 뜯어내고 어지간한 성인의 덩치만 한 머리와 떼어낸 꼬리만 회수한 것.
이것만으로도 빈자리가 거의 다 사라졌다. 앞으로 부산물을 얻는 만큼 야영용 장작을 버려야 할 판이다.
일행은 몸통만 남은 해츨링 좀비를 남겨두고 다시 이동을 개시했다.
17층에는 함정이 그리 많지 않았다.
잘 위장된 추락 함정과 벽에서 창이 연속으로 발사되는Fusillade of Spears 함정, 독극물이 발린 다트 함정 문과 산성액이 채워진 화살 함정 문 정도였던 것.
위화감이 느껴지는 곳은 어김없이 함정이 있었고 환인의 눈썰미를 피해 가는 함정은 없었기에 함정 때문에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7층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는 안느피셜 5급으로 분류되는 미이라 투사 네 마리였다.
“너희들은 쉬어라. 저건 내가 정리하지.”
=어?! 네 마리잖아! 위험…… 앗!=
뒤에서 안느가 다급히 말리려 들었지만, 환인은 축성받은 마스크를 제대로 쓰고 흑창을 든 뒤 으어어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그 위에 수갑手?과 각갑?을 낀 네 마리 인간형 괴물들의 틈에 뛰어들었다.
미이라 투사 4마리는 적 하나를 상대로 연합해서 용감히 싸웠다.
동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자리를 잡고 주먹과 발에 위상력을 담아 맹렬히 휘두른다. 유래를 알 수 없는 생전의 전투 기억을 의심하지 않고 전력으로 투법?을 펼진다.
한 대라도 맞추면 경직이 생긴 틈을 타 갖은 공격을 쏟아부어 말 그대로 다진 고기로 만들 수 있는 연계기와 연합기.
하지만 미이라 투사들은 그 한 대를 맞출 수 없었다.
뒤를 점거해 플라잉 킥을 날리면 창 자루로 슬쩍 궤도를 바꿔 다른 미이라 투사를 공격하게 만들고 달려들어 팔콘 펀치를 날리려 하면 어느샌가 옆으로 비껴 과일을 깎듯이 팔을 깎아버린다.
투신법??으로 움직일라치면 어느샌가 창 자루가 다리를 걸어 꼬이게 만들고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반격을 넣을라치면 자신의 공격이 옆의 미이라 투사를 때리고 있다.
그런 미묘한 균형도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서걱.
그어—
콰득.
게으어—
미이라 투사 하나의 공격을 흘려넘기기가 무섭게 바로 옆의 투사에게 밀어버린 환인은 두 마리가 엉켜 넘어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재차 플라잉 킥을 날리는 다른 미이라 투사의 허벅지 안쪽을 흑창으로 자른 뒤 창을 회전시키듯 휘둘러 창 자루로 허벅지 안쪽 뼈를 후려쳐 부수고 물 흐르듯 나머지를 잘라 끊어버린다.
=헐. 이슬아 방금 봤어? 1초 만에 한 부위에 공격을 세 번 넣는 거?=
=으응…….=
촤악 뻑! 쓰걱!
=히익. 목을 절반쯤치고 창대로 목뼈를 부러트린 뒤에 날로 다시 나머지를 잘랐어! 왜 저러는 거야? 그냥 치면 안 되나?=
=…창날이 상하는 걸 걱정하시는 거 같은데…….=
콰직! 촥!
=앗, 이번에는 그냥 팔뼈를 부수고 잘라버렸어!=
=……….=
처음 1분은 미이라 투사의 공격을 피하면서 팔다리를 툭툭 치기만 하더니, 1분이 지나자 네 마리 미이라 투사가 말 그대로 미/이/라/투/사가 되어버리는 데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안느와 이실리테는 기가 막혔다.
척 봐도 미이라 투사 네 마리의 합격은 자신들의 연계기보다 더욱 뛰어난 점이 곳곳에 보였다.
거기다 알려진 등급만 해도 5급. 만약 자신들이 저 넷을 상대로 싸웠다면…….
‘틀림없이 졌을 거야.’
이실리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주먹에도, 다리에도 위상력이 뒤덮여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다 4마리나 되니 저 둘이 따로따로 협공했다면 안느는 좀 버텼겠지만, 자신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패했겠지.
이형종과 싸움에서 진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한다.
그제야 미궁의 위험성을 체감한 이실리테는 사지가 잘려 나가 쓰레기처럼 뒹구는 미이라 투사 근처에서 가만히 서 있는 환인을 바라보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온한 모습으로 사색에 잠겨있는 주인님.
주인님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어서 여기까지 내려오신 거구나.
여자친구들의 말 없는 존경과 흠모를 받고 있던 환인은 덤덤하게 자신이 해낸 일을 두고 분석 중이었다.
‘이게 시각화의 정체였군.’
어제 해골 전사를 통해 시험해보려다 실패했던 것을 미이라 투사에게 적용해본 환인은 시각화의 정체를 깨닫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자신은 적의 공격과 움직임을 읽는 것에서 그쳤다.
그런데 그게 한층 더 진화해 이제는 적을 때리고 공격하면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할지 ‘눈’에 보이게 된 것이다.
물을 뿌리면 바닥에 떨어진다. 물을 끓이면 증기가 생기고 주전자를 기울이면 안의 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자신이 공격하면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게 되고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당연하다는 것처럼 눈에 보인다.
토너먼트 결승전 당시 찾아온 아렐=케드윈은 자신과 치열하게 나눈 가상의 전투와 회화로 큰 깨달음을 얻고 돌아갔다.
환인도 당시에 얻은 것이 없진 않았다.
상대를 읽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식도 있다는 것. 그리고 아렐=케드윈이 보여준 반격과 방어와 공격의 일부 기술을 지식으로 얻은 것이다.
그중 후자인 기술적인 요소는 대축제가 끝난 뒤 안느와 이실리테하고 대련해줄 때 그녀들을 때려보며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얻은 경험은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소울파이어와 벌였던 전투에서 느꼈던 격렬한 분노와 짜증, 이후 홀로 미궁을 탐색하며 예리하게 다듬어진 감각과 차갑게 가라앉은 사고가 자신을 변화시켰다.
변화는 시각화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 시각화를 본격적으로 인식한 것은 여자 친구들이 붉은비늘 해츨링 좀비과 싸울 때였다.
왠지 그녀들의 다음 움직임과 그로 인해 벌어질 현상이 짧게짧게 눈에 보였던 것.
‘내 읽는 능력과 아렐=케드윈의 보는 능력이 합쳐졌다.’
고개를 든 환인은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 친구들에게 다가가며 이 현상을 결론지었다.
‘전투로 한정한 짧은 미래시다.’
비록 2초에서 5초 사이로 짧게 시각화가 이루어지지만 어쨌든 적의 이후 행동이 ‘보인다’. 이걸 활용한다면 앞으로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는 일은 대폭 줄어들 거다.
그걸 여자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자 둘은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읽는 거 하고 결과가 보이는 거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움직임이 보이면 그걸로 급소든 뭐든 찔러버리면 끝이잖아.=
=결과가 보이는 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안느 말대로 적의 공격을 읽고 빈틈과 허점을 치면……=
끝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 친구들을 바라보던 환인은 말없이 그녀들의 무릎과 허벅지, 어깨와 허리, 옆구리 등을 툭툭 치고 건드렸다.
=꺄?!=
=으응!?=
고작 다섯 번의 터치로 안느가 아래, 이실리테가 위인 정상위 체위를 하게 되자 그녀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지만.
툭툭, 턱.
이번에는 세 번의 터치로 그녀들을 자신이 바라는 모양새로 만들었다.
=야, 야아아! 뭐 하는 거야!=
=아니야! 내가 일부러 이러는 게……?=
이번에는 이실리테가 아래, 안느가 위인 기승위 자세가 되자 팔다리가 얽힌 고양이처럼 바동거리던 둘이 움직임을 딱 멈추고 환인을 돌아보았다.
=어. 이거 설마?=
=주인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서로 엉겨 붙어있는 두 아가씨의 얼굴에 황망함이 번져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