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208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저 문만 해도 높이가 3m에 달하는데 허리를 숙이다니, 키가 4미터에 가까운 것을 깨닫는 순간 안느가 이실리테와 함께 앞으로 나서서 방패를 세우며 묻는다.
=적? 어디?=
큐삣.
=응? 앞?=
환인은 쌍두 해골 거인의 안와 4개 안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본 순간 팔뚝에 소름이 살짝 돋는 것을 느꼈다.
이 감각은 그때의 우르거와 비슷한데.
주머니에서 빛 막대를 꺼낸 환인은 달칵, 손잡이를 돌려 불을 켠 뒤 해골 거인의 발치로 던졌다.
쉬리리릭 부메랑처럼 회전하며 날아간 빛 막대는 정확히 쌍두 해골 거인의 근처에 멈추어 섰고, 적의 모습을 그제야 확인한 안느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와, 에틴의 해골이잖아. 미궁이 크게 성장했는데?=
5급이라. 봉?으로 착각할법한 천칭을 내려다보았다. 강도 강화와 내구도 회복 기능이 있으니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충분하지만…….
영혼 구슬이 있었다면 좋을 텐데.
첫날 하급 어둠 정령을 만났기에 중간중간 하나둘 정도는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날 이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때 때려서 친구들과 함께 모습을 감춘 건가 하고 생각했을까.
그 때문에 현재 왼팔에는 영혼 구슬이 하나도 없는 상태다.
=안느. 저거 얼마나 강해?=
=저거 공식적으로 5급으로 분류해. 부패한 인간 다섯이 모여도 상성 탓에 저거 못 이길걸?=
=…….=
=너 우르거랑 싸워봤지?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뼈가 무지막지하게 단단하니까 베는 게 아니라 끊어치는 느낌으로 때려. 가자.=
=응.=
간단한 전법을 짓고 달려 나가려는 두 여자의 뒤에서 환인이 소리쳤다.
“주변에 함정은 보이지 않지만 방심하지 마라!”
=네!=
=응!=
그워어어어!
달려오는 두 여자를 발견한 에틴 스켈레톤도 왼팔을 잡아뽑더니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달려든다. 그리고 빛 막대가 만들어내는 광원 안에서 격돌하는 셋.
콰광!
에틴 스켈레톤이 땅을 내려치자 바닥이 터져 나가고, 그걸 목격한 이실리테가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자기 팔을 뽑아 무기로 쓰다니!=
=우리 무기가 위협적이라고 받아들인 거야! 너 맞으면 100% 어디 부러진다! 조심해!=
=내 걱정은 말고 너나 걱정해!=
=아하하핫! 여기다, 이 뼈 대가리야!!=
쾅쾅!
위상력이 깃든 천벌의 망치로 성벽의 방패를 쾅쾅 두드리자 호박색의 빛이 짧게 짧게 터지며 우렛소리가 난다.
그 소음과 빛에 어그로가 끌린 에틴 스켈레톤이 손에 쥔 왼팔을 스윙하듯 안느를 향해 크게 휘두르고.
부웅 콰가각!
방패를 살짝 기울여 위로 튕겨낸 안느는 곧장 천벌의 망치로 에틴 스켈레톤의 무릎 관절을 힘껏 콰각! 내려찍었다.
그 공격이 효과적이었는지 자세가 단번에 무너지며 오른팔로 땅을 짚는 에틴 스켈레톤. 이실리테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땅을 짚은 팔의 팔꿈치 관절을 전력으로 후려쳤다.
=하앗!=
콰드득!
구오오오~!
팔꿈치 관절이 떨어져 나가며 오른팔과 오른팔이 쥔 왼팔이 동시에 튕겨 나가고, 두 팔을 잃은 4미터의 거체가 쿠웅, 굉음을 내며 옆으로 쓰러진다.
=간다!!=
콰앙!!
안느가 방패를 땅에 내려찍은 뒤 중전차처럼 땅을 가르며 에틴 스켈레톤의 복부로 돌진해 후려치자 굉음과 함께 뼈뿐이라 가볍다 해도 그 큰 거구가 들썩거렸다.
이어 에틴 스켈레톤의 상체로 쏟아지는 안느의 매서운 타격.
이실리테는 자신이 공격할 틈을 주기 위해 안느가 일부러 어그로를 끌어 가슴 부분을 공격한다는 걸 깨닫고 레드릭의 힐트를 최대한 끝으로 잡은 뒤…….
=으아아앗!=
자신에게 정수리를 보이는 에틴 스켈레톤의 두개골을 장작 패듯 내려쳤다.
‘저게 5급 해골인가.’
두 명에게 얻어터지면서도 자기 팔을 회수하러 가는 거대 해골.
그 해골과 치열하게 싸우는 여자 친구들을 바라보던 환인은 고개를 돌려 바닥을 낱낱이 살핀다.
첫 번째 스캔에서 물리적인 함정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술법 함정의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기에 환인은 돌조각 여러개를 손에 든 채 의심 간다 싶은 곳에 툭툭 던지며 함정 유무를 파악해 나간다.
그러던 중…….
큐웃.
“…….”
뒤따라오던 비상의 경고에 고개를 든 환인은 돌조각을 모두 버리고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흑창을 꺼내 쥐었다.
직후 북쪽 벽에 난 두 개의 문, 그중 11시 방향의 문이 덜컹덜컹 흔들리다 천천히 열리더니 신체 일부가 영혼처럼 일렁이는 기사 차림의 해골이 그으으 낮은 귀곡성과 함께 걸어들어왔다.
키는 환인과 비슷한 수준. 약간 누런 두개골의 눈구멍 속에서 타오르는 녹색 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느낀 환인이 비상에게 지시를 내렸다.
“비상. 물러서라.”
쿠엣.
힐끔, 여자 친구들을 보니 이미 에틴 스켈레톤의 두개골 하나를 박살 낸 채 나머지 하나를 부수기 위해 문자 그대로 에틴 스켈레톤의 뼈를 분쇄하고 있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안느가 믿는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에틴 스켈레톤에 다시 집중한다.
환인도 반혼半? 기사를 응시하다가 흑창을 집어넣고 다시 천칭을 꺼내 들었다.
저런 딱딱한 것을 흑창으로 후려치다간 별다른 내구 증가 기능도 없는 흑창의 뼈 날은 순식간에 마모될 터. 어떤 이유에서인지 5급 반전 개체의 가죽도 베어내는 흑창이다. 낭비할 수는 없다.
천칭을 들고 창의 자세를 잡은 환인은 후우우 작게 숨을 내뱉으며 몸 주변의 위상류를 자극해 더욱 단단히 만든다.
토너먼트가 진행되는 근 한 달간 유르파와 함께 위상류 훈련을 하며 터득한 가감법이다.
이렇게 위상류를 자극해 단단히 하면 위상력이 깃든 어지간한 상태 이상 공격이나 속성 공격은 대부분 흘려낼 수 있다.
축성 받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저 반영혼 반해골이 어떤 해로운 것을 뿌릴지 모르니 몸을 지키기 위한 최저한의 보호다.
환인의 자세를 목격한 반혼 기사는 멈칫하는 것처럼 걸음을 멈추었다가…… 낡았지만 척 봐도 기사검 같은 무기를 세워 어딘가의 정통 기수식 같은 검로를 그린 뒤 자세를 잡는다.
환인은 속으로 피식 비웃었다. 죽어서 미궁에게 재활용당하는 주제에 기사도를 따르는 건가.
그리 생각하며 환인은 자신도 비웃었다.
저 반혼 기사의 검술이 얼마나 뛰어날지, 아렐=케드윈 무사단장처럼 자신의 심장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줄지 기대감을 품었기 때문이다.
……크랏!
“…….”
환인과 반혼 기사가 동시에 붙는다. 녹슬었지만 예술품 같은 자태를 잃지 않은 130cm 날의 기사검이 환인의 팔과 허리, 목줄기를 베어내기 위해 독수리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휘둘러진다.
‘……한숨 나오는군.’
첫 공격에 반혼 기사의 수준을 파악한 환인의 눈이 조그맣게 찡그려진다.
쳐낼 것도 없이 종잇장 차이로 슬쩍 피한 환인은 이어 심장과 허벅지, 머리를 노리고 재차 찔러 들어오는 검의 7가지 궤적을 포착한 순간 분노와 함께 짜증이 불같이 일어났다.
아렐=케드윈과 나누었던 심상 대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접하기 그지없는 검로.
이따위를 보자고 기대감을 품었던 건가.
“…….”
환인은 뿌득, 어금니를 깨물고 반혼 기사가 보이는 빈틈이란 빈틈에 천칭을 모조리 꽂아 넣었다.
뻐버벅! 콰각, 투뚝 퍼버버벅!!
크라락!!?
삽시간에 11번의 공격을 얻어맞은 반혼 기사가 비명 같은 소릴 내뱉은 것에 화가 난 환인이 두개골을 후려치자 꽝! 쇳덩이로 쇳덩이를 때린 소리가 터진다.
휘청이며 몸 일부를 구성하는 옅은 영혼의 불길이 당황한 것처럼 일렁이지만, 분노를 머금은 천칭은 쉬지 않고 허공을 누비며 반혼 기사가 만들어내는 빈틈과 허점을 두들겼다.
쾅! 꽝! 떠엉! 터더덩!
반혼 기사가 자세를 잡으려 하면 무릎을, 어깨를, 팔목을 후려쳐 계속 자세를 무너트리며 일방적으로 공격을 쏟아붓는다. 쏟아부으면서 자신이 왜 이렇게 짜증이 난 걸까 생각했다.
기대감을 배신당해서?
아니다. 이건 차후에도 심장이 뛰는 자극적이고 짜릿한 전투를 겪을 일이 거의 없을 거라고 예감한 데서 온 짜증이다.
저 아렐=케드윈처럼, 자신도 가슴 뛰는 한때의 전투를 그리워하며 나이를 먹어갈 거라고 예견한 데서 온 짜증이었다.
크르라락…!
반혼 기사의 신체 일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며 공격하려는 골격의 움직임이 사라진 것을 꿰뚫어 본 환인이 삽시간에 여섯 걸음을 물러나자마자 후와아악 녹색이 스며든 영혼의 불길이 반경 3미터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더 이상 반혼 기사와 싸울 마음이 사라진 환인은 불길이 사그라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달려들며 어깨를 한껏 젖혀 찌르기 자세를 잡고.
……크륵.
방금 공격의 경직 때문인지 움직이지 못하는 반혼 기사의 안와 속 녹색 불길을 응시하며 손목을 돌려 회전을 먹이는 것과 동시에 반혼 기사의 미간을 찔렀다.
콰삭!
=하압!=
쾅!!
파각!
성벽의 방패에 위상력을 가득 담아 땅에 떨어진 에틴 스켈레톤의 마지막 두개골을 있는 힘껏 내려찍어 박살 낸 안느가 재빨리 방패를 회수해 내세우며 에틴 스켈레톤의 뼈다귀를 살폈다.
=휴우.=
더 이상 재생되고 합쳐지려는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던 안느는 심각한 얼굴로 박살 난 에틴 스켈레톤과 저쪽에서 환인이 처리한 이형종을 번갈아 바라본다.
=안느, 고생했어.=
=응? 어, 이슬이도 고생했어. 처음치고는 잘 싸우던걸?=
=으응.=
칭찬받았지만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는 이실리테는 고개를 돌려 방을 살피고 있는 환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안느, 주인님이 잡은 이형종도 강한 이형종이지?=
=소울파이어? 객관적으로 에틴 스켈레톤보다 더 세지. 1:1로 붙으면 소울파이어가 이길걸.=
=…….=
사실을 알려주자 이실리테는 작게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환인을 선망과 흠모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 일련의 행동에 속으로 피식 웃은 안느가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 때렸다.
=아야. 왜 때려?=
=도령 얼굴에 구멍 나겠다.=
=…….=
쓴웃음을 짓고 위상석 탐지 도구로 에틴 스켈레톤을 훑던 이실리테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나도 언젠가 주인님의 곁에 설 수 있을까?=
=넌 지금도 충분히 강하고 또 계속 강해지고 있어. 그렇게 너만의 강함을 확립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령의 옆이나 뒤가 아니라 앞에 설 수 있을 거야.=
=…후후. 성투사님의 식견이야?=
=무려 6급 성투사님의 보장이라고. 그러니까 내 앞에 고개를 조아려라.=
=웃기지 마. 주인님보다 약하면서 조아리긴 무슨.=
=어어? 도령하고 비교하는 건 좀 비매너 아냐?=
=그러니까 주인님한테 대련에서 한 번이라도 이기고 그렇게 으스대란 말이야.=
약간 우울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 이실리테를 보며 안느는 속으로 웃었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여동생 같다고 할까.
그즈음 방을 다 둘러본 환인이 돌아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느. 이 에틴 스켈레톤과 저 이형종도 강화형인가.”
=어응. 저건 소울파이어라고 하는데 저거랑 이거랑…… 으음. 평범하지 않다고 해야 하나.=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란 말인가.”
=뭐 흔하지 않긴 한데…… 에틴 스켈레톤하고 소울파이어하고 등장하는 곳이 조금.=
에틴 스켈레톤과 소울파이어.
통역 기능이 작동한 게 아니라 고유명사처럼 단어가 그대로 귀에 들어왔다.
아렐=케드윈이 말했던 기간틱 라이노사우르스나 그랜드 비틀킹 캘러페이스, 에틴 스켈레톤과 소울파이어처럼 고유명사로 고착된 것은 영어로 들리고 그 외에는 통역 현상이 이루어지는 듯한데…….
‘이 통역 현상에 대해서도 좀 알아둬야겠군. 동작 방식이나 발동 이유 같은 것.’
환인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소울파이어의 기사검과 상대적으로 멀쩡한 철제건틀릿, 철제그리브, 철제 흉갑 등을 챙겨오는 이실리테를 부르고 비상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방에서 잠시 대기를 선언했다.
=여기서 기다리라고? 왜?=
“혼자 앞서서 주변을 살펴볼 생각이다.”
=잠깐, 도령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그건 너무 위험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주인님, 위험해요.=
말을 꺼내자마자 반대를 보이는 여자 친구들의 반응에 환인은 설명이 부족했다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덧붙였다.
“가서 싸우겠다는 게 아니다. 4계층에 내려오자마자 이형종이 갑자기 2단계가량 강해졌다. 지금 우리 상태를 보면 알겠지만, 조금 전처럼 이형종이 서너 마리 씩 몰려오면 일이 어려워져.”
전력을 끌어낸다면 3마리, 4마리도 잡을 수 있겠지만 한 무리를 잡고 한참 쉬고 또 한 무리를 잡고 한참 쉬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자 가서 살펴보고 이형종이 하나나 둘이 있으면 끌고 오겠다는 거야?=
“그래. 적어도 이 방에는 함정이 없으니 주변 방을 둘러보고 이형종이 보이면 풀링해오겠다는 거다. 두 마리 정도는 괜찮겠지. 내가 하나를 맡고 너희가 하나를 맡고.”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이 16층의 구조가 벌꿀 집처럼 방과 방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점과, 너희들은 철제 갑옷을 입어 시끄러운데다 야간 시력도 자신보다 안 좋아 이럴 수밖에 없다고 팩트를 꼬집자 둘 다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순간 도령이 미친 건가 생각했어.=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본다만.”
=반대로 말하면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면 도령 혼자 뒤집어쓰는 방식이잖아? 아무튼 조심해줘. 도령이 죽으면 우리들 심장 절반도 죽어서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될 테니까.=
“……염두에 두지.”
대답하고 몸을 돌리려던 환인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실리테의 시선에 멈칫했다.
‘안느가 그런 조언을 하기도 했고…….’
고민은 짧았다. 훈련에 관해서는 더 이상 기준치를 낮출 수 없지만, 방금처럼 상대적인 지표가 있다면 거기에 맞추어 칭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방금 전투는 잘했다. 안느와 나무랄 데 없는 호흡으로 실력을 발휘하더군.”
그녀의 작고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하자 보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이실리테의 얼굴에 기쁨이라는 화사함이 피어났다.
마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몸을 돌려 남쪽으로 난 문을 향해 걸어가자 뒤에서 대화가 들려온다.
=좋단다……. 주인님한테 칭찬받은 게 그렇게 좋아?=
=조, 조용히 해…!=
아웅다웅하는 두 아가씨의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탐사 방식을 전환해 홀로 16층을 탐색하며 1마리, 혹은 2마리씩 이형종을 풀링해 동료들에게 데려가던 환인은 혼자라는 사실에 부담감보다 홀가분함을 느꼈다.
삼림형 미궁으로 트립한 뒤 생존하기 위해 움직이던 때처럼 머리와 가슴이 냉정해지는 감각.
마침 주변 분위기도 그곳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아있어 마치 그때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소울파이어에게서 느꼈던 분노와 짜증도 어느새 냉정해진 사고에 휩쓸려 사라진 상태.
“…….”
환인은 아까부터 뒷목과 머리 안쪽을 간지럽히는 기묘한 감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현상일까.
다음 방으로 넘어가는 문 앞. 벽에 기대고 눈을 감자 감각이 예민하게 깨어난다. 숨을 멈추자 쿵덕거리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울리다가 그 소리마저도 페이드아웃하듯이 천천히 사라져간다.
들그럭. 다각……. 탁…….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소음이 귀에 들어오자 소음 자체를 분석하듯 머릿속으로 입체영상이 그려지며 소음을 내는 대상의 형태가, 동작이 만들어진다.
신기한 현상에 잠시 그 이미지를 느끼던 환인은 눈을 뜨고 소리 없이 함정 해제 도구 중 기름칠을 위한 피펫을 닮은 주입기를 꺼냈다.
그리고 기름을 녹슨 경첩에 골고루 뿌린다.
‘30… 29… 28…….’
30을 세고 문손잡이를 잡아 밀자 육중한 나무 문이 소리 없이 조용히 열렸다.
주먹만 지나갈 정도의 틈. 반사경을 살짝 넣어 문 너머 방을 구석구석 살핀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서 서성이는 세 마리의 이형종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는 상대적으로 멀쩡한 강철 검과 강철방패, 머리를 가리는 강철 투구를 쓴 갈색의 인간형 해골이 방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다른 이형종은 없다.
재차 해골 이형종에게 시선을 주자 기묘한 감각이 또다시 밀려왔다.
이번에는 미래를 보는 것처럼 세 마리의 해골 전사가 언뜻언뜻 여섯 마리로 늘어났다 세 마리로 줄었다를 반복한다.
이상한 느낌이다.
왠지 이렇게 때리면 이럴 것 같다, 저렇게 찌르면 저럴 것 같다는 게 시각화되어 보이는 느낌이다.
눈을 잠시 감았다 다시 뜨자 원래의 세 마리로 돌아왔다.
자신이 미치거나 돈 것은 아니다.
‘이건 아렐 케드윈이 이야기하던 현상과 비슷한데……. 좀 더 알아봐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해골 세 마리의 위험도를 살폈다.
소울파이어나 에틴 스켈레톤, 좀 전의 방에서 마주쳤던 부엉이 대가리의 올빼미곰 해골만큼의 위험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세 마리라고 해도 가능하겠지.
시간은 이제 오후 7시 정도. 저것까지 잡으면 17층으로 내려가는 길과 함정은 모두 뚫게 된다.
방에 설치된 함정도 술법 함정은 나오지 않았으니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되지만…….
‘그녀들의 기운이 많이 빠졌어.’
처음 에틴 스켈레톤과 싸운 이후 열 번을 넘는 전투를 치렀다. 그녀들의 체력과 기력, 위상력이 많이 소비되어있는데 이대로 17층에 내려가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더욱이 지도를 기억해둔 17층에는 쉴 장소도 마땅치 않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환인은 힘줘서 문을 밀었다. 끼익 경첩이 우는 소리가 작게 나면서 활짝 열린다.
달그락.
문이 열렸지만 세 마리의 갈색 해골들에서 반응이 없다. 올빼미곰 해골은 그 즉시 이쪽을 보고 달려왔었는데 저것들은 감각이 무딘 듯 하다.
주머니에서 미리 주워둔 주먹만 한 돌조각을 꺼내 해골 전사 세 마리중 중간에 있는 놈에게 던진다.
동시에 세 마리가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오는 것이 시각화되어 먼저 이루어졌다.
“……?”
땅!
5초 뒤, 돌조각이 투구를 맞춘 탓에 소리가 크게 나자 해골 전사 세 마리가 그 즉시 돌아보더니 시각화와 정확히 일치되는 형태로 달그락! 쏜살같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
환인은 몸을 돌려 함정이 있는 곳을 피해 여자 친구들과 비상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