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207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부패한 인간을 해치우고 동쪽 대형 방의 대칭인 서쪽 대형 방으로 나온 환인 일행은 4마리의 이형종과 마주쳤다.
허연 안개 뭉치 같은 유령 세 마리, 해골 개 한 마리.
=내가 할게.=
다부진 표정으로 달려 나간 이실리테가 레드릭을 휘둘러 네 마리를 문자 그대로 썰어버린다.
환인의 앞에서 방패를 세우고 대기하던 안느는 레드릭이 이형종을 타격할 때만 언뜻언뜻 빛나는 것을 목격하곤 오, 작은 탄성을 흘렸다.
=저걸 벌써 저기까지 하네.=
“저게 대단한 건가.”
다른 직업자들과 다르게 위상력을 직접 다루지 않다 보니 감이 잘 잡히지 않은 환인의 질문에 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령도 어렸을 때 냇가에서 수영해본 적 있지? 그때 손으로 물총을 쏴봤을 거 아냐.=
냇가에서 놀았던 적은 없지만, 어렸을 적 목욕탕에서 아버지가 보여주신 것을 따라 해본 적이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도 많이 있어야 물총을 빠르고 강하게 쏠 수 있지, 물이 쬐끔 밖에 있으면 쏠 수조차 없어. 그러니까 위상력이 충분한 4급 후반이나 5급 초반부터 저런 테크닉이 가능한데 이슬이는 이제 4급이면서 저렇게 다루고 있잖아. 충분히 대단한 거야.=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쓰기보단 타격 시에만 방출하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좋다는 것은 여러모로 알려진 방법이다.
그러나 에너지 소모 측면에서 이로운 방식이라는 거지, 기술이나 공격력을 올리는 것과는 연관이 없다.
하지만 그 부분을 좀 더 깊게 파보면 위상력의 방출 조절은 곧 위상력의 제어와 조율 테크닉으로 이어진다.
“저 기술을 연마하면 위상력 방출의 강약도 조절할 수 있을 테고 조율과 제어가 되니 낭비되는 위상력도 줄일 수 있겠군.”
하나만 설명해주었는데 서너 가지를 깨달은 듯한 환인을 힐끔 돌아본 안느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령.=
“음.”
=지금까지 도령을 보면서 느낀 건데, 도령은 천재라서 그런가 칭찬에 너무 인색해.=
“……그런가.”
=이슬이는 자길 평범하거나 평범 아래로 생각하는데 그게 다 도령 때문이야. 애초에 도령의 훈련에 따라가는 것 자체가 자질이 있다는 뜻이라구. 훈련할 때 이슬이를 두들겨 패지만 말고 잘한다고 칭찬도 좀 해주고 그래.=
“…….”
=보니까 맨날 얻어터지기만 해서 자신감이 없어. 그나마 나랑 대련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얻긴 하는 거 같은데 그거보다 도령이 칭찬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걸?=
“흠.”
=못하는데 잘했다고 칭찬하라는 뜻이 아니야. 그냥 도령의 합격점을 조오금 내리면 좋지 않을까~ 라는 게 내 생각인 거지.=
환인은 입을 다물었다.
칭찬하라고 해도 잘하는 게 눈에 보여야 칭찬할게 아닌가. 잘하지도 않았는데 칭찬하는 것은 훈련에 독이 될 뿐인데.
환인이 입을 다물자 안느는 그제야 자신이 조금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싶어 눈치를 살폈다.
자신도 도령과 대련을 빙자한 교육을 받고 있는데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 아닌가 싶었던 것.
다급히 말을 덧붙인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도령의 훈련에 불만이 있다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구, 응!=
“아니, 네 지적 덕에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조언 참고하지.”
사람은 10인 10색이라는 말이 있다.
단적으로 공부가 그렇다. 칭찬을 해줘야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딴생각 못하게 멱살 잡고 끌고 와야 하는 사람이 있다.
이실리테는 평소 상관없이 열심히 하지만 따지고 보면 후자다. 자신이 격려해주거나 아주 가끔 칭찬해줄 때면 눈에 띄게 기뻐하며 훈련에 더 열심히 임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100점 만점에서 40점 정도를 합격선으로 잡고 있는데 그보다 좀 더 낮추면……. 무지성 쓰담쓰담 수준이 아닌가 고민하는 환인이었다.
1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 작은 방.
오전 7시에 탐색을 개시해 점심 즈음에 11층의 탐사를 마무리 지은 일행은 12층으로 내려가기 전의 방에서 조금 늦은 점심 식사 겸 휴식 시간을 가졌다.
안느와 이실리테는 알이 배긴 몸을 푼다며 갑옷을 벗고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환인은 그런 그녀들 근처에서 비상의 옆구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11층에서 마주친 함정을 수첩에 기록하며 암기하는 한편 이전 층에서 발견했던 함정 종류를 재차 확인해보았다.
‘가늠이 안 되는군.’
갈롯으로부터 미궁 함정 등급 분류는 배웠다.
1등급은 걸려도 죽지 않고 재수 없으면 팔다리가 꺾이거나 잘리는 수준.
2등급은 운 없으면 죽는 수준.
3등급부터 술법 함정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4등급 함정에 빠지면 높은 확률로 죽거나 상태 이상에 빠진다.
5등급은 걸리면 죽는다고 봐야 하는 단계.
당시 교육받을 때는 지식이 없어 일단 외우기만 했는데, 실전을 경험해보니 이 분류가 얼마나 대충인지 알게 되었다.
1계층과 2계층, 3계층의 함정 구조의 복잡함이나 기동 방식, 종류와 위험성이 다 다른데 이걸 저렇게 뭉뚱그려 묶어놓으니 정보의 역할을 못 하는 것이다.
자신이라면 저 다섯 단계 아래로 각 미궁별 함정 위험도를 1부터 10까지 열 단계로 나누어 분류했을 텐데.
아무튼 3계층인 11층부터 함정의 위험도가 크게 올랐다.
천장에서 길로틴이 쿵, 떨어진다거나 바닥에서 신경 가스, 독 가스가 뿜어져 나온다거나 벽에서 창이 우수수 튀어나온다거나.
이런 상승 폭이라면 4계층이나 5계층부터 술법 함정이 등장할 수도 있다.
‘술법 함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군.’
그때 이실리테와 안느의 대화가 환인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안느. 이제 몇 마리 남았어? 200마리 정도인가?=
=187마리. 이틀 정도면 완료될 거야.=
미궁에 들어온 지 이제 4일 차인데 벌써 1,000마리를 다 채워가는 중이다. 거의 하루에 200마리씩 잡은 셈.
=1,000마리라고 해서 막 한 달 씩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금방이네.=
=도령이랑 너랑 비상이 덕분이지 뭐. 난 여기 오기 전까지 의무 완수에 3달 정도 걸릴 거라고 예상했거든.=
=그렇게나 오래 걸려?=
=방법은 두 가지가 보통이야. 입구 근처에서 혼자 하루에 10마리씩 잡거나, 아니면 좀 깊게 내려가는 파티를 구해서 들어가거나.=
후자는 파티를 자주 못 구해서 느리고 전자는 매일 입장할 수 있지만 혼자라서 좀 위험하다는 단점이 있다.
안느는 환인과 이실리테, 비상을 바라보다가 살풋 웃었다.
사람 앞길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다.
아무 생각 없이 찾은 곳에서 몸과 마음을 줄 사람을 만나고, 평생 사귈 수 있을까 싶었던 친구를 얻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잠에서 깼을 때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구분이 안 가서 뺨이나 허벅지를 꼬집어보곤 한다. 환인에게 처녀를 주고 일주일은 매일 아침 자기 뺨을 아플 정도로 꼬집었을 정도.
=성투사도 조금 힘들겠네.=
=응? 뭐가?=
=1년에서 3년마다 이런 의무를 해야 하잖아. 안느 넌 플뢰인데 메리아놀을 벗어나서 라드세아로 올 정도면…….=
=아, 그런 건 아니야. 라드세아에서 활동하는 건 내가 선택한 거고, 그리고 의무라고 하지만 이걸 열심히 하면 꽤 큰 혜택이 있거든.=
=혜택? 뭔데?=
=이거.=
자신의 옆에 내려놓은 자이언트 워 해머와 자이언트 타워 실드, 은빛 전신 판금 갑옷을 탁탁 두드린다.
=각각 천벌의 망치, 성벽의 방패, 구세의 빛이라고 하는 건데 10년 이상 의무행을 해온 성직자들한테 대여해주는 땅신 교단 마도기야.=
=아. 그거.=
토너먼트가 시작되기 전에 방어구를 교환하고 온다며 외출한 것을 이실리테는 기억해냈다.
덩치가 너무 변해서 기존에 사용하던 무구가 맞지 않게 되어 본단에 교환 신청을 넣었는데 교환 수속에 한 달이 걸렸다던가.
안느가 뿌듯한 얼굴로 무구를 쓰다듬으며 기능을 설명해준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천벌의 망치는 중력 가중과 내구 증가, 자동 내구 회복, 증표 기능이 갖춰져 있거든?=
=기능이 네 개나 되네……. 그런데 증표 기능은 뭐야?=
=땅신 교단의 상징물 없이 성술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거. 그리고 성벽의 방패는 경도 증가, 내구 증가, 자동 내구 회복, 위상력 증폭 기능이 있고 구세의 빛은 고통 경감, 신체 강화, 내구 증가, 자동 내구 회복이 달려있어.=
마도기에 몇 개의 기능이 부여되어있고 어떤 기능이 붙었느냐에 따라 가볍게 최상, 상, 중, 하 네 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땅신 교단의 무구는 무구로서의 최적화된 기능밖에 없는, 하나하나가 금화 수백 장에 이르는 아티팩트였다.
=와……. 전부 버릴 거 하나 없는 기능들이네.=
=그치. 그리고 30년 차 의무수행자는 이걸 인건비가 들어가지 않은 순수 소재 비용만 주고 살 수 있어. 대충 40금화 정도?=
이실리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정도 혜택이면 성실히 수행하다 못해 너도나도 의무행을 시켜달라고 하겠지.
이어진 안느의 이야기에 따르면 판매 금지(판매 시 파문 및 고소·고발), 파손 시 반납 의무, 분실 시 회수 의무(교단 지원) 같은 조건이 있지만 성능에 비하면 자질구레한 수준이다.
궁금증을 적당히 해소한 이실리테는 스트레칭을 마치고 풀어놓은 압박 붕대를 들어 가슴을 묶기 시작한다.
가벼운 셔츠를 밀어 올리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실리테의 거유에 안느가 부러움을 담아 쳐다보았다.
와, 저 가슴은 진짜……. 뭘 먹길래 저렇게 가슴이 크지?
도령과 이슬이가 처음 만났을 때는 가슴이 G컵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도령하고 첫날밤을 보낸 뒤부터 이슬이 슴가가 점점 커지더니 H컵이 되더라?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
지금은 I컵이 아닐까 싶은 수준이다. 오죽하면 뒤늦게 성장기가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걸지도 모르겠다.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는 막 몸에서 뭐가 뿜뿜해서 예뻐진다는 그거.
아무튼, 이슬이는 미궁에 들어서면 가슴에 압박 붕대를 한다. 이건 웬만한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가슴을 맞아도 덜 아프고 격렬한 움직임에도 안 흔들려서 편하니까.
압박 붕대를 거의 다 감은 이실리테의 가슴을 바라보던 안느는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기 가슴을 보았다.
……씨이, 이게 세상이냐. 압박 붕대를 한 이슬이 가슴이랑 하지 않은 내 가슴이랑 둘레가 비슷하다는 게 말이 돼?
아냐. 나도 플뢰 중에서는 가슴이 큰 편이야. 응, 다른 종족이었다면 아마도 이슬이랑 비슷할 정도로 컸을 게 틀림없어.
=…….=
왠지 우울해진 안느는 말없이 갑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래도 도령은 내 가슴이 이쁘다고 좋아해 주니까. 응, 좋아해 주니까…….
아, 왜 눈에 자꾸만 땀이 차는 거지.
12층으로 내려온 환인은 이실리테와 왠지 시무룩해진 안느에게 일정의 변경을 이야기하고 4계층을 향해 최단 거리로 이동을 시작했다.
=왜 갑자기 빠르게 이동하는 건데?=
“네 의무행의 완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과 함정 기관의 확인 때문이다. 더하자면 이형종이 약해서 너희들의 훈련과 성장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정도겠군.”
=함정?=
의아해서 되묻는 안느와 언제나처럼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 이실리테에게 12층까지 오며 알아낸 것과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정리해서 들려주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서 4계층에 어떤 함정이 나올지 확인해볼 생각이다. 만약 술법 관련 함정이 나오기 시작한다면 바로 복귀하고, 아니라면 21층 이상으로 내려가 보려 한다.”
=만약 5계층에서 술법 함정이 나오면 어떻게 할 건데?=
“한동안 4계층에서 사냥해야겠지. 자금 확보와 전투 경험 습득, 직업의 성장도 필요하니까.”
=하긴. 우리 넷이면 4계층이 적당하긴 해. 5계층은 좀 위험하려나?=
=…….=
미궁 경험이 일천한 이실리테는 환인과 안느의 대화에서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지식을 흡수하다가 환인과 안느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시무룩해졌다.
4계층에는 4급 이형종이 나온다. 간혹 등급보다 강한 이형종이 출몰하긴 해지만 그래도 5급 이상은 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위험도 되지 않겠지. 안느는 6급에다 경험이 풍부하고 주인님은 말이 필요없을 정도니까.
하지만 본격적으로 5급 이형종이 출몰하기 시작하면 어떨까? 4급 밖에 안되는 자신이 방해되는 건 아닐까?
‘……주인님이랑 안느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열심히 하자.’
이실리테가 생각하는 사이 안느가 걱정을 드러냈다.
=확실히 함정 때문에 좀 그러네. 인력을 늘리기도 시원찮고, 그렇다고 함정이 없는 곳만 찾아다니는 것도 행동반경이 좁아지니까 좀 그러고.=
“함정에 관해서는 내가 배울 생각이다.”
환인의 대답에 안느와 이실리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어, 도령이 함정 전문 기술을 배우면 확실히 안심되겠지만…… 도령이 그거까지 배우는 건 좀 일이 과중해지지 않을까?=
=맞아요. 주인님은 지금도 하시는 게 많으시잖아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저희 대련도 봐주시고 체력 훈련에 영혼술하고 정령술도 단련하시고 일정 관리에 파티 인력 확보에 그, 밤마다 그것도 하시는데…….=
전부 격일이나 듬성듬성 하는 게 아니라 일과처럼 매일매일 하는 것들이다.
=솔직히 도령, 그, 위상석으로 체력을 회복하면서 세…엑스하는 것도 난 조금 걱정이야. 나랑 이슬이랑 매일 세 번, 네 번씩 하고 나중에는 유리 언니도 더해질 텐데 진짜 그러다 몸 축나.=
니오네브레스의 사람들은 21세기 현대인인 환인이 보기에 꽤 게으른 편이다.
여기는 시간을 그 옛날 지구처럼 하루를 12시진으로 나누는 100각법 비슷한 걸 쓰는데, 시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탓에 시간 개념이 굉장히 여유 있다.
보통은 해 질 무렵 집에 들어와 밥 먹고 놀다가 잠자리에 든 뒤 해가 뜨면 아침을 먹고 일하러 나간다.
일하러 나갔다고 해서 열심히 일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다가 종이 울려 퍼지면 점심 식사 시간이라고 밥 먹는다.
밥 먹고 난 뒤 다시 종이 칠 때까지 휴식 시간이라고 쉬다가 일을 시작하고,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하루가 끝났다고 퇴근하는 식.
여기에 낮이 짧은 겨울 같은 경우 일하는 시간은 더 줄어드는 반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14시간 이상이 된다.
그렇다고 집에서 일하거나 부업을 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독서나 공부는 잘사는 서민이나 부호의 집에서 하는 것. 음주도 돈이 들다 보니 일찍 자거나 어른의 놀이를 한다.
부지런한 사람들이나 가끔 부업을 하는 식이다.
즉, 24시간 중 6~7시간만 일하면 끝인 삶에 익숙한 이실리테나 안느의 눈에는 밤에도 불을 켜놓고 18시간을 꽉꽉 채워 활동하는 환인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렇게 활동하다가 과로사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 여인들의 우려를 읽은 환인은 왠지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런 표현을 막지 않고 갑옷을 걸친 그녀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환인의 부드러운 시선에 두 여자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시선을 피한다.
“내 고향에서는 이 정도가 보통이다만.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니 휴식의 의미도 있지. 무엇보다…….”
그녀들의 허리에서 슬쩍 손을 내려 갑옷의 보호 면적이 적은 둔부를 툭툭 건드린다.
=꺗.=
=으잇?!=
짓궂은 행동에 꺅, 작게 비명 지르며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린 안느와 이실리테가 큭큭 웃는 환인을 흘겨본다.
“밤마다 너희들을 안는 것을 노동으로 취급하고 싶진 않군.”
=도령도 진짜…….=
“아무튼 당분간 인원을 더 추가할 생각은 없으니 부족한 점은 파티 리더인 내가 채워야지.”
살짝 삐친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민 안느는 흥, 코웃음을 치곤 이실리테와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적당히 해, 적당히. 쓰러지거나 다쳐서 우리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말구.=
“주의하지.”
그 후 환인은 8시간 만에 15층까지 돌파했으며, 그 과정에서 안느의 1,000마리 불사자 정화 임무도 완료할 수 있었고 3마리의 외눈 해골 거인, 5마리의 부패한 인간을 처단해 3급 위상석을 하나 더 획득할 수 있었다.
계층.
보통 다섯 층을 한데 묶어 부르는 미궁 깊이의 단위다.
5일 만에 4계층까지 내려온 환인은 옆에 발밑의 땅속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짐승이 으르르? 우는 느낌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시종일관 여유 있던 안느의 얼굴도 약한 긴장이 스며들었고 이실리테는 딱딱하다고 느껴질 만큼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뀨으…….
비상이 보송보송하던 깃털을 바짝 눕히곤 환인의 곁에 바짝 붙어서서 불안한 듯 낮게 운다.
“괜찮다.”
부리를 쓰다듬고 두 손으로 머리 깃털 안쪽을 살살 긁어주자 웃는 것처럼 눈을 감고 손길을 받아들이던 비상이 푸르르 머리를 털며 뀨삣! 기운차게 운다.
심적 압박감을 털어낸 표정이다.
그걸 확인한 환인은 이실리테를 불렀다.
=네, 주인……응웁?! 하읍……!=
=……아니 이 사람들이. 갑자기 눈앞에서 웬 염장질이야.=
코앞에서 벌어지는 찐한 키스 씬에 안느가 볼멘소리를 내자 환인이 흐늘흐늘해진 표정의 이실리테를 품에 안아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파티원의 멘탈 케어다.”
=응? 아. 정신 침해.=
발개진 얼굴로 환인의 품에 안겨있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그녀는 4계층이 처음이라는 걸 기억해내고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숙련자들은 5급 이상 미궁의 4계층부터가 진짜 미궁이라고 평가한다.
이실리테는 저번 입장까지 포함해 이제 미궁 3회차인데다 5급의 4계층은 이번이 처음이다. 긴장해서 굳는 게 당연하지.
=확실히 사랑하는 주인님의 키스가 효과 좋네.=
안느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실리테는 서둘러 환인에게서 떨어진 뒤 빨개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약간 헝클어진 호박색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이실리테가 압박감을 완전히 떨쳐낸 것을 확인한 환인은 이번에는 안느를 보며 물었다.
“너도 해줄까.”
=안 해줬으면 삐지려고 했어!=
얼른 환인의 품에 안겨든 안느도 환인에게 3분에 이르는 깊은 키스를 받았고, 조금 반들반들해진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은 안느는 손부채로 얼굴을 부치고 있는 이실리테에게 실실 웃으며 말했다.
=심장이 조금씩 뛰던 게 싹 가라앉았네. 확실히 도령의 키스는 대박이야. 그치?=
=으, 응.=
얘는 부끄럽게 왜 그런 걸 묻는 거람.
=그런데 도령은 되게 멀쩡해 보이네. 6급 삼림형 미궁을 경험해서 그런가?=
“글쎄. 위상류가 관련이 있는 것 같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군.”
6급이라지만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었다. 외곽만 돌다가 푸른 불꽃 호랑이와 조우한 뒤 곧바로 삼림형 미궁을 탈출했으니까.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가능성이 큰 가설은 두 가지다.
신경이 일반인들과 달라서, 혹은 자신의 체질이 이런 미궁 정신 침해에 내성이 높아서.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환인은 제 컨디션을 되찾은 일행과 함께 어둠이 실체를 갖고 아가리를 벌린 듯한 방을 둘러보았다.
가로 약 63m, 세로 42m의 커다란 방. 썩은 가죽더미가 방의 남서쪽 구석에 쌓여있는 것이 보인다. 귀를 기울이면 작게 틱 틱 뭔가 튀는 소리가 방의 남쪽 벽에서 들려오고 있다.
지도를 펼치자 안느와 이실리테가 좌우에 붙어서 지도에 눈길을 준다.
16층의 구조는 방과 방이 이어지는 형태다. 문은 대부분 평범하거나 개방형으로, 16층에도 몇 군데 함정이 표시되어있었지만.
“바닥 함정 표시는 믿을 게 못 되지.”
내려오며 경험한 바에 따라 함정은 자신이 본 것만 믿기로 한 환인이다.
한층 더 조심하자고 생각하며 다음 층 계단으로 내려가는 최단 거리를 뽑고 있을 때 뒤에서 비상이 작은 목소리로 울었다.
쿠엣. 쿠쿠!
“적이다.”
서쪽을 가리키는 비상의 경고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재빨리 무기를 꺼내 쥔다.
그와 동시에 전방 63m 정도 앞, 건너편 방과 이어진 아치형 통로를 통해 거대한 해골, 그것도 두개골이 둘 달린 해골이 상체를 숙여 넘어왔다.
[감옥 미궁 지하 16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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