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 206+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환인은 함정의 존재와 이전 층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커진 넓이 탓에 예상보다 탐사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않았다.
급하게 미궁을 돌파해야 할 일은 없다. 정신 침해를 우려해 15일이라는 시간 내에 미궁 최하층의 심핵??을 깨야 할 일도 없다.
지금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미궁 돌파보다는 안느의 직업 의무 해결과 자신의 함정술에 대한 진로 결정 정도뿐이니까.
그래서 환인은 7층부터 안느와 이실리테에게 전투를 모두 일임하고 자신은 함정의 기관 분석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1계층보다 함정의 위험도가 소폭 올랐군.’
미궁 함정의 위험도를 1~5등급으로 나누었을 때, 엽사 조합 소속의 갈롯이 가르쳐준 것에 따르면 성장 전의 미궁 감옥은 2급 수준. 평균에서 조금 쉬운 정도라고 했었다.
실제로 이틀을 써서 7층과 8층을 통과하며 마주친 함정들은 그렇게 위험한 것들이 아니었다.
사람이란 재수 없으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함정은 죽음을 강요하기보단 상처를 입히는데 주력하는 수준이었던 것.
‘계층을 내려갈수록 함정의 위력이 늘어날 텐데.’
이정도가 2등급이라면 함정의 위험도가 5등급인 미궁은 어느 정도로 위험한지가 환인의 생각을 깊게 만들고 있었다.
‘당분간은 함정이 있는 미궁을 피해서 도전하는 게……. 아니, 그건 회피밖에 안 된다. 역시 제대로 준비해서 함정에 대해 더 공부하는 것이…….’
=앙, 아앗. 주인, 님!=
생각에 잠겨있던 환인은 이실리테의 격해진 비음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시선을 내리자 바지와 팬티가 발목까지 내려가 허물처럼 구겨져 있고, 상의와 브래지어는 가슴 위로 올라간 채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기둥을 받아들이는 이실리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벽과 거의 포옹하다시피 기대고 서서 바들바들 떠는 이실리테의 젖꼭지와 클리토리스는 자신의 손에 거의 뭉개지다시피 하는 중.
이실리테는 그런 자극에 이슬 맺힌 꽃망울처럼 몸을 조금씩 숙이고 있었다.
원래 간단한 삽입 운동으로 금방 끝낼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다른 길로 빠지는 바람에 이실리테를 좀 더 몰아붙이고 말았다.
“음. 간다.”
=흡, 네에엣!=
때마침 사정감이 치밀어올랐기에 환인은 이실리테의 골반을 잡고 푸욱푸욱 깊게 찌르기 시작했다.
=윽, 학! 하흡!=
하얗고 탐스러운 엉덩이골 사이로 여자 팔뚝 굵기의 살기둥이 들락이며 살결이 음란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작은 방에 연이어 울려퍼진다.
분신을 꽉 문 핑크색 속살이 살짝 딸려 나오다 들어가고 그때마다 귀엽게 주름진 항문이 움찔거리는 것이 반복되는 시각적 자극에 환인은 사정감이 점차 강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중 환인의 시야에 고운 호박색 말총머리가 들어왔다.
그걸 손에 감고 잡아당기자 목이 뒤로 꺾인 이실리테가 =컥.= 탁한 신음을 토해내며 환인의 기둥을 더욱 강하게 조였다.
자극이 한계까지 도달했다.
환인은 사정감을 참지 않고 푸욱, =으극!= 이실리테의 보지에 뿌리까지 삽입한 뒤 정액을 뿌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의 강렬한 쾌감이 물질화되어 이실리테의 자궁 앞에 쏟아진다.
“후우웃!”
=하아앙…!=
그렇게 몇 초 정도 이어진 사정을 끝내자 하프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듯한 후련한 감각이 가슴과 아랫배를 채웠다.
환인은 마지막으로 이실리테의 거유를 한번 꽈악 움켜쥐었다가 떨어지자 이실리테도 새끼 사슴처럼 다리를 후들거리며 벽에 안기듯이 상체를 기댔다.
H컵에 달하는 젖무덤이 눌리며 찐빵처럼 퍼져 옆구리로 삐져나오는 광경이 자못 자극적이다.
=하읏…… 읏…….=
절정의 여파에 이실리테가 몸을 살짝살짝 떨고 있을 무렵 붉게 상기된 얼굴로 다가온 안느가 환인의 귀에 속삭였다.
=도령, 끝났지?=
“그래.”
무엇을 할 생각인지 초승달처럼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악동 같은 미소가 떠있다.
안느는 도둑처럼 살금살금, 할딱이고 있는 이실리테에게 다가가더니 벽과 이실리테 사이의 틈에 들어가 무릎을 꿇는다.
=아? 자, 잠깐. 안느, 기다렷……!=
뒤늦게 안느를 발견한 이실리테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안느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어제의 복수다~. 하움.=
=흐꺅!? 앗, 안돼… 아앙!=
두 팔로 이실리테의 엉덩이를 붙잡은 안느는 송아지가 엄마 젖소의 젖을 빠는 것처럼 이실리테의 복숭아색 보지를 입으로 뒤덮고 쭙쭙, 음란한 소리를 내며 쪽쪽 빨기 시작한다.
=흥큿?! 아학…!=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표정을 찡그리는 이실리테.
허리를 뒤로 빼고 남은 한 손으로 안느의 머리를 밀어내려했지만, 안느는 이실리테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허벅지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이실리테의 보지를 놓치지 않는다
=아힉?!=
무엇인가가 속으로 들어왔는지 뒤로 빼고 있던 허리가 곧게 펴지고, 안느는 잘됐다는 것처럼 더더욱 이실리테의 밑에 얼굴을 붙여 이실리테의 골짜기를 뇸뇸뇸 빨아나간다.
‘둘 다 다리가 길어서 저것도 되는군.’
스탠딩 커닐링구스라고 부르는 자세는 보통 다리가 짧으면 어느 쪽이든 자세가 부자연스러워진다.
하지만 안느도, 이실리테도 다리가 길다보니 스탠딩 커닐링구스라 부르는 체위가 부드럽기 그지없다.
다리 사이로 들어와 열정적으로 밑을 빨아대는 안느 때문에 급기야 손을 모아 얼굴을 가린 채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안돼, 안돼….= 연신 중얼거리는 이실리테.
그리고 길다란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눈을 감고 이실리테의 보지를 아기가 젖꼭지 빨듯 빨고 있는 안느.
옷차림을 단정히 한 환인은 팔짱을 끼고 턱까지 괸 채 평론가처럼 진지하게 그 광경을 눈에 담는다.
이때까지 동성애 취향에는 별생각이 없었던 환인이었다. 자신에게 권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여신만큼이나 아름다운 호박색과 은색 머리카락의 아가씨들이 저러고 있으니 절로 백합, 혹은 레즈라고 불리는 행위에 페티시가 생겨나는 기분이다.
큐우~ 쿠쿳.
이실리테와 안느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는 비상의 질문에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둘만의 깊은 피부접촉으로 유대감을 늘리는 중이다.”
쿠에? 쿠우우.
“저 둘의 행위는 종족적 동성애다. 네가 끼어들기에는 종족은 물론 체구도 맞지 않으니 필시 여러모로 곤란할테지.”
환인의 설명이 어려웠는지 고개를 한차례 갸우뚱한 비상은 환인의 옆에서 이실리테와 안느의 행위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했다.
그무렵 쪽 이실리테의 음부에서 입을 뗀 안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이실리테를 올려다보며 히히 웃었다.
=어때? 기분 좋지?=
=…….=
반들반들해진 입 주변을 닦던 안느는 이실리테가 스르륵, 힘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놀라 품에 끌어당겼다. 내버려 뒀다간 뒤로 쓰러질 것 같은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모습이 대면좌위처럼 보여 환인이 한층 더 눈을 빛낼 무렵, 이실리테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싫어…….=
=으, 응? 그렇게 싫었어?=
나는 그때 조금… 솔직히 좋았는데.
=으으.=
살짝 눈물이 맺힌 눈으로 당황하는 안느의 허리에 팔을 감은 이실리테가 꾹꾹 허리를 조르며 안느의 길다란 귀를 앙앙 물기 시작한다.
=힉?!=
=기분이 이상해져서 싫다구! 난 이렇게까진 안 했는데!=
=응기잇…! 귀, 귀는 제발! 귀는 물지마앗…!=
이상한 신음을 지르며 이실리테를 떼어내려 하는 안느였지만, 이실리테는 분풀이하듯이 안느를 놔주지 않고 갈대 잎처럼 길다란 안느의 귀를 한동안 잘근잘근 물어댔다.
[감옥 미궁 지하 11층]
환인 일행이 3계층, 11층까지 도달하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첫날은 6층까지 돌파했고 이튿날은 8층까지, 사흘째 되는 날은 10층을 모두 탐사했다. 각 층의 모든 방을 들렀다가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일정치고는 빠른 편.
그리고 도달한 11층, 일행과 함께 지도를 밝히던 환인은 맵의 중앙에 있는 십자 교차로 지점에서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 일행을 멈춰 세웠다.
“멈춰라.”
유심히 바닥을 살펴본다. 그러자 겉보기에 평범한 타일 바닥이지만, 질감과 격자무늬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다른 곳에 비해 조금 색이 연하고 약간 비틀린 느낌을 받은 것이다.
콱.
천칭으로 발밑의 타일을 한 장 찍어 부순 환인이 그중 큰 조각을 집어 교차로 지점에 툭 던졌다.
=??=
=……?=
‘하나로는 부족한가.’
타일 몇 개를 더 부숴서 계속 집어던지자 그제야 덜컹,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열리며 함정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곳에는 널 죽이고 말겠다는 악의가 대나무숲처럼 빼곡히 박혀있었다.
고개만 살짝 내밀어 안쪽을 내려다본 안느가 히야~ 탄성을 지른다.
=창날 촘촘한 것 봐. 떨어지면 죽겠네.=
=음, 저거 다 회수하면 비싸게 팔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려가서 다 캐내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내려갔다가 막, 천장이 닫히거나 안에서 가스나 뭐가 뿜어져 나올 수도 있고.=
=그러려나…….=
3계층부터 함정에 빠지면 목숨을 잃을만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을 열려고 하면 바닥에서 산성 가스가 뿜어져 나온다거나, 천장에서 도검이 빽빽이 꽂힌 판이 떨어진다거나, 벽에서 갑자기 칼날이 베고 지나간다거나 하는 함정들이다.
스르륵, 바닥이 다시 닫히기 시작하며 끼릮끼릭 톱니바퀴의 구동음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일반 함정은 대부분 기관식이군.’
환인은 가로세로 7m에 달하는 함정 범위를 보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가지.”
=그냥 뛰어넘어가도 되는데?=
“굳이 이곳을 통과할 이유도 없다. 길은 많으니 돌아서 간다.”
11층은 158m*79m 사이즈의 대형 방을 기준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좌우 대칭형 미로다. 그리고 그 약간에서 샛길이나 뒷길이 존재했기에 돌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횃불을 켰어도 건너편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커다란 방으로 되돌아온 일행은 벽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깐 다른 곳에 다녀온 사이 이형종이 리젠 되었는지, 환인의 영혼 시야에 커다란 해골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바위 조각 같은 물체인 줄 알았는데 이형종이다.
‘중핵……은 아니군.’
골격의 형태는 우르거와 비슷하지만, 뼈대가 그보다 가늘다. 거기다 안와가 미간이어야 할 곳의 하나뿐.
외눈목의 사이클롭스 같은 건가 하고 생각하며 환인이 입을 열었다.
“저기 거대 해골이 있다.”
=응? 어디?=
곧바로 무기와 방패를 치켜든 안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실리테도 등에 멘 대검을 뽑아 든다. 환인은 그걸 보고 이전에 주워둔 주먹만 한 돌멩이를 꺼내 해골 거인의 두개골에 투척했다.
빠각!
씽 소리를 내며 날아간 짱돌이 두개골의 안와 안쪽을 콱, 찍고 튕겨 나온다. 그에 외눈 해골 거인이 홱 고개를 돌리더니 화가 났다는 듯이 그르릉 울면서 몸을 일으켰다.
3m는 될법한 키의 외눈 해골 거인이 쿵쿵쿵,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달려오기 시작한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이실리테와 안느도 환인과 비상을 지키듯 앞으로 나섰다.
“주변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 되도록 이 주변에서 벗어나지 말고 싸워라.”
=응!=
=네.=
그리고 잠시 후, 달려드는 외눈 해골 거인을 발견했는지 안느가 거대한 자이언트 타워 실드를 내세워 달려가며 성술사들의 유일한 원거리 공격 수단, 광탄을 쏘았다.
쉬잉
자이언트 워 해머 머리에서 쏘아진 주먹만 한 빛구슬.
대인 상대로 거의라고 할 만큼 효과가 없는 기술이지만, 빛의 속성인 탓에 불사자에게 큰 효과를 내는 빛의 구슬이 외눈 해골 거인의 갈비뼈를 때린 순간 목표가 안느로 변경되었다.
그으으으응!
꽈앙!
외눈 해골 거인의 포효와 함께 뼈주먹이 방패에 꽂혔다.
일반인이었으면 튕겨 날아갔을 충격이었음에도 안느는 발밑으로 충격을 흘려보내며 반격해 외눈 해골 거인의 골반을 후려친다.
콰지직!
맞은 자리의 누런 뼈가 산산조각나며 거대한 신형이 휘청하는 순간.
=합!=
카가가각!
옆으로 살짝 돌아갔던 이실리테의 올려치기가 외눈 해골 거인의 좌측 갈비뼈와 어깨뼈를 모조리 박살 내버린다.
막대한 충격에 외눈 해골 거인의 상체가 흔들리자마자 그때를 기다렸단 듯이 안느가 방패를 휘둘러 거인 해골의 정강이뼈를 후려쳐 쪼개버리고.
이실리테는 지지대를 잃고 낙하하는 해골 거인의 두개골을 향해 높이 치켜든 대검을 그대로 내려쳐 반동강 내 버렸다.
물 흐르듯 이어진 2명의 연계기.
불과 3초도 걸리지 않아 외눈 해골 거인을 박살 낸 안느가 후우, 작게 숨을 내쉬면서 이실리테를 향해 웃음 지었다.
그것은 이실리테도 마찬가지였다. 이만한 연계기는 오랜 시간 파티를 해온 사람들이나 선보일법한 수준이었으니까.
왠지 마음이 하나가 된 듯한 기묘한 일체감, 그것을 느낀 두 여자는 문득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곤 허흠, 으흠, 헛기침을 하며 서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우, 우리가 오래 대련하긴 했지?=
=으응. 보통 파티는 대, 대련 같은 거 잘 안 하니까…….=
맞는 말이었다. 대련을 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을 내보인다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 그것을 한 달 넘게 빡세게 해온 두 여자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다 눈앞에서 벌어진 성행위로 인한 흥분 때문이라지만, 서로의 생식기까지 빨았으니…….
환인은 그녀들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지는 것을 보며 작게 웃음 지었다.
대형 방을 지나 원형 방에 들어서자 너덜너덜해진 갑주 차림의 반쯤 썩은 여자 시체가 환인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푸른 피부를 제외하면 생전의 모습을 거의 다 갖추고 있던 여자 시체를 보자마자 안느가 방패를 들며 주의를 준다.
=부패한 인간이야. 살아있을 적 직업자 기술도 쓰니까 조심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소리와 함께 부패한 인간이 날아들었다. 탁해진 눈동자에서 녹색 불길이 그리는 선이 선명하다.
쾅 콰광!
삽시간에 자이언트 타워 실드를 내민 안느와 부딪친 부패한 인간이 서너 걸음 물러난다 싶더니 씽씽 공기가 갈라질 정도의 속도로 장검을 마구 휘두른다.
‘위상력까지 쓰는 건가.’
녹슨 장검이 희미한 빛에 뒤덮여 안느의 방패를 두들기는 것을 목격한 환인은 천천히 벽을 따라 돌며 방 내부를 살폈다.
“함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실리테.”
=네!=
뒤에서 대기하던 이실리테가 재빨리 부패한 인간의 뒤로 돌아가자 부패한 인간의 반응도 이실리테를 따라 돌아갔다.
쾅!
당연히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안느다. 있는 힘껏 방패를 올려 쳤고 트럭에 치인 것마냥 붕 떠오른 부패한 인간의 허리를 이실리테의 붉은 대검이 내려쳤지만.
‘막겠군.’
카가각!
=……?!=
환인의 예상대로 검면에 팔과 무릎을 대서 이실리테의 공격을 정확하게 막아낸다.
내동댕이쳐지듯 땅에 착지한 부패한 인간은 안느를 도외시하고 근육과 뼈관절 가동 범위를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이며 이실리테를 향해 장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끼에에에엑!!
슁슁슁슁슁슁!
으직, 뚜둑.
뼈와 근육, 힘줄이 상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올 만큼 난폭하고 빠른 맹공.
패턴도, 초식도 없는 무지성 난격에 살짝 압도당한 이실리테가 한발 물러서자 안느가 자이언트 타워 실드를 내세우며 위상력을 밀어넣는다.
그와 동시에 부패한 인간을 향해 안느가 중전차처럼 묵직한 돌격을 감행했다.
돌진하며 안느는 적어도 부패한 인간이 자신에게 약간의 관심을 내비칠 거로 생각했다. 죽은 자라면 적의와 투기에 반응하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부패한 인간은 그러지 않았다. 좀전의 내려치기가 상당한 경각심을 준 것처럼 오직 이실리테를 향해서만 무지성 칼질을 해댔고.
콰광!
그 결과 부패한 인간은 재차 트럭에 치인 것마냥 이실리테를 향해 재차 날아들었다. 특이점이라면 그러는 와중에도 장검을 휘두르길 멈추지 않았다는 것.
자신을 향해 튕겨 날아오는 부패한 인간의 모습에 이실리테의 눈이 한차례 강한 빛을 냈다.
=에이얏!!=
이번에야말로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레드릭에 위상력까지 밀어 넣어 일도양단하듯 날아드는 부패한 인간을 내려찍는 이실리테.
그 과정에서 장검과 레드릭이 부딪치며 쾅 굉음을 터트렸지만 레드릭의 가속도는 멈추지 않았다.
꽈아앙!!
붉은 잔상과 함께 땅에 깊게 처박히는 부패한 인간. 그럼에도 몸이 반 토막 나지 않고 덜그럭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에—
쿵!
강렬한 호박색으로 빛나는 자이언트 타워 실드가 길로틴처럼 떨어져 부패한 인간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땅에 떨어진 수박처럼 깨진 두개골 파편 사이로 체액이 번지며 역겨운 냄새가 풍겼지만, 이실리테는 그것도 느끼지 못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방금 손맛을 떠올린다.
‘좀전의 공격은 우르거를 후려쳤을 때처럼 제대로 먹히지 않은 느낌이었어.’
실제로도 다른 이형종이었다면 반으로 갈라졌을 텐데 부패한 인간은 찍힌 곳의 뼈가 부러지는 수준에서 그쳤다.
이게 3계층의 이형종이라니. 그럼 4계층이나 5계층은 얼마나 더 강하다는 거지? 이실리테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무기를 거두어들이자 안느가 눈치껏 이야기해준다.
=부패한 인간은 위상력을 잘 다뤄서 보통 4계층이나 5계층에서 등장해. 그런데 여긴 3계층에서 나오네.=
=으응.=
=……부패한 인간을 쪼개지 못한 게 신경 쓰여?=
=조금….=
=…내가 무기에 주입하는 위상력의 가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적 있었지?=
=응. 그래서 연습도 계속하고 있었고.=
고개를 끄덕인 안느가 부패한 인간을 정화하며 말한다.
=보통 물리 저항은 체격과 급수하고 비례하지만, 위상력을 잘 다루는 이형종도 물리 저항이 높아. 그런 물리 저항 괴물을 베어내려면 무기를 그만큼 좋은 거로 쓰던가, 위상력으로 절삭력을 높이거나 타격력을 높이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위상력의 가감을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얼마나 강하게 하느냐에 따라 공격력의 증가폭이 크게 달라진다고 설명해준다.
이실리테는 그런 안느를 고마움과 약간의 부러움, 그리고 아쉬움을 담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삶은 용병질과 도적질로 점철되어있었다. 사람하고만 싸워온 인생이다. 만약 이형종이나 마물하고도 싸워왔다면 안느처럼 전문적인 지식을 알게 되었을까?
아무튼, 이실리테는 앞으로 위상력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레드릭을 바꾸고 싶지는 않으니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러면 이건 몇 급 이형종이야? 4급? 5급?=
=원래 5계층 정도에나 등장하니까 5급일 가능성도 있고 3계층에 등장했으니까 3등급일 가능성이 없진 않아. 일단 강화형은 확실하니 최소 4급이겠지.=
=5급인가……. 그러고 보니 중핵하고 손맛이 비슷하긴 했어. 미궁 우르거는 이거보다 더 단단했고.=
부패한 인간의 정화를 끝낸 안느가 이실리테를 돌아본다.
=그러고 보니 우르거하고도 싸워봤다고 했지. 어디서 싸워봤어?=
웨이포드 근방에서 주인님과 함께 싸웠다고 대답해주자 이번에는 안느가 이실리테를 부러움과 아쉬움을 담은 눈길로 쳐다본다.
=정화 다 했으면 비켜.=
골반으로 슬슬 안느를 밀어낸 이실리테는 탐지 도구로 시체를 훑다가 오랜만에 위상석 반응을 보곤 눈을 빛냈다.
여자 시체의 가슴 부위에서 위상석 반응이 나온다.
넝마나 다름없는 갑옷을 부셔서 뜯어내고 반쯤 뜯어먹힌 가슴을 단검으로 배까지 가른다.
늑골을 부수고 가슴을 열자 움직임을 멈춰 거무튀튀해진 심장에 위상석이 박힌 것이 드러났다.
=뭐야, 3급밖에 안 되잖아. 에이……. 그래도 회색이네.=
=회색은 무슨 효과야?=
“방어와 관련된 효과다. 마도기 제작의 주재료가 되는 고가의 물건이지.”
뒤에서 들려온 환인의 목소리에 움찔, 놀랐던 이실리테는 재빨리 위상석에서 검고 찐득한 피를 닦아 환인에게 넘겨주었다.
안개처럼, 혹은 영혼의 그것처럼 진한 회색의 보석.
환인은 효과를 확신하며 그걸 맨손에 쥐었다. 피부가 쨍 한 느낌이 들며 감각이 약간 둔화되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등을 그었다.
=앗! 주인……님?=
=어! ……멀쩡하네, 와.=
이실리테와 안느가 깜짝 놀랐다가 손등이 멀쩡한 것을 보고 눈을 깜빡인다.
“역시 물리 내성 효과가 담긴 위상석이군.”
=아. 부패한 인간의 방어력이 이상하게 강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위상석 효과였구나. 그러면 3급이 맞지.=
몸 안에 차곡차곡 위상력을 쌓아 위상석을 만들어내는 바깥의 괴물과 다르게 이형종은 미궁이 만들어내다 보니 생성될 때부터 그 급에 맞는 위상석이 체내에 박혀있다.
그래서 위상석의 효과를 바로 받고 있었던 것.
환인은 회색 위상석을 만지작거리며 은빛 전신 판금 갑주를 걸친 안느를 바라보았다.
‘안느에게는 필요 없겠지.’
쓴다면 자신이나 이실리테다.
돌아나가면 유르파에게 본격적인 마도기를 제작할 수 있을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위상석을 주머니에 챙기는 환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