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202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아클라멘토 학장이 사과와 함께 배상한 스틱 형태의 마도기천칭을 살폈다.
정령을 후려쳐서 혹시나 영적인 오염이라던가 이상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발생할 가능성도 작았지만.
“가지.”
환인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일행이 조용히 뒤를 따른다.
통로 바닥과 좌우, 천장까지 유심히 살피면서 걷던 환인은 안느에게 물었다.
“중급 정령과 상급 정령의 성격은 어떻지? 하급 정령과 닮거나 비슷한가.”
=아는 사람들이 말하는 거나 내가 본 중급, 상급 정령들은 다들 괜찮은 성격이었어. 그 왜, 속성형 성격론 있잖아. 불은 화끈하거나 성급하고 물은 잔잔하거나 차분하고 바람은 장난꾸러기에 흙은 과묵한 그런 거.=
‘혈액형 성격론 같은 건가.’
=내가 본 정령은 속성형 성격론과 비슷하더라.=
“성미는 어떻지.”
=대화를 시도하면 들어주긴 해. 그래도 정령어로 말해야겠지만……. 맞은 애가 중급이나 상급 정령을 데려오는 걸 걱정하는 거야?=
“비슷하다. 하지만 말이 통한다면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만약 얻어맞은 하급 정령이 화내면서 친구들을 끌고 오면 전부 영혼 구슬로 만들어줄 뿐.
그렇지 않아도 하급 정령은 그 숫자가 적고 찾기도 어려워 53개(약 한 달간 이실리테와 안느의 영기를 흡수하며 4개가 더 늘었다.)의 영혼 구슬 중 하급 정령 구슬은 18개뿐이다.
제 발로 찾아온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
‘그나저나…….’
미궁에 최하급 정령은 없는데 하급 정령은 있다니. 등급에 따른 힘의 차이로 인한 현상인가.
역시 하급 정령과 강제력으로 대화를 시도해보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하급 정령에게 강제력으로 지시를 내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령의 세계와 정령들 간의 룰이 어떠한지도 모르는 마당에 정령을 이용하려 들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영혼 구슬로 만들고 기술로 쓰고 강령을 해도 다들 즐거워했기에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았는데.
‘정령이 말을 들어주면 굳이 추적과 탐색에 사람 영혼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
말이라도 통하면 정령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서 유혹해보기라도 할 텐데. 환인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이 행동하니 소통도 안 되고, 안느에게 정령어로 말을 걸어달라고 하면 ‘정령사도 아닌 게 어디서 함부로 말을 걸어!’하듯이 꽥꽥거리다가 사라져버린다.
꽥꽥이는 소리가 두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 험한 말을 하지 않는 안느가 작은 악마라고 표현한 것이 이해되는 수준이다.
그때 바닥과 벽에 부자연스러운 흔적을 발견한 환인이 걸음을 멈추며 왼손을 들었다.
미리 정한 신호를 알아본 일행이 멈추어 선다.
잠시 바닥과 벽, 천장을 살핀 환인은 함정의 구조와 발동 방식을 파악했다.
직후 덜그럭 달그락 소리와 함께 복도 저 멀리, 영혼 시야의 회색빛 어둠 속에서 말의 골격을 한 해골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령. 해골 소리가 들리는데.=
“그래. 해골마다.”
안느의 경고에 대답해주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집어 들자 끼리릭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해골마가 이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다그닥다그닥다그
그걸 보며 잠시 기다린 환인은 해골마가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돌멩이를 던져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바닥을 때렸고.
쿠광!
=?!=
=…!=
즉시 좌우 벽에서 사각형 돌기둥이 튀어나와 해골마를 박살 내버렸다.
와그르르 쏟아진 해골마의 뼈다귀 위로 스윙 도어처럼 튀어나온 벽이 천천히 돌아간다.
‘기초적인 스윙 블럭 트랩이군.’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평범한 벽이 된 함정을 향해 이실리테와 안느가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어, 이게…… 함정인가요?=
“그래. 저 바닥만 밟지 않으면 된다.”
=와. 그냥 지나갔다간 얻어맞고 튕겨 나갔겠는걸.=
=……잘 보니까 벽에도 균열이 보여요.=
안느가 헛웃음을 흘리다 감탄한다.
=어둠으로 함정의 부자연스러움을 감춘 거네. 이런 걸 발견하다니, 도령은 눈이 얼마나 좋은 거야?=
“영혼을 보는 눈은 어둠도 꿰뚫어 본다. 아무튼 해골마를 정리해라. 이쪽은 밟지 말고.”
함정이 있는 곳 근처에 서며 말하자 안느가 고개를 끄덕이고 금 간 채로 덜그럭거리는 해골마의 두개골로 향했다.
두개골이 손상되었기 때문일까. 1계층에 등장하는 해골이라 내구도가 약해서 그런지 바들바들 떨기만 하고 재조립되려는 기색이 없다.
해골마의 두개골을 발로 밟아 부수고 정화까지 한 안느가 환인을 지나가며 물었다.
=지도에 함정도 표시되어있어?=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문에는 기호로 함정을 표시하고 있지만 통로에는 어떤 함정이 있는지 따로 언급되어있지 않았다. 대충 해당 플로어에 어떤 함정이 나올 수 있는지 정도만 표기되어있을 뿐.
=그런데 용케 찾았네.=
“함정술 교육의 성과지.”
여상한 대답에 안느와 이실리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이 닫힌 뒤 환인이 시간 날 때마다 함정 공부를 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
함정을 지나친 뒤 대열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환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이실리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님은 그럼 계속 함정 공부를 하실 건가요?=
“…….”
술법과 위상력의 보조를 받지 않는 일반 함정은 대체로 주의력만 높다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해제도 어렵지 않은 편이다. 발견만 어떻게 하면 일부러 작동시켜서 파훼하거나 함정이 원래 모습을 찾는 사이 지나가 버리면 되니까.
그러나 상급으로 분류되는 위험한 함정들은 대부분 술법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마도 함정이며, 그런 것들은 찾기도 어려웠거니와 발동하면 근방까지 휩쓸기에 목숨이 오갈 만큼 위험하다.
그 때문에 상급 함정을 해제하는 데는 고등급의 함정 전문가가 필요한데 문제는…….
‘기술을 배운 엽사 함정 전문가의 몸값은 성술사에 버금갈 정도로 비싸다.’
상급 함정에는 고난도의 술식이 곁들여지기에 그걸 해제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술법 지식이 필요하다. 더불어 위상력의 감응력, 순발력과 손재주 또한 필요로 하기에 엽사 직업자들이 익히기에 최적이지만.
“함정술을 제대로 익히려는 엽사 직업자들은 거의 없다더군.”
=어째서인가요?=
“함정 기술을 배우는 게 비싸서.”
=아…….=
=흠.=
엽사들도 전투 능력만을 따진다면 전사나 투사와 비등한 수준이다.
근력이나 체력, 신체 방어력 등은 근접 전투직보다 낮지만, 순발력이나 재주 등은 그만큼 높기에 전투 능력이 전사나 투사보다 못 한다고는 절대 말 못한다.
그냥 싸우면 되는데 굳이 자기 돈 들여 함정술을 배울 필요가 있냐는 게 엽사들의 의식인 것.
엽사 직업자들의 함정술 홀대의 이유도 타당한 게, 함정 기술을 배우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드는 반면 기술을 배운다 해도 분배에 큰 메리트가 없다.
일단 함정술을 심화 과정까지 배우는 데는 일반적인 직업자가 근 10년을 빡세게 벌어야 하는 돈이 든다.
이만한 돈을 들여 함정술을 배웠을 때 그만한 리워드가 있다면 엽사들이 함정술을 익히려 하겠지만, 그런 일은 별로 없다.
함정술의 사용처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응. 나도 들었어. 본격적으로 함정 전문가가 필요한 미궁은 5급부터인데 이게 중급 함정술을 배운 사람이 필요하다더라.=
=그보다 낮은 등급의 미궁도 함정 전문가가 필요할 수가 있잖아. 그곳을 다니면 안 돼?=
=그런 미궁은 대체로 돈이 안 돼. 게다가 중급 함정도 문제인 게, 함정을 발견하면 혼자 해제하는데 이걸 실수했다간 자기 목숨’만’ 위험한 거야.=
계속 이동하며 마주치는 이형종을 정리하고 간간히 등장하는 함정문을 해제하던 환인 일행은 적당한 방에 도착해 휴식을 가졌다.
함정 전문가와 함정술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미궁을 가장 많이 들어가는 이들은 노동자야. 노동자들이 찾는 미궁은 등급이 낮고 함정이 별로 없고 수익이 나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거든?=
이런 파티에 함정 기술을 가진 엽사가 가입한다고 해서 분배율에 메리트를 줄까? 안 준다.
그렇다고 함정 기술로 인한 분배율 이득을 받을 수 있는 미궁은 대체로 5급 이상의 2계층. 능력이 떨어지면 입장도 하기 어렵다.
기초와 기본 과정을 익히는 동안에는 함정술을 쓸 곳도 별로 없고 쓴다 해도 큰 메리트가 없다.
배우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비싼 돈을 들여 함정술을 배우는데 초급, 중급 과정에서는 쓸 곳이 없는 거다. 상황이 이런데 누가 비싼 돈을 들여 기술을 배우려 할까.
그나마 초급, 중급 함정술을 활용할만한 (돈이 되는) 미궁이 있는 곳에 함정술을 익힌 엽사들이 모여들긴 하는데…….
=그런 데서는 또 파티에 가입하려는 엽사들로 인력이 넘쳐흐른단 말이지.=
이런 현상이 대두되며 함정술을 익힌 엽사는 그 숫자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헤쳐나와서 심화 과정을 익혔다고 끝이 아니라더군.”
=또 있어요……?=
“술법 함정을 해제하기 위한 고등급 함정술에는 술법학이 포함된다.”
환인은 엽사 조합에서 기술을 가르쳐주던 갈롯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성술사가 선천적인 이유로 찾기 어렵다면 함정 전문가는 후천적인 기술 습득의 난이도와 비싼 교육비, 그 과정의 푸대접으로 인해 찾기 어려운 셈이에요.’
‘찾기 어렵다는 것은 파티 생태계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겠군요.’
‘맞아요. 명문 명가에서는 재능이 있는 이를 찾아 어렸을 때부터 교육해서 자체적으로 수급하죠. 성술사처럼요.’
그녀도 고등급 함정 전문가가 되기 위해 술법학을 배우고 있는데 거기에 드는 비용이 천문학적이라 등골이 휠 지경이라고 푸념을 흘렸다.
엽사 조합에서 함정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술법학의 교육비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나마 파르히스트에는 아클라멘토 대학원이 있고, 교육 과정에 함정술이 있어 고정 수입이라도 있지 다른 데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게 갈롯의 이야기였다.
환인은 카턴 마을에서 만났던 식객, 흰여우의 피를 이어받은 아센의 푸념을 기억해냈다.
‘……제 색적 능력이라면 까다롭고 귀찮은 함정이 많은 미궁도 돌파할 수 있어요.’
추적자이자 색적 능력에 함정 해제 기술까지 가지고 있던 아센도 그러한 딜레마에 빠져 동료를 찾아다니던 중이었던 것.
갈롯에게 함정 기술을 배우던 중 환인도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함정 쪽 기능을 가진 동료를 영입해서 키울지, 아니면 자신이 함정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할지.
=보통은 동료를 영입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우리 파티는 평범하지 않으니까…….=
안느의 중얼거림과 시선을 받은 이실리테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동료를 한 번 늘리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늘어나게 된다.
함정술 뿐일까. 동료가 다쳐 일시적으로 이탈할 때를 대비한 예비도 구하면 좋겠지.
동료를 치료하는 성술사는 말할 것도 없다. 개방형 미궁을 대비해 색적, 추적 관련 기능을 가진 동료도 있으면 좋을 것이다.
산악형 미궁이 있다는 말은 비행형 위주로 전투가 벌어질 수 있다는 뜻. 원거리 전투에 숙달된 동료도 필요할 테고 급격한 환경 변화에서 보호하고 지원해줄 술법사도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환인이 동료에게 강령을 써줄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으니 각종 강화 술법, 전투용 부여 술법을 다루는 술사들도 영입해야 한다.
그렇게 상황을 대비하며 구하다 보면 파티는 소대 수준으로 인원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아니, 20~55명 집단이면 이미 클랜이나 길드라고 봐야겠지.
거점을 구한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길드 조직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방랑하는 현재는 한 명이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는 소수 정예를 원한다.
=머리가 복잡한걸.=
=주인님. 제가 한 번 배워볼까요?=
환인의 고민을 느낀 이실리테가 의견을 내세웠지만, 고려할 가치도 없어 고개를 저었다.
“너는 파티의 가사 전반과 전투만 맡아주면 충분하다.”
그녀의 자존심을 배려한 대답이었지만, 본심은 달랐다. 이실리테는 함정술에 전혀라고 할 만큼 자질이 없었기 때문.
=정 뭣하면 함정이 없는 미궁을 찾아다녀도 되는 일이니까 그 일은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도령, 충분히 쉬었으니까 이제 출발하는 게 어때?=
“음.”
안느가 내놓은 결론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아래층을 향해 걷기 시작하며 생각했다.
‘이번에 미궁을 내려가며 함정을 살펴보고 결정을 내려야겠군.’
그렇게 속으로 결정을 내릴 무렵, 통로를 걷던 안느가 천장을 보더니 어? 작은 탄성을 냈다.
이실리테도 안느의 반응에 천장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환인도 사전에 발견했던, 희미한 빛을 내고 있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저건 메리아놀 문자네요. 안느, 읽을 수 있어?=
=응. 금은 저으븝?!=
문자를 읽으려던 안느의 입을 막은 환인이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지적한다.
“저렇게 빛나는 문자는 읽을 수 있더라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다.”
=네? 어째서인가요?=
“정확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저주의 트리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금’ ‘은’ ‘저주받았다’ 이렇게 끊어 읽는 것이 정석이지. 그마저도 고등급의 술식 저주라면 보는 순간 저주나 약화가 걸릴 수 있지만…….”
환인의 손에 입이 막힌 채로 뭔가를 말하려던 안느가 아직 환인의 손이 입을 막고 있는 것을 깨닫고 손을 붙잡아 떼어내면서 말했다.
=여긴 1계층이니까 그런 저주는 없을 거 같은데? 있어도 저주 계통 특화 미궁에서나 볼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저 문구가 가리키는 건 뭘 뜻하는 걸까요. 이 층에 나오는 보물 상자는 전부 저주받았다?=
호기심을 내비치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안느가 후후 웃었다.
=누가 미궁의 벽에 글을 새겼고, 그걸 미궁이 적당히 이용해서 아무데나 붙여놓은 게 십중팔구일걸?=
=……그럼 아무 이유 없다는 거야?=
=그런거지.=
그 이야기에 환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문자는 지하 2층에서도 봤었으니까.
흐오오오오오…….
동서남북, 네 방향에 통로가 붙어있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성별이 모호한 유령의 울음소리에 안느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또 귀곡성이네. 감옥 미궁은 유령 이형종이 안 나오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미궁이 성장하면 이형종이 추가되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경우겠지.”
환인의 대답에 안느가 워 해머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이실리테에게 묻는다.
=이슬이 너 유령하고 싸워본 적 있어?=
=아니. 없어.=
그렇다면, 하고 서론을 꺼낸 안느가 유령과 싸울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준다.
=유령 계통은 대체로 생기 흡수 능력이 있다고 보면 되는데 강할수록 생기 흡수에 추가적인 효과가 붙어. 그 효과는 사람한테 안 좋은 것들 뿐이니까 절대로 유령하고 접촉하면 안 돼.=
=예를 들면 어떤 약화 효과가 나는데?=
=대표적인 건 탈력? 유령하고 접촉하면 기운이 쭉 빨려 나가. 강한 놈들은 생명력도 갈취하고 환각도 보게 만들고 오한을 들게 하거나 마비도 걸고…… 그러면서 몸은 희끄무레해서 때리는 맛도 없고 하여튼 재미없는 것들이야.=
=유령이면 물리 공격은 안 통할 테니까 위상력을 덮어씌워야겠네=
=마도기면 평범한 공격으로도 타격을 줄 수 있어. 급수 높은 유령 이형종은 위상력을 덧씌워야 하지만.=
그때 얌전히 뒤를 따르던 비상이 앞서가는 이실리테의 등을 머리로 툭, 들이받았다.
=응? 왜 그래?=
쿠엣.
“적이다.”
비상의 경고에 몸을 돌린 환인이 동쪽과 남쪽 통로를 가리키자 그곳으로 희끄무레한 안개 형태의 사람 크기만 한 덩어리가 흐늘거리며 날아들어 온다.
동쪽에서는 유령 둘과 거대 쥐 해골 하나, 남쪽에서는 유령만 둘.
그뿐만이 아니었다. 북쪽 통로에서는 시체 세 구가 터벅터벅 걸어온다. 미궁에 들어와 죽은 사람들의 시체인 듯 헤지고 부서진 무기와 방어구를 걸치고 있다.
=아, 진짜 유령 나오네.=
“북쪽은 내가 맡지. 이실리테는 남쪽. 비상은 대기하고 안느는 동쪽을 맡아라. 안느는 유령 하나를 남겨두도록”
=네.=
쿠엣!
=응.=
축성받은 마스크를 점검한 환인은 흑창을 꺼내려다 그냥 마도기천칭을 쥐고 마악 방으로 들어서려는 사슬갑옷의 여자 시체를 향해 달려가 목을 찔렀다.
그억.
환인의 공격에 반응해 부러진 검을 들어 올리긴 했지만, 그보다 기다란 스틱의 끝이 정확히 목뼈를 찍는 게 먼저였다.
으직 소리와 함께 목이 90도 각도 이상으로 꺾인 여자 시체가 뒤로 자빠진다.
‘강도 증가 기능 덕분인가. 꽤 훌륭하군.’
위상석을 스틱 몸체의 홈에 끼워놓으면 내구 수복 기능도 발동된다 했으니 봉?처럼 다루는 것도 문제없을듯하다.
그사이 쓰러져 버둥거리는 여자 시체를 밟으며 다른 여자 시체가 그으으 방으로 걸어 들어오다가 환인을 발견하곤 캬아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환인의 눈빛이 그 여자 시체의 차림에 깊어졌다.
시퍼렇게 변한 피부, 갑옷과 옷이 다 망가져 고철과 걸레처럼 몸에 걸려있다.
반쯤 썩어 근조직이 드러난 유방과 음부와 항문 사이가 쩍 갈라져 내장 일부가 흘러나온 모습은 생전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 쉽게 짐작이 가는 차림이다.
‘미궁 강도에게 노리개가 되었다가 살해당하고 미궁에게 삼켜진 직업자겠지.’
두 팔을 뻗어 좀비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 시체의 무릎을 천칭으로 후려치자 으적 무릎이 반대로 꺾이며 쿵, 주저앉는다.
환인은 그대로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퍼석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나며 찐득하게 굳은 뇌수가 파편처럼 튀어나와 한쪽 벽을 물들인다.
아래턱과 혀만 남은 여자 시체가 흔들거리다 무너지듯이 쿵, 바닥에 쓰러졌다.
그아아
세 번째로 통로에서 들어오는 여자 시체도 차림새가 두 번째 시체와 비슷했지만, 명치부터 치골까지 갈라져 내장을 쏟아낸 모습이라는 게 약간 달랐다.
철퍽
환인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뛰어오려던 여자 시체는 흘러내린 내장이 먼저 넘어져 버둥거리는 시체의 몸에 걸려 앞으로 자빠졌고, 환인은 그런 시체의 뒤통수를 내려쳐 머리를 박살 냈다.
앞선 시체처럼 머리가 박살 나자 움직임이 멈춘다.
퍽.
목뼈가 부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하는 첫 번째 여자 시체도 머리를 부수자 목뼈가 스프링처럼 튕겨 나왔다가 축 늘어지고 몸도 그렇게 흔들거리다가 널브러져 동작을 정지한다.
시체 셋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은 환인은 동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안느가 하나 남은 영혼을 위상력이 깃든 방패로 슬슬 밀어내는 모습과 이실리테가 두 마리의 영혼을 단 한 번의 칼질로 베어버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위상력이 깃든 물건은 어쩌질 못하는지 희끄무레한 덩어리 같은 유령은 안느를 향해 성긴 손짓만 하고 있고, 이실리테의 검에 의해 두 조각이 난 유령은 히이이 바람 빠지는 귀곡성과 함께 액체 같은 것으로 변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도령. 이거 어떻게 해?=
환인은 대답 대신 왼손을 유령에게 향하며 머릿속으로 강제력이 깃든 명령을 내렸다.
‘와라.’
히이익
‘이리로 와라.’
히이이이
강제력으로 명령을 내리자 반응은 나오지만 명령에 따르지는 않는다.
‘영혼에 대한 지배력이 낮아서 그런 거겠지.’
매일 빠짐없이 영혼 구슬 컨트롤과 명상과 정신 집중 훈련을 하고 있지만, 파르히스트에 도착한 뒤로 성불행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 기간이 70일이 다 되어 가니 영혼 지배력, 장악력은 아마도 거의 제자리 걸음 상태겠지.
=이거 왜 이렇게 움찔거려?=
“강제력을 시험해봤다. 이제 처리해도 된다.”
환인의 이야기에 안느가 자이언트 타워 실드로 유령을 후려치자 끼익, 쇠를 긁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방패를 훙 털어 허여멀건 액체를 털어낸 안느가 물었다.
=음. 움찔거리는 걸 보면 통하긴 하는 거지?=
“그래. 지금 내 영혼술의 수준이 아직 높지 않아 명령을 따르지는 않는 거 같다.”
=오, 그럼 도령의 영혼술이 더 성장하면 유령 말고 저런 죽은 자도 성불시킬 수 있는 거야?=
“해골이나 시체는 안 되겠지. 영혼이 아예 없으니.”
대답하며 여자 시체로 시선을 주자 덩달아 그쪽으로 눈길을 준 안느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쿠? 쿠흥. 쿠에~
빠직, 뽀득, 오도독
비상이 거대 쥐 뼈를 밟아 가루로 만들며 놀기 시작하자 이실리테가 기겁하며 말린다.
=앗, 비상아. 그런거 더러우니까 밟으면 안 돼. 지지야.=
쿠우.
=이리와. 발톱 닦아줄게.=
쿠엣!
이실리테는 비상의 발을 닦아주고 안느는 쓰러트린 이형종을 정화하고 탐지 도구로 위상석을 찾으며 돌아다니는 사이 환인은 여자 시체를 응시했지만, 역시나 빠져나오는 영혼은 없었다.
=다 됐어. 위상석은 역시 없네.=
“그럼 출발하지.”
미궁에 입장한 지 5시간째. 환인 일행은 지하 4층을 향해 움직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