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07화 (207/813)

〈 207화 〉 201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마스터 토너먼트까지 끝나고 총 3주간에 걸친 축제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물론 후야제도 있었는데 전야제와 다르게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춤도, 음악과 술, 음식도 없이 도시의 홀로렌 강 상류에서 등불을 흘려보내는 의식.

하얀성 앞 대광장에 모인 수만 명이 성주의 연설을 듣고 등롱에 불을 켠 뒤 홀로렌 강 상류까지 이동, 강에 등롱을 흘려보낸다.

유례는 파르히스트 민족혼의 불을 밝히는 의식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관심이 없던 환인은 폭이 200m에 이르는 거대한 강을 따라 새카만 어둠 속에서 노란빛을 흘리며 떠내려가는 수만 개의 등롱을 응시했다.

=도령. 무슨 생각 해?=

“각성의 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 그렇게 생각하니까 느낌이 묘한걸.=

=신님들의 총애를 받는 영혼사라서 각성도 다르다는 느낌이네.=

“다른 직업은 각성할 때 별다른 현상이 없는 건가.”

=응. 투사하고 성술사는 ‘아, 각성했구나.’하는 느낌이 들고 끝이었어.=

=전사도 마찬가지였어요.=

=신들께서 직접 내려주는 직업들만 조금 다르고 나머지는 다 똑같단다.=

신들이 직접 내려주는 직업이라. 전에 이실리테가 설명해주었던 특별한 직업들을 말하는 건가.

여자 친구들이 등롱을 떠내려 보낸 뒤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환인은 고개를 들어 새카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점차 추억이 쌓이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 품에 모이기 시작한다.

만약 지구로 돌아가야 할 때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모르겠군.’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때가 되어야 알 수 있겠지.

=이슬이는 무슨 소원 빌었어?=

=비밀.=

=여기서 빈 소원은 입에 담지 않는 게 좋단다~? 입 밖에 내면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니까.=

=…….=

유르파의 설명에 이실리테가 도끼눈을 뜨고 안느의 등을 철썩 때렸다.

대축제가 끝난 파르히스트는 빠르게 일상의 모습을 되찾았다.

거리를 꾸미는 기장식과 깃발, 입간판, 벽을 꾸미는 꽃과 화환, 수많은 노점이 철거되었고 관광객과 여행자들도 줄어 번화가, 시가지를 제외한 곳은 다시 한산해졌다.

환인이 지내는 곳도 고즈넉해졌지만, 호위 인력은 여전했다. 오히려 주변의 집으로 들어가서 호위망이 더 촘촘해진 느낌.

그러거나 말거나 환인은 감옥 미궁이 개방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미궁 입장을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이전에는 준비가 좀 빈약했었다. 가진 아공간 주머니도 적었고 식량을 챙겨갈 보존 주머니도 30리터짜리로 하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일단 아공간 주머니와 가방이 꽤 많이 늘었다.

환인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1㎥ 주머니, 샤라난의 마도구점에서 주문한 3㎥ 아공간 가방, 미궁 강도의 시체에서 노획한 2㎥의 아공간 주머니, 그리고 이번 토너먼트 상품인 3㎥ 가방.

여기에 식량을 보관할 30리터 보존 주머니와 3㎥ 보관 가방도 있으며 정화 물주머니도 다수이니 물품 용적 면에서는 중견 모험가 파티 급이다.

거실에서 안느와 유르파가 구매한 식량과 소모품으로 짐을 꾸리던 중 유르파가 중얼거렸다.

=내가 만든 아공간 가방을 써줘도 되는데…….=

목소리에 아쉬움이 듬뿍 묻어난다.

자신이 만들어놓았던 전투 보조 도구와 미궁에서 쓰기 좋은 마도구, 거기다 전 재산까지 제공하려 했지만 환인이 칼같이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아공간 가방에 모닥불용 장작을 차곡차곡 채워 넣던 안느가 포기하란 듯이 유르파의 등을 토닥였다.

=도령은 개인 소유 재산 부분에서 엄청나게 까다로우니까 그냥 포기해. 나도 금화하고 이거저거 파티 공금으로 넣으려 했는데 전부 거부당했다니까.=

=……그런 거였어? 자기~!=

이번에 새로 갱신된 20층~24층 지도를 외우고 있던 환인이 유르파를 돌아보았다.

=자기는 파티원이 개인 자산으로 파티 공금과 공용 물품을 제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렇습니다. 공금과 사비의 경계가 무너지면 불협화음이 생길 여지가 발생하니까요.”

=응응. 맞아. 돈 문제가 가장 일어나기 쉬운 파티원간의 마찰이니까. 하지만 미궁 탐사에 도움 되는 지식과 노동력 제공은 파티원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지?=

“……예.”

환인이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유르파가 미궁 탐사용 3인 마도구 세트를 탁자에 턱 하니 올려놓는다.

주변 온도 조절 기능 삼각대. 반경 5m의 기척 차단 오브제. 탈취 기능 소형 화병, 체온 조절과 방수 기능이 붙은 모포 세 장, 설거지가 필요 없는 청결 기능의 식기 3인분이다.

=내 능력은 마도 제작이니까 공금으로 파티가 쓸 마도구를 제작한 걸로 하면 되는 거지? 원가로 17은화야.=

옆에서 유르파가 꺼내놓은 마도구를 살피던 안느가 마침 대량의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나온 이실리테를 보며 속삭인다.

=이 정도면 실제 가격은 5금화가 넘겠는데?=

=비싸네. 안느, 이거 작은 보존 주머니에 담게 도와줘. 전부 미궁에서 점심때 먹을 것들이야.=

=어? 응.=

환인이 스윽, 시선을 들어 유르파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도구 생산을 위한 자금 10금화를 요구할게. 자기랑 아가씨들이 미궁을 탐사할 동안 집에서 마도구를 만들어 판매할 용도로 쓸 거야.=

“……알겠습니다.”

당당하게 환인의 주머니에서 10금화 17은화를 뺏어가자 안느가 눈을 끔뻑인다.

그걸 보며 유르파가 씨익,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웃었다.

=두고보렴. 이 10금화를 몇 달 안에 100금화로 불린 다음 미궁 탐사용 장비를 최고급으로 바꿔줄 테니까!=

이제 예전으로 못 돌아가~ 소리가 나올 정도로 돈쭐을 내줘야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싱글거리니 안느가 조금 부러워하며 빰을 살짝 부풀렸다.

저러면 파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역할을 가지고 가는 거 아닌가?

그걸 본 이실리테가 조용히 타이른다.

=부러워하지 마. 내가 가사 전반을 맡아 하듯이 안느도 성술로 파티를 지원하고 백업할 수 있잖아? 하지만 유리 언니는 전투에 참여 못하니 할 수 있는 게 저거뿐이야.=

=그건…… 그렇지만.=

=유리 언니도 초조할 거야. 저렇게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필사적으로 찾을 정도로.=

=……음.=

듣고 보니 유르파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자기 능력을 뽐낼 기회를 찾아 좋아하는 모습에서, 드디어 자신이 파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기뻐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문득 그걸 이실리테가 먼저 깨달았다는 사실에 안느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조금씩 변하고 있어.’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처음 봤을 때와 지금의 이슬이는 확실히 다르다.

뿌리를 내리지 못해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던 작은 나무가 지금은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자신을 간수하기에도 벅차 보였는데 이젠 다른 사람을 챙길 정도로 심적 여유가 생긴 모습에 안느는 왠지 기뻤다.

그녀의 뒤로 돌아가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어깨에 턱을 올린다.

=왜?=

=그냥.=

여기서 시간이 더 흐르면 이실리테는 어떤 모습이 될까. 그 모습을 얼른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헤헤 웃는 안느였다.

미궁 입장 준비를 끝마치고 대기하던 환인은 며칠 뒤, 아루루가 가져온 감옥 미궁 개방 소식에 곧바로 동료들을 이끌고 미궁으로 향했다.

=우와, 사람 많아.=

아루루의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움직였는데도 백원벽 앞 관문은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인파를 질린다는 듯이 쳐다보던 안느가 아루루의 통통한 볼살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아?루야, 2시간 전에 미궁 개방했다고 하지 않았어?=

=했어요. 친구들이랑 매일 여기서 시간 보내다가 공고문이 붙는 거 보자마자 알려드린 거예요.=

=근데 2시간 만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이 주변에는 직업자님들이 머무르는 숙소랑 여관이 많으니까요. 저 같은 애들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소문이 빠르게 퍼졌을 거예요.=

거의 40일 만에 개방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환인은 검문소 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모험가, 탐험가, 용병과 노동자들, 그리고 멀찍이서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입장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 야, 저기. 은빛 철벽이다.=

=뭐야. 붉은 대검도 있잖아. 아는 사이 같아 보이더니 파티 동료였어?=

=녹색 쿠에도 있다…….=

=그런데 저 후드 쓴 놈은 뭔데 쌍여신 사이에 끼어있는 거? 아우라도 없는 거 보면 무직자인 거 같은데.=

=짐꾼 아냐? 시발 개 부럽네. 나도 짐꾼 역할 잘 할 수 있는데.=

=이 꼴통들은 눈알을 폼으로 달아놨나……. 척 봐도 법사잖아.=

환인 일행이 검문소 쪽으로 다가가자 익스퍼트 토너먼트의 우승자와 준우승자를 알아본 직업자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토너먼트 잘 봤다고, 멋있었다고 소리는 사람들은 덤이다.

덕분에 환인은 검문소 앞이 왜 그렇게 막혔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고, 기사님. 저희는 진짜 선량한 노동자라니까요오.=

=입 다물어. 한마디만 더 하면 공무 방해로 감옥에 처넣어버릴 테니까.=

=…….=

경비병들과 두 명의 기사가 인상착의 뭉치를 들고 백원벽 안으로 들어가려는 직업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던 것.

잔뜩 날이 선 기사들의 분위기에 안느가 이실리테의 귀에 속삭였다.

=우와, 말 잘못했다가 목이 날아갈 거 같은 분위기네. 왜 저렇게 검문에 힘을 쓰는 걸까?=

=그 일 있잖아…….=

=……아.=

성주의 셋째 딸 사망 사건을 뒤늦게 생각해낸 안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입장에 시간 좀 걸리겠다고 생각하던 안느는 환인이 후드를 벗는 모습에 의아해했고, 후드를 벗은 환인을 보자마자 여기사들이 아는 척 해오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음? 아, 환인 님!=

=뭐? 환인 님?=

“아르세스트 양. 그리고 사우나데 양.”

뭐야. 도령은 언제 저 기사들이랑 안면을 익힌 거지? 재주도 좋네 진짜.

“이 많은 사람을 검문하시다니.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게 저희 파르히스트 기사단의 업무니까요. 아, 감옥 미궁에 입장하러 오신 건가요? 뒤에 있는 분들은…… 은빛 철벽님과 붉은 대검님?=

이번 토너먼트 입상자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외모 탓에 너무도 유명했다.

거기다 환인이 올려둔 호감도까지 더해지니 주의가 필요한 위험인물 명단을 걸러낼 검문 검사는 거의 형식적이 되었고, 환인 일행은 별다른 대기 시간 없이 시장통 같은 백원벽 검문소를 지나 미궁 앞 광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도려엉~.=

간드러진 콧소리와 함께 왼쪽에서 팔짱을 껴오는 안느의 행동에 환인의 한쪽 눈썹이 작게 들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비음까지 내는 거지.

……혹시 아까 여기사들과 친분을 보여서 질투하는 건가?

자신이 다른 여자들과 친근감을 보이면 알게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거나 메롱하고 혀를 살짝 내밀던 안느였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있잖아. 미궁 안에서는 그거… 어떻게 할 거야?=

아니었군.

영기 흡수를 위한 섹스가 언급되자 이실리테도 그게 궁금한지 오른쪽에서 힐끔 시선을 보낸다.

“중단해야지.”

=응……. 그게 상식이긴 하지?=

안느가 동의를 구하듯 오른쪽에 서 있는 이실리테를 쳐다보자 이실리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형종이 배회하고 미궁이 시시때때로 정신을 침해하려는 장소에서 섹스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멀쩡한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넘기기에는 안느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환인은 안느의 고민을 읽고 가까워지는 미궁을 보며 말했다.

“영기가 쌓여서 몸이 다시 커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건가.”

=조…금? 도령이랑 이슬이도 알다시피 내 몸무게는 별로 안 변했잖아. 만약 2주 넘게 하지 않으면…….=

말을 끝맺지 못하는 안느와 걱정을 살짝 드러내는 이실리테에게 환인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변화한 체격이 되돌아간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말이다.”

류히도 그랬고 창관의 여자들, 웨이포드 호텔의 메이드들도 개선된 피부가 예전으로 돌아가거나 하지 않았었다.

그녀들은 일반인이라 그렇다 쳐도 한 달을 넘긴 시간 후에 재회한 유르파도 피부는 여전히 매끈했었으니까.

=응. 알았어.=

설명을 들은 안느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환인의 눈에는 억지로 표정을 밝게 만든 것이 훤히 보였다.

억지로 표정을 밝게 만들며 흥흥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환인은 미궁의 지도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안전한 장소에서 전희를 생략하고 5분 내외로 짧게 끊는 정도면 괜찮겠지.’

5분이면 영기가 증가하지 않을 만큼은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한산한 미궁 출입구에 도달한 환인은 이실리테와 안느를 알아본 경비병 덕분에 이번에도 별다른 검문 없이 금방 미궁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석유 같은 것이 흘러내리는 느낌의 출입벽은 5급이 되어서인지 검은 영혼이 흘러내리는 불길한 느낌으로 변했다.

그리고 끔찍한 느낌의 벽을 통과해 미궁에 들어선 환인은 전에 비해 미궁의 공기가 무거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기가 더 기분 나빠졌는데. 미궁이 성장해서 그런가.=

=어둠도 좀 더 불길해진 느낌이야. 막…… 몸을 핥는 거 같아.=

4급 미궁일 때는 벽과 천장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약간 유령의 집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해지기 전의 산속 병원 폐허처럼 심적으로 압박하는 느낌이다.

일행과 함께 걸어가며 환인은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분명 원거리 호위 병력으로 보이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입장을 막지 않았을까.’

반쯤은 자신의 미궁 입장을 막으려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까지 지켜보기만 했을 뿐, 자신이 미궁에 입장하는 것을 참견하지 않았었다.

어째서일까. 자신은 걸어 다니는 생화학 폭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어쨌든 들어온 건 들어온 것이니 바깥일은 일단 머릿속에 접어두고 입을 열었다.

“3층까지 최단 거리로 내려간다. 진형은 내가 선두로 안느와 이실리테, 비상 순이다.”

=네.=

=어어.=

쿠엣.

“비상은 등짐이 불편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큐삐~

이번에도 짐 운반 역할을 맡은 비상은 새로 마련한 짐운반용 안장을 착용하고 물자를 옮기는 중이었다.

짐의 안정성과 착용감을 고려해 제작된 물건이었지만, 비상의 체격에 맞추었다고 해도 생경한 물건이라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더 편해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이번 입장의 시간 배분은 내려가는데 9일, 복귀하는데 6일해서 총 15일.

이전에는 이실리테의 실전 경험과 가벼운 미궁 탐색이 주목적이었지만, 이번에는 안느의 의무 이행과 미궁의 심층 탐사를 노리기로 동료들과 합의한 상황.

함정에 유의하며 이전에 내려와 봤던 길을 따라 삽시간에 3층까지 내려온 환인은 미궁의 구조가 생각보다 바뀐 게 더 없다고 생각했다.

‘어둠만 조금 더 짙어졌나. 확실한 것은 다음 층부터 알 수 있겠지만……. 분위기가 조금 신경 쓰이는군.’

미궁이 변했다면 지도와 형태가 달라질 테니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흡!=

쾅!

축성받은 마스크를 낀 안느가 자이언트 워 해머, 천벌의 망치를 내려찍어 개의 골격을 한 해골을 단번에 박살 내버리고는 징표를 꺼내 불사자의 혼 조각을 추출하며 중얼거린다.

=이형종이 꽤 많은걸.=

=이게 보통의 출현 빈도인가 봐. 안느, 이걸로 몇 마리 정화했어?=

=이거랑 저번에 정화한 거까지 다 합치면 197마리.=

=1,000마리 정화였지? 803마리 남았네.=

최단 거리로 3층까지 내려오는데 마주친 이형종은 17마리였다. 이 정도 분포라면 15일 일정 속에 1,000마리는 충분히 정화할 수 있겠지.

히이이이이…….

=…….=

=…….=

어디선가 여자의 흐느낌이 들려와 세 명과 한 마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방금 여자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여자가 아니라 유령 계통의 곡소리일 거야. 등급이 높아져서 그런가? 직접적인 정신 공격이 시작되나 보네.=

=아. 이것도 정신 침해 공격이구나.=

=응.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깊게 내려가면 점점 심적으로 압박이 들어올 테니까.=

그렇게 말한 안느는 마도구­천칭을 들고 앞서 걷기 시작하는 환인의 뒤를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

=근데 도령. 있잖아.=

“음.”

=이런 미궁에서 등장하는 정신체 계열 이형종한테도 도령의 강제력이 들어? 유령도 따지고 보면 영혼이잖아.=

“그건 나도 궁금하군. 정령에게 통하는 것을 보면 유령에게도 통할 가능성이 없지 않…….=

「에비… 꾸엑!」

말하던 중 벽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놀래키는 검은색 하급 정령을 반사적으로 후려친 환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주인님?=

“……눈앞에 갑자기 어둠의 정령이 나타나서, 반사적으로 공격했는데 타격이 통하는군. 천칭 덕분인가.”

「……으아앙~! 인간이 나 때렸어어어~! 우에에엥~!」

환인을 놀래주려다가 얻어맞고는 20미터가량을 날아가 뒹굴었던 어둠의 정령이 징징거리며 모습을 감추었다.

그걸 환인의 어깨 너머로 지켜본 안느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고 환인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정령들과 사이가 나빠진다든가 하는 문제로 비화하면…….

정령을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이실리테만 한숨 쉬는 주인님과 친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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