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200 파르히스트 토너먼트
* * *
시상식은 짧았다.
결승전을 관람한 성주는 우승자인 안느만 앞으로 불러 우승을 치하하며 100금화의 상금과 함께 신체 활성화의 비술이 담긴 목걸이를 수여했고, 준우승자인 이실리테와 4강 진출자인 나머지 두 명은 토너먼트 주최 측을 통해 상금과 부상을 받았다.
준우승의 상금과 부상은 50금화와 3*3*3m 아공간 가방, 3등은 30금화와 1*1*1m 아공간 가방, 4등은 10금화였으며 부전승이 발생하지 않았기에 5위는 없었다.
=땅신 교단의 성투사인가. 입단에 관심은 없겠군.=
=송구합니다.=
익스퍼트 토너먼트 우승자는 파르히스트 기사단 우선 입단 시험을 받을 수 있지만, 애초에 안느는 땅신 교단의 성투사.
=그대의 용맹스러운 대결은 잘 보았다.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그 철벽은 땅신 교단을 지키는 수호 방패가 될 테지. 훗날 그대의 위명을 이 귀로 들을 수 있길 바라겠다.=
=그 말씀 마음에 새겨 부단히 정진하겠습니다.=
성주는 작게 웃으며 안느의 오른쪽 어깨를 지팡이로 툭툭 두 번 건드린 뒤 성으로 돌아갔다.
기사단 입단의 억지 권유도 없는 깔끔한 태도였다.
토너먼트에서 뜻깊은 성과를 낸 여자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온 환인은 그녀들의 성과를 축하하려 했지만, 되려 그녀들에게 축하받았다.
=축하드려요, 주인님.=
=도령, 축하해!=
왼쪽 뺨에는 안느의 키스를, 오른쪽 뺨에는 이실리테의 키스를 받은 환인은 뜻밖의 상황에 의문을 표시했다.
어째서 축하를 받아야 할 그녀들이 자신에게 축하해준단 말인가.
=토너먼트 우승자와 준우승자를 여자 친구로 둬서?=
안느는 멋진 여자 친구를 두어서라고 했지만, 이치에 안 맞는 이야기다. 게다가 히히 웃는 모습을 보면 그마저도 농담이라는 뜻.
그러면 왜?
환인의 의문이 느껴졌는지 주인님에게 먼저 키스한다는 파격적인 스킨십에 얼굴이 조금 빨개진 이실리테가 설명했다.
=주, 주인님께서 저와 안느에게 해주신 교육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요.=
=응응. 파르히스트 3종 토너먼트는 라드세아 중부를 넘어 북부와 남부에서도 꽤 알려진 무투대회야. 거기서 우승과 준우승을 한 여자가 도령의 제1, 제2 제자라고 해봐. 제발 우리 아이한테 교습해달라고 고족과 부호들이 우르르 몰려들걸?=
환인에게 찰싹붙은 두 여자의 설명에 유르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는 이름이 알려지는 걸 별로 원치 않는 거 아니니……? 이걸 공개하면 반대로 사람들이 굉장히 몰릴 거 같은데.=
유르파의 의문에 환인을 뒤에서 껴안고 있던 안느가 으스대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든다.
=이런 커리어는 묵혀둬도 그 효과가 별로 사라지지 않는 부류야. 우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도령의 명성이랑 교육의 가치가 계속 오르는 거지. 도령 입장에서 손해 볼 건 하나도 없단 말씀.=
=아~ 그러겠네. 확실히 자기의 교습은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유니크한 수업이니까.=
그녀들의 마음을 느낀 환인은 작게 웃으며 이실리테와 안느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들에게 차례대로 진한 키스를 해주었다.
=음…….=
=으응~!=
눈을 살짝 감고 수줍부끄하면서도 환인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이실리테. 그리고 환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10cm 정도 더 큰 키로 오히려 달라붙는 안느.
환인은 두 여자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축하를 건넸다.
“우승과 준우승 축하한다. 특히 이실리테는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했군.”
=주인님께서 방어술을 가르쳐주셔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아니. 예선 토너먼트를 지켜본 결과 처음 만났을 당시 이실리테 네 수준이었으면 예선은 어떻게 통과했을 거다. 본선은 다른 문제였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4강전까지 돌파한 것은 그동안 네가 해온 노력의 성과라고 칭찬하자 적잖이 감동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아무튼, 도령? 이거 받아.=
“이건…….”
안느가 환인의 손에 올려준 것은 우승하고 받은 부상, 신체 활성화의 목걸이였다.
그 기능의 우수성 덕분에 마도기로 분류된 액세서리이고 고족이나 호족들이 많이 찾는 베스트셀러다.
=이 목걸이를 차고 시동어를 외우면 하루 10분,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해. 부작용과 후유증도 없고 착용하고 있으면 평소의 신체 회복력도 올라가는 물건이야. 일 중독 같은 도령한테 딱 맞는 물건이지?=
이런 효과라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텐데.
거절하려 했지만 안느의 얼굴을 보아하니 거절을 거절할 모양새라 환인은 조용히 받아들였다. 디자인도 남자가 착용하기에 나쁘지 않은 디자인이었고 옷을 입으면 겉으로 티 나지 않는 물건이었으니까.
“고맙다. 잘 사용하지.”
이실리테도 부상으로 받은 아공간 가방을 파티 공용 물품으로 사용하겠다며 아공간 주머니와 가방을 모아둔 곳으로 가져가는데, 안느와 유르파도 자신을 힐끔거리다가 이실리테를 따라갔다.
환인은 거실에 혼자 남아 아렐=케드윈이 남기고 간 전언을 생각했다.
‘자네의 죽음은 수 천, 수 만, 수십 만, 수백 만의 죽음과도 같으니 부디 몸조심하길 바라네. 또한 신분을 숨기지 마시게. 우리 가문의 징표가 자네를 비호할 걸세’
영혼사 한 명의 목숨 무게가 수백만 명의 목숨과 같다는 식의 비유가 아니라는 것은 듣자마자 눈치챘다.
“…….”
신분을 숨기지 말라. 이말은 즉 영혼사가 죽으면 주변에 무언가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하면 네가 죽으면 크나큰 재앙이 닥칠 것이니 영혼사임을 가는 곳마다 밝히고 필요하다면 파르히스트의 징표로 신분을 증명해 쓸데없는 분쟁에 휘말리지 말라는 뜻.
‘영혼사가 살해당할 경우 광범위한 무언가가 벌어진다는 뜻이겠지. 이 경우라면…… 영혼의 난동? 혼재가 일으키는 재액과 흡사한 무언가?’
아니. 그 정도로 수백만 명이 죽을 리는 없다.
중부에서 손꼽히게 발전한 성도인 파르히스트도 인구수가 수십만 명에 불과하다.
수백만 명이 사망할 수 있다면 주도에서 벌어지는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종족의 왕이 거주하는 주도는 그러한 대비에 철저할 것이다.
환인은 트립한 이후 문명과 접촉한 당시부터 혼재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어째서 범죄를 저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했다.
승룡천제라는 행사를 최대 4년마다 한 번, 주기적으로 영혼사를 초빙해 치르며 도시나 마을의 영혼을 청소하기 때문인 거다.
이실리테 같이 특이한 경우와 영혼사를 부르기 어려운 촌락을 제외하면 혼재가 발생할 정도로 영혼이 숙성되는 일은 드물 테지.
아무튼, 그런 대비를 생각한다면 주도에서 문제가 벌어질 일은 없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즉…….
‘전염병인가. 이 경우에는 영적인 부분에서 전파되는 전염병일 가능성이 크겠군. 어쩌면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일 수도 있고.’
생각하던 환인은 자신의 여자들이 거실로 나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영혼사의 아우라는 어느 정도로 알려졌지?”
=네?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 이름은 몰라도 영혼사의 아우라 파장은 다 알걸?=
=여섯 살만 되어도 알 거야.=
‘일반인들은 모르고 있다. 안느와 유르파도 알지 못한다.’
시두르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좋은 집안의 자식으로 추정되는 이엘카타도 자신에게 영혼사에 대해 이야기해주던 당시 그러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백려강도, 레심도 자신이 영혼사라는 것을 밝혔을 때 두려움보단 공경을 보였단 점에서 모른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환인의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간다.
주어진 조건으로 인해 나오는 가설과 도출되는 결과물들은 하나같이 우라늄 전략 핵미사일이 터진 것에 버금가는 끔찍한 것들이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지만 지식이나 지혜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환인의 얼굴이 자연스레 굳어지자 여자들도 환인이 괜히 이런 질문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특히 유르파가 그 심각성을 가장 근접하게 유추해내고는 딱, 손가락을 튕겨 방음차음 보호막을 펼쳤다.
집 밖에서 들려오던 흥겨운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소음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유르파가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자기. 영혼사의 무언가에 문제가 생긴 거야?=
환인이 생각을 정리하느라 대답하지 않자 유르파와 안느가 생각을 주고받는다.
=영혼사의 아우라? 그게 문제가 될 게 있나?=
=이 경우에는 아우라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영혼사를 알아보는 점에 문제가 있다는 듯 같아. 자기의 질문은 그런 뉘앙스였으니까.=
=알아보는 게 뭐가 문제가 돼?=
=자기가 저만큼 심각한 얼굴을 한다면…….=
=한다면?=
=……으응, 이건 너무 비약인 거 같은데. 말이 안 돼.=
유르파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지 않자 안느의 눈이 가늘어진다.
=유리 언니? 사람을 화나게 하는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거라고 했거든?=
눈을 가늘게 뜬 안느가 중년 남자처럼 손가락을 흐물거리며 다가가자 오싹, 정조에 위협을 느낀 유르파가 재빨리 이실리테의 뒤로 숨는다.
=그러니까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라고 했잖니! 얼토당토않은 아닌 거라서 말 안하는 거뿐이거든?!=
=판단은 우리가 한다. 얼른 말햇!=
=꺄아!=
안느에게 붙잡힌 유르파는 난폭하게 젖가슴을 주물러지며 비명을 지르다가 항복을 선언했다.
여자의 가는 손가락이 중년 아재처럼 음흉하게 가슴을 주무르고 젖꼭지를 꼬집으니 혐오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영혼사가 죽으면 뭔가 큰일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한 거야!=
=……?=
=……??=
이야기를 들은 안느도 그렇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던 이실리테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갑자기 영혼사의 죽음이 왜 나온단 말인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아가씨들에게 유르파가 헝클어진 브래지어 위치와 주물럭거림을 당해 속옷에서 삐져나온 젖살을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말했잖니. 비약적인 생각이라고.=
=너무 비약이잖아. 아우라를 말했는데 왜 죽는 이야기가…….=
“비약이 아니다.”
드디어 나온 환인의 발언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깜짝 놀라고 유르파의 안색이 다시 굳었다.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은 환인이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듣는 이야기는 실수로라도 밖에서 꺼내지 않도록 조심해라.”
=어, 어어.=
“아마도 국가 최상류층의 주도로 범세계 규모의 인식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떠들다가 호족, 성족, 왕족들의 귀에 들어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당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듣고 잊어버리라고 말한 환인은 아렐=케드윈을 통해 성주에게 받은 전언을 이야기했다.
아렐=케드윈을 통해 성주에게 받은 파르히스트 가문 징표도 꺼내 놓자 백곰이 새겨진 복잡하고 호화로운 문양의 금속을 본 유르파가 화들짝 놀란다.
=루나라이트! 이, 이건 뭔데 루나라이트로 만든 거야?=
“성주가 신원보증인이 되어주겠다며 케드윈 단장을 통해 전달해준 것입니다.”
=…….=
=…….=
여자들은 그제야 환인의 이야기가 피부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도령/주인님/자기가 허튼 이야기를 할 리 없고 저런 지혜로 이상한 추측을 내놓을 리 없으니 높은 확률로 진실이라는 것.
안느가 좀전의 환인처럼 심각해진 얼굴로 턱을 괸다.
=그래서 세계 규모로 사람들의 인식 개조가 이루어졌을 거라고 한 거네. 성족이나 왕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면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최소 중급 도시 규모 이상을 다스리는 가문의 당주 정도일 거야.=
=그러니까, 자기 말은 사람들이 영혼사에게 해코지 못하게 성족이나 왕족들이 대규모로 이미지 조작을 했다는 거네.=
유르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확인하자 안느가 고개를 끄덕인다.
대답은 환인이 했다.
“예.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영혼사의 자기 헌신과 성실, 선량함은 타인의 존경과 감동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니까요. 그자들은 적당히 이미지의 토대 정도만 잡아놓았을 테고 거기에 뼈와 살을 덧붙인 것은 영혼사의 선행과 그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일 겁니다.”
충격적인 이야기다. 거기다 왠지 세계의 비밀 일부를 엿본 느낌에 여자들이 침묵한다.
=……성주님이 주인님께 그런 전언을 보낸 것도 조금 이해가 될 거 같아요.=
이실리테의 조심스러운 발언에 세 명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때까지 살면서 아우라 발현이 되지 않은 영혼사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거든요. 만약 주인님이 말씀하신 대로 영혼사님이 죽으면 큰일이 벌어진다면…….=
=직업을 숨기고 다니다 큰일 당하지 말라고 징표도 내어주고 경고까지 해준 거지.=
이실리테가 안느에게 묻는다.
=넌 뭐 들은 거 없어?=
=어? 없어어. 나라고 뭐 너랑 다른 게 있을 거 같아?=
=좋은 집 아가씨랬으면서.=
=가문의 눈 밖에 난 계집애였다고 했잖아. 그리고 그 좋은 집의 주인은 아빠고. 게다가 특급을 넘어선 성급 비밀은 보통 가주 직계로 구전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거란 말이야. 아무튼 도령도…… 거기에 해당하나?=
=주인님은 강령의 혼합 직업자시니까…….=
혼합직업? 강령? 이게 무슨 소리야?
환인이 영혼사라는 것만 알고 있던 유르파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대화에 잠시 생각이 꼬였고,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자신을 응시하는 환인의 눈빛에 머리가 간만에 풀가동 되며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냈다.
이건 환인이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시험이라는 것.
=여기서 중요한 건 자기의 생각이야. 지금까지 영혼사라는 걸 숨기고 이때까지 하던 것처럼 지낼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백곰 징표를 활용하면서 영혼사로 활동할지. 후자라면 나랑 안느 아가씨는 6급인데다 이슬이 아가씨도 4급이라 우리가 영혼 기사를 대신해 자기를 수행하고 있다는 식으로 꾸며도 될 거야. 사람들은 쉽게 믿을걸?=
=전자라도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도령이 좀 강해야지.=
도령의 무기??는 안느가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의 자신에게 지금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알려주면 ‘그런 사람은 없어.’ 같은 반응을 보일 정도.
여기에 활성화 목걸이와 유르파가 만들어줄 자동 방어 마도기에 영혼 강령까지 더해지면 솔직히…….
‘7급도 도령을 어쩌지 못할걸?’
하지만 유르파는 동의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짝발로 선다. 그러자 풍만한 골반과 이실리테에 버금가는 거유가 강조되며 자연스레 요염한 자세가 되었다.
=무력으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어. 크라버리의 호족 같은 자들은 체면이 구겨졌다고 생각하면 쪽수로 압박할 텐데 도시급 영주의 무장병력을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을 거 같니? 거기다 나는 전투 도구를 모두 사용하면 힘없는 계집애가 되는데?=
=…….=
=…….=
“그러면 유르파는 어떤 방침이 좋다고 생각합니까?”
왔다.
=자기가 이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활동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촌락이나 마을에서는 안느 말대로 자기의 능력도 있고 우리도 있으니까. 다만 도시에서는 방침을 약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봐.=
“그러니까 도시 한정으로 평소처럼 활동하다 문제나 트러블이 생길 것 같으면 정체를 드러내는 게 좋겠다는 뜻이군요.”
상급 영혼사라는 것 하나만 밝혀도 낮은 계급의 호족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불가침적인 존재가 된다.
그 이유는 역시 영도와 오대 교단의 존재 및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영혼사는 보호해야 한다’는 범국가적인 구두 약속 때문이다.
상급 영혼사에게 해악을 끼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오대 교단과 사대 종족 전체가 적으로 돌아서거나 핍박할 텐데 어지간히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건드릴 수 있을 리 없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결론과 매우 흡사한 제안을 내놓았던 것.
유르파는 고개를 끄덕이는 환인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으로 논리를 풀어놓았지만, 솔직히 유르파는 그런 일이야 어쨌든 좋았다.
본심은 ‘영혼사가 죽으면 수백만 명이 죽는 재앙이 벌어진다고? 그래서?’다.
이제 자기가 없는 세상에는 흥미 없다. 자기가 죽을 때 자신도 죽으면 뭐 따로 자살할 일도 없고 좋지 뭐. 이런 느낌.
그렇다고 이런 본심을 내놓으면 자기가 실망할 테고 자신의 유용성을 의심할 테니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내놓은 답이었는데…….
‘다행이야.’
합격인듯해 안도하는 유르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이 창가 근처로 다가가 창밖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여전히 이 소장원을 지키듯 일반인, 시민을 가장한 호위 병력이 있었다.
“앞으로의 방침은 큰 변화 없이 지금처럼 직업을 감추는 쪽으로 가는 대신, 트러블이 발생할 것 같으면 직업을 밝히는 식으로 하지. 다만, 나도 그렇고 다들 회색 후드 로브나 회색 로브를 입었으면 한다.”
=아. 영혼사 일행이라는 상징으로 회색을 쓰신다는 거죠?=
이실리테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다. 특별한 녹색 쿠에와 4명의 일행. 그중 한 명은 무직자이고 다른 한 명은 혼합 직업의 성투사.”
환인의 손가락이 비상과 자신, 이실리테, 유르파, 안느를 차례대로 가리킨다.
“이만한 특징을 가진 파티가 회색 로브를 입고 다닌다면 소문은 금방 퍼질 거다.”
=응. 확실히 제 입으로 떠들고 다니는 것 만큼 구차해 보이는 게 없긴 해. 난 찬성.=
안느의 찬성을 필두로 이실리테와 유르파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이 입을 로브는 자신이 만들겠다며 유르파가 방에 틀어박히고 이실리테도 그런 유르파를 돕겠다며 집에 남았을 때, 환인은 안느와 함께 마스터 토너먼트 경기를 관람하러 다녔다.
올해 마스터 토너먼트 참가자는 7명. 그중 3명이 7급이고 나머지 4명은 6급이었다.
환인은 그런 6급과 7급의 대전을 관찰하며 대인전의 모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흡수해나갔다.
콰과광! 쿠궁, 두두두…… 뻐버벙! 칵, 카드드득!!
와아아아아……!!!
‘생각보다 빠르진 않아. 무기술과 방어술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안느와 이실리테 수준이다.’
7급 권투사와 7급 검전사의 대전을 지켜보던 환인의 감상이었다.
물론 빠르긴 매우 빠르다. 속도만을 보자면 삼림형 미궁에서 만났던 푸른 불꽃 호랑이보다 조금 느린 정도.
하지만 근육의 구조는 외견으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구조를 파악하면 움직임 또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움직임을 읽게 되면 공격을 막고 피하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수월하다.
지금 연무대에서 맞붙고 있는 검전사와 권투사는 사자와 사슴 머리의 남자지만, 신체는 지구의 사람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근육의 움직임은 포착하기 쉬웠고 환인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대전 중인 두 명의 7급은 환인에게 무수하게 썰리고 찔려서 죽고 있었다.
위상력이 깃든 공격을 막거나 피할 방법, 그리고 7급이라는 급수에서 오는 신체적인 강인함을 상쇄할 수단을 확보한다면 현실에서도 가상과 똑같은 결과를 낼 수 있겠지.
‘하지만 이상하군.’
7급으로 알려진 웨이포드의 상급 무관장, 하이에른=조드의 아우라는 팔다리를 뱀처럼 휘감고 있는 노란색 아우라였다.
그런데 저들의 아우라는 진하긴 하지만 전사와 투사의 무난한 아우라와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아우라다.
‘급수에 따라 아우라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을 얻은 자 특유의 현상이겠군.’
즉, 7급 직업자라고 해서 하이에른=조드처럼 특이한 아우라를 가진게 아니라는 뜻이 된다.
칵, 콰광!
우와아아아악……!!!
위상력이 가득 담긴 권투사의 주먹질에 검전사의 오른쪽 어깨가 박살 나며 관중석에서 경기장이 무너질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환인의 관심은 이미 경기장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그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마스터 토너먼트의 우승자와 아렐=케드윈의 친선 시합이었지만…….
“……돌아가지.”
아렐=케드윈과 마스터 토너먼트 우승자 간의 시합은 아렐=케드윈의 거절로 무산되었다는 이야기에 환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에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닐 테고.
‘직위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는데 경기장까지 불려 나와 오락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겠지.’
게다가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밑천을 털리기 싫어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직감에 피식 웃은 환인은 안느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산책하듯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