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199 파르히스트 토너먼트
* * *
토너먼트 결승전 이전에 4강전의 패자들끼리 붙어 3위와 4위를 결정하는 대전이 준비 중이었지만, 흥미가 사라진 환인은 유르파와 함께 자신의 여자들을 보러 선수 대기실로 향했다.
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대기실로 향하는 통로를 막고 있던 파르하스트의 기사에게 제지당한 것이다.
=결승 진출자와의 면회는 일절 금지되어있습니다.=
“저희는 그녀들과 같은 파티이며 동료입니다.”
=그래도 불가합니다. 이 기간에는 설령 성주님이라 하셔도 접근하지 못하는 만큼 결승이 끝난 뒤에 동료분께 축하와 위로의 격려를 드리시지요.=
성주가 와도 만나지 못한다니. 환인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유는 명확하다.
‘부정이 개입될 여지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겠지.’
예를 들어 승부조작.
=은빛 철벽의 우승으로 70장 사겠소!=
=은빛 철벽으로 20장이요.=
=붉은 대검 5장 주세요~.=
=당연히 우승은 은빛 철벽이지! 은빛 철벽으로 100장!=
=은빛 철벽 1장하고 붉은 대검 1장 살게요.=
=아니 왜 그렇게 나눠 사는 거요? 그러면 어느쪽이 이기든 손해일텐데?=
=토너먼트 표 수집가인 게지.=
=아.=
경기장 바깥, 출입구 근처의 화려한 패널 아래에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행정관 직원들이 도박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1장에 1은화, 1인당 최대 100장까지 구매할 수 있으며 배당에 따라 표의 개수만큼 환금이 이루어지는 식이다.
만약 승부조작이 가능하다면 돈을 버는 것은 말 그대로 물을 퍼담는 것 만큼이나 쉬울 테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사람이니만큼 성주령으로 접근을 차단한 것일 터.
‘계산적이군.’
그리고 양심적이기도 하다.
무인, 무사는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승부조작을 위해 참가자, 진출자들에게 접근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성주 본인의 체면과 명예도, 진출자의 목숨도 위험해진다.
그런 불안전 요소에 손을 대지 않고 환금 수수료로만 이익을 얻는 한편 승부조작에서 선수들과 구매자들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예스러운 실리를 챙기는 것은 어느 정도의 절제력과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못 할 선택이다.
경기장 밖으로 나온 환인은 결승까지 몇 시간이 남았기에 유르파와 함께 주변을 돌면서 기념품도 구경하고 사람들도 구경하고 점심도 해결했다.
그중 환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지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세련된 부스booth의 기념품 관이었다.
=아가씨들 인기가 대단하네요. 역대 최고인 거 같아요.=
“초상권… 같은 것은 없겠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이 모여 이실리테와 안느의 초상화나 무기, 방어구의 레플리카 등을 구매해가고 있었다.
자기 여자들의 얼굴이 모르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팔려나간다는 사실이 조금 불편한 환인이었지만, 자신이 불편함을 느꼈다는 사실에 더 신기해하며 유르파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인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고 있을 무렵이었다.
눈에 확 띄는 장소에 설치된 승부 예측 배팅 패널을 본 유르파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다.
=자기는 배팅 안하니? 자기 안목이면 누가 이길지 이미 알고 있을 거 같은데.=
“알고 있지만 한쪽을 사면 다른 쪽이 시무룩해지겠지요. 배당금을 얻는 이득보다 시무룩해진 쪽을 달래주는 것이 더 힘들 것 같으니 안 사겠습니다.”
=푸훗. 그건 그러네. 특히 안느 아가씨라면 삐져서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입을 삐죽 내밀 거야.=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렇게 삐져서 흥흥거리다가도 환인이 키스해주면 언제 삐졌냐는 듯이 헤헤 웃으며 환인의 목에 매달리겠지.
유르파와 가벼운 데이트를 즐기던 환인은 결승전 시작 10분 전에 경기장으로 돌아왔고, 자신의 지정석(1금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무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서있던 사람도 환인을 발견하곤 손을 작게 흔든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빛에 검은색 깃털이 흑요석처럼 반질반질 빛나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케드윈 단장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떤 놈께서 한 가지 명령을 내리셔서 말이오. 오늘은 안식일인데 이런 날에까지 부려 먹고 말이야. 쯧쯧.=
멋들어진 흑색 부리로 씨익 웃으며 대답하는 아렐=케드윈. 그의 독특한 인칭대명사가 가리키는 건 오직 한 명뿐이다.
환인은 지나치며 이쪽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곤 지정석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말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음.=
키가 2.5m에 가까운 인계족 남자는 팔짱을 풀고 허리를 숙여 문을 지나쳤다.
그 움직임에 근육이 옷 너머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며 환인은 미간을 아주 살짝 찌푸렸다.
성주의 초대장을 전하러 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1미터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보니 뭔가 묘한 것이 감각에 걸려든 것이다.
이실리테나 안느, 유르파 같은 직업자에게 느껴지는 것과는 다르다. 이건 무엇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르파가 후드를 여미곤 환인에게 속삭였다.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것 같으니까 난 밖에서 기다릴게. 누가 못 들어오게 막아야지.=
“부탁합니다.”
눈치껏 빠져주는 유르파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해준 환인은 난간에 서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기장을 응시하는 아렐=케드윈의 옆에 섰다.
“…….”
=…….=
말없이 대형 연무대를 정리하는 직원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아렐=케드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나?=
“있습니다만 케드윈 단장께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겁니다.”
=그런가. 그렇겠지. 음…… 역시 자네도 사람들의 행동이 훤히 보이나? 아, 이건 펜리의 명령과는 다른걸세. 명령받은 삭막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노인네의 잡담에 잠시 좀 어울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니 맘 편히 있으시게. 허허허.=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아렐=케드윈에게서는 아무런 선민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진심일 것이다.
환인은 아렐=케드윈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에 한층 집중하며 대답했다.
“케드윈 단장께서는 보이시나 보군요. 저는 읽어집니다.”
=오, 읽어진다라…… 그거 참 멋진 일일 거 같군. 나는 말일세, 상대를 눈에 담으면 왠지 모르게 보인다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오고 어떻게 피할지 말일세.=
“…….”
=나는 이게 평범보다 조금 더 감각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네. 그 왜, 촌락마다 한 둘씩 유독 센 놈들이 있지 않나.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지.=
또래 친구들은 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금 우쭐거리기도 했다며 클클 웃은 아렐은 잠시 후 짧게 탄식을 흘렸다.
=그 생각은 내가 성인식을 치른 다음 날, 촌락을 습격해온 짐승 떼를 통해 틀렸다는 걸 깨달았지. 마을의 어른들은 물론 마을을 지키던 형과 누나들도 나와 같은 것은 못 한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게야.=
홀로 이십여 마리의 짐승을 찔러 죽인 그날부터 아렐은 머릿속에 하나의 의문이 새겨졌다.
왜 저 사람들은 동물/괴물이 공격하는 걸 못 피하지? 저 사람들은 어째서 동물/괴물이 훤히 보여주는 빈틈을 찌르지 못하는 거지?
그 의문은 그가 강해질수록 깊이가 깊어져 22세가 되던 날에는 갈증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촌락 근처의 숲에 자리 잡고 있던 괴물들을 검 한 자루로 모두 도륙한 24살의 아렐은 어떻게 자신이 이럴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마음에 검 한 자루만 들고 태어나 자란 촌락을 떠났다.
이후 3년간 라드세아 북부, 중부, 남부를 검 한 자루와 식량이 든 짐보따리만 들고 떠돌았다.
싸움을 걸어오면 그게 일반인이든 직업자든, 동물이든 마수든, 괴물이든 이형종이든 무엇하나 가리지 않고 싸웠다. 싸워서 이겼다.
약간의 역경과 고난은 있었지만,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은 없었다.
=아니,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8급, 9급의 직업자였어도 목숨이 위험했을 테니까 내 문제는 아니지. 그랜드 비틀킹 캘러페이스, 기간틱 라이노사우르스 같이 군대가 상대해야 할 괴물을 홀로 어떻게 상대하나.=
아렐의 이야기에 환인도 생물 하나가 기억났다. 등에 산을 짊어지고 다니던 고층 빌딩 크기의 거북이.
=아무튼 그렇게 돌아다녔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네. 그러다 42년 전, 축제 준비기간인 파르히스트에 발을 내디뎠고, 거기서 그 망할 자식을 만난 게야. 곰탱이주제에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자식 말일세.=
알지? 하며 찡긋 윙크하는 아렐=케드윈은 넉살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혓바닥만 긴 놈에게 낚인 아렐은 마스터 토너먼트에 출전해 우승한다면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주겠다 했고, 아렐은 그에 넘어가 그해의 익스퍼트 토너먼트에 출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명년에 마스터 토너먼트에 출장, 거기서도 우승을 거머쥐었고…….
“근위 무사단에 입단하셨군요.”
=그렇지. 거기서 사탕발림에 또 넘어가 단장직까지 맡게 되었고.=
“그래서, 답은 들으셨습니까?”
=하! 내가 천재여서 그렇다고 하더군. 아니 누가 그걸 몰라? 몇 년을 방랑하며 시도 때도 없이 허구한 날 들은 게 너 천재라는 말이었는데! 그렇게 따졌더니 그 자식이 뭐라고 한지 짐작이 가나?=
“그게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했겠지요.”
=……맞네. 그게 사실인데 뭘 복잡하게 생각하냐는 핀잔만 들었지.=
그때 성주는 성내의 실력자란 실력자는 모두 데려와 대결시켰다. 아렐은 무직자의 몸으로 수백 명과 싸워 그들을 모두 이겼고,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그 말을 들은 아렐은 그런가? 하고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이야기.
이후에는 유르파가 말해주었던 대로였다.
근위 무사단의 단장이 되었고(쓰러트린 인물 중에 전대 단장이 있었다고) 그대로 46년간 파르히스트 근위 무사의 단장을 역임해왔다는 말.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눈앞의 남자는 아직도 초원을 떠돌던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아니, 어깨에 올려진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그때처럼 자유롭게 초원을 떠돌고 싶어 하는 거겠군.’
그런 마음이 성주를 지칭하는 칭호의 변질로 드러난 것이다.
‘꼽냐? 꼬우면 날 내쫓아 보던가.’
……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겠지.
‘혹시 단장직에 관심 없나?’
=혹시 단장직에 관심 없나?=
아렐이 목의 볏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딱히 내 주군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고. 성주님은 기본적으로 인격자이신데다 저어기 크라버리나 웨이포드의 망나니들과 다르게 권위를 남발하지도 않으시지. 수하는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시고 잘한 일에는 칭찬과 상을, 못한 일에는 호통과 벌을 내려준다네. 공명정대하다는 거지.=
“…….”
=자네가 만약 마음이 있다면 성주님께 직접 권해주겠네. 자네라면 충분히 다음 대의 근위 무사의 단장직을 해내고도 남을걸세.=
환인도, 아렐도 상대의 실력은 대화 도중 간파했다.
대화하며 무수한 환영으로 공격을 가했고 공격을 받았고 공격을 피했고 공격을 막으며 상대의 수를 읽고 보았다.
와중에 환인은 51번 죽었고 아렐은 49번 죽었다.
영혼사의 힘을 일절 사용하지 않은 공방이지만, 숨겨둔 한 수가 있는 것은 아렐도 마찬가지다.
뭐가 됐든 자신이과 아렐이 직접 붙게 된다면 5분 가량 미동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승부는 한순간에 결정 나겠지.
‘결과는 51%의 확률로 나의 패배일 테고.’
환인은 눈을 감고 작게 숨을 내뱉었다. 아렐=케드윈과 수 싸움을 하며 달아오른 심장이 천천히 식어간다.
웅성웅성…….
시간이 되었는지 관중석이 서서히 뜨거워져 가고 있다.
어느새 열린 영혼 시야에 관중석이 하나의 거대한 영기의 덩어리로 보인다. 경기장은 영기의 그릇. 관중은 그릇 속의 내용물.
직원들이 이전보다 9배는 더 큰 연무대을 다시 꼼꼼히 확인하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해야 할 목표가 있는 몸이라 파르히스트에 메일 수 없습니다. 저를 따르는 동료이자 연인들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가. 아쉽군. 자네가 와준다면 나도 속 시원히 단장직을 때려치우고 떠날 수 있을 텐데.=
환인은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당신과 저 같은 인간을 강제할 수 있겠습니까.”
=…….=
“우리 같은 자들은 마음 내키는 길을 제 발로 걸어가는 인간입니다. 그것이 설령 잘못된 길이라 해도 말입니다.”
표정 없이 턱의 볏을 쓰다듬던 아렐=케드윈의 표정이 별안간 후련해지더니 세상 만사 근심 걱정을 모두 토해내듯 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기세가 일변했다.
환인은 직감했다. 지금 싸우면 100번 싸워 90번 질 거라고.
팔과 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가슴과 머리를 짓누르던 번민이 해결되어 실력이 늘어난 건가?
씨익 보기에도 시원한 미소를 눈매에 띄운 아렐=케드윈이 말했다.
=그 이야기, 41년 전에 들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때 들었다면 지금 같은 해방감은 느끼지 못하셨겠지요.”
=큭큭큭. 그래, 그 말이 맞아. 하하하하!=
속이 뻥 뚫린 듯한 즐거운 웃음을 터트린 아렐=케드윈은 환인의 어깨를 탁탁 치면서 말했다.
=괜찮다면 언제고 내 집을 찾아주게. 자네한테라면 보물 같은 막내딸도 아깝지 않으니 말일세!=
“확답은 못 드리겠군요.”
환인의 대꾸에 프하하, 다시 웃음을 터트린 아렐=케드윈은 백색 곰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징표를 환인에게 건네주곤 휙 미련 없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성주님의 전언일세.=
‘자네의 죽음은 수 천, 수 만, 수십 만, 수백 만의 죽음과도 같으니 부디 몸조심하길 바라네. 또한 신분을 숨기지 마시게. 우리 가문의 징표가 자네를 비호할 걸세’
“…….”
환인은 직감했다. 성으로 초대했을 때 보여주었던 성주의 미묘한 기색은 이걸 뜻하는 거였다고.
=성주님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였는지 나는 머리가 나빠 모르겠지만, 성주님은 허튼 소릴 할 위인이 아닐세. 자네 같은 사람에게 그리 말할 정도라면 필시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
그러하니 모쪼록 성주의 전언을 무시하지 말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아렐=케드윈은 떠나갔다.
환인은 징표를 쥔채 그의 빈자리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환인의 정신이 딴 데 팔린 사이 이실리테와 안느의 결승전은 어마어마한 함성 속에서 안느의 승리로 돌아갔다.
언제나 방어적인 태도로 반격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 이실리테.
언제나 방어적인 태도로 적을 무력화시킨 다음 승리를 거머쥔 안느.
그러한 스타일을 결승전에서는 모두 관두고 오직 공격 일변도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호쾌하게 휘둘러지는 붉은 대검. 그런 대검을 막아내고 몸통을, 무릎을, 팔과 어깨를 박살 내기 위해 떨어져 내리는 자이언트 워 해머.
반듯한 돌로 포장해놓은 연무대가 사정없이 박살 났고 무기에 맺힌 위상력이 가시화되어 서로 맞부딪칠 때마다 굉음을 일으켰다.
응원의 함성은 둘 다 드높았지만, 비교해보면 이실리테쪽이 약간 더 컸다.
키보다 더 큰 2.3m 가량의 붉은 대검을 롱소드마냥 휘두르는 이실리테는 투여신?처럼 아름답기도 했고, 붉은 잔상을 남기며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은 문외한이더라도 무언가 있어 보일 만큼 엄청나게 멋있고 화려해 보였기 때문.
안느도 일각에서는 은빛 여신이라 할만큼 아름다워 팬이 많았지만, 역동감이 무기와 방패 둘로 나뉜 데다 보법도 어지럽게 움직이는 이실리테에 비해 정적??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화려함이 덜 드러나 이런 차이가 난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놀라운 무위를 선보이는 것은 똑같았기에 관중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기대했다. 4급 전사에 불과한 이실리테가 6급 혼합 직업자인 안느를 이겨 약자들의 카타르시스가 되어주기를.
하지만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보통 위상력통?의 차이는 곧 실력의 차이로 이어진다. 압도적인 기량을 지니지 않는 한 급수가 낮은 쪽이 이길 가능성은 0%에 가까운 것이다.
이실리테 혼자 환인에게 방어술과 무기술을 배웠다면 가능성이 있었겠으나, 안느도 환인에게 처녀를 바치고 사랑을 맹세한 이후 방패까지 소형으로 바꾸며 환인을 통해 대? 인간형 전투의 숙련도를 쌓았다.
둘의 무기술과 기량은 엇비슷하지만 이실리테 쪽이 더 높다. 하지만 위상력통은 안느 쪽이 월등하다. 위상력을 다루는 숙련도도 안느 쪽이 훨씬 높다.
거기에 안느는 방어의 스페셜리스트.
이실리테가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고, 그점은 이실리테도 알고 있었기에 초반에 승부를 내려 했다.
대전이 시작되자마자 맹공을 펼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콰과광! 쿠광, 카가각, 꽈아앙!
위상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노도와 같은 공격으로 안느의 팔에 강한 부하를 준 이실리테는 안느가 방패를 든 팔이 살짝 흔들린 걸 포착했다.
계획대로다. 주인님이라면 여기서 5단계, 6단계로 이어지는 무수한 사다리꼴의 플랜을 세워놓으셨겠지만, 자신은 이 반응을 끌어내는 게 한계.
이실리테는 레드릭의 힐트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위상력을 있는대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대련할 때에는 아무리 두들겨도 흔들리지조차 않던 안느의 팔과 방패를 향해…….
=하아아압!!=
=……?!=
자신이 가할 수 있는 최강이자 최고의 공격을 안느의 방패에 때려 박았다.
꽈과과광—!!!
붉은 대검, 레드릭이 한순간 붉은빛을 발하며 광휘의 빛을 때린 순간 강렬한 타격 속성의 위상력 폭발이 일어나 안느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폭발에 바닥 블럭이 박살나고 땅도 크게 패이며 붉은 아지랑이가 뒤섞인 먼지 폭풍이 몰아쳤다.
이만한 공격을 받았다면 제아무리 안느라도 큰 타격을 입었겠지.
레드릭을 면으로 강하게 휘둘러 흙먼지를 날린다. 그리고 빈틈을 드러내고 있을 안느를 후려치려 했지만…….
=……!=
=아야야. 진짜 앙큼하다 너. 레드릭을 완전히 다룰 수 있게 된 걸 숨기기나 하고 말이야.=
옅은 빛의 막에 둘러싸인 채 멀쩡히 방패를 세우고 있는 안느를 목격한 이실리테는 맥이 탁 풀렸다.
멈추었던 숨을 길게 내쉬며 레드릭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후우우. 어떻게든 널 한 번 이겨보려고 숨겨왔던 건데…….=
=누가 들으면 내가 압도적인 줄 알겠다? 우리 대련 승률은 네가 더 높은거 알지?=
=그건 그냥 기술만 겨루는 거잖아.=
그렇게 대답한 이실리테는 ‘맞은 건 갚아줘야지.’ 눈을 뾰족하게 만들고 방패와 워해머를 세워 접근하는 안느를 보다가 풀썩 웃었다.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심판관에게 손을 들어 선언했다.
=제가 졌습니다. 위상력이 바닥났어요.=
우와아아아앜……!!!!
위상력의 과도한 사용으로 식은땀이 흘러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 이실리테에게 관중의 격렬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항복하긴 했지만, 그전에는 시종일 격렬하고 또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이실리테는 기운 빠진 얼굴로 작게 웃으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안느는 어이없어하다가 얼굴을 찡그리곤 위상력 탈진 상태에 가까워진 이실리테를 부축해 신관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아아아아아……!!!!
아름다운 두 아가씨가 우정을 나누는 모습에 또다시 우렁찬 함성이 쏟아진다. 하지만 안느는 기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보다 이슬이의 이름을 연호하는 게 더 많이 들렸던 것.
=우씨. 내가 이겼는데 왜 진 거 같은 기분이지……?=
=이게 졌지만 잘 싸웠다는 거야.=
안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실리테를 바라보다가 갑옷 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옆가슴살을 꼬집었다.
=아파.=
=말 못하면 밉지나 않지.=
말로는 투덜거리지만,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있는 안느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