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203화 (203/813)

〈 203화 〉 197+ 전야제

* * *

부스럭.

타인이 본다면 죽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곧은 자세로 자고 있던 환인은 보드라운 무언가가 옆구리를 누르는 느낌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이 이상 예쁠 수 있을까 싶은 호박색 머리카락의 미녀가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중력을 거부하듯 한 쌍의 거유가 옆구리를 살짝 누르고 있다. 자신이 느낀 건 이 감촉이었겠지.

팔을 내려 이실리테의 허리를 감은 뒤 품에 끌어당긴다.

=으응…….=

팔베개를 하게 된 이실리테는 작은 신음과 함께 어미의 품을 찾는 새끼 고양이처럼 꼬물거리다가 환인의 가슴에 한 손을 올리곤 희미한 미소를 띠며 다시 색색 고른 숨을 내쉰다.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피부와 닿은 살갗에 전해져온다.

환인은 작은 숨소리를 내는 이실리테의 맨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생각의 주제는 단연코 어제 있은 만찬의 목적이었다.

펜리=후스티오=파르히스트 성주는 자신이 영혼사임을 알게 된 이후 그 어떤 정치적 발언도 없이 평범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파르히스트를 방문해본 소감이 어떤가.

도시에 지내며 어디 불편한 점은 없었는가.

눈에 걸리거나 신경 쓰이는 점은 없는가.

대축제 준비 기간인데 부디 축제를 즐겨주었으면 한다.

깨끗하고 넓은 도시라고 생각했다.

전혀. 잘 정비된 구획과 조경은 이때까지 본 도시 중 가장 훌륭하다.

없다. 생업에 종사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생기가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며칠 전에는 동료들과 함께 물 축제에 참여했었다. 즐거웠다.

그렇게 시답잖기 그지없는 대화만 나누다가 만찬은 끝났고 환인은 적당한 사례를 받았다.

“…….”

오른손을 들어 달빛에 비추자 중지에 녹색 보석이 박힌 백금 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름은 바람 가호 반지. 이게 딸의 시신을 챙겨준 것에 대한 성주의 사례였다.

돌아와 유르파에게 보여주었더니 설명하기를, ‘투사체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반지이며 일정 속도 이상의 물체가 날아오면 바람이 일어나 궤적을 흘려버리는 상당한 수준의 마도기라고.

몸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받은 선물이었는데 문제라면 성주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라는 점일까.

10개의 반지를 각 손가락에 끼고 있었는데, 10개 중 하나라곤 해도 성주가 사용하던 물건이다.

보통이 아니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 이건 성주가 보여줄 수 있는 호의 이상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환인은 고심했다.

아무리 자신이 영혼사라지만, 딸의 시신을 챙겨주었고 영혼이 방황하지 않도록 성불시켜주었다지만 이런 물건을 망설임 없이 주는 게 정상적인 건가?

“…….”

이만한 호의를 보여준 이유, 가장 가능성이 큰 추측은 자신을 가문 소속 영혼사로 끌어들이려 하는 포섭이지만, ‘굳이?’라는 게 환인의 심정이었다.

7급 호족이라면 중세 시대에 비유해서 백작이나 후작급의 대大 귀족이다.

해당 영지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겨우 종교의 방랑 신관 같은 자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귀물을 선물로 건네준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실리테의 어깨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풍만한 젖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기초부터 가설을 새로이 검토한다.

우선, 자신이 영혼사임을 눈치챈 이유는 사람을 풀어서 자신의 행적을 조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한 도시에서 그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사는 성주라면 틀림없이 정보 조직도 존재할 터.

신비한 힘이 실존하는 이 세상이라면 직선거리로 수백 킬로미터 정도쯤이야 금방 왕복할 수단이 있겠지.

아마 율캄까지 행적을 쉽게 더듬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 근방에는 마을이 많지 않았으니까.

성불행을 할 때마다 촌락 사람들에게 비밀 엄수를 요구했지만, 환인은 솔직히 비밀이 영원히 지켜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촌사람들은 간단히 입을 열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7급쯤 되는 호족이 보낸 사람들이 캐묻는다면 버틸 방법이 없겠지.

여기에 카턴 마을의 사도라는 자가 올렸을 보고서가 성주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육박한다.

자신을 상급 영혼사라고 오해했다면 소숫점 5자리까지 내려가겠지.

“…….”

뭔가, 반지를 내어준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도무지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답답함이 손끝에 드러나며 이실리테의 말랑말랑한 분홍색 젖꼭지를 난폭하게 건드리고 있으니 이실리테가 옆구리에 바짝 붙어오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속삭인다.

=주…인님…….=

“깼나. 미안하군.”

=아니에요…. 답답하시면…….=

잠시 꼼지락거리며 환인의 품 안에서 몸을 돌린 이실리테는 엉덩이골에 닿는 환인의 단단해진 양물을 골짜기로 살살 문지르기 시작한다.

그 애간장을 태우는 듯한 자극을 잠시 즐기던 환인은 이실리테를 뒤에서 껴안으며 그녀의 촉촉히 젖은 우물 속으로 기둥을 밀어넣었다.

쑤우욱­

=흐… 응….=

사방에서 꾸물꾸물, 잠결이라는 느낌으로 상냥하게 조이는 육벽의 감촉을 느끼며 두 손으로 이실리테의 젖무덤을 움켜쥔다.

그동안 집요하게 유두를 괴롭히고 가슴을 주물러준 덕분일까, 가슴이 G컵을 넘어 H컵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조만간 확실히 H컵이 될듯 하다.

두 손으로 잡아야 다 잡힐듯한 젖무덤을 주무르고 있으니 그 천상의 부드러움에 머릿속이 나른해지는 기분이다.

명산의 능선처럼 잘록하니 내려가는 허리도.

명품 바이올린처럼 선이 아름다운 골반도.

달빛을 받아 빛나는 듯한 호박색 머리카락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이실리테를 어루만지며 움직이듯 안 움직이듯 정적으로 그녀의 보지 속을 음미하던 환인은 천천히 사정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앙…….=

작은 콧소리와 함께 눈 앞의 하얗고 가녀린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본 환인은 좀 더 놀 생각을 접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그녀를 찾아왔던 수면의 요정이 도망가버릴 것이다. 지금 끝내는 것이 좋다.

환인은 배에 힘을 줘 그녀의 뱃속 깊은 곳에 정액을 뿌렸다.

짧지만 오직 자신의 만족만을 위한 사정.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끼며 삽입을 유지한채 손을 내려 그녀의 아랫배를 만져보자마치 내장이 밀려난 것처럼 불룩 솟아오른 부분이 느껴진다.

그게 마음에 든 환인은 잠시 아랫배를 쓰다듬어주다가 으응, 무릎을 살짝 움츠리는 그녀의 목덜미에 짧게 키스해주곤얇은 담요를 끌어 올려 함께 덮었다.

“…….”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자 옅은 향수 냄새가 난다. 언젠가 좋은 향기라고 스쳐지나가듯 말했던 그 향기다.

싱그러운 그 향기를 느끼며 환인은 잠을 청했다.기둥이 그녀의 속에 들어가있는 채지만 부드럽고 촉촉하고 따스한 느낌에 빼기 싫어졌기 때문.

남자의 물건을 속에 품은채 잠든다는 경험이 없어 조금 꼬물거리던 이실리테는,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속살을 한번 조여준 뒤 환인의 팔을 베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자다 깨서 조금 졸립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금방 잠들겠지…….

대축제 전야제로 인해 도시 전체가 시끌시끌한 와중에 환인 일행이 머무르는 소장원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시두르가 정말로 요리를 배울 사람을 보냈던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이실리테 양.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아, 안녕하세요. 이실리테 씨.=

=윤라, 수라. 어서 오세요.=

관자놀이 쪽에 작게 난 소 뿔과 I컵은 될법한 젖가슴이 특징인 인우족人?? 자매가 이실리테와 인사를 나누곤 이번에는 환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환인 님.=

=안녕하십니까.=

자매 중 언니 쪽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든 환인은 내용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계시다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후 윤라 자매는 이실리테와 탁자 끝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이실리테. 당신이 가르쳐준 요리 레시피를 요리장에게 알려드렸어요.=

=마님이 이실리테의 요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하지만 저희가 만든 것은 제맛이 나지 않아 요리장에게 요리법을 알려드리고 만들어달라 부탁드렸던 거예요.=

=하지만 요리장도 그 레시피대로 만들었지만 같은 맛이 나지 않아서…….=

자매는 사과와 함께 고급스럽게 포장된 최상급 식자재를 건네주었고, 이실리테는 그 사과 선물을 받으며 별것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님께 이야기 들었어요. 그건 아마 평범한 고기를 써서 그럴 거예요. 그날 제가 알려드린 레시피는 염장 고기를 기준으로 한 야외 요리였거든요.=

=아.=

=앗.=

=마침 점심 준비를 할 때니까 같이 가시겠어요? 직접 만들면서 차이점을 알려드릴게요.=

=부탁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세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환인은 창가에 붙어 살짝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밤 전야제가 있어서일까. 평소보다 집 앞 거리의 통행량이 더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사이 관광객이나 여행자로 안 보이는 인물들이 가끔 섞여서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숨기지 못하는 단련의 흔적, 그러면서도 직업자가 아닌 사람들.

소파로 돌아온 환인은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감시자는 아니다. 분명 집을 눈여겨보고 있지만 집을 감시하기보다는 집에 접근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는 느낌.

‘성주가 붙인 경호 인원인가.’

무언가 그림이 그려지는 기분에 바람 가호의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덜컥, 문이 열리며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안느와 아루루가 들어왔다.

=다녀왔어~.=

=다녀왔습니다!=

아루루와 함께 양손에 쇼핑 봉투를 잔뜩 들고 온 안느는 거실 탁자에 쇼핑 봉투를 올려놓으며 물었다.

=도령. 집 근처에 수상한 놈들이 보이던데 짐작 가는 거 있어?=

“약간은.”

=……?=

보통은 궁금증이 해소될 대답을 해주는데 왜 말이 없지?

환인을 돌아본 안느는 아루루를 눈짓으로 가리키는 환인을 보곤 속으로 짧은 탄성을 흘렸다.

=아루루, 그건 거기 두고 주방에 가서 이슬이 도와줄래? 점심 장만하는 거 같은데.=

=네에~.=

아루루가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들어가는 걸 본 환인은 작은 목소리로 성주가 보낸 경호 인물이 아닐까 한다고 대답했다.

흐음, 허공을 보며 뭔가 생각하던 안느는 곧 쇼핑 봉투 안에 든 옷을 꺼내기 시작한다.

=도령의 직업을 눈치챘다면 당연한 대응이네.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영혼사의 보호에 신경을 쏟아야지.=

“그런가.”

=‘그런가’로 끝낼 말이 아니야. 성내에서 영혼사가 죽기라도 해봐.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고. 난 저것도 오히려 적다고 보는데?=

“영역에서 영혼사가 죽었다간 교단과 영도에서 엄청난 항의를 보내긴 하겠지.”

=내 말이. 특히 도령은 크라버리에서 못마땅하게 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조심해야 해.=

환인이라면 5급 직업자 1개 파티를 상대로도 멀쩡하겠지만, 그렇게 강하다는 걸 모르는 성주라면 1개 부대 정도는 파견하는 게 정상이라고 안느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안느의 생각과 다르게 환인은 쇼핑 봉투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옷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게 다 뭔가.

지구에서 한때 유행하던 바니걸 복장에 유두와 음부만 가리는 역바니걸 옷. 환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 세계의 코스프레 같은 옷이 있는가하면 가슴의 70% 이상과 배꼽, 옆구리와 등을 훤히 드러내는 치파오 쇼트 원피스 비슷한 옷에 고양이 속옷과 다름없는 옷에…….

소파에 앉아 안느가 꺼내는 옷을 바라보던 환인은 급기야 진주 팬티같이 속옷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나오는 걸 보고 입을 뗐다.

“안느. 그 옷들은 뭐지.”

=응? 오늘 전야제 있잖아. 그때 입고 나가보려고. 도령도령, 이 옷 어때?=

안느의 손에 들린 것은 컨셉 그라비아 화보집이나 맥심 잡지에서나 볼법한 슬링 샷 수영복이었다.

그걸 자기 몸에 대보는 안느의 행동에 환인은 약간 기막힘을 느끼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안에도 유교 탈레반이 있었나.

아니, 이건 유교 탈레반이라기보단 자기 여자의 속살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소유욕의 발로겠지.

환인은 이실리테의 심부름인지 정원의 텃밭으로 나가려던 아루루를 불러세웠다.

“아루루, 전야제에 나오는 사람들의 복장 수위가 어느 정도입니까.”

=음~ 이 정도가 보통이라고 생각해요.=

환인의 질문에 탁자 위에 잔뜩 쌓여있는 옷 중 한 벌을 골라 보여주었다.

팬티를 겨우 가리는 초 미니스커트에 유방의 남반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짧은 크롭티.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진짜인 듯 하다고 생각한 환인은 전야제 = 여자가 남자를 유혹해서 침대로 끌어들이려는 만남의 장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안느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들린 슬링 샷을 건네받는다.

그리고 비교적 평범한 바니걸 옷을 넘겨주며 말했다.

“안느. 너는 이걸 입어 주었으면 한다. 이런 속옷 같은 것들은 밤에 내 앞에서만 입어주면 좋겠군.”

=어? 어어. 응…….=

살짝 부끄러워하던 안느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는 환인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곤 분홍색 속옷 비슷한 것을 집어 들었다.

입으면 구슬 팔찌 같은 게 보지를 가로지르는 것을 훤히 보여주는 팬티와 젖꼭지를 클립으로 집어서 가리는 유두 가리개다.

밤에 이걸 입고 섹스하자는 건가? ……와, 그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야하긴 하네.

안느가 뺨을 살짝 붉히며 주섬주섬 속옷 아닌 속옷을 챙길 무렵, 텃밭에서 채소를 뽑아온 아루루가 도저히 두고 못 보겠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저기, 안느 언니.=

=응?=

=이런 야한 옷들은 보통 임자 없는 여자들이 남자를 꾀어서 침대로 데려가려고 입는 것들이에요. ‘저를 골목길로 끌고 가서 마구 강간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다고요.=

=……!=

안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어쩐지 가게 여주인이 음흉하게 보더라니!

어? 잠깐, 그럼 이걸 입으라고 말한 이유는 도령도 그걸 알고 있었다는……!

환인은 차이나 드레스를 닮은, 옆트임이 골반 위쪽까지 올라오는 긴 원피스와 골반과 밑이 훤히 트인 일본의 무녀복 비슷한 옷을 들고 주방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마 이실리테와 유르파에게 주려는 거겠지.

후다닥 달려간 안느가 환인의 등에 매달리며 다급히 말했다.

=도령, 도령! 나 몰랐어!=

“음?”

=이런 옷을 입는 이유 말이야! 그냥 야한 게 예쁘다 싶어서 골라온 거니까! 다른 남자한테 눈이 가서 그러는 거 아니니까!=

거의 비명 지르다시피 하며 들러붙는 안느의 모습에 이유를 깨달은 환인이 피식 웃었다.

시선을 돌리자 아루루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옆을 지나가는 게 보인다.

환인은 몸을 돌려 안느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알고 있다. 오해하지 않으니 진정해라.”

밤이면 자신의 앞에서 한 마리 암컷 토끼가 되는 안느다. 자신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 하는 여자인데 오해할 리가.

안느를 다독여서 거실로 돌려보내자 교대하듯 유르파의 방문이 열리며 작업용 모노클을 낀 회색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머리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니……? 안느 아가씨의 비명이 들렸는데?=

“나중에 안느에게 물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걸 받으시죠. 안느가 사 온 전야제 축제 옷입니다.”

밑이 훤히 트여 속옷을 입지 않으면 보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바지 형태의 무녀복이다. 섹스의 편의성만 크게 높인 야하기 짝이 없는 옷.

유르파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우와 야해. 이걸 입으라는 거야?=

“끈으로만 이루어진 옷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자기 앞에서 입는 거면 난 끈 옷도 괜찮은데~.=

“괜찮군요. 그런 색기 넘치는 옷이 많으니 안느에게 부탁하면 몇 벌 받을 수 있겠지요. 받아서 저에게만 보여주면 됩니다.”

=응. 꼭 보여줄게.=

그리고 주방에서 점심을 만들며 윤라 자매와 아루루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이실리테를 바라보던 환인은 그녀의 방에 차이나 드레스 풍 원피스를 가져다 놓았다.

나중에 쥐여주어야겠군.

대축제 전야제는 무척이나 화려하고 호화찬란했다.

하얀 성 앞 대광장에서 구름같이 모인 군중이 요란한 음악 소리에 맞춰 춤추거나 술을 마시며 논다. 그렇게 분위기가 뜨거워져 가고 있을 무렵 높다란 단상에 모습을 드러낸 성주의 일장 연설이 이어지고…….

=제 30회 파르히스트 백성제를 시작한다.=

성주의 대축제 선언과 함께 3층 건물 사이즈의 으리으리한 퍼레이드 카가 5대나 등장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짐승신을 묘사한 초대형 퍼레이드 카.

대광장은 말 그대로 후끈 달아오르며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성비가 남자 3, 여자 7에 이를 정도로 치우친 대광장이어서 그럴까, 환인은 분 냄새와 여자 특유의 체취로 조금 숨이 막혔다.

거기다 눈에 보이는 여자들의 옷차림은 최소 원피스 비키니 수준의 노출도에서 최대 티백 팬티만 입고 약간의 페인팅을 한, 알몸이라 봐도 무방한 차림들이다.

첫 번째 퍼레이드카가 출발하며 수천 명이 퍼레이드 카 위에 서거나 따라가며 아찔한 춤사위를 벌인다.

좌우 인도에 빼곡히 모인 사람들. 그들이 쏟아내는 환호성과 함성. 퍼레이드 카 위에서 악단이 연주하는 소란스럽고 요란스러운 노래.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한 거리는 한밤중이었지만 절대 어둡지 않았다.

수백 명의 술사들이 총동원되어 하늘에 띄워 올린 빛의 구체 때문일까.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하얀빛의 구슬이 뿜어내는 빛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대낮처럼 밝다.

환인은 자신의 여자들과 함께 첫 번째 퍼레이드 카를 따라갔다.

=우와아! 파르히스트 대축제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진짜 엄청나네!=

=세상에! 안느, 저기 저 여자 좀 봐. 알몸이잖아!?=

=아니야~! 잘 보면 문신으로 보지를 가렸잖니?!=

=저건 벗은 거나 다름없잖아요!=

너무 시끄러워서일까, 고함지르듯 대화를 나누던 유르파는 안 되겠다 싶어 손가락을 튕겨 옅은 바람막을 쳤다.

그러자 소음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며 겨우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휴우, 완전히 알몸인 거랑 문신으로 가린 거랑은 다르지. 그나저나 전야제가 이런 느낌이었구나. 색다른걸?=

=응? 뭐야. 유리 언니는 십수 년을 여기서 살았잖아. 왜 처음 보는 것처럼 말해?=

=살긴 했지만 전야제에 참여한 적은 별로 없어. 흡정족이라는게 들통나면 막 구석에 끌려가서 강간당하기 일쑤니까. `넌 정액이 밥이라지? 아랫입으로 잔뜩 먹여줄 테니 다 받아먹어라! 으랴으럇!` 하면서.=

=…….=

=…….=

=내가 당했다는 건 아니고 아는 사람이 그렇게 당했다는 걸 듣곤 전야제에 참여한 적은 없어.=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아연실색했지만 유르파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도 괜찮은 거야?=

=당연? 우리 멋진 자기랑 든든한 아가씨들이 있는데 뭐가 걱정일까~.=

그리 말하는 유르파는 가랑이가 뻥 뚫린 무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빨간색 바지에 어울리는 빨간 속옷을 입어 그저 패션 정도로만 보이는 수준이다. 노출도도 가랑이가 트인 것 빼면 주위에서 가장 적다.

유르파의 옆에 있는 이실리테는 환인이 쥐여준 백색 차이나 드레스 풍 원피스를 입었다.

옆트임이 옆구리까지 올라와 걸을 때마다 검은색의 레이스 끈팬티가 살짝살짝 드러나는데 눈처럼 하얀 허벅지 및 다리의 각선미가 부각되어 눈길이 저절로 갈 만큼 뇌쇄적이다.

안느는 환인이 골라준 검은색 바니걸 옷을 입었는데 목에 찬 칼라와 망사 스타킹, 검은색 구두를 신고 머리에 토끼 귀 머리띠를 착용한 모습이 플뢰 족 특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은색 초식 토끼 느낌이다.

그럼에도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와 여신이 아닐까 싶은 만큼 아름다운 외모, 거기에 후광 같은 6급 성투사의 아우라가 합쳐져 만렙 토끼처럼 느껴진다.

세 명의 여자는 주변의 여자들과 비교해도 다섯 단계는 더 높은 외모다.

하지만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숙련된 전사의 느낌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농도 짙은 아우라, 남편/연인/주인이 있음을 나타내는 보라색 스카프를 목이나 팔에 묶고 있어 남자들이 접근하지 않는다.

환인이 앞에서 이 여자들은 내 거라는 살벌한 분위기를 흘리고 있어서기도 하지만 말이다.

=정말 스카프를 묶은 여자한테는 남자들이 접근 안 하네요.=

=이런 건 있다고 표시하는 거 뿐이니까. 일행이나 남자 없이 혼자 돌아다니면 끌려가기 십상이야. 저 사람처럼.=

유르파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쥐와 개 머리의 남자 둘이 노출도를 대폭 올린 메이드복 여자 한 명을 짐짝처럼 번쩍 들어서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들의 수준이 기대 이상인지 끌려가면서도 기쁜 듯 별로 반항하지 않는듯한 여자를 바라보던 환인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바란 거라면 도와줄 이유는 없겠지.

강제로 끌려간다 해도 도와주지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파르히스트 대축제, 백성제라고 하는 축제의 전야제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과 흡사한 식으로 이루어졌다.

다섯 대의 퍼레이드 카가 중앙 대로를 이동하면 도시의 모든 시민이 모여든 것처럼 대로변에 모여든 시민들이 꽃잎을 뿌리고 함성을 지르고 춤을 추며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는 식이다.

퍼레이드는 약 2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다섯 대의 퍼레이드 카가 사라진 뒤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홀로렌 강변에서 야간 축제가 밤새도록 이어졌고, 마음이 맞은 젊은 남녀들은 서로 손을 잡고 으슥한 곳으로 사라졌으며 축제라는 분위기에 마음이 개방된 여자들도 외부 방문객 남자들과 어울려 어두운 도시 곳곳에서 몸을 섞었다.

환인과 그의 여자들은 질 낮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고급 주점 3층의 창가에서 그 축제 분위기를 느끼며 술잔을 기울였다.

몇몇 여자 손님들이 젊은 벤처 사업가처럼 흑색 기조의 조끼 정장을 차려입은 환인에게 추파를 던졌지만.

=…….=

=…….=

이실리테와 안느가 살벌한 눈빛을 보내면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어 좋은 분위기를 방해받는 일은 없었다.

=와아, 정말? 자기한테 그런 힘이 있었어?=

=유리 언니도 내가 이렇게 변하는 걸 옆에서 다 지켜봤잖아.=

=난 그냥 독한 약이나 인체 시술 같은 걸 받았나 했지. 와아, 그럼 내 피부가 이렇게 깨끗해진 것도 자기 덕분이었구나.=

=그러니 유리 언니도 뒷짐 지고 물러나 있지만 말고, 이상한 여자가 주인님께 다가오면 막으란 말이에요.=

=으응, 내가 그래도 돼? 그런 건 정실인 아가씨들이 해야 하는…….=

=어차피 유리나 저희나 주인님께는 다 똑같은 여자예요. 그러니 유리 언니도 주인님의 여자라는 자각을 가지고…….=

환인은 자신의 여자들이 사이좋게 숙덕이는 것을 한 귀로 들으며 휘황찬란한 빛이 비치는 강변 축제를 구경했다.

즐거운 분위기,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들, 그리고 맛 좋은 술.

이보다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평온하고 안락한 밤의 시간을 즐기며 환인은 술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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