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195 성도 파르히스트
* * *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보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나, 본 이상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건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걸세. 아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것, 하물며 장소가 미궁이라면 더욱 쉽지 않은 일이지.=
그리 말하는 성주에게 환인은 줄곧 품고 있던 의문 한 가지를 묻고 싶었다.
자신이 가지고 나온 여자의 시체가 성주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줄곧 가지고 있던 의문이다.
왜 이런 위험한 시기에 딸이 미궁에 들어가게 내버려 두었냐는 의문.
하지만 환인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성주가 평민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초대하는 호의를 보였다지만, 이 질문은 성주의 무능을 꼬집는 질문이 될 수 있다.
이 세계에 모욕죄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위험한 다리를 건널 필요는 없다.
성주는 호화스러운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조금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조금 복잡하군. 식전에 마시기 괜찮은 위스키가 있다네. 들겠나.=
“감사히 받겠습니다.”
성주가 우람한 팔을 들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벽에 시립 해있던 하녀 두 명이 소리 없이 물 흐르듯 움직이며 곧바로 잔 세 개와 황금색으로 빛나는 유리 술병을 가져온다.
성주는 모친에게 먼저 술을 따라드린 뒤 자신의 잔에 채우고 청년의 잔에도 황금빛 액체를 채워주며 물었다.
=딸은…… 고통 없이 성불했는가?=
질문에 찰나의 시간, 환인은 눈을 서늘하게 빛냈고 조용히 대답했다.
“소녀들과 함께 미련 없이 하늘로 올랐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성주의 조금 잠긴 목소리를 들으며 환인은 시두르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도 자신이 영혼사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성 하늘고래는 영혼사와 관련된 생물이었나 보군.’
그 일이 아니라면 자신이 영혼사라는 걸 눈치챌 건수가 없다.
그렇다면 루비 브로치를 건네준 것은 자신의 정체를 읽고 보여준, 대가를 염두에 둔 호의였나.
자신이 시두르와 대화를 나눌 동안 두 차례 변모한 시선의 뜻을 읽어본다면 성주가 자신이 영혼사라는 걸 확신한 것은 조금 전.
‘시두르가 내 정체를 성주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말은 아렐 케드윈의 보고로 의심하고 방금 확신했다는 뜻. 시두르와 성주의 사이는 생각보다 더 나쁘군.’
그렇다면 역시 소환당해야 할 일을 초대로 바꾼 것은 이엘카타라는 말이 된다.
플뢰니까 귀족의 영애인가. 거기다 영혼사이니 성내의 분위기와 흐름 정도는 입수할 방도가 있을 테고, 자신을 소환하려는 성주의 의중을 모종의 수단을 통해 입수해서 개입한 것이겠지.
환인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며 이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득실을 따져보고 있을 때, 성주는 조금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내가 영혼사임을 어찌 알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는군.=
“성주님의 본의에 일개 필부에 불과한 제가 어찌 함부로 질문을 드리겠습니까. 그저 누군가에게 저에 대한 언질을 받으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성주는 작게 감탄했다. 고작 말 몇 마디와 약간의 행동으로 그것까지 읽었나.
크리스탈 잔에 담긴 황금색 액체를 목에 털어 넣은 성주가 깊어진 눈빛으로 묻는다.
=자네는 지구의 호족인가.=
환인은 대답 없이 성주처럼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살짝 피어올라 비강을 채우는 곡물의 향을 느끼며 잔 밑바닥에 약간 남은 술을 응시하다가 성주를 향해 조용히 말한다.
“저는 그저 길을 찾아 방랑하는 여행자일 뿐입니다.”
=그런가…….=
성주는 문득 눈앞의 청년에 대한 욕심이 솟아났다.
자신을 앞에 두고서도 태연자약할 정도로 담이 크며, 이쪽의 매너와 맞지 않는 행동거지이지만 그런데도 거슬리지 않는 절도가 느껴진다.
깊은 심계도 느껴지고 그런데도 눈 밖에 나지 않는 진중함까지.
웨이포드의 음흉한 자식이나 크라버리의 짜증 나는 자식과 전혀 다른 대인배의 풍모. 거기에 차원 방랑자이면서도 영혼사의 능력을 각성했을 만큼 신의 사랑을 받는 남자다.
‘이런 아들 하나만 있다면 후사 걱정은 없을 텐데.’
아니, 아들이 없으니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군.
다섯 딸 중 어느 아이가 이 청년과 어울릴까 생각하던 성주는 옆에서 들려온 모친의 목소리에 정신을 되돌렸다.
=환인 군은 이번에 곤란한 일을 겪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제가 준 브로치를 쓰지 않으셨더군요. 어째서인가요?=
…어머니께서 가문의 브로치를? 성주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으나 빠르게 풀었다.
이런 청년에게 브로치를 건네주는 것이라면 아깝지 않았으니까.
“시두르 님께서 주신 브로치를 이런 일에 쓸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손녀딸의 살해범으로 몰릴 위험마저 있었는데도 그런 평가인가요?=
살짝 놀라는 시두르에게 환인은 담담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하늘 보기 부끄러운 일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한 점 거리낌 없으니 두려워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처음에는 의심받았다 들었는데요.=
환인은 시두르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0.5초 정도 생각했다.
성주가 듣고 있으니 크라버리와 전쟁을 부추길 이야기를 꺼낼까, 아니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까.
“의심이 아니라 오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혜도 모르는 추방자가 크라버리의 앞잡이 짓을 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성주님께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성주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 생각하지 말게. 썩은 뿌리와 싹을 도려낼 기회가 되어 되려 자네에게 고마워하고 있으니.=
환인은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이 자리에서 싸움을 부추기는 발언은 곤란하다. 보아하니 시두르도, 성주도 눈치와 판단력과 분석력이 일반인 이상이다. 허튼 발언은 즉각 간파할 테지.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어 한 대답이 나쁘지 않았는지 성주도, 시두르의 얼굴도 한층 풀어진다. 술이 들어간 영향도 있겠지.
자신이 영혼사라는 사실도 밝혀졌고, 시두르와 성주가 관련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왠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듯 하여 환인은 품고 있던 궁금증을 성주에게 물었다.
“제가 수습한 시신의 주인이 파르히스트 제3 영애였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무척 놀랐었습니다. 아가씨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래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체면을 세워준다. 그런 식으로 의문을 풀 길이 없었다는 티를 내자 성주가 크게 피로한 얼굴로 한 손으로 눈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불행이 겹쳐 일어난 일일세.=
“불행스러운 사고였군요.”
=미궁의 성장 원리는 이미 다 밝혀졌다고 여겼지만…… 인간의 자만심이었던 거지. 여기에 부탁받으면 거절을 못 하는 딸의 선량함과 아비의 호령이 무서워 말을 못 하게 만든 본인의 잘못과 안전불감증까지 겹친 불행.=
성주는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괴로운 듯 잔에 술을 가득 담아 입에 털어 넣었다.
딸을 먼저 보낸 아비로써 보이는 괴로움의 표현에 환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성주는 그 이상 서로가 불편해질 수 있는 과거의 사고와 실수 등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시두르도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1000mL의 술병을 비운 세 명은 만찬이 준비된 다이닝 룸으로 이동했고, 환인은 현실의 5성 호텔 레스토랑 못지않은 코스 메뉴를 만끽하며 현실을 향한 약간의 향수병을 날릴 수 있었다.
오간 대화는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었다.
* * * *
창가에 서서 환인을 태운 사두 마차가 정문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지켜보던 시두르는 부채를 착 접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보내다니 의외로구나. 그 녀석을 거둔 것처럼 환인 군에게도 손을 뻗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 청년을 대할 때와 다르게 한 옥타브 낮아진 목소리. 정이라곤 눈물 한 방울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성주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 청년의 뒤에는 땅신 교단과 종족 연합의 고위 귀족이 둘 이상 있으며 자신도 신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계의 호족일 수도 있는 만큼 조심스레 대하는 것이…….=
=아비를 잡아먹은 그 버릇은 여전히 고치지 못했구나.=
=…….=
=어찌 보면 요나가 그리된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지. 아비가…….=
=……거기까지 하시지요.=
=후후후…. 그러지 말고 이 어미도 잡아먹지 그러느냐. 아, 그랬다간 보물고 하나가 사라지니 그게 아까워 그러지 못하려나.=
저 북극의 얼음 바람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에 성주는 희미하게 생겨나는 눈가의 주름을 매만졌다.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바람이 차가울 테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
시두르는 절대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이 아닌 표정으로 성주를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후우, 힘없는 한숨을 짧게 내쉰 성주는 잠시 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며 뒤에 시립한 집사에게 말했다.
=기사단장을 호출하도록. 무직자 중 원거리 경호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의 명단과 함께 오라 전하라.=
=예, 각하.=
* * * *
집으로 돌아온 환인은 마차가 돌아가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 풍경에 환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도령, 다녀왔어? 성에서 무슨 일 없었어? 괜찮아?=
=주인님, 성을 떠날 준비는 다 끝마친 상태에요. 말씀만 하신다면 곧장 빠져나갈 수 있어요.=
“…….”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가 당장이라도 도시를 떠날 수 있을 차림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실 한쪽에서 장구류를 착용한 모습으로 서 있는 비상을 쳐다본 환인은 유르파에게 시선을 주었다.
=…….=
하얀색 마녀 옷 비슷한 것을 몸에 걸치고 있던 유르파는 ‘말렸지만 듣질 않았어.’하듯이 어깨를 살짝 으쓱인다.
아무래도 자신이 비상 탈출해 도망쳐올 때를 대비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듯하다.
환인은 그녀들의 마음 씀씀이와 대비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 문제 없었다. 도시를 떠야 할 일도 없으니 갈아입고 와라.”
=아, 응.=
=네.=
환인도 방으로 돌아가 정장을 갈아입으려는데 언제 갑옷을 다 벗었는지 이실리테가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가벼운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들어와 정장을 벗는 것을 도와준다.
잠시 뒤에는 안느가 문을 열고 빼꼼 안을 들여다보더니 ‘늦었네.’ 작게 아쉬워하며 문을 닫고 갔다.
정장 상의, 조끼, 넥타이, 셔츠를 차례대로 벗고 이실리테에게 건네주며 환인이 말했다.
“노인장이 성주의 모친이더군.”
=……?=
노인장이 누구더라……?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이실리테는 윤라와 수라 자매를 떠올리곤 아, 작게 탄성을 흘렸다.
=굉장한 신분이셨네요. 윤라가 그런 반응을 보일 법도 했어요.=
“그녀들도 함께 있었다.”
어쩌면 그녀들이 요리를 배우러 올지 모른다고 전해주자 이실리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요리를요?=
“부인께서 네 요리가 마음에 드셨던 것 같았다. 성의 요리장에게 알려주었지만, 네가 낸 맛이 안 난다고 안타까워하시더군. 그래서 권해드렸는데 네 허락 없이 진행해서 미안하다.”
=앗.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테니까요. 비슷한 일이 생기면 주인님이 편하신 대로 해주세요.=
웃으며 하는 이야기에 환인은 이실리테의 뺨을 한 손으로 감싸며 입에 살짝 키스해주었다.
=아…….=
살짝 멍해 있던 이실리테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환인이 벗은 옷을 챙겨 도망치듯이 방을 빠져나간다.
피식 웃은 환인은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으며 성주를 떠올렸다.
‘식사 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부자유스러운 침묵은 뭐였을까.’
자신이 영혼사라는 것을 알아보아서 생긴 심경의 변화라 보기에는 맞지 않는 기색이었다.
무언가, 그보다 좀 더 무겁고 심각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보일 법 한…….
“…….”
신경 쓰이지만 사소한 정보도 없어 추리가 불가능하다.
결국 생각하는 것을 접고 한쪽으로 미뤄둔 환인은 언제고 기회가 되면 다시 알아보겠다고 생각하며 수첩을 꺼내 이에 대한 항목을 기록했다.
거실로 나간 환인은 각자 편한 옷차림으로 의자에 앉아있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유르파와 안느를 보았다.
키 195cm에 모델 몸매가 된 안느는 프릴 면바지 같은 것과 배꼽이 살짝 드러날락 말락 하는 끈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근육안느일 때 입던 끈나시와 돌핀 팬츠인데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옷을 개조했다지만 얼굴도, 몸매도 여신처럼 아름답고 늘씬하다 보니 이상하지 않고 잘 어울린다. 오히려 아슬아슬하게 젖꼭지가 보일 정도로 옷이 파여서 눈이 즐거운 느낌.
그런 그녀의 옆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붙어오며 팔을 끌어안아 왔다.
육감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검은색 박시 원피스를 입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유르파가 부러운 듯이 이쪽을 쳐다본다.
‘유르파의 입장도 이제 정리해야겠군.’
잠시 후 이실리테까지 나온 것을 본 환인은 성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성주는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불렀을 뿐이라는 이야기.
=와, 만찬을 대접받은 거야? 성주성 요리장이라면 실력이 엄청났을텐데…… 맛있었겠다.=
“확실히 요리 솜씨가 뛰어나더군. 하지만 같은 요리라면 이실리테가 만든 게 더 맛있는 느낌이었다.”
환인의 감상에 안느가 이실리테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만찬 요리를 만들어달라고 장난삼아 조르기 시작한다.
그걸 구경하는 유르파를 향해 환인이 말했다.
“유르파도 이제 알아두어야겠군요.”
=응?=
“저는 영혼사입니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급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엑!?=
화들짝 놀란 유르파가 당황한 눈으로 안느와 이실리테를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환인을 향해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으, 응……. 어, 그럼 나한테 직업을 알려줬다는 건…….=
설마 자기가 영혼사였다니. 그 사실에도 놀랐지만 직업을 자신에게 밝혀주었다는데서 더 놀라는 한편 살짝 기대감을 드러냈다.
몸을 들썩이는 회색 머리의 눈물점 미녀를 보며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로부터 15일이 지났지만 유르파의 머리색은 여전히 회색입니다. 아주 조금씩 머리색이 짙어지고 있지만 그 차이는 지극히 미미합니다. 이제 회색으로 고정되었다고 봐도 되겠지요.”
=어으응. 아, 아마도?=
“솔직히 지금도 고민됩니다. 저와 잠자리하면 세뇌에 가깝게 사고가 바뀌는데 그게 인간적으로 옳은 일인지…….”
=아니야!=
흥분해서 버럭 고함질렀다가 합,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유르파는 회색 머리카락이 너울거릴 정도로 붕붕 고개를 젓고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난, 흡정족의 백화는 상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한 종족적인 최후의 설계라고 생각해. 안느 아가씨도 생각해봐. 만약 내가 맹목적으로 자기를 따르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
=……솔직히 말하면 불안감이 없어지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도령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응응. 이슬이 아가씨는?=
=유리가 그런다면 매우 기쁠 거예요. 저와 함께 주인님을 섬기고 봉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거봐, 그치? 하듯 환인을 돌아본 유르파는 기도하듯 두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나, 나 진짜 자기랑 함께 있고 싶어. 첩이나 연위 자리도 아까우면 안 줘도 돼. 그냥, 그냥 자기 곁에서 가끔 성욕 처리 구멍으로만 사용해도 기쁘게 받아들일 테니까, 그러니까 옆에만 있게 해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거야!=
뭔가 PTSD가 발동한 것처럼 허덕이는 모습에 안느가 얼굴을 굳히더니 유르파에게 다가가 품에 꼭 안아주었다.
유르파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쿵덕이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가슴에 유르파의 얼굴이 폭 묻히도록 안은 안느가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인다.
=괜찮아. 도령은 이유 없이 버리거나 해꼬지 하는 사람이 아니야.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선한 사람이니까, 유리가 생각하는 그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아. 응, 내가 벌어지지 않게 옆에서 도와줄게. 그러니까 진정해.=
=하아, 하아…….=
말을 꺼낼 때는 괜찮았지만, 말을 멈추고 안느의 품에 안기자 호흡마저 불규칙하게 변한다.
유르파의 창백하다 할 수 있는 손이 안느의 팔을 잡으며 부르르 떠는 것을 응시하던 환인은 유르파가 흥분을 가라앉히길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가 한 말이 당신의 초조함과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약간 붕뜬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말하자 유르파도 간신히 진정한 모습으로 환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갑자기 급발진하는 것처럼…….=
작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소파에 데려온 환인은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히며 말한다.
“그럼 아까 하던 말을 이어서, 유르파 당신은 전투가 어렵지만 그 외에는 우리보다 뛰어납니다. 카턴 마을의 그 마도구점을 오랫동안 유지한 것 자체가 당신의 재정적인 능력을 증명하는 셈이지요.”
아무리 뛰어난 상품과 훌륭한 비지니스 모델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영업 능력이 없다면 번창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유르파는 파르히스트에 있을 때도 샤라난과 팀을 맺어 잘나가는 마도 제작자였고 카턴 마을로 돌아온 뒤에도 금화를 세 자릿수로 쌓아둘 만큼의 부자였다.
“그런 당신에게 파티의 재정적인 부분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제 파티에 들어와 주시겠습니까?”
=응…… 응응. 수락할게요.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질 정도로 노력할게요…….=
유르파가 환인의 가슴에 안겨들었지만, 이실리테와 안느는 유르파라는 여자의 마음속 그늘을 목격한 기분에 질투도 표현하지 못했다.
=저기이…… 정말 나랑 같이 목욕하게? 그냥 방에서 아가씨들을 안기 전에 예열용으로 날 갖고 놀아도 되는데.=
환인의 손에 잡혀 욕실 앞 탈의실까지 따라 들어온 유르파는 이상할 만큼 부끄러움을 느끼며 쭈뼛거렸다.
남자들하고 잔 경험만 따지면 세 자릿수에 도달할 정도인데 이런 기분은 처녀를 버릴 때도 느끼지 못한 설렘과 부끄러움이었다.
그러한 감정을 눈치챈 환인은 유르파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속삭였다.
“제 행동에 오해한 것 같군요. 당신을 파티원으로 영입했다지만 당장 안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당신의 변화를 지켜볼 생각입니다.”
=……??=
그럼 왜 욕실 앞까지 데려온 거지?
“혹시 그 정도로 정액을 먹지 못하면 죽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요.”
=으응. 자기한테 받은 정의 농도가 무척 진해서 앞으로 4개월은 더 안 먹어도 될 정도야. 그, 그런데 날 안 먹을 거면 왜 같이 목욕하려는 건데…?=
환인은 대답 없이 유르파의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박시 원피스 위로 그녀의 보지 둔덕을 지분거렸다.
=하앙.=
“섹스는 하지 않더라도 같이 목욕하며 스킨십으로 친분은 다질 수 있으니까요.”
=으. 그, 그랬다간 나 발정 나서 못 버틸지도 몰라아.=
아까 품에 안겼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처럼 바짝 붙어있으니 그의 체취가 너무 강하게 다가온다.
순식간에 발정해버린다고 할까, 이 냄새를 가까이서 맡으면 참을 수 있을지 장담 못하겠다.
=흑!=
스르륵, 원피스 아래로 들어와 팬티를 젖히고 속으로 불쑥 들어온 손가락의 감촉에 유르파는 관능적인 표정으로 신음을 토해냈다.
“발정이 나도 천국을 보여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의 그런 반응 조사도 겸할 예정이니까요”
유르파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유사 성행위 도구, 남자의 성기처럼 꽈베기마냥 꼬아놓은 굵은 실타래를 보며 밑이 홍수가 난 감각을 받았다.
내 몸을, 조사한다고?
아아. 이 얼마나 짐승 같은…… 남자인가.
유르파의 입에서 뜨거운 한숨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