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97화 (197/813)

〈 197화 〉 192 성도 파르히스트

* * *

아직 채 도시가 깨어나지 않은 새벽.

이실리테와 안느의 훈련을 도와준 환인은 유르파의 협조를 받아 위상류 감지 훈련을 진행했다.

촤아아아악——

“…….”

훈련 방식은 간단했다. 상의를 탈의한 채 바지만 입고 유르파가 소환하는 수속성 법술을 맞는 것.

머리 위에서 작은 폭포 같은 물줄기가 쏟아지는, 물리력은 거의 없다시피 한 술법으로 수분의 보충 목적이나 타인과 상호 작용을 통한 시너지를 목적으로 하는 기초 수 속성 술법이다.

원래 환인은 동료들에게 가고일 왕자의 비밀 무덤 탐사를 제 안 하려 했었다.

그러나 안느의 감각이 며칠 후에 시작될 토너먼트에 온통 집중되어있기도 했고, 유르파가 자신의 위상력 감지 훈련의 진척이 더디다는 걸 눈치채고는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나섰기에 환인도 훈련으로 방향을 튼 것.

촤아아아악­!

30초 정도 이어지던 물벼락이 끊기고 소녀들이 입을법한 갈색 베이비돌 원피스를 입은 유르파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자기, 어때? 느낌이 와?=

“몇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흐응. 보통 이런 체질 개선은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10년 단위로 걸리는 작업인데 역시 자기는 굉장하네.=

“얼마 전 운 좋게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이지요.”

길레스=벡슬이 던진 화염 부적 덕분에 느꼈던 감각, 그것이 유르파가 일으킨 약한 술법적 공격 덕분에 점차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위상류의 자극은 성술같은 보조 효과보단 법술 같은 순수한 속성 공격에 더 크게 반응한다는 것이 판명 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계속 감각 훈련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체질 개선 작업은 몸에 강한 부하를 주기 때문에 천천히 해야 한다고 유르파가 설득했고, 그 결과 아침과 저녁에만 다섯 번씩 자극을 받는 중이다.

잠시 후 물줄기가 끊어지고 유르파가 다가오며 말했다.

=고생했어~.=

“고생했습니다.”

=여기, 수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수건을 넘겨준 유르파는 환인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순간 재빨리 그의 마른 근육과 복근의 식스팩을 눈에 담는다.

크으, 저 멋진 식스팩 좀 보고 단단하게 각진 흉근이나 떡 벌어진 어깨는 또 어떻고!

내가 저 멋진 몸에 파묻혔었다니…… 믿기지 않네 진짜.

그날 그와 보냈던 뜨거운 시간을 떠올리자 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며 보지에서 침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환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허벅지를 오므린 유르파는 그에게서 수건을 건네받아 젖은 목과 보기 좋은 수준의 근육이 잡힌 어깨와 등을 닦아주면서 사심을 한가득 채운다.

그사이 환인은 점점 격해지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쾅­ 콰곽! 카드득, 쿠궁, 쾅! 퍽, 타다당!

둘 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향해 대검을, 자이언트 워 해머와 자이언트 타워 실드를 부딪쳐나간다.

1초에 세 번씩 무기와 방패를 부딪치는 고속의 공방전.

아까부터 발자국이 3m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살짝살짝 움직이며 무기 막기와 회피, 반격을 적절히 사용하는 이실리테와, 폭풍을 만난 거목처럼 하위 방어술로 분류되는 막기block와 쳐내기deflect로 이실리테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는 안느의 대련은 꽤나 눈요기가 되는 점이 있었다.

살면서 한 번 보기 힘들 정도의 미녀들이 땀을 줄줄 흘리며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이라거나, 땀 때문에 옷이 젖어 속살이 살짝살짝 비치는 점이라거나.

“흠.”

=왜 그러니?=

환인의 젖은 몸을 다 닦아준 유르파가 뒤에서 젖은 수건에 대고 냄새를 킁킁 맡다가 얼른 수건을 숨기며 묻는다.

“확실히 대련은 비슷한 실력끼리 해야 늘어나는군요.”

=이슬이 아가씨 말이니?=

“제가 대련해줄 때는 실력의 상승이 더뎠는데 안느와 대련하면서 실력이 빠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마음가짐도 훨씬 단단해지고 있고요. 좋은 현상입니다.”

유르파는 살짝 딴지를 걸고 싶었다.

‘이슬이 아가씨가 저렇게 단단해진 이유는 자기 덕분인 거 같은데…….’

저런 모습과 각오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안느 아가씨나 자신일 리 없으니…….

결판은 곧 났다.

이실리테가 과감하게 찌르기를 질러 안느의 자이언트 타워 실드 정 중앙을 찌른 순간 검자루를 쥐고 반 바퀴 회전.

그 압력과 회전력에 방패가 흔들린 틈을 타 위에서 떨어지는 워 해머를 대검으로 쳐올린 뒤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안느의 가슴에 숄더 태클을 먹여 안느를 몇 걸음이나 물러서게 만든 것으로 승부가 난 것이다.

=으, 또 졌네.=

어깨 박치기를 명치에 먹은 안느가 워 해머와 타워 실드를 내려놓고 가슴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어째 날이 갈수록 기량의 차이가 좁혀지는 느낌이다.

물론 직업의 힘까지 동원해 싸우면 자신이 매번 이기겠지만, 그건 위상력의 양과 등급으로 찍어누른 거다.

6급이나 되어서 4급 전사를 이겼다고 자랑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게다가 뭔가, 이슬이의 검술은 이상하다.

자신이 아는 대검 전사 대부분은 딱딱 끊어지는 공격과 강력한 힘이 특징이었는데 이슬이는 대검 사용자라기보단 검무를 추는 무희 같다고 할까.

상대하고 있자면 이슬이의 몸놀림에 뭔가 현혹되는 기분이다. 여자마저 유혹하는듯한 저 아름다운 얼굴이 무표정도 아니고 나른한 표정도 아니고…… 하여튼 저 표정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울렁거린단 말이다.

게다가 몸매는 좀 좋나.

저런 몸으로 검무를 추듯 막기와 피하기, 반격을 사용하며 중간중간 궤적을 읽기 힘든 공격까지 해대니 속된 말로 환장할 지경이다.

=검술이 점점 도령을 닮아가는 느낌이야.=

안느가 툴툴거리자 이실리테가 수건을 가져오며 웃었다.

=내가 주인님한테 기술을 며칠이나 배웠는데. 이 정도는 해야 주인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단 말이야.=

=으~. 나도 빨리 도령한테 부탁할걸 그랬어어.=

설마 도령이 막기와 쳐내기마저도 달인처럼 다룰 줄 누가 알았나.

안느의 오해가 깊어지는 가운데 이실리테가 깨끗한 수건을 넘겨주며 다독였다.

=넌 나보다 무술의 자질이 뛰어나니까, 주인님께 배우다 보면 너도 금방 강해질 거야.=

=응…….=

길이만 1.8m에 달하는 자이언트 워 해머를 지팡이처럼 짚고 잠시 생각하던 안느는 이제 자기 키와 비슷한 크기의 자이언트 타워 실드를 쳐다보았다.

자이언트 타워 실드는 이형종이나 마수, 괴수의 공격을 막는 데 최적화된 방어특화 둔기나 다름없다.

일반 타워실드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두껍고 더 무겁다 보니 들고 휘두르거나 내려치기만 해도 급이 낮은 마수나 이형종은 짜부라질 정도.

덕분에 타워 실드로 다룰 수 있는 테크닉은 극히 제한적이다.

‘역시 방패를 바꿀 때가 됐어.’

도령과 함께 다니다 보면 사람과 싸울 일도 많아지겠지.

이때까지는 이형종이나 괴물을 상대로만 싸워왔기에 자이언트 타워 실드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쳐내기 같은 섬세한 기술을 배우려면 교단에서 지급 받은 광휘의 방패 같은 게 훨씬 나을 터.

광휘의 방패라 불리는 은색 카이트 실드도 일반적인 카이트 실드보다 2배는 크지만, 안느의 키도 195cm이니 비율상 적당한 수준이다.

오히려 일반 카이트 실드를 쓰면 키 탓에 스몰 실드처럼 보이겠지.

안느는 결단을 내리고 자이언트 타워 실드를 깨끗하게 정리한 뒤 아공간 가방에 집어넣었다.

훈련을 끝내고 거실로 돌아온 환인은 안느의 정신적인 피로가 조금 누적되어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요 며칠 대련과 훈련을 빡세게 한 것도 있고 이래저래 정신적인 피로가 쌓일 만 하겠지.

환인은 수첩을 꺼내 축제 일정을 확인하고는 이실리테와 안느, 유르파를 불러 권유했다.

“남부 물신 교단 앞 광장에서 물 축제를 한다는데, 한 번 가볼까.”

=어, 물 축제?=

안느와 아가씨들이 혹하는 얼굴로 돌아본다.

“그래. 마침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 일정이 맞는다면 물 축제가 시작될 거다.”

=우와, 맨날 훈련하거나 집을 나가면 자료수집만 하거나 하던 도령이 어쩐 일이야?=

“네가 좀 지쳐 보여서.”

=…….=

무, 뭐야…… 가슴 두근거리게.

곁에서 지켜보던 유르파는 새콤달콤한 젊은이들의 감정 교류에 흐뭇해하면서 얼굴을 붉힌 안느와 이실리테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들 물 축제에 가는 거지? 그럼 내가 좋은 걸 가지고 있으니까 따라오렴. 우리는 나갈 준비할 테니까 자기는 잠깐만 기다려요~.=

유르파에게 끌려가며 좋은게 뭐냐고 묻는 안느와 보면 안다고 대답하는 유르파.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여자들의 모습에 환인은 권유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유르파, 안느, 이실리테 세 명이 한여름의 햇살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하얀색 원피스지만 모습은 제각기 달랐다.

이실리테는 그 큰 가슴을 강조하는 듯 허리선이 가슴 아래에 있는 원피스.

안느는 목둘레에 복잡한 문양의 망사가 붙어있는 데다 맵시 있는 다리와 팔을 그대로 드러내는 튜닉 원피스.

유르파는 특색 없이 무난한 티 원피스다.

셋 다 별다른 액세서리가 없는 차림이었지만 워낙 아름답다 보니 옷만으로도 미모가 확 사는 느낌.

특히 이실리테와 안느는…… 식상하지만 여신처럼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아름답군.”

=헤헤.=

=가, 감사합니다…….=

세 명의 미모를 칭찬하던 환인은 유르파가 다가와 기대해도 좋을 거라며 귓속말을 해주고 싱긋 웃었는데, 그 이유를 물 축제에 참가하고서야 알았다.

하얀 원피스가 물에 젖으니 그녀들의 속살과 속옷이 그대로 비쳐 보이며 무척 육욕적으로 보였던 것.

그러나 환인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없었다.

종합 운동장의 3배는 될 법한 넓은 광장에 수백 명이 모여있었는데, 이실리테와 안느의 미모에 질투한 여자들이 그녀들을 노리고 집요하게 물을 퍼부었고, 환인의 매력에 홀린 여자들은 환인의 젖은 모습을 보기 위해 집요하게 바가지를 휘둘러 물을 뿌렸던 것이다.

물을 피하는 와중에 환인은 입구에서 팔찌를 나누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입장할 때 받은 팔찌가 이런 기능이었군.’

하나는 물을 뿌려 맞춘 횟수, 다른 하나는 물을 맞은 횟수를 카운트하는 마도구였다.

주위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벤트가 끝났을 때 가장 적게 맞고 가장 많이 맞춘 사람을 찾아 상품을 증정한다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애초에 맞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한 번도 물을 맞지 않고 여자들에게 물을 뿌려나갔다.

=꺄악!=

=아앙, 또 맞았어어.=

=이익! 저 남자 왜 저렇게 잘 피하는 거야!?=

근래에 이실리테와 테스트해본 결과 날아오는 화살도 낚아챌 수 있게 된 환인이다. 눈에 훤히 보이는 물보라를 피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야아아~! 다들 저 남자를 노려! 혼자 옷이 뽀송뽀송하잖아아~!=

다들 젖었는데 혼자만 멀쩡하다?

즉시 공적으로 지목된 환인은 우르르 모여드는 여자들을 피해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물을 채워놓은 바가지를 빼앗아 뿌리거나 분수대에서 물을 받아 쫓아오는 여자들에게 뿌렸다.

=아앗, 도령! 도와줘!=

키가 보통 여자들보다 20~30cm가 더 큰데다 여신처럼 아름다워서일까, 시작부터 뭍 여자들의 표적이 되어 수백 번 물보라에 얻어맞은 안느가 캬하하 웃으면서 달려와 환인의 뒤에 숨는다.

=우와! 뭐야, 도령 옷이 하나도 안 젖었잖아? 물벼락을 다 피한 거야?!=

“피하기 쉽더군.”

=도령이나 피하기 쉬운 거지!=

환인의 대답에 안느가 깔깔 웃는다. 근심 걱정과 피로가 싹 날아간 듯 티 없이 맑은 미소다.

=도령 진짜 사기야! 아하하!=

잠시 후에는 이실리테도 홀딱 젖어 감색 속옷이 비쳐보이는 모습으로 달려와 합류했고, 유르파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금방 일행에 합류해 편을 먹고 다가오는 여자들과 물싸움을 시작했다.

=여기 물에 안 젖은 남자가 있어! 다들 모여~!=

맞게 둘까보냐!

도령/주인님/자기는 내가 지킨다!

의욕을 내면서 몸으로 환인의 앞을 막고 다가오는 여자들을 향해 물을 마구 뿌리는 세 여자.

환인은 그런 여자 친구들을 뒤에서 지켜보며 작게 웃었다.

오길 잘했군.

이벤트가 끝나고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압도적인 스코어(물 맞은 횟수 0회 / 물 때린 횟수 64회)를 기록한 환인은 물 축제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부상으로 500mL 용량의 정화 물주머니를 받을 수 있었다.

시상을 치른 뒤 환인은 여자 친구들과 함께 축제 분위기의 도시를 거닐며 데이트를 즐겼다.

노천 극장에서 연극도 보고 기예단의 재주도 구경하고 동물로 곡예 하는 곡예 쇼도 관람했다.

노점에서 파는 얼린 과일 과자나 행정관 직영 노점에서 크레이프도 사서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시종일 입에서 군것질을 떼지 않던 아가씨들이 스페인 광장 같은 곳에서 세 번째 크레페를 사서 먹으며 히히덕거렸다.

=와, 속옷까지 다 말랐네. 이런 얇은 원피스를 입으라고 한 이유가 있었구나.=

=응응. 날이 좋아서 물에 젖어도 금방 마르거든. 주위를 둘러봐 봐. 다들 비슷비슷하게 입고 있잖니.=

=난 또 유르파가 흑심을 품고 이런 거 입힌 줄 알았지. 이슬이도 그렇게 생각했을걸?=

=내가 흑심 품을 게 뭐가 있니? 오히려 자기한테 이~렇~게 예쁜 몸으로 관능미를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게 아니니?=

유르파가 짓궂게 웃으며 안느와 이실리테의 원피스 등 어림을 잡아당긴다. 그러자 두 아가씨의 잘록한 허리와 물방울 모양의 풍만하고 예쁜 가슴의 윤곽이 확 드러나며 환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환인의 시선이 닿은 곳은 1자 모양의 예쁜 배꼽들.

아주 살짝, 근육이 잡히기 직전의 탄력 넘치는 복근과 그런 복근의 매력을 한층 더 높이는 배꼽의 그림자에 환인의 시선이 깊어졌고, 남친의 노골적인 시선에 안느와 이실리테는 빨개진 얼굴로 유르파의 손을 밀어내곤 애꿎은 크레페만 우물거렸다.

그렇게 즐겁게 놀고 집으로 돌아온 환인은 문 앞에서 집 지키기를 부탁한 아루루의 놀라고 당황한 얼굴을 마주했다.

=화, 환인 님! 집에 소, 손님! 손님이 오셨는데 그분이, 그분이!=

=아루루, 진정해. 집에 누가 왔다는 거야?=

이실리테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아루루의 강아지 귀를 쓰다듬어주자 하우우, 긴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토해낸 아루루가 집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 성에서 나오신 분이예요. 배, 뱁백천 그그그뉘 무사단잦즈즈자자장님니니밈미……!=

백천 근위 무사단 단장.

환인과 이실리테, 안느의 눈빛이 동시에 깊어지고 유르파가 우려의 눈빛을 비춘다.

=유르파. 아렐 케드윈이라면 그저께 이야기했던 그 사람 아냐? 막, 살아있는 검신이라고 말이야.=

=맞아. 그런 사람이 왜 찾아온 거지?=

“성주님의 뜻이겠지요.”

그때 이야기는 환인도 들어서 기억하고 있다.

환인은 문에 다가가는 사이 수많은 생각과 가설과 계획을 떠올렸다가 가라앉혔다.

‘초대겠지.’

40년간 성주직을 탈 없이 해왔을 정도의 남자라면 육감이든 뭐든 뛰어난 분야가 있을 테고, 그걸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으리라.

제하=메샤와 아클라멘토 대학원의 소동만 없었다면 성주가 위화감을 느낄 일은 없었을 텐데.

아무튼, 성에서 사람이 나왔다지만 기사단이 몰려오거나 병사들이 에워싼 게 아니다. 성내 무력 서열 1위나 다름없는 근위단의 단장이 홀로 찾아왔다면 트러블일 가능성은 없다.

생각을 마무리하면서 문을 열자 환인은 키 2m의 검은색 닭 인간과 마주할 수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은실로 최소한의 장식만 넣은 제복. 그리고 그러한 색과 무척 잘 어울리는 칠흑 같은 깃털과 연필심처럼 까만 부리, 검은색 물감처럼 까만 볕, 부리부리한 잿빛 눈동자.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아우라.

날개는 없다. 수납식인가? 팔은 인간과 다름없지만, 발이 닭의 발인데 발마저도 까맣다. 오골계 계통의 조인족인가. 사람보다 허리춤의 검이 더 존재감이 강하군.

환인의 눈이 찰나의 시간 동안 존재감이 없다시피 한 아렐=케드윈을 훑을 때 아렐=케드윈도 환인을 훑었고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나와 동류로군. 거기에 이 기척은 정령인가. 하지만 혼의 기운도 느껴지는데…… 보고서는 엉터리였어.’

직업이 있지만 아우라 발현이 일어나지 않은 법사 계열이라고? 농담도. 저런 인물이 법사라면 자신은 예전에 전장에서 법사에게 목이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아렐=케드윈은 망할 영주놈께서 왜 정중이라는 단어에 악센트까지 줬는지 이해하고 살짝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시했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은 무례를 용서하시오.=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환인입니다. 이쪽은 제 연인들인 이실리테, 안느, 그리고 유르파.”

연인이 셋? 보고서에는 둘이라고 되어있었는데 그사이 한 명이 늘었단 말인가. ……아니, 유르파라면 카턴 마을의 비술사라는 그 여자군.

그보다 굉장한 미녀들이다. 자신도 펜리 성주와 함께 돌아다니며 적지 않은 미녀들을 봐왔는데 저 은발의 키 큰 플뢰와 황색 머리카락의 동족 아가씨는 그중에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

거기에 직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술을 단단히 연마한 특유의 기세가 느껴진다.

=허허. 본인은 아렐 케드윈, 미력한 무직자이지만 과분하게도 성주놈님의 왼팔을 맡고 있소.=

=……??=

=…?=

=……?=

방금…… 성주놈이라고 한 거 같은데? 여자들이 혼란에 빠졌지만,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렐=케드윈에게 앉으라 손짓한 다음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백천 근위 무사단의 단장직을 맡으신 분께서 절 찾아오신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군요. 혹시 제하 메샤의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짐짓 모르는 척 연기를 시작하자 아렐=케드윈은 끔뻑 넘어가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오. 본인이 귀하를 찾은 것은 영주놈님의 초대장을 전달해드리기 위해서라오.=

했어! 방금 영주놈이라고 분명히 말했어!

세 여자가 경악하든 말든 아렐=케드윈은 품에서 약간도 구겨지지 않은 백색 초대장을 환인의 앞에 내려놓고 툴툴거린다.

=성주님께서는 귀하를 ‘정중히’ 초대하라 하였지만, 솔직히 칼밥만 먹고 사는 무지렁이라 어찌해야 정중한 초대가 될지 모르겠군. 그런 일이라면 자스칼 집사장이라도 보내면 될 것을.=

“단장님이 직접 방문을 하셨다는 것 자체가 정중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해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오. 그러면…… 확인해보시겠소?=

환인의 대답에 턱의 볏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은 아렐=카드윈이 초대장을 가리켰다.

“…….”

고급스러운 초대장을 열어본 환인은 이런저런 미사여구로 꾸며진 여섯 줄의 글귀를 볼 수 있었다.

요약하면 괜찮은 날짜와 시각을 전령에게 알려달라는 내용이다.

초대 인원은 자신 혼자. 하지만 바란다면 두 명까지 동행을 허락한다고 되어있었다.

동료의 수를 알고 있는 게 당연하겠지만 소식의 갱신이 빠르지는 않군.

정중하고 기품있는 금색 글씨체를 들여다보던 환인이 고개를 들어 아렐=케드윈에게 대답했다.

“내일이라도 괜찮습니다.”

=결정이 빠르시군. 영주놈님께 그리 전하겠소. 그럼 이만 실례하지.=

환인은 밤하늘처럼 새카만 인계족 남자를 배웅한 뒤 초대장을 다시 펼쳐보며 생각에 잠겼다.

왼팔이라 자기소개하며 외지인 앞에서 영주를 놈님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의존명사를 붙일 정도인 것을 보면 성주와 보통 관계가 아닐 것이다.

관직에 큰 관심이 없으며 물욕도, 명예욕도 없는 사람이겠지. 괴이쩍은 발언으로 트집잡혀 쫓겨나더라도 오히려 헐헐 웃으며 초원으로 떠나갈듯한 느낌.

거기에 솔직히, 기술로 맞붙으면 쉽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승률을 꼽는다면 49% 정도일까.

그런 사람이 초대장을 전하러 왔다는 것은 아렐=케드윈을 통해 자신을 파악해보려는 의도라고 봐야겠지.

“…….”

아렐=케드윈 그 특유의 기세를 떠올린 환인은 그와 한 번 목숨 걸고 싸워보고 싶다는 감정이 치밀어올랐지만, 그대로 눌러서 마음속 심연으로 집어넣는다.

싸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싸움으로 얻는 메리트보다 그것으로 감내해야할 디메리트가 더 크다.

환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말했다.

“내일은 나 혼자 들어가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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