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189 성도 파르히스트
* * *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며 어스름이 물러가는 시각.
회색 후드를 눌러쓰고 홀로렌 강변을 달리던 환인은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덕분일까. 콧속을 찌르는 듯한 차가운 새벽 공기, 지구의 대기처럼 탁하고 텁텁한 공기가 아니라 알프스의 대자연 속에 있는 것처럼 맑고 청량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후우.”
그 차가운 공기가 운동으로 달아오른 몸을 달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자 후드 안쪽에서 수증기가 훅 하고 뿜어져 나온다.
‘웨이트 밴드 효과가 훌륭하군.’
줄곧 이런저런 훈련과 대련은 했지만,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을 하지 않아 몸이 둔해진 것을 느낀 환인은 유르파에게 한 가지 물건을 의뢰했다.
‘유르파. 혹시 기압을 알고 있습니까.’
‘기압? 그 높은 데서는 귀가 먹먹하고 낮은 데서는 뚫리는 그거 말하는 거니?’
‘비슷합니다. 주변에 그 기압을 낮추는 마도구가 필요한데, 만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거기다 가벼운 중력 가중 술법도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지도록 하면 더 좋겠군요.’
‘으응.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건 어디다 쓰려구?’
‘폐활량과 유산소 운동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자학하는 취미가 있어?’
작은 오해를 푸느라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주변 공기를 희박하게 만드는 동시에 중력을 1.3배 정도 더 늘려주는, 안느가 평하기로 고문 기술자의 악취미적인 마도구가 튀어나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부족한 산소로 현기증을 일으키고, 두통과 어지럼증이 호흡곤란과 함께 찾아온다. 거기다 중력까지 높아지니 몸에 가해지는 부담은 제곱으로 증가.
지구였다면 몸 버리기 좋은 행위라는 의사의 소견과 함께 정신과 상담을 권유받았겠지만, 이 세계에는 성술??이라는 초자연적인 치유법이 존재한다.
더욱이 자신의 훌륭한 동료이자 여자 친구인 안느는 20년이 넘도록 성술을 익혀온 성술의 전문가가 아닌가.
‘성술이 아니더라도 핏빛 위상석의 재생 효능 덕분에 부담은 적은 편이지만.’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른 환인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새벽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전 일과를 마무리 짓고 거실의 의자에 앉은 환인은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를 탁자에 올려둔 뒤 자물쇠 따기 연습을 시작했다.
여러 개의 손가락 굵기 철봉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꼬여있는 고난도 자물쇠 따기 연습 도구다.
찰그락, 자르륵.
락피킹lockpicking 툴로 자물쇠 잠금 해제를 시도하며 생각한다.
‘오늘로 파르히스트 도착 한 달째인가.’
이래저래 크고 작은 문제가 해일처럼 몰려왔지만, 모두 잘 해결되었고 남은 것은 안느의 땅신 교단 의무와 10일 후로 다가온 토너먼트 뿐이다.
기초 함정술 교육은 끝마쳤고 기본 과정과 심화 과정은 당장 배울 필요가 없을 듯 해서 미루어두었다.
땅신 교단 의무를 이행하려면 감옥 미궁이 개방되어야 하는데 미궁은 아직도 개방되지 않았다.
그동안 매일 미궁을 둘러싸고 있는 백원벽白??을 방문해 안면을 익히고 약간의 뇌물과 립서비스를 통해 병사 아가씨들과 친분을 다진 환인은, 미궁 개방과 안정화가 더 미뤄져서 대축제가 끝난 뒤에나 열릴 거라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친분을 다진 아가씨 중에는 파르히스트 기사단의 기사도 있었는데, 환인에게 홀딱 빠진 그 아가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새로이 늘어난 4개 층의 탐색과 첫 생성 이형종과 보물의 선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미궁이 성장을 끝낸 뒤 늘어난 층에 등장하는 첫 이형종은 보물 이형종이라고 불려요. 일반 이형종임에도 중핵과 비슷한 위상력을 머금고 있어 등급이 높은 위상석이 나올 확률도 높고 장비가 위상력을 먹어 마도기화 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마찬가지로 미궁에 생성되는 첫 상자의 경우 뛰어난 값어치의 장비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구요.’
그 말은 즉 미궁이 성장하며 퍼진 위상력이 가라앉아 안정화될 때까지 늘어나는 부가적인 수입을 도시가 독점한다는 뜻이었다.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을 낸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환인은 감옥 미궁에 관한 관심을 끈 상태다.
다른 일은 토너먼트 참가.
대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토너먼트의 출전 신청은 10일 전부터 받기 시작했지만, 안느와 이실리테는 서두르지 않았다.
‘원래 실력자는 신청 마지막 날 하는 법이야. 참가 신청 종료 몇 초를 남겨두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떡하니 내는 거지.’
‘그러다 시간 경과로 참가 못하면 쪽만 파는 거 아니야?’
‘그런 일은 없어. 마지막 참가 신청서를 받은 뒤에 100을 센 뒤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을 때 참가 신청이 종료됐다고 선언하거든. 그러니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마지막에 내는 거지.’
‘…….’
환인도, 이실리테도 의미 없이 겉멋만 잔뜩 든 행위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아 안느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안느는 시간만 나면 접수 신청받는 북부 경기장을 방문해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고 있었다.
참가자의 면면을 확인하고 그에 대해 대비를 하기 위해서라던가.
“…….”
그렇다기보단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축제 기분을 느끼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지만, 즐길 거리가 얼마 없는 세상이다 보니 그런 안느의 행동을 이해해주었다.
게다가 매우 아름다워졌으니 자기 모습을 뽐내고 싶기도 할테고.
잘그락잘그락.
끝이 휘어진 장침 같은 도구와 칫솔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종이처럼 얇고 가느다란 도구로 자물쇠 구멍을 건드리고 있을 때였다.
콰당 정원과 이어진 문이 열리며 땀투성이가 된 미녀 두 명이 땀을 닦으며 들어왔다.
=……라니까! 이슬이 너 정도면 진짜 상위 입상도 노려볼 수준이라고!=
한쪽은 키 195cm의 호리호리하지만 호리호리하지 않은 은발 장신의 청순 미녀.
=진짜 실력자는 참가 신청 마지막 날에 몰린다며. 그 말은 지금까지 본 실력자는 다 별거 아니라는 뜻 아니야?=
다른 한쪽은 키 175cm가량의 호박색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건강한 느낌의 청순 미녀.
=어…… 그것도 그런데……. 하여튼! 이슬이 너도 좀 더 훈련에 매진해야 한다니까? 토너먼트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실력을 더 끌어올려야지!=
=나도 전사긴 하지만 이전에 주인님의 하녀야.=
=하녀 기사지.=
=이상한 소리 말고……. 아무튼 토너먼트는 평소처럼 훈련하며 쌓은 실력으로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인할 생각뿐이니까 그만 재촉해.=
=아 진짜아. 도령! 도령이 이슬이한테 좀 한 마디 해봐, 응? 이슬이는 도령 말이면 껌뻑 죽잖아. 좀 더 열정적으로 토너먼트 준비하라고 지시하란 말이야. 응? 응?=
키 195cm 정도의 날씬한 미녀가 포니테일로 올려묶은 은발을 살랑이며 다가와 환인의 목에 매달리며 애원한다.
그 모습에 호박색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은 청순한 미녀가 눈에서 으스스한 눈빛을 내뿜었다.
=……야. 땀투성이 몸으로 주인님한테…….=
으르렁거리는 이실리테의 기백에 움찔한 안느는 입을 삐죽 내밀며 떨어졌다.
=아무트은. 진짜 조금만 더 훈련하자니까? 이슬이 네가 상위 입상하면 도령도 흐뭇해할 거라고.=
=됐으니까 일단 씻어. 너 지금 몸에서 냄새 엄청나게 나.=
=냄새 안 나거든! 도령은 내 체취가 엄청 달콤하고 향기롭다고 했거든!=
=그건 냄새 아냐?=
=…….=
=땀 냄새잖아. 들어가서 씻어. 빨리.=
=너무해…….=
“…….”
환인은 아웅다웅하며 욕실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매혹적인 뒤태를 감상했다.
이실리테와 안느를 안으며 영기를 흡수한 지도 어느덧 10일이 지났다.
영기를 흡수하면 아름다워지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고, 흡수당한 영기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신체와 골격이 변한다는 것을 그녀들을 통해 확인했다.
그 결과 그녀들의 외모는 여기저기가 바뀌었다.
일단 이실리테는 키가 3cm 정도 작아졌다. 그렇다고 리치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비율이 좋았지만, 이제는 진짜 신이 와도 손댈 곳이 없을 만큼 신체 비율이 완벽한 8등신이 된 것.
팔다리에 비해 허리가 약간, 아아주 약간 길었는지 키만 살짝 작아지고 리치는 그대로였다.
물론 골격의 변화가 있어서 훈련 시에 약간 조정이 필요했지만, 안느가 있어 적응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진짜 변화는 안느에게서 일어났다.
일단 223cm 정도 되던 키가 무려 28cm 정도 줄어 195cm, 장신의 배구 선수 정도가 되었다.
키만 줄었다면 엄청난 문제가 되었을 텐데 근육에도 크나큰 변화가 가해졌다. 남자 머슬 계열을 초라하게 만들던 근육이 압축되어(사라진게 아니다) 겉으로 보면 필라테스 강사처럼 매력적인 모습이 된 것이다.
근육이 압축되었다는 걸 눈치챈 것도 잠자리에서 안느를 안으며 알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쇼윈도 마네킹 같이 날씬한 다리 한쪽의 무게가 거의 30kg에 육박했던 것.
키 195cm라면 팔다리가 길어 멀대 같을것 같은데 실상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이실리테를 비율에 맞춰 조금 더 확대한 느낌이라고 할까.
‘얼굴이 전혀 변화가 없는 것도 놀랍지.’
저 이실리테마저도 눈썹이 살짝 가늘어지고 눈매가 조금 날렵해지며 더욱 예뻐졌는데 안느는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었던 거다.
그런데도 놀라운 게, 이전에는 부조화를 만들어내던 얼굴이 필라테스 강사처럼 잘빠진 몸매가 되자 말 그대로 얼굴과 몸매가 일치하며 초절정?? 미녀가 되었다.
환인처럼 공감 능력이 모자란 남자도 옆으로 안느가 지나가면 무의식중에 살짝 돌아볼 정도였다. 다른 남자들은 열 명이 지나가면 열 명이 전부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볼 수준.
여기서 환인은 인지를 초월한 미모라는 것이 존재함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보기에 이실리테나 안느나 비슷비슷하게 아름다웠다. 그런데 초자연적인 영기의 신체 조율이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안느의 얼굴은 말 그대로 ‘완벽’하다고. 바뀔 곳이 없는 말 그대로 지고의 미美라고.
‘아무튼.’
지난 10일, 그녀들과 동침한 덕분에 부족하던 영기의 지식을 조금 더 채울 수 있었다.
먼저 직업자의 영기 회복 속도.
직업자의 영기 회복은 일반인을 아득히 능가한다. 일반인은 마지막으로 안은 뒤 15일의 휴지기가 필요하지만 직업자는 휴지기가 없다.
일반인은 영기가 최저로 바닥났을 때(흡수할 경우 신체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수준) 완전 회복에는 최장 반년 정도가 드는 데 비해 직업자의 회복은 전날 흡수당한 영기의 절반 정도다.
즉 이틀에 한 번씩 흡수하면 이론상 평생 영기를 흡수할 수 있다는 뜻.
거기다 보유 영기의 양에 따라 흡수할 수 있는 영기 또한 차이 난다.
안느에게서 흡수할 수 있는 영기의 양은 이실리테의 약 4배. 그리고 이실리테에게 하루 흡수할 수 있는 영기의 양은 일반인의 약 3배.
한 마디로 그녀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하루치 영기는 일반인 여자 15명 분이라는 거다.
남자는 하루에 사정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
핏빛 위상석의 도움을 받으면 하루에 10명도 넘게 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10명을 넘게 안았다간 하루가 사라진다.
그 이유로 환인은 창관의 발걸음을 끊었다.
=도령, 요즘 창관 안가더라?=
“너희가 있는 데 갈 이유가 없지.”
=……흐흥. 그렇다는 거지? 오늘 밤은 나도 힘내야겠네? 헤헤.=
그 결과 이실리테와 안느 둘 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환인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호감도가 더 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좋은 소식이 있다면 나쁜 소식도 있는 법인가.’
10일간 안느와 이실리테를 통해 흡수한 영기는 총 150명분이다.
그리고 늘어난 영혼 구슬 개수는 단 1개.
창관의 발길을 끊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10일간 거의 150명분의 영기를 흡수했는데도 구슬이 1개밖에 늘지 않았다는 것은 창관에서 써야 할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뜻이니까.
시간 버리고 돈 버리고 여자 친구들의 기분도 안 좋게 만들고. 창관에 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들을 아예 안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돈이 들지 않고 질병의 걱정이 없는 여자, 즉 촌락의 아가씨는 기회가 되면 되는대로 안을 예정이다. 그 점은 이실리테와 안느에게도 이해를 받아놓았고.
그때 욕실 쪽에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뭔가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왈칵 열리며 내동댕이치듯 이실리테가 욕실 안에서 튀어나왔다.
알몸은 아니었고 안느가 평소 입고 다니는 복장, 돌핀 팬츠와 비슷한 하얀색 바지에 하늘하늘한 베이지색 끈나시 차림이다.
=……!=
환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두 팔로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린 이실리테는 닫힌 욕실 문에 붙으며 작게 소리친다.
=안느……! 문 열어, 얼른…!=
‘또 안느의 장난에 당한 건가.’
보나마나 목욕을 끝내고 나온 안느가 자기 옷 한번 입어보라고 이실리테를 구슬렸겠지. 조금 냉정하게 보여도 이래저래 부탁을 받아주는 이실리테니까 그 부탁을 들어주었을 테고.
그리고 입자마자 피지컬로는 당해내지 못하는 안느에게 탈의실에서 내쫓겨 저 상태가 된걸테지.
안느가 저러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자신에게 좋은 걸 보여주려는 의도.
“…….”
눈처럼 하얗고 늘씬한 다리와 명치까지 밖에 가리지 않는 끈나시 탓에 훤히 보이는 잘록한 배와 옆구리. 시원하게 드러낸 어깨선과 가느다란 목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중요한 것은 노팬티와 노브라였는지, 끈나시에는 젖꼭지의 흔적이 두드러졌고 허벅지 사이에는 황금의 역삼각형 지대와 함께 도끼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는 점이다.
=…읏~!=
환인의 시선을 느끼며 귀까지 붉어진 이실리테는 결국 문을 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호박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격하게 흔들리는 거유 한 쌍은 덤이었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작게 열리며 은발 미녀의 머리가 빼꼼 튀어나왔다.
안느가 환인을 발견하곤 히히 웃으며 묻는다.
=도령, 구경 잘 했어?=
“그래.”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안느도 키득키득 웃으며 욕실을 나온다. 그런데 입고 있는 옷이 이실리테의 옷이다.
조금 작아 보이는 블라우스, 이실리테가 입으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치마인데 안느가 입으니 무릎 위 20cm의 숏스커트다.
사뿐거리며 다가온 안느가 뒤에서 가느다란 팔로 목을 끌어안으며 묻는다.
=도령은 정했어?=
“무엇을?”
=우와. 알면서 능청스럽게 되묻는 것 좀 봐.=
안느는 얄밉게 되묻는 환인의 행동에 킥킥 웃으며 환인의 목을 좀 더 힘껏 안는다.
그러자 가슴이 짓눌리는 감각과 함께 밤에 사랑을 나눌 때보다 더 진한 그의 체취가 느껴져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안느였다.
“그래, 정했다.”
=토너먼트 나가는 거지?!=
반색하며 묻는 안느의 기대감과 다르게 환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나간다.”
=에이…… 도령이 출전하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일 텐데 왜 안 나가는 거야?=
“토너먼트는 파르히스트가 부상을 미끼로 근위 무사를 뽑기 위한 기획의 일환이다. 거기에 내가 우승해봤자 여러 가지 구설에 휘말릴뿐더러…….”
찰칵 차라라락
고난도 자물쇠 연습도구라더니 생각보다 싱겁군.
6개의 쇠봉이 복잡하게 얽혀있던 자물쇠가 제대로 된 위치에서 지정된 홈을 차례대로 누르자 듣기 좋은 음향과 함께 자물쇠가 분해된다.
후두둑 떨어지는 철봉을 보곤 자물쇠 따기 도구도 내려놓고 자신의 목을 감싼 안느의 팔을 어루만지며 말을 계속했다.
“주목을 받으면 내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도 있지. 출전은 이래저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어.”
=출전자 명단도 모르면서 우승 확정이라고 말하는 거야?=
살짝 짓궂게 웃으며 환인의 뺨을 콕콕 찌르는 안느였지만, 솔직히 안느 자신도 환인이 출전만 하면 우승할 거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축복을 걸고 속성술을 쓰면서 공격해오는 환인은 자신도 방어 일변도로 대해야 그나마 버티는 정도.
그런 마당에 환인을 처음 보는 사람이 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 6급의 까마귀 년도 그에게 단 1합에 하반신이 세로로 쪼개져 죽었는데 말이다.
환인은 안느의 질문에 대답 없이 작게 웃었고 안느도 딱히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기에 팔을 풀고 환인의 옆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나도 출전 안 하는 쪽이 좋으려나? 내가 관심받으면 같은 파티인 도령도 주목받을 텐데. 거기다 이슬이까지 같은 파티라고 하면 모르긴 몰라도 남자들은 확실히 도령을 주목할 거야.=
치마가 짧은데다 아직 이전 체격의 습관을 고치지 못했는지 다리를 조금 벌리고 앉은 안느. 덕분에 그녀의 하얀 허벅지 사이로 청초한 속옷이 눈에 들어온다.
살짝 접힌 서혜부와 약간 밀려 올라간 팬티 끈, 그리고 피부색과 흡사해 마치 벗은 것처럼 착시가 일어나는 하얀 팬티의 천.
골짜기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보며 환인은 손을 뻗어 무릎을 모아주었다.
“파르히스트 상류층과 얽히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다.”
안느는 허벅지를 딱 붙인 채 멋쩍은 듯 배시시 웃다가 다시 자물쇠 따기 연습을 시작하는 환인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기 삶을 송두리째 바꿔준……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
그런 그가 출전하지 않으니까, 조오금 진심을 내서 상위 입상을 노려도 괜찮은 거지?
이슬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예선전이나 중간에 만나더라도 안 봐줄 거다.
‘반드시 1등 해서 상금 100금화로 도령한테 자동 방어 마도기를 맞춰줘야지.’
그는 정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강하지만 신체 방어력은 평범한 수준이다.
인지하지 못하거나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그 점을 보완해주는 자동 방어 체계 마도기면 지상형 성수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될 것이 틀림없다.
물론 지금 소지금으로도 충분히 사줄 수 있다. 멋으로 20년 넘게 성투사로 활동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환인은 그런 식으로 개인 재산을 소비하는 걸 싫어할 거다.
그러나 같은 파티원으로서 토너먼트에 출전해 따낸 상금으로,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의 안전을 기원하며 제작해주는 거라면?
‘유르파랑 이야기도 나눠놨고…….’
환인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주는 거라면 가공비 없이 재료비만 받고 제작해주겠다고 유르파가 약속해주었다.
보통 마도기의 가격표에는 재료비 외에 인건비용, 소재 구매 비용, 소재 운송 비용, 가공 비용 등을 다 포함해서 재료비의 약 4배, 5배 정도 되는 게 보통이다.
몇몇 인기 있는 소비품의 경우에는 50배, 100배로 불어나는 일도 있지만…… 아무튼.
‘소비자 가격이 400금화 정도 되는 마도기라면 초고기능 장비니까 도령의 실력에 걸 맞는 게 나올 거야.’
그걸 받은 도령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안느였고, 좋아하는 도령의 얼굴을 상상했더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정원으로 나갔다.
쉴 시간에 무기라도 한 번 더 휘둘러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