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93화 (193/813)

〈 193화 〉 188 성도 파르히스트

* * *

세 명에게 다가가자 여성용 화장품 같은 것을 두고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게 귀에 들어왔다.

=목욕 후에 몸에 바르면 좋은 향기가 나는 건 물론이고 피부가 하얗게…….=

=원료에 뭐가 들어갔…….=

=수액괴물의 점성질을 정화하고 정제한 뒤 재생 성분을 끌어올린…….=

‘마도구 뿐만 아니라 화장품도 만들었던 건가.’

용기도 그렇고 꽤 고급스러워보인다. 포장만 잘 해놓는다면 성능이 확실하다는 가정하에 금화 단위로 팔릴 듯한 퀄리티다.

그나저나 10분전만해도 분위기가 어색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뒤늦게 환인이 온걸 눈치 챈 세 명이 돌아본다.

=주인님.=

=아. 도령 왔구나. 어땠어?=

샤라난은 동생과 남자를 공유할 수는 없는 일이니 지난 일은 서로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자고 이야기했고, 환인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샤라난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서글픔이 묻어났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유르파와 경쟁해서 이길 자신이 없었던 거겠지.

오늘 이후로 다시 방문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환인도 다시 찾을 생각은 없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환인은 긴장한 것처럼 뻣뻣하게 서있는 유르파에게 시선을 주었다.

=…….=

근 한 달만에 다시 만난 유르파는 자신이 샤라난과 몸을 섞었다는 사실은 눈꼽만큼도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잔뜩 긴장하고 있지만 말이다.

‘긴장이라니.’

자신이 아는 유르파의 성격은 긴장과 거리가 멀었다. 방금 재회했을 때처럼 들러붙어야 정상인 거다.

방금 보기에 셋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으니 협박을 받은 것도 아닐테고.

환인은 유르파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유르파.”

=……으응. 호, 혹시 내가 뒤쫓아와서 기분 상했다거나…… 그런건 아니지?=

“그럴리 있겠습니까. 모든걸 두고 절 쫓아왔다는게 조금 놀라웠을 뿐입니다.”

안에서 샤라난에게 모두 들었다. 카턴 마을의 기반을 모두 팔고 먼 여행을 떠나듯 자신을 쫓아왔다고.

행선지는 칸트위 씨에게 들었겠지.

“일단 자리를 옮길까요.”

환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고 비상과 함께 근처의 찻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여자에게 보여준 환인의 행동에 유르파의 얼굴 그늘은 더욱 짙어졌다.

고풍스러운 찻집에 들어온 환인은 본인의 입으로 어찌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들었다.

“무모한 일을 하셨군요. 운이 닿아 이렇게 만날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대체 얼마나 되는 시간을 허비했겠습니까.”

=으응. 하지만 자기의 특징은 다 알고 있는걸. 조합에 의뢰하면 찾는건 어렵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구…….=

“전 밖에서는 되도록 후드를 쓰고 다닙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편이고요. 더욱이 일이 생겨 파르히스트에 들르지 않고 다른 도시로 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지만…… 남은 일생을 방랑했어도 후회하진 않았을 거야. 꿈과 바램을 쫓는 일은 힘겹고 괴로워도 기쁘고 행복한 추억이 되었을 테니까.=

환인은 유르파의 대답을 유도하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했다.

무슨 뜻에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자신을 쫓아온 의도에 다른 사람의 의지가 섞이진 않았는지.

그도 그럴게 유르파는 보통 사람이면 하지 않을 행동을 저질렀다.

카턴 마을의 칸트위에게 듣기로 백화는 일주일 정도면 끝나고 격렬한 감정도 그와 함께 금방 사그라든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달도 넘게 시간이 흐른 상태지 않은가.

충동적으로 마을을 떠났어도 지금이라면 다시 돌아가거나 마음이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인셈인데…….

=수십년을 쓰더라도, 설령 죽기 전까지 자기를 다시 보지 못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어.=

……유르파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환인은 그녀의 대답을 끝까지 들은 뒤 지극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의견을 내놓았다.

“유르파. 아직도 백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닙니까.”

=백화는 3주 전쯤에 끝났는걸?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돌아가는게 들은 것보다 느리긴 하지만…….=

억지로 탈색시켜 만든 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회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대답하는 모습에 환인은 영혼 시야로 유르파의 아랫배를 보았다.

‘영기를 흡수한 것과 관련이 있는건가.’

영기는 남은 영기가 얼마이든지 마지막으로 흡수 한 뒤 약 15일 정도의 휴지기를 거쳐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략 3개월에서 6개월 정도가 지나면 영기가 전부 회복된다고 류히를 통해 파악했었다.

하지만 어찌된건지 유르파의 영기는 한달이 지난 지금, 처음 만났을때의 수준으로 회복되어있었다.

그녀를 두 번 안은 결과 영기가 상당량 감소했는데 그게 고작 한 달만에 회복되어있었던 거다.

‘직업자라서 영기의 회복 속도가 빠른 거라고 봐야겠군. 아무튼…….’

속으로 어느정도 사실에 근접한 추리를 내놓은 환인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차를 한모금 머금었다.

일단 유르파는 하나부터 열까지 솔직하게 대답했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해서 집과 땅, 들고 다니기 어려운 부피의 재산을 칸트위에게 반값으로 처분한 뒤 짐을 챙길 수 있을 정도로만 챙긴 다음 뒤쫓아왔다는 뜻.

다만 저 감정이 아직 백화의 영향을 받은 감정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다.

“유르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 눈에는 백화의 격해진 감정에 아직 영향을 받는 걸로밖에 안 보입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이실리테와 안느의 표정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변했다.

확실히…… 도령/주인님의 이야기면 유르파가 보여줬던 조건 없는 태도가 맞아떨어져!

=그러면 자기한테는 더욱 문제가 없잖니. 최소 한 달에 한 번만 뱃속에 정액을 뿌려줘도 평생 편하게 이용해먹을 마도 제작 도구가 손에 들어오는 셈이니까…….=

처연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하는 유르파. 왼쪽의 눈물점이 눈물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이성적인 생각과 반대로 하얀 마녀 로브 위로 자기 배를 매만지며 대답하는 유르파의 모습에 환인은 남자의 정복욕이 크게 치미는 것을 느꼈다.

속으로 감탄했다. 저게 노리고 한 거라면 대단한 여자고, 아니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찌른 셈이니까.

환인은 그런 내색을 정말 1mg도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욱 문제가 됩니다. 저는 서로 믿고 의지하며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를 원하는 거지, 말 잘 듣는 여자 노예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요.”

=……!=

세 여자는 환인의 차분한 대답에 적잖이 감동 받았다. 보통 남자라면 이런 경우 ‘웬 떡이냐.’하고 냉큼 삼켰을 텐데!

놀라는 여자들을 못 본 척, 눈을 감은 환인은 생각하는 시늉을 보였다.

‘어쩜 생각하는 모습도 저렇게 멋있을까.’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 여자가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 생각하는 사람처럼 턱을 괴고 있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유르파. 동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으응.=

환인이 이실리테와 안느를 데리고 자리를 옮기는 모습에 유르파는 불현듯 치민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환인을 불렀다.

=저기!=

“예.”

=……하, 하나만,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니?=

초조함이 느껴지는 유르파를 잠시 응시하며 그녀의 조바심을 부추긴 환인이 작게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한테 지금 동료는…… 어떤 사람들이니?=

“당연히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이지요.”

유르파는 그 대답에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너희는 그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유르파와 앉아있던 곳에서 멀리 자리를 옮긴 환인은 약을 한 것처럼 헬렐레하는 유르파를 살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동료로 삼을지 어떤지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나부터 말할게. 일단 객관적으로 말해서 동료로 삼아도 괜찮다고 생각해. 도령이 나오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시종일관 솔직하고 진지하게 도령한테 호감을 보였거든. 유르파가 저런 행동을 할 만한 타당한 이유도 있었고.=

찬성 1표.

=제가 보기에도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모습이 백화 해소의 중간 과정이라면 차후에 뭐라도 문제가 생길 거라고 봐요.=

“이실리테는 반대인가.”

=앗, 반대라는 뜻은 아니구요. 결정하기 전에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주, 주제넘은 발언이었다면 죄송해요.=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아니군. 환인은 탁자 위에 곱게 포개진 이실리테의 손을 잡고 손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이실리테. 네가 비굴해질 때마다 널 좋아하는 내 가치도 떨어지게 된다.”

=……!=

“사과는 네가 정말 잘못했을 때만 하면 된다. 알겠지?”

=네, 녜헷……!=

혀가 꼬였는지 발음이 샌 이실리테의 얼굴이 붉어지고 안느가 그런 이실리테의 뺨을 콕콕 찌르며 놀리는 것을 구경하던 환인은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말했다.

“찬성 1표에 보류 1표. 나도 일단은 두고 지켜보는 쪽이다.”

=괜찮네. 백화 현상이 끝날 때까지 지켜본 다음 됨됨이를 다시 확인한다는 거지?=

“그래. 백화 이전의 유르파는 꽤 장난기 많고 지적 호기심이 강해 보이는 성격이었다. 우선순위가 지식의 확보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당분간 곁에 두고 지켜보며 유르파의 변화를 관찰하자는 제안에 안느도, 이실리테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생각이 변한 이유가 있어? 가게를 막 나왔을 땐 파티에 안 받을 것처럼 말했었잖아.=

“유르파가 비명횡사하면 입맛이 안 좋을 거라고 말한 네가 그걸 묻나.”

=앗.=

당황하는 안느에게 후, 웃으며 농담이라고 한 환인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확실하다. 당시의 그녀는 마을에 자리를 잡은 모습이었고 내가 생각한 구성이 아니었기에 넘어갔을 뿐이었지.”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유르파의 능력은 자신들과 중복되지도 않고, 당장 파티에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연락 방법을 남긴 뒤 우리가 거점을 마련한 다음 부르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한다면 유르파가 우리 뒤를 쫓다가 노상에서 비명횡사할 일도 없을테고, 그녀도 기약 없이 일행을 뒤쫓으며 시간을 땅에 버리지 않아도 된다.

=아, 그런 방법도 있구나.=

“마침 그녀에게 부탁할 것도 있으니 제작 의뢰를 넣어놓고 지켜보지.”

=네.=

=응.=

얼굴이 살짝 상기된 유르파에게 돌아가 동료들과 의논한 결과를 말해주자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얼굴로 그 결정에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행동이 백화 효과가 아직 덜 끝났다고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을 유르파는 모르는 걸까.

환인이 그리 생각하는 사이 유르파는 샤라난의 가게로 뛰어가 자기 짐을 챙겨왔고, 환인은 늘어난 일행을 데리고 소장원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환인은 일행을 한자리에 모아서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진행했다.

“환인입니다. 파티의 리더이며 아우라는 없지만 술사 계통 직업자입니다.”

=이실리테에요. 루크랑 인성족이며 주인님의 하녀 겸 호위입니다.=

=안느야. 보다시피 플뢰족에 땅신 교단의 6급 성투사고 파티의 전열을 담당하고 있어.=

=유르파 익스티나. 흡정족이고 부여 계통 비술사지만 제조에 몰두하느라 전투 능력은 형편없어. 내 몸을 지킬 정도의 전투력은 있지만 주로 만들어놓은 마도구를 던지거나 써서 싸워.=

유르파가 자기소개를 하며 탁자에 이것저것 올려놓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던 안느는 쉬지 않고 수북이 쌓여가는 전투 도구에 표정이 어색해진다.

=……이거 전부 공격 부적이잖아? 전격에 화염에 얼음에 빛과 어둠 부적도 있고…… 이건 마비독 단검? 정신 독침하고 저주 지팡이도 있네.=

=이런 비싼 소모품을 전투에 쓰신다는 건가요?=

=돈보단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이 부유 빗자루를 타고 물이랑 전격 부적을 같이 던지거나 마비 단검을 맞추고 저주를 걸고 폭탄을 던지거나 해.=

=유르파 진짜 부자구나…….=

장당 20은화가 넘는 부적만 100장짜리로 몇 다발이나 되었고 한 자루에 5~30은화하는 즉효성 마비독 단검, 정신독 단검, 각종 저주 지팡이는 다 합쳐 40자루가 넘었다.

그중 작고 예쁜 청색 유리구슬을 발견한 이실리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진동탄이 아닌가요?=

=어? 헉, 진짜네. 이슬이 너 용케 알아봤다?=

=용병으로 활동할 때 전장에서 이걸 맞고 죽어가는 동료를 본 적 있어서…….=

공간 진동 폭탄, 줄여서 진동탄.

이 엄지 크기만 한 구슬 한 개에 5금화이며, 구슬이 터지면 반경 수 미터 공간이 진동하며 액체와 기체형 괴물을 제외한 생물과 무기물을 가리지 않고 큰 타격을 주는 전술 병기다.

바위가 맞으면 가루가 되고 땅에 터지면 모래가 된다. 사람이 맞으면 뼈와 살점이 가루가 되고 액체로 변해 물풍선처럼 변해버린다.

용병 동료가 녹아내리듯 눈코입귀 항문성기에서 검붉은 액체를 흘리며 쪼그라드는 모습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안느가 혀를 내두른다.

=이게 다 터지면 나도 못 버티겠는데…… 군인도 아니고 일반인이 이런걸 들고 다니는 건 처음 봐.=

=힘없는 여자가 도적하고 강도떼로부터 몸을 지키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니?=

=이 정도면 당신과 마주칠 도적이나 강도가 불쌍할 수준이네요.=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안느가 공감하고 유르파가 웃는 사이, 환인은 부적이나 진동탄보다 마비독 단검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특이한 구조군요. 자루에 독을 담아놓고 맞추면 내부의 독이 주입되는 방식입니까. 자루에 마력 회로도 보이고…….”

=와, 알아봤구나? 자루에 새겨진 문양은 보존 주머니에 쓰는 마력 회로거든. 그래서 안에 독을 담아두면 변질하지 않고 쭉 유지돼. 물론 무제한은 아니고 독을 만들 때 위상석을 갈아서 섞어둔 위상석 가루의 양에 따라 달라져. 대강 2달 정도?=

“그 정도면 제압용으로 괜찮겠군요. 재료를 구해드릴 테니 몇 자루 제작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자기가 원하는 건 다 만들어줄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또 달리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환인은 주머니에서 6급 주황색 위상석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어머나. 이건 6급 위상석이네? 이 정도면 군수품으로 분류되어서 소유하기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걸 오브나 완드처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모양이나 형태는 개의치 않습니다. 제작 의뢰비는 통상적으로…….”

=아냐아냐. 그냥 만들어줄게.=

“……괜찮겠습니까?”

=으으응. 사양하지 않아도 돼. 그날 자기한테 받은 게 너무 큰데도 보답도 못 해준 게 굉장히 마음에 걸렸거든. 그리고 동료가 되면 내 제작 능력도 공유할텐데 뭐.=

“저도 받은 게 적지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기간은 대축제가 끝날 때까지 해주시면 됩니다.”

=응!=

환인은 6급 위상석을 마도구로 만든다는데 놀라지 않는 유르파를 보며 확실히 돈이 많다는 것을 눈치챘다.

저 안느마저도 이걸 마도구로 만든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았던가.

=그럼 내 제작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자기가 마음에 꼭 들게 만들어줄게.=

“예. 잘 부탁합니다.”

=맡겨줘!=

유르파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임시 동료로 유르파가 합류한 지 며칠이 지났지만, 환인이 예상했던 트러블은 발생하지 않았다.

=유르파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이 있나요?=

=나? 나는 못 먹는 거 없어. 싫어하는 것 없이 다 잘 먹어. 그건 왜?=

=제가 식사를 책임지거든요.=

=앗…… 그렇구나. 잘 부탁해. 내가 도와줄 게 있다면 말하구.=

=그럴게요.=

이실리테는 처음 안느를 만났을 때처럼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예비 동료로 대했으며.

=팔다리 가느다란 것 좀 봐……. 유르파, 운동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나 몸 쓰는 건 진짜 못하는데.=

=몸을 쓰라는 게 아니라 운동해서 체력을 기르라는 거야. 앞으로 거점이 생길 때까지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하며 여행할 텐데 이래서야 버티겠어?=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면 되잖니.=

=빗자루 타고 매일매일 12시간씩 한 달 동안 날아다녀 봤어? 장담하는데 그 정도가 되면 너 허리 부러진다.=

=…….=

=매일매일 우리 훈련하는데 어울리란 말은 안 해. 그래도 파티의 행군에 지장을 안 줄 정도로 체력은 붙여야지.=

=…….=

=같이 체력 단련하자?=

=으, 응.=

밤마다 환인과 몸을 섞으며 며칠 사이 눈에 띄게 근육이 줄어들고 키도 조금씩 작아지고 있던 안느는 이실리테에게 하는 것처럼 살갑게 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차별하지 않고 예비 동료로 대우하고 있었다.

=안느 아가씨. 그 큰 방패의 마력 회로, 조금 손봐야 할 때 아니니? 회로가 끊어진 데가 조금씩 보이는데.=

=어? ……그러네. 이슬이랑 대련하는 게 좀 격렬하긴 했지.=

=나한테 맡겨볼래? 내가 고쳐줄게.=

=이거 땅신 교단 본단의 성물방에서 산 건데? 수리할 수 있어?=

=핵은 방패 안쪽의 위상석이잖니? 그건 손 안 대고 여기 흠집으로 끊어진 회로만 이어 붙이는 거니까 어렵지 않아. 수리도 여러 번 해봤으니까 익숙해.=

=음……. 그럼 부탁할게.=

=맡겨주렴. 그리고 이슬이 아가씨는 혹시 그 부엌칼 소중한 거니?=

=아뇨. 시장에서 산 거 제가 갈아서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거 써보렴. 틈틈이 만든 건데 생활 마도구라서 날이 잘 들 거야. 자고로 요리 칼 하면 날카로움이 생명 아니겠니.=

=와. 정말 날이 잘 드네요. 고맙습니다.=

=뭐얼. 나야말로 고마운걸? 이실리테 아가씨가 매일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주잖니.=

유르파도 이실리테와 안느를 대할 때 아가씨들, 아가씨들 하면서 꼬박꼬박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처음 자신에게 다짜고짜 꼬마라고 부르며 놀리는듯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예의가 바른 모습.

그보다 외모만 보면 유르파가 가장 나이가 많고 그다음이 안느, 마지막이 이실리테인데 서열은 이실리테 > 안느 > 유르파인게 신기한 환인이었다.

이에 대한 의문은 오후 내내 방에서 뭔가를 만들다가 잠시 쉬러 나온 유르파에게 들어서 풀 수 있었다.

=자기는 모르는구나……. 난 안느 아가씨보다 이슬이 아가씨가 더 무서워.=

“……무섭다는 겁니까.”

=응. 깝치거나 자기한테 함부로 행동하다간 잘 때 목에 칼이 박힐 거 같은 감각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

=앗, 이런 말 했다는 거 이슬이 아가씨한텐 비밀이다?=

“예…….”

그 후 안느도 불러서 물어보았다.

=이슬이 무섭지……. 웃으면서 화내는 거 보면 등골이 오싹해.=

“…….”

=평소에 짓궂은 장난을 치면 화내고 꼬집긴 하지만 거기에는 친근감이 있어서 괜찮은데, 진짜 화난 거 보면 무서워서 거역을 못 하겠어.=

환인과 몸을 섞었던 그 날 오후, 그의 훈련을 방해하는 식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이실리테가 진심으로 웃으며 화내던 것을 떠올린 안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엌칼로 살아있는 닭을 해체하며 웃는데 마치 ‘주인님의 훈련과 성장을 방해하면 널 이렇게 만들 거야.’로 보였다고 할까.

피슛­ 목이 잘린 닭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하얀 볼살에 튀는 것을 봤을 땐 자기 목이 베인 것 같은 착각에 순간 숨을 멈출 정도였다.

팔에 돋은 닭살을 쓸어내리는 안느를 가만히 바라보던 환인은 대충 그럴듯한 이유를 낼 수 있었다.

‘이실리테는 태어났을 때부터 생존을 위해 경쟁하며 살아왔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는 용병으로 전장을 뒹굴었고 그 뒤에는 도적단의 두목으로 활동했었고.’

아마도 그런 삶이 그녀의 행동에 묻어났고, 눈치 빠른 유르파와 감각이 좋은 안느가 그걸 무의식중에 알아챈 게 아닐까.

‘굳이 나설 필요는 없겠지.’

편들기나 알력이 보였으면 직접 나서서 서열을 정해주었겠지만, 다들 알아서 잘 행동하고 있으니 끼어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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