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187 유르파=익스티나
* * *
환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유르파는 가게 문이 닫히자마자 딱, 손가락을 튕겨 주변의 소리를 차단했다.
술력으로 바람을 불러와 주위의 소리를 막는 기술이다.
그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안느가 팔짱을 끼고 나섰다. 머릿속에 주인님밖에 없는 이슬이는 약점이 너무 명백하니까.
그런 이슬이 대신 자신이 저 회색 여자가 파티에 걸맞은 인물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조금 전에는 환인의 입장에서 그를 배려해 말했지만, 그가 없는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니까.
그리고 유르파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자신이 남자한테 들러붙어서 살 수밖에 없는 흡정족이라지만, 자신보다 더한 모기 같은 년들이 사랑스러운 그이의 피를 빨아먹으며 사는 꼴은 못 본다.
더욱이 그 피가 자신의 노동으로 충당되는 피라면 더더욱.
=그래서, 당신은 누구야?=
=유르파. 유르파 익스티나. 아가씨들은?=
=이실리테. 주인님의 필두 하녀예요.
=안느야. 도령의 예비 짝이고, 이슬이는 하녀라고 주장하지만 도령한테는 나와 같이 짝이나 마찬가지니까 건방지거나 무례한 태도를 보일 생각일랑 말아.=
유르파는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두 여자를 빠르게 살폈다.
‘흐음. 수준이 정말 높은걸.’
플뢰가 맞나 싶을 만큼 과도한 덩치 쪽은 비록 근육 때문에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목구비와 뼈대 비율만 보면 저 이상이 없을 정도로 미인이다. 근육만 줄인다면 종족을 가리지 않고 눈길을 사로잡을 미녀가 되겠지.
거기다 희소 직업자인 데다 6급이나 된다. 덩치를 본다면 근접 전위 계열일 것이다.
작은 쪽은 덩치 쪽 못지않은, 자신도 살면서 몇 명 보지 못했을 만큼 루크랑 남자 10명이 있으면 10명 모두 호?를 표시할 만큼의 미녀.
이쪽은 4급 전사지만 자세에서 급을 뛰어넘는 실력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덩치 쪽한테는 꽤 신분이 높은 플뢰의 냄새가 맡아져.’
플뢰는 지위에 따라 체취가 다르다.
신분이 낮은 플뢰는 평범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체취를 풍기지만, 신분이 높을수록 꽃꿀에 가까운 달콤한 체취가 풍기는데 눈앞의 덩치는 일찍이 유르파가 맡아본 적 없을 정도의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스읍.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자 두 아가씨의 체취와 함께 그녀들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그이의 정액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짜낸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싱싱한 정액 냄새…….’
그것만으로 살짝 절정에 오른 유르파는 그러한 기색을 눈곱만큼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이 취해야 할 스탠스를 결정했다.
유르파는 6급치곤 전투 능력이 거의 없지만, 그만큼 살아남기 위한 눈썰미는 좋은 편이었다.
그러한 눈썰미로 두 명의 실력을 대번에 간파한 유르파는 그녀들이 자신보다 윗줄의 인간임을 빠르게 인정한 것이다.
=일단 아가씨들한테서 자기를 빼앗을 생각이 없다는 걸 먼저 밝힐게.=
=그게 말이 되나요?=
호박색 눈동자가 예쁜 작은 아가씨의 담담한 말투에 유르파는 저 둘이 이미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한테 다 들었나 보네? 그럼 이야기가 간단해지지. 나는 흡정족이고, 첫 백화를 그이 덕분에 경험했어. 혹시 흡정족의 격언을 들어봤니?=
=어떤 격언인가요?=
=흰 꽃을 개화시켜준 남자는 절대 놓치지 말고 곁에 붙어있으라는 거야. 물론 넘버 원을 노리라는 뜻이 아니야. 온리 원을 노리라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은 유르파는 그녀들이 자신에게 적개심을 품지 않도록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흡정족이야. 그래서 내 주제를 잘 알거든? 아가씨들이랑 싸웠다간 자기가 매우, 굉장히, 무척이나 싫어할 거 같단 말야.=
=어떻게 그걸 확신하는 거죠?=
=으응. 흡정족은 코가 좋아. 특히 남녀의 특정 체취에는 선천 능력을 발동한 인랑족과 비슷할 정도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아랫배를 톡톡 건드리는 행동에 이실리테와 안느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그이가 싫어할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야. 그리고 난 많은 걸 바라지 않아. 그냥… 연위 자리만 하나만 받을 수 있으면 대만족?=
유르파는 허리의 주머니 하나를 풀어서 내용물을 꺼내 보인다.
=봐, 난 싸우는 건 잘하지 못하지만 마도 장비 제작은 특기거든? 여행에 필요한 마도구를 만들어줄 수도 있고 마도구를 팔아서 여비에 보태줄 수도 있어.=
조용히 듣기만 하던 안느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왜 우리 도령한테 붙으려 하냐는 거야. 정력이 절륜한 남자는 루크랑 족에 얼마든지 있잖아. 그 정도 재력이면 정력이 강한 남자를 얼마든지 꿰찰 수 있을 텐데?=
타당한 지적이지만 그건 흡정족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유르파는 비죽이 웃음 지었다.
=아가씬 루크랑 종족이 흡정족 남녀를 어떻게 대하는지 모르는구나?=
=…….=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모기나 다름없어. 정액을 빨아먹는 모기. 난 거기서 설명 한 줄이 더 추가되겠지. 돈 잘 벌어다 주는 편리한 모기.=
이실리테는 그 말에 조용히 공감했다.
=하지만 그이는 안 그랬어. 흡정족인 나랑 스킨십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았고 내가 주려 하던 보답도 필요 없다고 했단 말야. 믿어지니? 그냥, 그냥 내가 맛있어서 안아주었고 수백 닢이나 되는 금화를 마다했다는 게?=
=음…….=
안느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결론을 말하면 자신을 사람 취급, 여자 취급해주었기에 홀딱 빠졌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 이야기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 입을 떼지 못할 때 유르파가 계속 말한다.
=나는 욕심을 부리다가 험한 꼴을 당하는 여잘 너무 많이 봤어. 그게 흡정족이라면? 그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하겠지?=
=…….=
=자기의 사랑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굶어 죽지 않게 그이한테서 정액을 받을 수 있는 위치면 만족한다는 뜻이야. 그게 연위인거구.=
하고 싶은 말이 끝난 듯 해서 이실리테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입장은 알겠지만 그래도 저는 회의적이에요. 결정은 당연히 주인님께서 내리시겠지만, 흡정족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주인님의 건강이 걱정되니까요.=
유르파는 이실리테의 발언과 태도에서 그녀의 타입을 눈치채고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한 대상에게 맹목적인 사랑과 충성을 바치는 타입.’
저런 타입 앞에서 함부로 나댔다간 등에 칼 맞고 죽기 십상이다. 유르파는 좀 더 자세를 굽히기로 마음먹었다.
입장의 차이가 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
=그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일단 자기한테는 위상류 체질이 있어. 알고 있니?=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두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류 체질은 흡정족의 흡정도 피할 수 있어. 그이에게 전해준 위상류 체질 훈련법을 열심히 단련하고 있다면 건강 문제는 문제없다는 뜻이야.=
=아, 그걸 당신이 주인님께 드린 거였군요.=
그 순간 작고 아름다운 아가씨 쪽의 적개심이 약간 사라진 걸 느낀 유르파는 돌파구를 찾았다고 생각하며 가감 없이 밀어붙였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야. 나는 내 능력 모두를 그이를 위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 그도 그럴 게 그이는 당연히 그런 봉사를 받을 만큼 멋진 남자잖니?=
=…….=
작은 여자의 적개심이 더욱 줄어든다. 더불어 덩치 미녀도 자신의 발언에 공감한 듯 아까부터 경계심이 조금씩 줄어드는 중이었기에 유르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입을 털었다.
자신이 왜 그이를 뒤쫓아왔는지, 어째서 지지기반을 모두 버리고 마을을 떠났는지, 그이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쏟아낸다.
=그런 남자야. 그런 남자를 보고도 따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그건 여자도 아니지. 안 그러니?=
=그건…… 그렇지.=
=확실히 그렇죠.=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정실인 아가씨들의 자리를 노릴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거야. 그냥…… 아가씨들의 허락만 바랄 뿐인 거지.=
유르파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두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처음 환인과 재회한 직후 그의 품에 뛰어들었을 때 그가 이실리테와 안느의 안색을 살피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뭘 말하는 걸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미 그이의 곁은 저 두 명이 차지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선착순에서 늦어버렸으니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만약 저 아가씨들이 그이와 자신의 해후에 어깃장을 놓기 시작하면 자신은 손가락도 빨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
그런 상황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이의 정실 자리까지 노리는 건 아니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남자에게 기생해서 밖에 살 수 없는 종족이다.
그이도 자신을 맛있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별미라는 의미에서 맛있다고 한 것일 거다. 사람은 밥을 먹고 살지 디저트만 먹고 살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눈앞의 두 아가씨만 공략하면 큰 산 하나는 넘는 셈이다.
그리고 산을 넘어 결승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더 이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저 정도 되는 아가씨들이 그이의 여자니까.’
외모도, 능력도, 신분도 확실하다. 그러니 능력 없고 어쭙잖은 년들은 눈앞의 두 아가씨가 알아서 쳐내 줄 것이다.
자신은 정실 아가씨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그이에게 봉사하며 곁에서 떨어지는 콩고물만 받아먹으면 된다.
=음.=
=…….=
그즈음 이실리테와 안느는 ‘저런 이유라면 괜찮지 않나?’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냅다 도령/주인님한테 안겨들며 자기라고 불러서 화가 났지만, 저건 흡정족의 성격 같은 거고 실제로는 눈치도 빠른데다 분수를 잘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분수라고 하기에는 우리도 하자가 있는 년들이지만.’
안느는 대강 그림이 그려졌다.
저 여자는 자신보다 우리가 입장이 우위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도령은 대범해서 종족 차별 따윈 하지 않으니까. 저 여자의 말재주와 가진 패를 보면 아마 파티에 들어오는 것은 기정사실일 거다.
=이슬아.=
=응.=
유르파에게 기다리라고 한 안느는 그녀에게서 멀어진 뒤 이실리테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도령의 선택을 기다렸다가 그에 맞춰 행동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
선천 능력인 진실의 주시자로 본 유르파는 비록 남자를 좀 많이 밝히긴 했지만, 성향은 선한 쪽이었다.
하는 말도 모두 진실이었고 진담이었으니 도령이 파티로 받아준다면 자기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키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왈가왈부할 것도 없이 그녀가 파티에 어울린다면 도령은 받아들일 거고, 아니라면 자신들이 말하지 않아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안느의 설명에 이실리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동료로 괜찮아. 눈치도 빠른 거 같고 파티 분위기를 해칠 만큼 성격도 나쁘지 않은 거 같고 능력은 6급 비술사니 확실하기도 하고.=
서로 의견을 나눈 이실리테와 안느는 초조하게 기다리는 유르파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린 중립으로 있을게.=
=으응?=
=도령이라면 당신이 그 어떤 달콤한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야. 파티에 필요하다면 받아들일 거고, 아니라면 받지 않을 테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도령의 판단에 영향을 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도령의 선택에 따르겠다는 이야기야.=
=당신이 같은 파티가 된다면 환영할게요.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인연이 아닌 거겠죠.=
=고마워….=
그 정도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일단 고비는 넘겼다는 사실에 유르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건 그이를 설득하는 거뿐.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이를 찾으면 마냥 즐겁고 행복한 생활이 기다릴 거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거대한 벽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서 있었으니까.
‘……하자.’
눈앞의 아가씨들은 어쨌거나 그이의 정실들이다. 호감을 사놔서 나쁠 일은 없겠지.
원래는 파르히스트 상류층 귀부인들한테 비싸게 팔아먹고 여비에 보탤 생각이었는데, 그이의 수족 같은 짝에게 호감을 살 수 있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가씨들한테 선물이라도 주고 싶네. 부담스럽다면 혹시라도 파티에 가입했을 경우를 대비한 뇌물이라고 생각해도 돼.=
넉살 좋게 그리 말한 유르파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메이드 화장품을 꺼냈다.
=알지 모르겠는데 이건 얼굴에 바르는 보습 재생 화장품이야. 얼굴을 화사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피부 재생이랑 노화 방지, 노폐물 제거를 해줘서 아기 피부처럼 만들어주는 거거든?=
=……이거 익스티나 아쿠아리아 볼륨쓰리랑 익스티나 미네랄리상트 넘버파이브잖아?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건데 어떻게 이렇게 많이 들고 있어? 너 혹시…….=
=복제품 아니거든요. 내가 만든 거야.=
=뭐? ……잠깐, 익스티나? 유르파 익스티나?=
안느가 자신의 화장품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유르파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뜬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화장품은 라드세아 국가 내부에서만 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종족 연합인 메리아놀에까지 퍼져있었나?
뭐,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편하지!
유르파는 자신의 화장품을 잘 모르는듯한 이실리테에게 자신의 회심의 작품을 설명했다.
이걸 바르면 어디가 좋아지는지, 어딘가가 좋아지면 그이가 얼마나 좋아할지, 이걸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까지.
자고로 아름다운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
그리고 이 화장품은 여자를 아름답게 해준다.
간단한 요체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호기심을 보이는 걸 보며 유르파는 속으로 안도하는 한편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랬는데 그이가 날 거부하면 어떻게 하지?
이제 그이 없이는 살지 못할 거 같은데, 그이가 날 받아주지 않으면…….
유르파의 마음속에 걱정이 커질 무렵.
“……?”
가게 안에서 샤라난과 애틋한 느낌으로 관계를 정리하고 나온 환인은 의외의 광경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둘의 성격이 있으니 머리채 쥐어뜯으며 싸우진 않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좋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셋이서 모여 좋은 느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내가 가게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