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89화 (189/813)

〈 189화 〉 184 성도 파르히스트

* * *

이실리테와 안느가 주방으로 사라지고 잠시 후.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집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정원과 이어진 문이 덜컥거리다 열리더니 비상이 쿠쿠 울며 들어왔다.

본능을 잡아끄는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오는 왼쪽, 주방으로 이어진 통로를 향해 한 발짝 움직였던 비상은 순간 밀대로 머리를 때리는 이실리테를 기억해냈다.

…쿠웃!

음식을 만들 때 가까이 가면 어김없이 밀대가 날아오는데 그거에 맞으면 꽤 아프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친구가 소파에 앉아 작고 네모난 걸 보는 게 눈에 들어온다.

환인과 주방으로 이어진 통로를 번갈아 보던 비상은 머뭇거리다가 환인이 앉아있는 소파 곁으로 다가와 배를 깔고 앉았다.

주방으로 가본다고 이실리테가 먹을 걸 주긴커녕 먼지 난다고 때릴 테니까. 그냥 친구 옆에서 기다려야지.

그런데 친구가 자길 봐주지 않는다. 지그시 쳐다봐도 아래만 볼 뿐, 이쪽을 안 봐준다.

왠지 심통이 난 비상이 이마로 소파 팔걸이를 쿵, 들이받았다.

갑작스런 충격에 흠칫 놀란 환인은 그제야 불퉁한 눈빛의 비상과 눈이 마주쳤다.

슬쩍 팔걸이에 머리를 올리고 ‘나를 쓰다듬어라!’하며 지그시 바라보는 비상의 행동에 환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보들보들한 깃털로 뒤덮인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쿠삐~

지그시 눈을 감고 자신의 쓰다듬을 만끽하는 비상을 구경하던 환인은 비상의 윤곽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웨이포드 미궁에서 성장했으니 이제…… 두 달 정도 지난 건가.

지금까지 성장 속도를 생각해보면 슬슬 마지막 성장을 할 때가 된 거 같은데, 비상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기대된다.

덩치는 밀짚색 성체 쿠에와 비슷하니 조금 더 자라고 날개가 길어질까, 아니면 모습은 이대로 유지되고 바람 속성이 더 강해질까.

“넌 언제 마지막 성장을 할 거냐.”

쿠에?

내가 빨리 크는 게 좋아? 하고 묻는 비상에게 환인은 손가락 끝으로 정수리 부분을 살살 긁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기대되기도 하고 말이다.”

쿠흥~.

기대받고 있다는 걸 느낀 비상은 으스대는 것처럼 ‘빨리 성장해줄게!’하며 고개를 들고 흥흥거린다.

그때 안느가 주방쪽에서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 환인은 입꼬리를 쓱 들어올렸다.

헬쓱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는 꼴이 조금 웃겼기 때문이었다.

“괜찮나.”

=……이슬이 앞에서 도령한테 치근덕거리는 건 관둬야겠어.=

헬쓱한 얼굴로 그리 말한 안느는 환인이 앉아있는 소파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흐유우, 긴 한숨을 내쉰다.

평소에는 짓궂은 장난을 치고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거나 치마를 들춰봐도 화를 안 내는데, 도령의 일하고 관련되니까 말 그대로 귀신으로 변한다.

거기다 화를 내는 것도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라 웃는 얼굴로 저음을 내면서 갈구는데…… 하나같이 맞는 말이라 반박도 못하는 게 더 괴롭다.

잠시 안느가 숨돌릴 틈을 준 환인은 아까 안느가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낸 것들의 정체, 소리 지를 때 쓴 언어의 종류를 물어보았다.

=그건 정령이야. 크기를 보면 하급 정령이겠지. 그것들이랑 내가 말한 게 정령어고.=

“역시 정령이었군……. 하급 정령이라면 중급이나 상급도 있다는 건가.”

=어어. 중급은 8살짜리 정도고 상급은 14살, 최상급은 어른 정도로 커. 당연히 클수록 힘도 엄청 세지는데 최상급 정령은 거의 7급 직업자만큼이나 강해.=

대답해준 안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도령은 그걸 어떻게 본 거야? 정령은 정령사의 자질을 가진 우리 동족 밖에 못 보는데.=

“너와 이실리테를 안고 영기를 흡수하면서 능력이 한 단계 성장했는데 아마 그 때문인 것 같다. 밭에 흙색의 소인이 쪼그려 앉아있길래 다가갔는데…….”

정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자 안느가 흠,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콧숨을 내쉰다.

=도령이 차원 방랑자라서 볼 수 있는 건가? 하지만 다른 차원 방랑자 중에 정령을 볼 수 있던 사람은 못 봤는데……. 어쨌든 정령사가 아니라면 그 자식들하고는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성격이 그렇게 안 좋은가.”

=응. 악랄한 게 다른 언어도 알아들을 수 있으면서 대답이나 반응은 정령어에만 한다는 거야. 물론 반응한다고 해서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냐. 혼자 있을 땐 어떻게든 구슬리거나 다독여서 말을 듣게 할 수 있는데 방금처럼 서넛이 보이면 진짜 작은 악마들이 돼.=

“…….”

=머리 쪼개지는 느낌이었지? 나도 그 소릴 듣고 깜짝 놀라서 일어난 거였어. 또 작은 악마 놈들이 누구 괴롭히는구나 해서.=

“으음.”

안느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그 말대로라면 성격이 정말 대단하다는 뜻인데……. 정령을 다룰 수 있을지 걱정이 든다.

일단 시도라도 해보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 환인은 안느에게 부탁했다.

“내게 정령어를 가르쳐줄 수 있나.”

=정령어는 가르치고 가르침 받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음, 일단 확인해볼까?=

환인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안느는 환인의 손을 잡고 자기 목을 감싸게 한다. 그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하늘의 정령. 땅의 정령. 돌의 정령. 나무의 정령. 풀의 정령…….」

“…….”

「어때? 뭔가 감이 잡혀?」

“전혀 안 잡힌다.”

안느가 말을 할 때마다 머리가 징징 울리고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는 손에는 온기와 성대의 떨림만 느껴질 뿐, 20종이 넘는 정령의 종류를 들었지만 그래서? 싶은 느낌이다.

손을 거두어들인 환인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 정령어는 선천적인 자질로 말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건가.”

=응. 전혀 감을 못 잡겠으면 정령어의 자질이 없다는 뜻이야. 그런데 진짜 신기하네. 영혼사가 정령도 볼 수 있었나?=

“안느, 이게 보이나.”

왼팔을 안느의 눈앞에 흔들어 보인다.

=음. 그냥 팔인데. 뭔가 있어?=

“내 눈에는 옅은 회백색의 빛이 건틀릿처럼 손끝에서 여기, 팔꿈치까지 뒤덮고 있다.”

=…….=

눈에 힘을 주고 선천 능력인 진실의 주시자까지 일으켰지만 안느는 환인이 말한 것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놀리려고 이런 말을 할 리 없으니…….

혹시, 도령의 직업은 그게 아닐까?

진지한 눈으로 환인을 응시하던 안느가 마악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 주방에서 이실리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느~. 식사 준비가 다 됐으니까 거실로 옮겨줘~.=

=아, 응.=

……점심 식사를 끝내고 말해야겠다.

환인은 이실리테가 정성 들여 준비한 점심을 먹으며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종족 연합 도시에 대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응. 물어봐. 내가 알고 있는 거면 전부 대답해줄게.=

매콤한 칠면조 구이의 육즙이 맛있게 스며든 알감자를 으깨 채소와 함께 먹던 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족 연합 도시에서 차원 방랑자는 어떤 위상인지. 차원 방랑자가 이 세계로 넘어오게 되는 이유, 차원 방랑자가 받는 취급 같은 것에 대해서 듣고 싶다.”

=음……. 먼저 말해두겠는데 차원 방랑자와 관련된 깊은 정보는 최고위 귀족이나 왕족만 알고 있어. 내가 아는건 여기 루크랑 호족 중에서 4~5급 이상이면 다 아는 수준 정도니까 그건 고려해줘.=

“그래.”

=일단 내가 알기로 차원 방랑자는 우연한 사고 끝에 넘어온다는 거야.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내 지식이 그리 깊지 않아서 해줄 설명이 없네. 그리고 취급……이라고 할 만큼 막 대하지는 않아. 그들이 지닌 지식 중에는 위험한 게 있어서 그걸 관리하기 위해 그들이 함부로 지식을 전파하지 않도록 계약을 맺는 정도? 그 외에는 자유를 보장해.=

“자유라……. 도시를 나가겠다고 해도 받아준다는 건가.”

=응. 도시를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는 6개월에 걸친 집중 사회 교육을 시행해. 나가서 덧없이 죽지 않도록 니오네브레스의 세계에 관해서 공부시키는 거지. 그 뒤 계약을 진행해. 차원 방랑자가 가진 다른 세상의 고등 지식을 전파하지 않겠다는 계약이야.=

“계약에 비협조적이면 감금하거나 제약을 주겠군.”

=그렇지……. 사회를 무너트릴 수 있는 지식도 있는데 그런 걸 막 퍼트리면 위험하잖아.=

아마도 몇 번, 과거에 그런 문제가 불거졌을 거다.

막무가내로 사회에 현대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전파하려 하거나 지구의 20~21세기 상식을 퍼트려 상식 개변을 통해 혁명이나 쿠데타 등을 시도하려 한 자들도 있겠지.

혁명이나 쿠데타를 시도할 생각은 없고 그저 자신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라왔으니 자신의 상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 인간도 있을 테고.

환인은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이지만, 각종 사회적 주의 위에 기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잘 발달한 기술 체계가 있다면 설령 그게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제각기 갈 길을 나아가며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술이 모자라고 기술 체계가 부족하다면 그게 어떤 사회주의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머리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 좋게 받아들여져도 “너 빨갱이야?” 같은 소리를 듣기 쉬운 사상이니까.

즉, 니오네브레스의 생활 기반으로는 민주주의든 공화주의든 얼마 가지 않아 폭삭 망하기 좋다고 생각한다는 뜻.

그러나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보기에 차원 방랑자는 평온한 사회생활을 망가트리려는 악의 축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차원 방랑자를 해충이나 해악으로 보지 않고 보호하려 한다는 점에서 종족 연합이 얼마나 포용력이 높은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왜? 도령 뭔가 안 좋은 이야기 들었어?=

“그래. 누구는 종족 연합이 차원 방랑자를 구금해서 착취하고 있다고 하고 누구는 종족 연합이 차원 방랑자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더군. 또 누구는 차원 방랑자 소식을 들으면 종족 연합의 무력 부대가 찾아와 강제로 끌고 간다고도 하고.”

=뭐 크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네. 하지만 메리아놀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차원 방랑자를 우리 세계에 방문한 손님으로 대하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종족 연합 주화를 보여주며 진실을 말해줄지 잠시 고민했다.

카턴 마을의 유르파는 공간에 대한 술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구의 한국에서 줏은 종족 연합 주화.

두 가지를 합치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 세계에 저쪽 세계의 사람을 납치한다는 뜻이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높은 확률로 종족 연합의 고위직일 것이다.

‘……아직은 숨기고 있어야겠군.’

안느가 종족 연합 주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일정을 약간 수정했을 텐데.

눈만 깜빡이며 환인과 안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이실리테나, 환인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안느를 안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그녀들에 대한 믿음의 수치가 아직 높지 않을 뿐.

‘역시 종족 연합을 찾아가는 것은 좀 더 힘을 기른 뒤에 해야겠어.’

환인은 궁금한 점이 해결되었다며 식사를 재개했다.

식사 후 이실리테가 타준 차tea로 입안의 기름기를 씻어내고 있을 때 안느는 아까 말하려다 못한 것을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도령.=

“음.”

=아까 말하려다가 밥 준비가 다 되서 못한건데 말이야. 일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전부 추측이라는 점을 강조할게.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도령이 주의해서 함부로 능력을 밝히지 않길 바라서라는 걸 알아줘.=

“그래.”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듯 해 환인이 자세를 똑바로 한다.

=내가 보기에 도령은 우리 로우 팩션의 직업을 각성한 게 아닌 거 같아.=

로우law 팩션이라면 루크랑, 플라비우스, 플뢰, 프라우드 4대 종족을 필두로 하는 선 성향 종족이다. 거기에 반대되는 종족은 이블 팩션으로 알려진 오흄, 호브, 우르거, 바르둘 등이 있고.

팩션의 존재를 이실리테에게 들은 뒤 조금 조사해본 덕분에 기억하고 있는 환인이었다.

“내가 이블 팩션 쪽 희소 직업을 각성했다고 보는 건가.”

=아까도 말했다시피 정확한 건 아냐. 희소 직업이 모두 알려진 것도 아니고 도령은 평온의 파동도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안느 자신이 보기에 환인은 비술사 계통의 강화술과 저주술을 쓰며 법술사 계통의 속성술도 쓸 수 있고 영혼사의 영혼술까지 쓴다.

혼합 직업이라 해도 두 가지 능력을 쓰는게 한계인데 도령은 비술과 법술을 쓰고 영혼술을 쓰는 데다 이제는 정령과 관련된 능력까지 발현되었다.

=이런 경우는 니오네브레스 수천 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어. 물론 도령과 같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

안느는 입술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 이블 팩션 쪽의 직업자야. 그중에도 강혼사.=

“강혼사…… 강령술과 관련된 직업인가.”

=응. 주로 혼의 감응력이 뛰어난 자들이 각성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직업 특징은 죽은 자의 영혼을 매개체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야. 주로 우리 플뢰의 대척점인 섀도어 쪽에서 출몰하는 직업인데 굉장히 위험한 놈들로 알려져서 나도 알고 있어.=

환인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 강혼사가 하는 일은 다양해. 힘을 강하게 한다던가 영혼의 힘으로 공격한다던가 영혼의 힘으로 저주를 건다던가…….=

‘내가 각성한 게 강혼사가 맞겠군.’

환인은 직감했다. 자신은 영혼사가 아니라 강혼사라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영혼사와 강혼사의 혼합 직업이라고 할까.

환인은 솔직하게 밝혔다. 이 정도는 이제 자신의 여자가 되어 자길 배신할 수 없게 된 안느나 자신에게 목을 매고 있는 이실리테가 알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영혼사와 강혼사의 특징을 함께 타고난 것 같군.”

=……어? 진짜?=

“그래. 내가 각성하게 된 계기는 녹색 괴물…… 호브라고 부르는 놈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에 손이 닿게 된 거였다. 이게 그놈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 일부다.”

개인용이 된 아공간 주머니에서 소울 스틱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자 안느와 이실리테가 눈을 크게 뜬다.

“힘든 전투를 끝내고 탈진 상태에 가까웠던 나는 우연히 이 지팡이에 손이 닿았고 직후 정신을 잃었었다. 그다음 각성의 길에서 빛의 강을 따라 걸으며 내가 살해한 생명과 마주했었지. 그 시련을 겪은 뒤에 각성에 성공했고.”

=어, 어어. 그건 영혼사의 각성 시련……이네.=

“음. 하지만 나는 영혼을 구슬화해서 여러 가지 기술을 쓸 수 있다. 너희가 본 것처럼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고 안 보이는 화살을 날릴 수도 있지. 너희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도, 저주를 내리는 것도 그 영혼 구슬을 재료로 쓰는 거다.”

=거기다 영혼사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평온의 파동도 쓰지…….=

안느는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사와 강혼사의 혼합 직업이라고? 이게 높은 사람이나 영도에 알려졌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느의 머리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때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얌전히 듣기만 하던 이실리테가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입을 열었다.

=저…… 주인님. 그러면 재료로 사용한 영혼 구슬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실리테의 질문에 안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설마 영혼이 소멸하는 건…….

“축복이 끝나면 몸에서 빠져나와 성불한다. 기술로 쓰더라도 똑같다. 기술을 전개한 뒤 성불해서 하늘로 올라가지.”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안느가 안도하는 것처럼 이실리테도 안도했다.

영혼은 다섯 신님이 관리하는 하늘에서 잠시간의 평온을 만끽하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만약 영혼을 소모품으로 사용한다면 신의 분노를 받거나 저주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 그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사람들에게 맞아 죽겠지.

사랑하고 사모하는 남자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하고 당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아직은 짐승이나 괴물, 정령으로만 쓰고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선량한 사람의 혼을 쓸 때면 혼에게 양해와 허락을 구하고도 있으니까.”

그 이야기에 이실리테는 마에스티그 촌락에서 주인님이 해주셨던 말과 축복 실험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분명 그때 주인님이 그러셨었다. 이라트의 혼의 힘으로 자신에게 축복을 내릴 거라고.

“아무튼 이 일은 너희이기에 밝힌 거다. 그러니 비밀로 해주면 고맙겠군.”

=당연하지. 오늘 들은 건 어디에서도 입 밖에 안 낼 테니까 안심해.=

=저도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두 여자 친구의 모습에 작게 웃은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느에게 말했다.

“그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시험해볼까. 안느, 네 도움이 필요하다.”

=어, 뭔데?=

“못된 장난만 치는 정령에게 힘을 빌리는 거지.”

=진짜? 그거 재밌겠네! 난 뭘 해주면 돼?=

어쩐지 신난 듯한 안느의 모습에 하급 정령한테 꽤 쌓인 게 많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정령 하나가 안느에게 덩치 괴물이라고 놀렸었지.

피식 웃으며 정원으로 나간 환인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곧장 하급 정령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왼편 담벼락 근처의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졸고 있는 쿠르티의 등, 거기에 녹색 하급 정령이 드러누워 있었던 것.

아까 자신에게 끔찍한 두통을 선사해준 정령 중 하나라는 걸 알아본 환인이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저 정령과 `대화`하는 사이 다른 정령이 다가올 경우 잠시만 막아주면 된다.”

그 정령을 가리키자 안느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맡겨줘!=

그러면서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퍽 때리고는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린다. 아프긴 아픈데 이게 왜 이렇게 아픈지 이해를 못 한 표정이다.

아야야, 때린 자리를 주무르며 아파하니 이실리테가 휴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야. 여자들이 가슴 모양 갑옷을 괜히 착용하는 줄 알아?=

=……아?=

=아, 가 아니야. 가슴은 민감해서 맞거나 하면 다른 곳보다 더 아파. 방금 맞았을 때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지 않았어?=

=아팠어…….=

이실리테가 안느에게 여자로서 알아야 할 몇 가지를 가르치는 사이 환인은 주위를 좀 더 둘러보았다.

담장 너머 반대편 집 지붕 위에 하급 정령 서넛이 더 보이지만, 정원에는 저 녹색 하급 정령뿐이다.

잠깐 눈을 감았던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착하고 선량한 영혼이 아니라면 정중히 대해줄 필요 없지.

녹색 하급 정령에게 강제력으로 명령을 내린다.

‘당장 이리 와라.’

「…어? 어어?」

쿠르티의 밀짚색 깃털을 이불 삼아 드러누워 있던 녹색 정령이 얼빠진 소리를 내면서 환인에게 끌려오기 시작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다른 수단을 사용하려 했는데 역시 강제력이 통한다.

자기 몸이 왜 멋대로 움직이는지 이해 못 한 녹색 하급 정령이 환인을 올려다보곤 꽥, 비명을 지른다.

「으악! 나한테 왜 이러…….」

‘입 다물어라. 얌전히 있어라.’

시끄럽게 떠들려하는 녹색 하급 정령의 입을 다물게 했더니 읍읍거리며 애벌레처럼 꼬물거린다.

정령이어서일까, 사람 영혼에게 강제력으로 명령을 내린 것과 반응이 다르다.

‘정령도 영혼이라는 거지.’

환인은 그런 녹색 하급 정령을 향해 음산한 미소를 띠며 왼손을 뻗어…….

슈왁­

……영혼 구슬로 만들었다.

유지 시간 96시간의, 약한 녹색을 띠는 회백색 영혼 구슬이다.

환인은 그 녹색이 스며든 회백색 영혼 구슬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크기는 다른 영혼 구슬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뚜렷하다.

‘동물이나 괴물, 마수의 영혼 구슬은 등급에 따라 밝기의 차이 정도밖에 없었지.’

일반 영혼 구슬은 100원 동전보다 조금 더 작고 반투명한데 이건 크기도 약간 더 크고 형태도 좀 더 뚜렷한데다 색도 스며들었다.

그 색이 녹색인 이유는 녹색 하급 정령인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자신이 죽인 사람의 영혼 구슬이 붉은 것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무의식중에 습관이 된 영혼 구슬 핸들링을 녹색 하급 정령의 구슬로 펼친 순간이었다.

…꺄하하….

갑자기 들려온 여자아이의 희미한 웃음소리. 환인은 본능적으로 영혼 구슬이 된 녹색 정령의 웃음소리였음을 간파했다.

그렇군. 최하급 정령들처럼 관심 분야와 호기심은 똑같다는 거지.

=어, 도령? 방금 정령…… 어떻게 했어? 갑자기 사라졌는데.=

정령까진 볼 수 있어도 영혼 구슬로 변한 것은 못 보는 건가. 환인은 안느에게 짧게 설명해준 뒤 영혼 구슬을 보며 잠깐 고민했다.

‘내게 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실리테나 안느에게 강령의 테스트를 진행해도 결국 자신에게도 써봐야 하니……. 환인은 결정을 내리고 녹색 하급 정령의 영혼 구슬로 자신에게 강령을 펼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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