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183 성도 파르히스트
* * *
욕실에서 미지근한 물로 정사의 흔적을 씻고 나온 환인은 거실 소파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일어나 고작 4시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체감은 나흘 동안 섹스한 느낌이라 기운이 쭉 빠진다.
“…….”
주황색 위상석은 이럴 때 쓰라는 거겠지.
개인용 아공간 주머니에서 6급 주황색 위상석을 꺼내 쥐자 위상석을 통해 뜨뜻차가운 감각이 흘러들어와 가슴 속을 채운다.
흡사 밤새고 몬스터 2캔을 원샷 한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피로가 풀린 게 아니라 몸과 정신은 피로한데 에너지만 억지로 주입 당해 반강제로 각성한 감각이다.
‘원기 회복 효과가 사라지면 바로 쓰러지겠군.’
후우, 한숨을 내쉬면서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은 환인은 눈을 감고 잠시 긴장을 푼다.
여자가 우물이라고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안느와 이실리테를 차례대로 1시간씩 안은 여파는 2시간 동안 여자 10명과 한 것 같은 탈력감이었으니.
“…….”
왼팔을 들어 살핀다.
원래는 회백색의 영혼 구슬로 빼곡히 차서 빛의 토시를 여러 겹 낀 듯한 모양새라야 하지만, 지금은 아주 옅고 엷은 빛의 건틀릿을 낀 것처럼 팔꿈치 아래 전체가 빛나고 있었다.
현재 보유한 영혼 구슬은 48개.
안느를 안으며 그 막대한 영기의 일부, 아주 약간을 흡수했고 덕분에 구슬 보유 개수가 48개로 늘며 영혼 능력…….
‘……앞으로 영혼술이라 해야겠군.’
영혼술이 성장했음을 알게 되었다. 왼팔의 변화는 그 증거인 것.
능력의 성장은 안느를 안던 도중에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게 성장의 징후인지 알지 못했었다. 생각해보면 약간 몸 안이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지, 약간 몸이 붕 뜨는 기묘한 고양감이 느껴졌었는데 하필 그때가 안느를 개처럼 엎드리게 해놓고 사정 직전 한참 삽입하던 도중이었기에 눈치채지 못했던 거다.
그런데 지금.
‘1개를 더 보충할 수 있는 건가.’
감각이 알려주고 있었다. 현재 최대 영혼 구슬 보유 개수는 49개이며…….
‘영혼 구슬의 남은 유지 시간이 더욱 정확하게 느껴진다.’
이전에는 대충 이 정도겠구나 싶은 모호한 감각이었는데 지금은 빛의 건틀릿을 보면 영혼 구슬이 몇 개인지, 개별 구슬의 남은 유지 시간이 몇 분인지, 어떤 구슬이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 컴퓨터가 머릿속에 결과를 출력해주는 것처럼 뚜렷하다.
예를 들자면…….
‘이 정령의 구슬로 저주를 걸면 신체 능력 10% 하락과 과호흡 증세가 나고…….’
이 정령의 구슬로 저주를 걸면 근력 15%, 기타 능력 5% 감소와 함께 경련 증세가 일어난다. 이것은 체력 15%감소, 이것은 순발력 12% 감소, 이것은 발작, 이것은 광기, 이것은 과민성 고통.
“…….”
환인은 살짝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 보이는 정보만 있어도 최소 6급 이하 직업자를 대상으로 절대 질 수가 없다.
최소 보유한 영혼 구슬 개수와 주변에 있는 정령의 숫자만큼 적이 밀려오더라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어떤 상태 이상에 걸릴 것인지 아는 것만으로 절대 질 수 없는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셈이니까.
예를 들어 안느와 싸워야 하는데, 자신이 신호하는 순간 안느가 경련 증세에 걸린다고 가정해보자.
경련이 일어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안느의 목을 베는 것은 어린아이의 팔을 비틀기보다 쉬운 일이다.
6급의 성투사, 보편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동등한 급수의 일반 직업자 다수가 필요한 방어의 스페셜리스트를 그렇게 처리할 수 있는 거다.
정보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던 환인은 왼손에 핏빛 위상석을, 오른손에는 주황색 위상석을 쥐고 일어나 거실을 서성인다.
‘확실히 유틸적인 면에서는 좋아졌지만, 영혼술 자체가 성장했다고 보긴 어려워.’
다음 성장은 영혼 구슬이 몇 개일 때 성장하게 될까. 6개, 12개, 24개, 48개 순이었으니 다음은 96개? 아니면 192개?
그때도 이런 식으로 업그레이드가 아닌 옆그레이드가 이루어진다면 곤란하다.
안느에게 8급 호족도 자신을 알게 되면 군침을 흘릴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환인이었다.
그런 권력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 웨이포드의 인호족 상급 무관장 정도의 무력에 영혼사로서 확고한 존재감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 상태에서 큰 발전이 없다면…….
“평생 숨어다녀야겠지.”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다. 그 말은 부족한 무력만큼 정치로 메꿔야 한다는 뜻이며 곧 머리를 죽어라 굴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자신은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요령이 좋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환인에게 그런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환인은 고개를 저으며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안느와 깊은 관계가 되었으니 이제 종족 연합 도시에 관해서 물어봐도 괜찮겠지.
종족 연합이 차원 방랑자를 정말 납치해서 노예 취급하는지, 아니면 감금해두고 지식 탱크로 사용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차원 방랑자의 안전을 위해 보호하고 있는지 확인해보자.
환인은 개인적으로 세 가지 전부 해당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답이 어떠냐에 따라 앞으로 여행의 의미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쿠에~.
정원으로 나오자 양지바른 곳에서 쿠르티와 함께 따끈따끈 일광욕을 즐기던 비상이 호다닥 달려와 얼굴을 비비고 몸을 문지르며 난리를 친다.
환인은 그런 비상의 목이며 등을 긁어주며 물었다.
“아침은 먹었나.”
쿠? 쿠에~ 쿠쿳.
그냥 대충 눈에 보이는 풀을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에 환인은 주방에서 식료품 주머니를 들고나와 둘에게 늦은 아침을 주었다.
그릇에 온갖 과일과 생고기를 담아주자 비상과 쿠르티가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쿠쿠 거리면서 밥그릇에 부리를 파묻고 과일과 고기를 먹어 치우는 두 마리를 바라보던 환인은 비어있는 영혼 구슬 두 개를 채우기 위해 정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선이 정원 한구석에 고정되었다.
‘저건 뭐지.’
이실리테가 금방 자라는 채소라며 만들어놓은 작은 밭. 서서히 싹이 나고 있는 채소들 사이에 키 20cm 정도 되는 작은 인간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피부색도, 머리카락도 색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전부 흙색이다.
소인족小人? 같은 소수 종족인가. 임대된 줄 모르고 들어온 거라면 주의를…….
“……?”
신기할 정도로 작은 모습에 영혼 시야를 개방해 소인을 본 환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색계통이 아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색계통이 안 보이는 것은 주로 무생물이나 유령이다. 생물을 죽이고 음식으로 만들어도 색계통은 오랫동안 남는다.
하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무생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색계통이 안 보이는 거라면…….
‘유령?’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닌 건가. 하지만 몸이 투명해 보이지 않는데.
환인은 밭으로 다가가 그 작은 생명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져서일까, 쪼그려 앉아 뭔가를 보고 있던 작은 생물이 고개를 들어 환인을 올려다본다.
“…….”
…….
얼굴로 보이는 나이는 대략 12세 전후. 눈코입도 제대로 붙어있고 머리카락도 부스스하지만 움직임에 따라 살랑거린다.
깜빡깜빡.
귀여운 소녀 얼굴의 소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자기가 보이냐는 듯이.
환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진흙색의 눈이 1.5배 정도 커지더니 꺅, 비명을 지르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퐁 하는 느낌으로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흙색 소인은 완전히 모습을 감춘 건지 보이지 않는다.
“…….”
대신 흙색이 아니라 하늘색, 혹은 녹색, 혹은 파란색과 회색의 작은 사람들이 하늘 위, 나무 위, 물 위, 돌 위에 서 있거나 앉아있거나 나는 모습으로 하나둘 환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도 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환인은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감쌌다.
「와와, 플뢰도 아닌데 우리는 어떻게 본 거야?」
「꺄~ 왼팔 좀 봐! 작은 애들이 우글거려!」
「납치범이야? 납치범인 거야?」
「이름이 뭐야? 응? 이름이 뭐야?」
「이 인간한테 이상한 냄새 나! 근데 싫지 않아!」
「난 싫은데? 에베벱.」
“…….”
15cm ~ 25cm 사이의 작은 인간 열댓 명이 머리 위, 어깨 위, 날 수 있으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니고 주머니 속에도, 옷깃 속에도 들어오려하며 떠드는데.
정말로…….
‘머리가 울리는군.’
통역 현상을 처음 느꼈을 때는 약간 머릿속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고 익숙해지는 것도 금방이었는데 이…….
‘정령인가.’
……작은 정령들, 짐작하기로 하급의 정령들이 하는 말은 머릿속을 울리는 게 아니라 머리를 때리는 느낌이다.
「너 누구야? 이름이 뭐야?」
「어디서 왔어? 뭐 하다 왔어?」
「왜 왔어? 뭐 하려고 왔어?」
「작은 애들은 왜 데리고 다녀?」
「왜?」
「왜?」
「왜?」
“…미안한데 조금만 조용히…….”
「꺅! 뭐라고 말했어!」
「말도 할 줄 아는구나!」
「근데 무슨 말이지?」
「못 알아듣겠당~.」
「괴물인 거야?!」
「괴물들이 저런 말을 하던데!!」
‘통역 현상이 정령에게 통하지 않는 건가.’
환인은 인내심을 시험받는 기분에 긴 숨을 내쉬며 살인 충동이 들끓으려는 마음을 다스렸다.
만약 이들이 정말 하급 정령이라면 앞으로 최하급 정령으로 영혼 구슬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하급 정령으로 구슬을 만들어야 할 터.
그런 정령의 눈 밖에 날 짓을 할 수는 없다.
지끈거리는 이마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던 환인은 루크랑어로 말했다.
“조금, 조용히 말해주겠습니까.”
「꺄하하하!」
「꺄르르륵~.」
「입을 뻐끔거리는 게 붕어 같아~!」
「더해봐, 더해봐!」
루크랑어도 못 알아듣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정령에게 통하는 언어가 따로 있거나 말을 거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뜻.
‘이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이쪽도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겠군.’
「얘~ 좀 더 말해봐!」
「뭐라고 더 말해봐, 응? 응?」
「왜 말 안 해?」
「꺅꺅!」
잠깐 생각했더니 하급 정령들이 다시 꽥꽥거리며 떠들기 시작한다. 그러자 두통이 미간 사이로 흘러내리는 듯, 이제는 코 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까지 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주황색 위상석 덕분에 유지되던 각성 현상이 종료되려는지 피곤이 급격하게 차올랐다.
‘안돼. 좀 더 각성 유지를…….’
비틀거리며 주머니에서 위상석을 꺼내려던 환인은 안쪽 개인실에서 쿠당탕탕, 무언가 떨어지고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안느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얇은 담요를 드레스처럼 몸에 감은 안느가 뛰쳐나왔다.
=도령!=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거실의 환인을 발견한 안느는 자다 깬 듯한 얼굴로 달려가다가 환인의 주위를 보곤 헉,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안느의 눈에 환인을 에워싼 작은 악마들이 보였던 것이다.
저 망할 것들이 왜 도령에게 붙어있는 거지?
「야!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다들 저리가! 저리가! 훠이~! 훠이!!」
「우왓, 덩치 괴물이다!」
「도망쳐~ 잡아먹힐 거야~.」
「무서워어엌크크히히히~!」
덩치 괴물…….
마음에 상처를 내면서 도망가는 작은 악마들을 잠깐 노려본 안느였지만 이내 인상을 풀었다. 저것들이 저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안느는 좌절한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환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도령, 괜찮아?=
“……덕분에 살았다.”
처음 보는 환인의 기운 빠진 모습에 살짝 놀랐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이해했다.
저 작은 악마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하면 숙련된 정령사도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을 느낀다.
그렇다고 말을 잘 듣는것도 아니기에 방금 같은 상황이 되면 통제가 불가능에 가깝다. 정령사도 학을 떼면서 정령들을 쫓아내 버리는 것이다.
=어쩌다가 저 작은 악마들한테 둘러싸인 거야? 도령도 저것들 본 거지?=
“그래……. 일단은, 좀 쉬어야겠다. 두통이 심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군…….”
=어어. 부축해줄게.=
손을 내미는 안느의 모습에 피식 웃은 환인이 몸에 감고 있는 담요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담요가 스르륵, 저절로 풀리며 안느의 나신이 밝은 햇살 아래 훤히 드러나고 만다.
=흐익!=
“넌 옷부터 제대로 입는 게 좋겠다.”
=도, 도령!=
허둥지둥 담요로 몸을 가리는 안느를 두고 방으로 돌아온 환인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명상을 시작했다.
안느가 이것저것 아는 듯하니 조금 쉬었다가 물어봐야겠군.
30분 정도 누워 명상하다가 스르륵 잠든 환인은 1시간 뒤에 방을 나왔다.
명상과 휴식을 병행해서인지 두통도 사라졌고 피로도 풀려 몸이 한결 가볍다.
마침 젖은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오던 이실리테가 환인을 발견하고 허리를 공손히 숙인다.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그래. 넌 몸은 괜찮나.”
이실리테는 자기 하반신으로 살짝 시선을 주는 환인의 행동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부끄러워했다.
=네, 네. 전 괜찮아요. 주인님은요…?=
“너와 안느 때문에 쉬던 게 아니었다. 다른 문제가 있었지.”
이실리테와 거실로 나가자 거실에는 안느가 남친 셔츠 룩처럼 조금 헐렁한 옷을 입고 앉아있다가 환인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도령! 나, 나나! 이거 봐 이거!=
아까는 두통 때문에 신경을 못 썼는데, 놀랍게도 안느는 약 4시간 만에 여자의 선이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날 정도로 변화하는 중이었다.
=목둘레도 조금 줄어들었고 어깨랑 허리도, 몸도! 근육이 빠지고 있어! 봐봐 가슴도 티가 나기 시작했다고!=
흉부를 앞으로 내밀며 옷을 누르자 누가 봐도 가슴이라 할만한 융기가 드러난다.
환인도 그걸 확인하고 안느의 어깨를 다독이며 끄덕였다.
“다행히 효과가 있군.”
=그래! 다행히 효과가 있…… 응?=
안느는 말하다 말고 읭? 하는 얼굴로 환인을 바라보고, 이실리테는 놀랐다는 듯이 입을 살짝 가렸다.
=설마 주인님이 그 환상의 비약이셨어요?=
=환상의 비약? 그건 무슨 말이야? 그보다 도령, 내가 몸이 변한 게 그냥 섹스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
당황하는 안느를 이실리테가 얄밉다는 얼굴로 바라보다 그녀의 뺨을 콕 찔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성교한다고 다 예뻐지면 세상에 못난이가 있을 리 없잖아.=
=아니 나 빼고 다 예쁜이였으니까…… 나만 빼고 다 섹스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
“…….”
=…….=
그 기막히고 짠 내 가득한 답변에 환인과 이실리테는 말문이 막혔다. 표정이나 행동은 또 어떤가. 소심한 쭈구리가 따로 없다.
이실리테는 자신에게 술을 먹여 꽐라로 만들어놓고는 먼저 주인님의 품에 안긴 안느가 무척 얄미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고 또 저런 모습을 보이니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보다, 환상의 비약이 무엇인지 해명을 요구하는 환인의 시선에 이실리테가 입을 열었다.
=제가 기술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들은 소문이 있었거든요. 고급 창관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는 어떤 남자랑 섹…스하면 얼굴이랑 몸이 예뻐진다면서 여자들이 그 남자를 환상의 비약이라고 부른다고요.=
=그 남자가 도령이란 말이야?=
안느와 이실리테의 시선에 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런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을 줄이야.
“내가 영기를 흡수해주는 여자는 대체로 외모가 개선된다. 주로 피부가 고와지거나 몸매가 보정되는 수준이었지. 얼굴 골격도 조금 변하는 것도 확인했다.”
설명을 듣고 입을 쩍 벌렸던 안느는 자기 몸과 환인을 바라보더니 작게 울상을 지었다.
=그, 그걸 왜 그때 이야기 안 해줬어?=
해줬다면 진작에 안겼을 텐데, 이런 생각이 전해지는 질문에 환인은 안느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이 영기 흡수 효능이 네게 얼마나 변화를 줄지 모르니까.”
=…….=
“지금 네게 일어난 변화는 나에게도 놀라운 수준이다. 더해서 이 이상 개선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 만약 지금이 아니라 이전에 말해줬다면 네 심정이 어땠을까. 지금 그정도 수준에서 변화가 멈춘다면 네 기분은 어떨까.”
잠시 생각한 안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엄청나게 기대했을 거야. 그리고 실망할 테고…….=
환인은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안느의 뺨을 보듬어주었다.
“기대를 배신당하면 실망하게 되고 실망은 분노를 불러오지. 차라리 모르고 있다가 몸에서 벌어지는 것을 직접 느끼는 게 너에게 좋을 거라 판단했다.”
예기치 않게 사실이 밝혀졌지만, 자신이 밝힌 게 아니니 안느가 느낄 실망감과 한숨의 방향은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 것이다.
안느의 몸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1시간 동안 안느와 섹스하며 그녀에게서 흡수한 영기는 그야말로 대단한 양이었다. 거의 일반인의 12배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체구가 약간이지만 줄었다. 체구가 줄었다는 것은 그릇도 줄었다는 걸로 해석이 되는데 영기의 체표면적 비율로 보면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영기를 흡수하면 할수록 체격도 덩달아 줄어든다는 뜻이 된다.
‘영기가 줄어든 만큼 근육도 줄어든 건가. 그렇다면 영기가 쌓이면 다시 근육도 불어난다는 뜻?’
환인이 그렇게 가설을 세우는 사이 안느는 자기 뺨을 보듬어주는 환인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환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 도령. 그저 감사해야 할 일인데…… 감정이 격해져서 그만 도령한테 무례를 저질렀어. 용서해줘.=
“이해한다. 평생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일인데 현자라도 담담하게 있을 수 없겠지.”
=고, 고마워.=
“아무튼, 너의 영기는 다른 사람의 수백, 수천 배에 해당되는 양이다. 내가 그것을 흡수하면 네 몸에도 변화가 계속 이어질 거라고 예상한다. 너와의 관계는 내게도 큰 도움이 되니 도움을 주면 고맙겠군.”
=어, 물론이지. 꼭 밤이 아니라도…… 지금부터라도 난 괜찮은데. 헤헤.=
부끄러워하며 중얼거리는 안느를 향해 이실리테가 도끼눈을 떴고 그걸 본 안느는 흠칫하고 놀란다.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환인은 작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명에게 하루 흡수할 수 있는 영기의 양은 정해져 있다. 보통 30분 정도면 한계에 다다르지. 그러니 내일부터 부탁한다. 이실리테도 여유가 된다면 날 도와다오.”
=아, 네. 주인님.=
=으응!=
환인의 설득도 설득이지만, 환인의 옆에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실리테가 너무 무서워서 퍼득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던 안느였다.
웃는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무서울 수 있지?
사랑을 뺏어간다고 저렇게 쳐다본다면 덜 무서울 텐데 도령을 방해해서 저렇게 화내는 건가…….
=안느. 이제 점심 준비할 건데 좀 도와줘?=
=어?=
그리고 이실리테의 호출에 안느는 침을 꼴깍 삼켰다. 평소라면 부드럽게 부탁하는 말을 했을 텐데 지금은 명령에 가까운 말투다.
따라갔다간 무진장 혼날 거 같은데 안 따라갈 수도 없고, 도령한테 도와달라고 했다간 나중에 더 크게 혼날 거 같고…….
안느는 소파로 가서 앉는 환인을 힐끔거리다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
분명 이슬이는 나보다 약한데.
이상하게 반항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해하며 안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동물처럼 이실리테를 따라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