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86화 (186/813)

〈 186화 〉 181+ 이실리테­1

* * *

이것은 꿈이다. 그래, 꿈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실리테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고아 주제에. 넌 음식이나 만들고 청소나 해!]

[하층민이 어떻게 감히 환인 님께 말을 거는 거지? 머리에 화살이라도 맞은 거야?]

[어휴 냄새. 환인 니임~, 저런 볼품없는 계집은 버리는게 어때요오? 제가 비싸고 일 잘하는 노예로 사드릴게요오.]

백려강과 이엘카타 그리고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예쁜 여자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주인님의 주변에서 알랑거린다.

저쪽은 환한 빛이 내려쬐며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호화로운 방.

이쪽은 쥐가 돌아다니고 구정물이 곳곳에 고여있는 더러운 길바닥.

저 여자들은 저렇게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예쁘게 꾸민 모습으로 주인님과 어울리는데, 자신은 낡고 헤어진데다 여기저기 기운 걸레 같은 옷을 입고 더러운 바닥을 청소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슬펐다.

꿈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럼에도 북받쳐오르는 설움과 슬픔은 어찌할 수 없었다.

[환인 님. 저 볼품없는 계집이 없는 곳으로 가요~.]

[꼴도 보기싫어, 정말.]

[흥!]

주인님이 여자들과 함께 멀어지는 모습에 이실리테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주인님, 주인님!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더, 더 열심히 할게요. 주인님이 시키는거, 전부다 열심히 할게요! 제발……!’

말을 꺼내야하는데, 주인님한테 애원해야하는데 목소리가 안나온다.

주인님의 바지자락이라도 잡고 싶은데 몸이 천근만근이라 달리기는 커녕 걸을수도 없다.

그러는 와중에 저쪽의 풍경이 변한다.

호족의 침실처럼 호화찬란한 가구와 밝은 빛이 어우러진 침대 위, 주인님이 얼굴 없는 여자들과 얽히며 사랑을 나눈다.

‘흐윽… 주인님… 주인니임……. 저 좀 봐주세요……. 저, 여기 있어요…….’

애타게 주인님을 부르며 손을 뻗지만, 어느샌가 얼굴 없는 여자들이 이실리테와 환인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폭언을 내뱉으며 걷어차고 짓밟기 시작했다.

[낳아준 어미도 모르는 천한 계집이 주제도 모르고!]

[넌 염치도 없니? 환인 님을 강도질하려 해놓고는!]

[사람이라면 살려준 것에 감사하면서 냉큼 사라졌어야지!]

[너나 길레스 벡슬이나 똑같아!]

[너 때문이야! 알아?! 환인 님은 호족이 되어도 부족한 분이신데 너 때문에 이 고생을 하시는 거라구!]

이실리테는 쏟아지는 폭력과 선명한 고통에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감싼채 울면서 작게 비명을 질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 몰라서 그랬어요, 용서해주세요……!’

[말로만 죄송하지말고! 진짜 죄송하면 환인 님 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야!! 이 더러운 거지년아!!]

사라지란 말이야……!!!

…라지란 말이야………!!

……지란 말이……!

‘시, 싫어어어……! 주인니임……!’

더러운 웅덩 속에서 엎드려 끅끅 울던 이실리테는 어느덧 여자들이 없어지고 쏟아지던 폭력도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건 우중충한 회색빛 세계 뿐.

하늘도, 땅도, 풀도, 물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마치 자신처럼… 부모님께 받은 이름도 없고, 사랑을 준 사람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자신처럼.

무가치하고 누구도 필요로하지 않는 춥고 쓸쓸한 회색 세상 속에서 이실리테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꿈인데, 꿈이라는걸 알고 있는데 왜 꿈에서 깨지 않는걸까.

혹시 이게 진짜 현실이고 주인님과 하던 여행이 환상이었던건 아닐까?

끔찍한 생각에 천천히 몸을 웅크린 이실리테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꼈다.

그런거라면…… 죽을래. 죽고 싶어… 누가, 누가 날 좀 죽여줘…….

“……?”

안느를 재운 다음 욕실에서 깨끗히 씻고 이실리테의 방을 방문한 환인은 이실리테를 보곤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침대 위에서 몸을 S자로 비튼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잠꼬대 중인 모습.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눈 주변이 퉁퉁 부어있을 정도였다.

=!$%/|…… !:ㅖ{%…….=

또다시 웅얼거리기에 입가에 귀를 가까이 해봤지만, 옹알이 같은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자세가 불편해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건가.

환인은 이실리테를 똑바로 눕힌 뒤 편히 쉬라고 웨이스트를 꽉 조이는 하이웨스트 스커트를 벗겼다.

벗기고 보니 이번에는 블라우스가 가슴을 꽉 압박하는 모양새여서 위에서부터 단추 3개를 풀어주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미녀가 하얀 블라우스만 입고 어른의 검은색 팬티를 드러낸 반라 차림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화보집을 연상케하는 수준이었다.

환인은 잠시 그 자태를 감상하다가 이불을 끌어와 덮어주었다.

그리고 침대와 붙은 벽에 기대고 앉아 이실리테에게 허벅지 배게를 해준다. 그러고 있자니 눈가에 묻은 눈물이 신경쓰여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

방금 살짝 웃은거 같은데…… 체온을 느껴서 그런가.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어준 뒤 조용히 명상에 들어갔다.

죽여달라고 중얼거리며 흐느끼던 이실리테는 어느 순간 더는 춥지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들자 회색 세상은 조금 밝아져 은은한 회백색으로 변해있었는데, 회백색은 신기하게도 차갑다거나 외로운 느낌이 아니라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포근한 느낌이었다.

‘…….’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실리테는 어느샌가 희고 하얀 꽃이, 혼재를 알려주는 일라일 꽃이 바닥에 가득, 저 지평선까지 흐드러지게 핀 것을 눈치챘다.

갑자기 왜 일라일 꽃이……?

하늘이 생기더니 구름도 생겨났다. 이어서 포근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준다.

‘…….’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망울들이 마치 이쪽으로 오라는듯이 흔들린다.

망설이던 이실리테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폭신해진 땅을 밟으며 정처없이 바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안가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거대한 산이 나타났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깔아뭉갤듯이 위압감 가득한 산이지만…….

‘……무섭지 않아….’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자신 하나쯤은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을 것처럼 넓고 자비로워보인다고 할까.

이실리테는 자연스럽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얼마안가 따스한 햇볓이 내려쬐는 산자락의 꽃밭을 발견했다.

지쳐서 주위가 보이지 않을 지경에 나타난 꽃밭은 너무나 포근해보였다.

하지만 내가 저길 들어가도 되는걸까? 나처럼 더럽고 형편없는 여자가 저렇게 하얗고 깨끗한 꽃밭에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망설였지만,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날것처럼 따뜻해보이는 꽃밭이라 참기가 어려웠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쉴게요…….

누구에게 허락을 구하는지도 모르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 이실리테는 조심스레 햇살 가득한 꽃밭으로 들어갔다.

‘아…….’

따뜻하다. 햇살이 마치 누군가의 품에 안긴것처럼 따스함이 마음속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실리테는 자신도 모르게 꽃밭에 누우면서 눈물을 살짝 흘렸다.

‘주인님…….’

=주인님…….=

안느에게 흡수한 영기 덕분에 1개가 더 늘어 48개가 된 영혼 구슬을 살피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부르는 소리에 그쪽을 내려다보았다.

“…….”

잠꼬대였나.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이실리테는 어느새 눈물을 그친 상태였는데, 서럽게 울던 좀 전과 다르게 작은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타인의 체온이 사람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지식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온기를 조금 나누어 주었던 건데 그게 효과가 있는지 이실리테는 좀 전보다 더 평온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제대로 잠든 것 같아 이마에서 손을 치우자 이실리테의 표정이 다시금 울상으로 변해간다.

“…….”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에 손을 얹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이 평온해졌다.

자세를 고쳐줬으니 잠자리가 불편해서 꾸는 악몽은 아닐 테고…….

환인이 알기로 술을 이만큼이나 마신 것은 자신과 합류한 뒤로 처음이다. 술기운이 마음속의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냈기 때문에 악몽을 꾸는 거겠지

이것도 술주정이라고 해야 할까.

피식 웃은 환인은 이실리테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군.’

자세히 들여다보니 속눈썹이 길다. 인조 속눈썹을 붙인 것만큼이나 길지만 그렇다고 부자연스럽지 않고 가지런해서 예쁜 속눈썹이다.

그다음으로 이목구비를 천천히 살펴본다.

눈썹의 위치, 미간 간격 콧날과 코의 길이와 모양, 입술의 위치, 입술의 모양 등. 의도해도 이렇게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황금비율이 얼굴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냥 봐도 아름답지만 들여다보면 더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할까.

도적질할 때는 워낙 추레하게 다녔고 머리카락도 엉망으로 해서 미모가 숨겨져 있었지만, 기술원에서 하녀로서 몸가짐 등을 배운 뒤부터는 숨겨져 있던 미모가 모두 개화한 모양새다.

가만히 이실리테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환인은 역시 이실리테가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루크랑 족이든 플뢰 족이든 여자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아름답지만, 환인은 루크랑 족 여자에게서 아주 약간…… 그야말로 조금이지만 거슬림을 느꼈다.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짐승 귀와 엉덩이 위의 꼬리뼈에서 시작되는 꼬리가 거슬림의 원인이었다.

이유가 있는 논리적인 감각은 아니다. 단지 그것이 조금 신경 쓰인다는 정도.

플뢰족은 그런 루크랑 족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지만,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혼혈에 약간 신비한 분위기를 섞은 듯한 외모 때문인데, 바라보다 보면 사람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약간…… 꽃이나 식물을 보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그런 면에서 이실리테는 사람처럼 생기가 넘치면서도 머리 위에 짐승 귀가 없다. 아까 치마를 벗기며 봤는데 꼬리도 없었다.

귀는 평범한 사람 귀고 엉덩이골 위로도 매끈한 허리가 바로 이어진다.

외모 측면에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지구인과 다를 바 없었기에 환인의 입장에서는 이실리테가 가장 취향에 맞는 것이다.

그래봤자 김치찌개에 소고기가 들어갔냐 돼지고기가 들어갔냐 정도의 차이일 뿐, 맛있는 건 똑같으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한동안 이실리테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환인은 오뚝한 콧날을 살짝 건드려본 뒤 영혼 능력에 대해 다시 고찰하려는 순간.

=으응…….=

이실리테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작은 신음과 함께 느릿하게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멍하니 자기 얼굴을 올려다보는 이실리테를 환인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잠시 그렇게 시선을 주고받던 이실리테는 화들짝 놀라 파드득거렸다.

=히잇! 주, 주인님!?=

내,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어떻게 주인님의 허벅지를……!

급히 일어나려 버둥거리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말을 잘 안 듣는다.

=이익!=

그럼에도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 두 다리를 버둥거리는데 그 바람에 이불이 다리에 치여 훌렁 날아가 버렸다.

덕분에 하얗고 매끈한 두 다리와 새하얀 피부를 가리는 약간 색기 있는 검은 팬티가 드러났고.

=꺄……!=

자신의 옷차림을 뒤늦게 깨달은 이실리테는 블라우스 밑단을 억지로 내리려다 아직도 주인님의 허벅지를 베고 있다는 걸 눈치채곤 흑, 짧은 신음과 함께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굴러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쿵.

=아윽!=

“…….”

환인은 그 난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허벅지 베개를 받은 게 저렇게 경기를 일으킬 일인가.

양반다리로 자세를 고쳐 앉자 이실리테의 머리가 침대 아래에서 슬그머니 올라왔다. 얼굴에 울상이 가득하다.

=주, 주인님…… 죄송해요. 감히 주인님 허벅지를 제가…….=

“……?”

아. 그런건가.

이때까지 이실리테와 한 스킨십은 건전한 목욕 시중과 옷을 입을 때 곁에서 시중을 들며 살짝살짝 피부에 닿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것도 자신이 일방적으로 시중을 받는 식이었지, 이번처럼 이실리테에게 해주는 듯한 스킨십은 한 번도 없었다.

환인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잘 잤나.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악몽……이요?=

그러고보니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고 입에서 역한 술찌든내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어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차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이실리테는 침대 모서리에 얼굴을 박고 어깨를 떨었다.

어떡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보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추리력이 조금 모자란 이실리테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고 그런 자신을 주인님이 방에 데려다주셨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가 편히 잘 수 있게 치마도 벗겼고 그…… 무릎 베게까지…….

환인이 말한 악몽보다, 자면서 꾸었던 악몽의 내용보다 환인에게 못난 꼴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현기증이 난 이실리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죄송해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소리치고는 앞섶이 열린 블라우스에 팬티 차림으로 방을 뛰쳐나갔다.

“…….”

그리고 10분 후, 황급히 머리를 손질하고 얼굴을 씻었는지 한결 단정해진 모습으로 우물쭈물,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반신 알몸으로 팬티 앞만 겨우 가린 모습이 단정하게 목 단추까지 채운 블라우스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실리테가 자신의 옆에 놓인 하이웨스트 스커트에 시선을 주는 것이 느껴졌지만, 환인은 일부러 건네주지 않았다.

그러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이실리테가 눈을 질끈 감으며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 죄송해요.=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다. 내가 허벅지 베개를 해주고 이마를 만져준 것이 혐오스러웠다거나 싫었던 것은…….”

=절대 아니에요!!=

“……아니었군.”

살짝 놀랄 정도의 고성에 훗, 웃은 환인은 이실리테의 시선이 계속 치마로 향하는 것을 보고 치마를 들어 내밀었다.

경계심 강한 고양이처럼 일정 거리 안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실리테를 향한 미끼다.

가져가라는 손짓에 겁먹은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다가오는 이실리테. 이윽고 머뭇머뭇 내민 이실리테의 손이 스커트에 닿은 순간, 환인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서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히약……!=

몸이 끌려오며 환인의 가슴에 상체를 기댄 모양새가 되었다.

검은색 팬티의 하트 모양 둔부를 뒤로 쭉 내민 자세 덕분에 이실리테의 G컵에 해당되는 거유가 인정사정없이 환인의 가슴을 짓누른다.

품에 이실리테를 안아서일까, 그녀의 목덜미에서 기억에 있는 꽃향기가 물씬 피어오른다.

환인은 이실리테의 허리에 손을 감아 그녀를 다리 사이에 앉혔다.

키가 170cm를 훌쩍 넘기는 장신이지만, 다리가 워낙 긴데다 환인과 키 차이로 인해 앉은키가 머리 하나는 작다.

그러다보니 자세가 환인의 품에 쏙 들어와 연인 앉기를 한 것처럼 되었다.

=…….=

이실리테는 눈동자에 소용돌이가 일어난 듯한 표정으로 달달달 떨고 있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듯한 이실리테의 표정을 보면서 환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제대로 말한 적이 없군.”

=……?=

“고맙다. 지금처럼 편히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네 덕분이다.”

치마를 입지 않은 파렴치한 상태였지만, 이실리테는 이순간 그런 사실을 잊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인님이 내 노력을 인정해주셨어……!

……그런데 주인님의 향기가 참 좋네. 품도 따뜻한 게 마치 꿈에서 느꼈던 그 꽃밭처럼……….

‘……아.’

그제야 이실리테는 꿈을 떠올렸다.

이 냄새, 이 따스함. 꿈에서 보았던 그 햇볕이 내리쬐는 꽃밭과 똑같다.

무엇하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실리테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주인님 덕분이었음을 여자의 육감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받고 싶은 것이 있나.”

=예? 앗, 상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주인님께 방어술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걸요.=

기초 함정술을 배우는 데만 5금화를 내야 할 만큼 지적 기술의 가치가 어마어마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전투의 최고급 기술로 알려진 회피, 막기, 반격 세 가지의 기술을 대련 형식으로 가르쳐준다고 하면 금화를 얼마나 내야 할까.

이실리테는 모르긴 몰라도 하루 수업비로 금화는 내야 할 거로 생각했다. 실상은 그 몇 배지만 아무튼.

환인은 이실리테의 쓰다듬기 좋은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네가 기술을 배워 강해지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온전히 너만의 포상이 되는 것은 아니란 뜻이지.”

=그, 그렇지만…… 그것 외에는 정말 바라는 게 없는걸요.=

있다면 주인님께 버림받지 않고 오래오래 주인님을 모시는 거지만, 이 상황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이실리테는 생각했다.

내심 걱정하던 것이 술의 힘을 빌려 악몽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주인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약한 트라우마가 되기에 충분한 일.

그런 내심을 표정에서 읽은 환인이었지만, 넘어가 주지 않았다.

“다르게 해석하면 내게 그만한 능력이 없다거나 내가 매력적인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도 되는군.”

=네에?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새끼 고양이처럼 안겨있던 이실리테가 품 안에서 화들짝 놀라는 것을 느끼며 환인은 후, 웃었다.

슬쩍 찔러봤는데 반응이 너무 솔직하다.

이래서야 뭔가를 숨기거나 할 수 있을 리 없지. 애초에 첫 만남부터 소처럼 우직하고 무식하던 이실리테가 아니던가.

자신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반응에 환인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실리테는 주인님이 어째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연모하는 주인님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이 시간이 쭉 이어졌으면 하고 짐승신님에게 기도할 정도로.

그리고 환인은 그런 이실리테의 불안을 날려줄 이야기를 그녀의 동그랗고 귀여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실리테, 나는 널 놓아줄 생각이 없다.”

=……!=

“평생을 내 곁에 둘 거다. 만약 내게서 떠나가려 한다면 나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널 붙잡을 거다.”

이 말이 이실리테에게 얼마나 안도를 줄까. 환인은 대강이나마 짐작하며 계속해서 이실리테에게 속삭였다.

“내가 너에게 방어술을 가르친 지도 어언 100일이 다 되어 간다. 그걸 수업비로 환산하면 대강 얼마가 될지 짐작하느냐.”

=아……니요….=

“회피와 막기는 비교적 배우기 쉽다. 가르치는 곳도 많지. 반격도 앞선 두 가지보다 소수이긴 하지만 배우고자 한다면 그럭저럭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있지. 하지만 세 가지 기술을 대가에 가깝게 다루는 자가 1:1 대련으로 가르친다는 희소성, 그것은 일일 교습비가 10금화에 해당할 정도다.”

=…처, 천 금화…….=

“그래. 네가 만약 날 떠나려 한다면 그 금액을 전부 청구할 거다.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겠지. 1년 뒤에는 3650금화, 5년 뒤에는 18,250금화, 10년 뒤에는 36,500금화.”

작은 마을을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실상은 이만한 돈을 내고 몇 달 몇 년씩 배울 사람은 대륙에 걸쳐 1명을 찾기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환인은 생각을 숨기며 “너는 평생 내게서 떠나지 못한다.” 이렇게 속삭이자 이실리테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목소리에는 정말 청구할 거라는 위협과 윽박이 아니라, 널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상냥한 의지가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님…….=

환인은 어쨌든 간에 이실리테가 위안받았다는걸 느끼고 남편이 아내를 안아주듯 품에 안고 등을 어루만져준다.

“자, 여기에 또 한 가지 더.”

=……?=

“내게는 일반인 여자의 영기보다 직업자인 여자의 영기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안느는 현재 너보다 한발 앞선 상황이지.”

……안…느으!

이 나쁜 년! 얌전한 플뢰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세상에 틀린 말 하나 없네!

기회가 왔다고 냉큼 낚아챈 그 행동력과 실행력에 이실리테는 부러워하면서도 질투했고 흥분했다.

그 탓에 볼살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고, 그 얼굴을 본 환인이 큭큭 웃으면서 말했다.

“안느는 내게 엎드려 절하면서 평생 따르겠다고 이야기했다. 이러는 마당에 이실리테 너는 내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건가.”

=주, 주인님.=

“지금의 나는 네가 가장 바라는 걸 들어줄 수 있다. 그리고 이 기회가 지나가면 언제 같은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1년 뒤가 될 수 있고 혹은 10년뒤가 될 수 있다. 어쩌면 평생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평소였다면 이쯤에 도망치거나 쭈구리가 되어 제대로 말도 못 하다가 분위기를 흐지부지 흩트려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느와 밤새 대작하며 흉금을 터놓은 대화, 그리고 빛의 속도로 배신한 안느에 대한 질투, 좀 전에 꾸었던 악몽 덕분에 이실리테는 한순간이나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저도 주인님을…… 평생 따르고 싶어요.=

말하고 났더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한편으로는 드디어 말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후련해졌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님이 거부하시면 어쩌나 두려워졌다.

이실리테는 떨리는 눈으로 환인을 바라보았고, 환인은 이실리테의 두 뺨을 감싸고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이실리테.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말을 하는 여자가 좋다. 더 솔직하게, 네가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해라.”

더욱 부끄러운 말을 요구하는 환인의 이야기에 이실리테는 울듯말듯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감싼 환인의 손을 잡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도 주……인님한테 저도 안기고… 싶어요. 제, 제 영기도 주인님이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잘 말했다.”

환인은 작게 웃으며 이실리테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쳤다.

이실리테의 입술에서는 일라일 꽃향기가 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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