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83화 (183/813)

〈 183화 〉 178 성도 파르히스트

* * *

이실리테와 안느는 밤이 깊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실리테는 용병 시절 겪었던 더러운 일과 도적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 그리고 환인과 함께 레힐 마을에서부터 이곳, 파르히스트까지의 여정을.

안느는 집을 뛰쳐나와 이곳, 파르히스트에 당도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난 이름도, 성도, 집도 다 버려서 해줄 이야기가 없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야? 너 보면 집이 엄청나게 부자인 거 같은데…… 집에서 그냥 놓아줘?=

고족이나 호족 가문에 있어 자녀란 곧 가문의 번영을 위한 장기 말이나 다름없다. 멀쩡한 장기 말을 하나 못쓰게 되는 셈인데 그냥 놓아준다고?

안느는 피식 웃고는 자조적인 미소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난 그 집안에서 계륵 같은 존재였거든. 결혼시켜서 내보내야 하는데 꼴이 이러니까 사촌들도 친척들도 나만 보면 짜증 내고 이맛살 찌푸리고 더러운 거 보듯이 피하고……. 나도 참다 못해서 ‘그냥 빈손으로 나갈게요. 제 이름은 가문비에서 지워주세요.’ 하고 나와버렸어.=

=어휴……. 그럼 부모님도 손 놓으신 거야?=

=…….=

=그건 아닌가 보네…….=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고 하셨어. 하지만 친척 사촌이라는 것들이 날 빌미로 부모님을 계속 공격했거든. 그대로 있었으면 부모님도 위험해지고 나도 위험해졌을 거야. 위험해질 거면 나 혼자 위험해지는 게 낫지.=

부모가 없는 이실리테였지만 안느와 안느의 부모님이 내린 결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집 나온 뒤로는 어땠는데?=

=뭐……. 가진 건 몸뚱이뿐이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지. 타고난 힘 덕분에 꽤 이름을 날리게 됐고…….=

어느 날 우연히 땅신 교단의 문을 밟았다가 성술의 자질을 깨닫고 중복으로 각성해 성투사가 된 것, 땅신 교단 본단의 수행장소에서 동기들과 수행하고 나와 땅신 교단 소속 자유 성투사가 된 것, 그 뒤로 일정 기간마다 의무를 이행해주며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세상을 흘러 다니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안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와중에도 자신의 덩치 탓에 절친한 친구 하나 만들지 못하고 겉도는 일상이 이어졌다.

=친구는 있었지만 그건 내 능력만 보고 접근한 사람들이었지, 도령처럼…… 뭐라고 할까, 나라는 인간 자체가 필요하다는 느낌은 없었어. 이슬이 너처럼 보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아하하. 그야 주인님하고 비교하면 다들 평범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멋쩍게 웃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안느도 피식 웃었다.

이실리테는 차로 입술을 축이는 안느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르아웬이라는 사람은 친구 아니야? 친하다고 했잖아.=

=자주 얼굴을 보고 의무를 이행해주고 부탁 몇 번 들어줘서 친한 거지 친구라는 의미는 아니야.=

그러면서 부모님이 계신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아련한 눈빛으로 말한다.

=아무튼…… 집을 나온 뒤로 해코지를 당하지 않은 걸 생각해보면 부모님이 막아주신 게 틀림없겠지. ……부모님이 보고 싶어.=

=우락부락해도 귀여운 딸이니까.=

=우락부락하다고 하지 마!=

=꺅.=

이실리테에게 얇은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몸으로 깔아뭉갠 안느는 얇은 이불 아래에서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오랫동안 함께 모험한 파티는 동료들을 가족으로 여긴다고 들었다. 실제로 10년 차, 15년 차 정도 되는 모험가 파티를 보면 한 가족을 넘어 자기 몸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나도 제2의 가족을 여기서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기쁠 텐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주인님한테 고백할 생각이야?=

얇은 이불 아래에서 꼬물거리던 이실리테의 질문에 안느는 입을 다물었다.

고백이란 말이 나오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급격하게 쪼그라든다. 이불을 걷어내고 빠져나온 이실리테는 흥, 콧방귀를 끼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나한테는 용기를 내서 주인님한테 들이대고 고백하라고 부추겨놓고는 자기 일이 되니까 입을 다무는 것 좀 봐.=

=그야 넌 예쁘잖아. 가슴도 크고…… 와, 내 손에도 다 안 잡히는 것 좀 봐. 이게 가슴이야 주머니야?=

=어, 어딜만져!=

안느의 손이 꾸물거리며 자기 젖가슴을 주무르자 이실리테가 몸서리치면서 안느의 팔을 찰싹찰싹 때린다.

예상외로 손이 맵다고 생각하며 안느가 물었다.

=넌…… 내가 도령과 가까워져도 괜찮아?=

=…….=

대답을 못 하는 모습에 안느는 역시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도령과 멀어지는 게 맞…… 까지 생각한 순간 놀라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괜찮아.=

=어…….=

=너 말고도 주인님을 좋아하는 여자는 많아.=

여기서 좋아한다는 것은 창관 여자들이나 지나다니면서 만난 평범한 여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겠지.

=율캄이라는 마을에 주인님이 구해준 소녀들도 있고 웨이포드에서 만난 백려강이라는 아가씨는 6급 호족의 자제였어. 이엘카타라는 분도 있는데 그분은 주인님하고 같은 영혼사시고. 전부 사랑이라는 감정을 지녔거나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야.=

=으, 음.=

=그 사람들도 그렇고…… 주인님한테 다가서는 사람을 난 질투하지 않기로 했어. 나는 주인님을 모시는 것만 생각할래.=

안느도 그렇고 백려강도, 이엘카타라는 사람도 다들 입이 떡 벌어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안느는 자기가 예뻐서 부럽다고 하지만, 이실리테는 오히려 안느가 더 부러웠다.

요리 잘하고 얼굴 예쁘고 ‘어린’ 여자는 지금도 곳곳에 널려있다. 더욱이 여행 중 크게 다치거나 나이 먹어 늙으면 자연스럽게 여자의 매력은 떨어질테지.

하지만 안느는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힘과 진귀하고 희소한 직업, 그리고 많은 돈이 있다.

그건 나이와 큰 상관이 없는 가치를 사람에게 주는 법이다.

파르히스트에 도착한 이실리테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몸으로 주인님을 유혹해봤자 그건 자신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일이라고. 몸으로 유혹한 매력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퇴색될 거라고.

오히려 주인님과 사이를 오래오래 이어주는 것은 육체나 정신적인 관계 따위보다 사람의 정이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주인님을 모시면 주인님의 성격상 명백한 하자가 없는 한 내치지는 않으실 테니까.

살짝 고개 숙인 이실리테의 고뇌를 읽은 안느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실리테도 안느의 딱딱하면서도 말랑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신세가 비슷한 두 사람의 밤이 깊어갔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 아직 어슴푸레한 기운이 남아있을 무렵에 거실로 나온 환인은 거실의 탁자에 마주 앉아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두 명의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안주는 그냥 채소. 술은……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을 맡아보면 최소 40도가 넘는 증류주다.

=어앟…… 도려엉, 이러나써어? 에헤헤헤.=

=핰. 제셩헤여어어. 바아루 식샤 준비하께요오…… 에콩.=

환인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실리테가 휘청이다 제풀에 발목이 꺾여 풀썩 쓰러진다.

세반고리관의 기능이 마비되었는지 일어서기 위해 흐느적거리는데, 상체는 가슴이 찐빵처럼 눌릴 정도로 엎드린 채 다리만 바짝 힘을 주니 엉덩이가 솟구치며 검은색 플레어스커트가 뒤집힌다.

“…….”

마치 고양이가 엉덩이만 치켜든 모양새.

겨우겨우 속옷의 역할을 하는 새카만 팬티를 잠시 응시하던 환인은 말없이 이실리테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웬 술을 이렇게 마신 거냐.”

=졔셩해요오. 안느가아, 가티 마씨자꾸 꼐쏙 쫄라써어……. 히히힣, 쥬힝니이잉~.=

팔을 끌어안은 채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이실리테의 모습은 환인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애교 넘치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수줍은 척, 새초롬한 척, 그러면서 성실하게 수발을 들고 봉사하는 모습만 보다가 이런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니 느낌이 새롭다.

반대쪽의 안느는 투명한 술을 홀짝이면서 이쪽을 향해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환인과 눈이 마주치자 곧 무표정하게 변하더니 이윽고 서러워하는 것처럼 표정이 잔뜩 찡그려진다.

=도려엉, 이 나쁜노마아아. 내 첫 키이스를 뺴서가기나 하고오…… 흐이이잉…….=

“싫었나?”

=시를리가 잇냐아아아……. 나아, 남자 알뭄더 하안번도 모옷봣따고오…. 니가아 처으민데힝….=

안느가 술주정을 하는 사이 몸을 앞뒤로 흐느적거리던 이실리테가 쿵, 탁자에 머리를 박더니 웅얼웅얼 알지 못하는 소리를 중얼거린다.

두 주정뱅이를 잠시 응시하던 환인은 탁자를 둘러보았다.

투명한 1리터짜리 유리 술병이 30병 가까이 비어 있었다.

이 세계에서 평범한 술은 나무통에 들어있다. 보통은 발효 쪽으로 맥주나 와인이 대부분이고 이런 나무통의 술은 서민의 술이라는 인식이 크다.

반면 유리병에 든 술은 부잣집이나 위세가 높은 집에서만 마시는 고급술이며 1병에 싸게는 2은화, 비싸게는 몇 금화씩 한다.

‘안느가 꺼낸 술인가.’

안느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 환인은 아직 따지 않은 술병을 따서 안느의 술잔을 채워준다. 그리고 누구 잔인지 모를 술잔을 가져와 절반 정도 술을 채웠다.

잔을 살짝 흔들자 강렬한 과실향기와 피어오른다.

“자.”

=……?=

환인이 술잔을 내밀자 이게 무슨 행동인가 하면서도 따라 술잔을 내미는 안느. 그 잔에 짠, 부딪친 뒤 100ml 정도 되는 액체를 단숨에 마신다.

빈속에 마셔서일까, 독한 술이 위장을 찌른다. 동시에 복숭아와 레몬을 섞은 듯한 강렬한 향기가 비강을 가득 채웠다.

“좋은 술이군.”

첫맛도 깔끔했고 끝맛도 매우 순했다. 흔히 레이디 킬러 칵테일로 알려진 스크루 드라이버처럼 과일 맛만 나는 느낌이다.

울음을 그치고 멍한 얼굴로 환인을 바라보던 안느도 자기 잔에 담긴 술을 쭈욱 들이킨다.

입가를 타고 술이 흘러내리는 걸 보며 환인이 물었다.

“안느, 넌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하지?”

=…….=

단단히 취한 것처럼 콧숨을 내쉬며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몸을 살짝 흔들던 안느는 탁자 위에 엎어지며 말했다.

=남자한테에…… 사랑… 바꼬 시퍼어…….=

환인은 두 여자가 꽐라가 된 것을 보며 내심 잘됐다고 여겼다.

어젯밤 이실리테와 안느가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걸 중간까지는 들었지만, 그 뒤에는 조용해져서 잠자리에 든 줄 알고 자신도 잠자리에 들었는데 설마 밤새 술을 대작했다니.

술에 취했다는 것은 본심을 오픈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일이 껍질째 벗겨져 `드셔주세요`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

더욱이 이실리테는 탁자에 머리를 박고 웅얼거리면서 반쯤 잠들었다. 그에 비하면 안느는 혀가 꼬이긴 했지만 사리 판단이 가능한 수준. 누굴 먼저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다.

일단 이실리테를 방에 넣어두고 먼저 안느를 술의 힘을 빌려 감정을 토해내도록 한 뒤 거사를 치른다.

그 뒤에 이실리테를 깨운 뒤 설득을 통해 품에 안으면 웬만한 문제는 해결될 테지.

물론 처음에는 둘 다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특히 안느의 혼란이 클테지만, 자신이 이실리테까지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안느도 며칠 전부터 자신이 보여주었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받아 수긍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만큼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본심 확인 작업.

지금처럼 자신을 지목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남자라고 표현한 것을 확대해석해서 안았다간 차후에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자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자길 원한다고 말하게 만들어야 한다.

환인은 즉석에서 일부 계획을 수정하며 안느에게 대답한다.

“그 말은 딱히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건가.”

=…….=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지 않는 안느. 환인은 안느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였다.

마지막 희망인 양 꼭 쥐고 있는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운다.

짠­

손에 쥔 잔에 가해진 작은 충격에 다시 고개를 든 안느는 환인이 술을 마시는 걸 보며 자신도 술잔을 기울였다.

술의 반절이 입을 타고 흘러내린다. 환인은 손수건을 꺼내 흘러내린 술을 닦아주며 말했다.

“뭐가 두렵지?”

=…….=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가 거부당할까, 거절당할까 두려운 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안느의 모습에 환인은 그럴만하다고 여겼다.

수십 년간 남자와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남자들에게 거부만 당하면서 살아왔다. 마지막 희망이자 마지막 끈이라고 여긴 사람에게마저 거부당하면 더 이상 살아갈 마음도 들지 않겠지.

하지만…….

“복권도 사야 당첨될 확률이 생긴다.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고 행운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

“너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 중 한 명인가.”

=그취마안, 그러며언 아안 아프은거얼…….=

“정말 그걸로 만족하나? 마음을 억누르고, 희망을 죽이고,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움직이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잘못한 게 없다며 위안 삼는 것으로 정말 만족하나?”

풀썩.

안느는 반쯤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인상을 마구 썼다. 술에 잔뜩 취했지만 환인이 하는 말은 그럭저럭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안느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도오령은 바부야아…….=

“…….”

=그으래서 더 무서운거라고오오.=

훌쩍이며 안느가 짜증 난다는 듯이 말한다. 짜증 내면서 술기운이 조금 날아가서일까, 말도 또렷해진다.

=좋아하니까 무서운 거야……. 도령이 좋아져 버렸으니까… 도령한테 거부당하면, 진짜로…… 이번에는 진짜로 절망할 거 같으니까아…….=

더 이상 우울해지는 건 싫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이 움직인 사람에게 거절당하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후폭풍이 몰아칠 텐데, 그걸 견딜 자신이 없다.

그래서 무서운 건데 이 바보는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만족할 리가 없잖아. 나도 남자랑 꽁냥거리……는 것까진 무리겠지만 그래도 섹스도 해보고 싶고 아이도 낳아보고 싶고 엄마 소리도 들어보고 싶단 말이야아.

“그러고 싶은 상대가 나라는 건가.”

=그래이바보야!=

후, 술 향기가 스며든 웃음을 내쉰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사이 이실리테는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안느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환인은 탁자에 엎드려 잠든 이실리테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고, 그대로 이실리테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느는 환인이 이실리테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과 콧물을 글썽거렸다.

결국…… 남자는 예쁘고 가녀린 여자만 좋아하지…….

두 팔 사이로 얼굴을 묻은 채 이제 살아갈 자신도 없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저주하고 절망하던 안느는……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길에 어? 하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 콧물로 얼룩져서 별로 예쁜 얼굴은 아니군.”

=읏…….=

황급히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안느를 보며 환인은 최하급 정령으로 강령을 펼쳤다. 그리고 안느를 번쩍 안아 올렸다.

키 차이가 대충 30cm 정도 나긴 하지만 공주님처럼 드는 데는 문제없다.

=어어?!=

앗 하는 사이 공주님 안기를 당한 안느가 화들짝 놀라 상체를 세운다.

“떨어지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라.”

생전 처음 당해보는 공주님 안기에 안느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안 무거워……?=

“깃털만큼 가볍다고는 못하겠군.”

=큽. ……그게 무슨 말인데.=

“알면서 묻지 말라는 말이지.”

=킥킥킥.=

환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킥킥 웃은 안느지만, 마음속으로는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실제로도 눈이 촉촉해져 간다.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말을 하게 된 뒤부터는 아버지도 부담스러워하면서 스킨십을 해주지 않았다. 다 자란 뒤로는 남자든 여자든 다가오지 않았고.

그런데 스스럼없이 안아서 들어 올리다니, 절대 가볍지도 않을 텐데…….

‘남자의 품이 이렇게 따뜻했었나?’

잠시 후 구색만 안느의 방이지, 한 번도 쓰지 않은 방에 들어온 환인은 안느를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감동의 여운에 잠겨있던 안느가 뒤늦게 화들짝 놀랐다.

어, 방에는 왜 데려다준 거지? ……자라고 데려다준 거겠지. 응, 이제 잘 자라고 하고 방을 나갈 거야. 그럴 거야.

속으로 애써 부정적인 상상을 하는 안느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도 설명할 길이 없는 기대감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환인은 그러한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안느를 보며 작게 웃고는 그녀의 한쪽 뺨을 감싸 쥐고 입술에 키스해주었다.

혀를 넣는 딥키스까지 가면 기절하거나 주먹이 날아오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서 입술과 입술만 살짝 닿는 가벼운 키스다.

머리는 이실리테와 비교될 만큼 작았기에 키스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숨결에도 과일 향과 피톤치드라고 할지, 약간 숲속 비슷한 향기가 났기에 불쾌하지도 않았고.

미묘한 냄새가 났더라도 입술 접촉을 통해 흘러들어온 영기의 양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도, 도령. 나… 나는…….=

무어라 말하려는 안느의 입술에 검지를 살짝 가져다 대며 말을 멈추게 한 환인은 조용히 물었다.

“안느. 나는 너에게 연민도, 동정도 품지 않았다. 오늘까지 보여주었던 모습은 모두 한 점 거짓 없는 내 마음이었지.”

=…….=

“나는 네게 마음을 다 보여주었다. 너는 어떻지? 이제까지와 다른 내일로 나아갈 용기가 있나?”

=나, 나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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