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177 성도 파르히스트
* * *
제하=메샤가 죽었다는 소식은 그리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저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제하=메샤가 원한을 가진 어떤 파티에게 살해당했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 제하=메샤를 살해한 게 누구인지, 어떻게 살해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죽었다는 사실도 내장을 꼬리처럼 늘어뜨린 채 죽어있는 참혹한 모습이 다른 추적자에게 발견되어서 알려진 것.
유일하게 사정을 아는 두 명은 계약 마도구로 평생 비밀 유지 서약을 했기에 진실은 천천히 어둠 속에 묻혀갔다.
제하=메샤 사망 사흘 후.
=…….=
=……느?=
=…….=
=…안느.=
=……….=
=안느!=
여러 번 불러도 대답 없는 모습에 이실리테가 골을 내며 버럭 고함지르자 거실에 앉아 멍하니 벽만 바라보던 안느가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어? 불렀어?=
=다섯 번도 넘게 불렀거든!=
=어…… 미안….=
환인이 집에 없기에 꽥! 고함을 질렀던 이실리테는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안느의 태도에 한숨을 푹 내쉬면서 물었다.
=또 그 여자가 죽을 때 생각하고 있었어?=
=응…….=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은 말 그대로 찰나 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실리테가 보기엔 제하=메샤가 날아들었고, 주인님이 베었고, 그걸로 끝인 일이었던 것.
주인님도 별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셨기에 이실리테도 아무 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집에 돌아와서 벌어졌다.
안느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흐느적거린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갑옷을 벗지 않고 멍하니 서 있길래 정신 차리게 해서 갑옷을 벗겼고, 씻으라고 해도, 밥을 먹으라고 해도 멍하니 앉아만 있었기에 끌고 다니면서 씻기고 밥을 먹였다.
그 뒤에 이유를 물어본 이실리테는 굉장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인님과 제하=메샤가 고작 2초 남짓한 사이 서로의 수를 수십 번 읽고 서로가 낸 최적의 수단으로 결착을 내었다는 이야기.
자신이 보기에는 `스쳐 지나갔더니 결판이 났더라~`였는데 실상은 치열한 수읽기가 벌어졌다고?
난 역시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이실리테의 반응에 안느는 말 못할 답답함을 토로했다.
2초 사이에 오간 초고속의 수 싸움, 안느 자신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을 보면 말 그대로 수준을 초월한 엄청난 수 싸움이 오갔을 텐데 그걸 알고도 그런 반응이라고?
안느가 기막혀하는 걸 이실리테도 느꼈지만 시큰둥했다.
대단하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주인님이니까 그정도는 당연한건데.
무엇보다 자기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고 싶다면 뼈를 깎는 훈련을 하면 되는 거고, 못 따라갈 경지라고 느끼면 포기하고 현재 수준에서 만족하는 거지 뭐 별거 있나?
=…….=
아무튼, 그걸 또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이실리테는 이번에도 자신이 이해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야 도적 출신이었다가 하녀가 되었고 무술을 배우는 건 주인님한테 도움이 되기 위해서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안느는 기본이 투사니까.’
자기도 입에 넣는 순간 일곱 가지 무지개 같은 맛이 느껴지는 음식을 먹으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와, 이거 어떻게 만들었길래 이런 맛이 나는 거지? 어떻게 이 요리를 배울 수 없을까? 할 거다.
그걸 안느에게 대입해보면…… 음…… 한 7배 정도 더 충격적이라고 해줄까?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이실리테는 안느의 승모근을 탁탁 때리면서 말했다.
=좀 있으면 주인님 돌아오실 거야. 그전에 먼저 씻어. 주인님 씻으시고 바로 식사하게.=
=……응….=
=…꼭 씻어라?=
=…….=
으휴.
이실리테가 저녁 요리 재료를 사러 아루루와 함께 외출한 지 20여 분이 지났을 무렵.
=아.=
의미 없는 소리를 낸 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어야지……. 안 씻고 있으면 이슬이가 돌아와서 또 잔소리할 테니까…….
흐느적거리면서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은 안느는 벽에 세워진 거울 속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여자의 것이라고 보기에 너무 듬직한 체구와 근육.
그나마 남자들보다 잘록한 허리와 남자들보다 좀 더 발달한 골반 덕에 보이는 S자 몸매가 여자라는 것을 가르쳐주지만, 그것도 쩍 갈라진 대퇴부 근육과 각지다시피한 비복근을 보면 여자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팔다리가 길고 쭉 뻗어서 잠시 바라보다 보면 여성미가 느껴지긴 하지만 누가 봐도 여성의 매력보다는 무력에 치중된 모양새.
안느는 물끄러미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런 몸뚱이를 가지면 뭐 해. 도령이 보여준 것도 못 따라 하는데…….=
시무룩해진 안느는 대충 뜨거운 물을 몸에 끼얹은 뒤 네 명이 들어가도 넉넉한 욕조에 들어가서 앉았다.
=……짜증나.=
이슬이는 앉으면 그 머리보다 큰 가슴이 물에 둥둥 뜰 정도로 잠기는데 자신은 뭐 반신욕하는 것도 아니고.
짜증 나서 수면을 팡! 때렸더니 좌우로 큰 너울이 생기며 물이 욕조를 넘쳐흘렀다.
=…….=
이슬이한테 조금 미안해졌다. 도령이 바로 목욕할 수 있게 물을 가득 채우고 뜨겁게 데우느라 고생했을 텐데…….
그렇게 쪼그려 앉아서 세상 혼자 우울한 것처럼 궁상을 떨고 있는데 욕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슬이라고 생각해서 눈길도 주지 않았던 안느는 들어온 사람이 멈칫하는 행동에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 어? 도령? 도령이 왜?’
환인은 환인대로 굳어있었다. 탈의실에 벗어둔 옷도 없었기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안느가 들어가 있단 말인가.
“…….”
그렇다고 나가서 옷을 입자니 땀에 흠뻑 젖은 속옷과 옷을 다시 입긴 싫고 이런 몰골로 나가서 새 옷을 꺼내입는 것도 싫다.
환인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가 욕조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안느가 흠칫, 무릎을 모아 앞을 가리고 몸을 웅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도, 도령. 나 지금 목욕하고 있는데…….=
“나도 땀에 젖은 옷을 다시 입고 싶진 않아서. 미안하지만 금방 씻고 나가지.”
신전 숙소에서는 사정상 함정 실기 수업을 진행하지 못해 이론 수업만 우선하여 진행했다.
숙소를 나온 뒤부터는 엽사 조합을 방문해 그곳에 준비된 장비와 설비로 실기 수업을 진행 중인데, 이게 체력을 많이 쓰는 일이라 수업을 치르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된다.
환인은 되도록 안느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욕조 가장자리에 등을 돌리고 앉아 물을 끼얹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걸 잠시 지켜보던 안느는 자신의 얼굴을 짝짝 때렸다.
이슬이가 미리 말해줬는데도 늦게 욕실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다.
일하거나 훈련하거나 해서 땀 흘린 것도 아닌데 함정술 공부를 하고 오느라 땀 흘린 도령이 목욕할 기회를 뺏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게다가, 내 몸은 남자 뺨치는 몸이니까. 뭐 오목하고 볼록한데가 있어야 도령도 볼 마음이 들 텐데 이런 몸을 보고 싶겠어?’
오히려 내가 봐달라고 부탁해야 봐주지 않을까. 속으로 자학적인 농담을 하며 안느가 마악 땀을 다 씻어낸 환인에게 말했다.
=도령. 이왕 들어온 거 탕에 몸도 담그고 가.=
“……괜찮나.”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어차피 남자나 다름없는 몸인데.=
자조 어린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대답 없이 일어서서 욕탕에 들어갔다.
‘헉.’
그리고 환인의 우람한 그것을 코앞에서 목격한, 아니 애초에 남자의 물건을 처음 본 안느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당황해버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사흘 전에 있었던 충격적인 결투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증발해버렸을 정도.
현재 안느의 머릿속을 단어로 표현하면 자지자지자지고추성기자지도령몸좋네?자지고추좆이슬이어쩌지고추자지자지 정도가 될 것이다.
똑, 똑…….
습기로 맺힌 물방울이 천장에서 욕탕으로 떨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침묵이 이어진다.
그 침묵이 안느에게 부담스럽게 다가올 무렵 촤악 얼굴에 뜨거운 물을 끼얹은 환인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안느.”
=으, 응?=
“미궁을 다녀온 뒤부터 날 계속 도령이라고 부르더군. 왜 그렇게 부르는 거지?”
=어…… 대장이라고 부르는 건 왠지 삭막한 거 같아서……. 도령하고 이슬이가 친하게 지내는 거 보니까 나도 조금 부럽기도 하고 해서 그랬던 거야. 기분 나빴다면 안 부를게.=
“그런 건 아니다. 갑자기 호칭이 바뀌었길래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까.”
기분 나빠서 물어본 게 아니라니, 다행이다? 까지 생각했던 안느는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 순간 뇌 정지가 올 뻔했다.
“안느. 넌 네 몸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옷을 두껍게 껴입고 육중한 판금 갑옷을 입어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여성의 굴곡은 충분해.”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겨우겨우 입을 뗐지만 새되고 계집애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를 들은 도령이 무슨 생각을 할지 두려워 안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환인은 그런 안느를 곁눈질하다가 작게 웃었다.
마침 기회가 왔다. 슬슬 쿨타임이 돌았으니 안느 자신이 여자라는 걸 다시 상기시켜주어야지.
자주 못하니까 이번에는 수위를 강하게 올려서.
“뭐가 이상한 소리라는 거지. 넌 충분히 여성스러워.”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고. 이게 무슨 여자 팔이라는 거야? 이 어깨도, 가슴도 도령보다 더 굵고 튼튼하잖아.=
“잘 단련된 훌륭한 팔과 어깨지. 그럼에도 여성스러운 매끈한 피부라서 윤기도 나고”
도대체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모습에 안느는 씨이, 울분에 차 눈물을 살짝 글썽이면서 으르렁거렸다.
처음 도령이 자신을 여자로 봐줬을 땐 당황하고 놀란 상태여서 사리 판단이 미숙했던 상태였다. 그래서 살짝 가슴이 설렜던 거다.
하지만 방금 탈의실에서 거울에 자신의 몸을 본 지금은 지극히 냉철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도령의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머리가 돌았다고 말하고 엄청 닮은 거였어! 이런 날 여자로 본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속으로만 으르렁거린 안느는 무릎을 세워 쪼그려 앉은 자세로 조금 더 움츠리며 지극히 타당한 질문을 던졌다.
=……도령은 혹시 동성애 취향이야? 아니, 여자도 안으니까 양성애?=
“난 남자와 성적 접촉하는 성향은 없다.”
=진짜? 진짜 없어?=
“상대의 취향은 존중하지만 그걸 내게 강요한다면 돌도끼로 머리를 쪼개줄 용의가 있다.”
진실의 주시자 능력을 써서 대답을 들은 안느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도령은 머리가 돈 것이야. 아니면 눈이 심각하게 이상하거나.
안느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환인은 종족 재능을 사용한 탓에 유리처럼 광택이 돌고 있는 안느의 은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
안느는 환인의 얼굴이 갑자기 다가오는 것에 순간적으로 얼었고, 잠시 시간이 흘러 환인이 물러나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여성의 매력은 가녀린 체구 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안느 넌 충분히 매력적이다. 남자들이 네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 남자들의 눈이 옹이구멍이라서 그런 것일 뿐, 그 일로 네가 자학할 필요는 없다.”
=…….=
내, 내 첫 키스… 첫 키스였는데…… 첫…….
영혼이 어디론가 빠져나간 것처럼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안느의 어깨를 살짝 잡아준 환인은 몸을 돌려 욕탕을 빠져나갔다.
‘이제 뜸이 들겠지.’
환인이 원하는 것은 안느와 이실리테를 둘 다 손에 넣는 것. 안느라면 정신을 차린 뒤 이실리테에게 어떤 식이든 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높은 확률로 자신의 감정을 이실리테에게 밝히며 사과하는 코스일 거다.
안느의 감정을 들은 이실리테는 시무룩해지고 우울해하겠지만, 자신과 파티를 생각해서 안느의 결정을 존중할 거고, 그렇게 되면 환인은 안느와 육체적인 결합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실리테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안느가 친구의 남자를 빼앗았다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괴로워하기 전, 이실리테도 설득을 통해 품에 안는다.
그 사이 두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숙성시킬 기회가 있으면 좋을 텐데…….
환인은 안느와 키스한 순간 흘러들어온 약간의 영기를 생각하며 입술을 매만졌다.
버드 키스만으로도 입술이 찌릿할 정도의 영기가 넘어왔다. 만약 그녀의 질에 삽입하며 영기를 본격적으로 흡수하면 어느 정도의 영기가 넘어올까.
‘그날이 영혼 구슬이 48개가 되는 날이겠지.’
제하=메샤를 죽인 다음날부터 환인은 하루에 5명씩 사흘간 15명을 안았다.
그러나 영혼 구슬은 단 하나도 늘어나지 않았다. 살구꽃 관을 찾았던 그 날 추측했던 것처럼 일반인의 영기로 영혼 구슬을 축적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직업자의 영기가 필요한지 아니면 이제부터 영혼 구슬을 쌓는데도 직업자의 영기가 필요한지는 테스트해봐야겠지만…….’
환인은 돌아온 이실리테가 준비해놓았는지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입으며 오늘 밤을 내심 기다렸다.
목욕으로 일과를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이실리테는 잠옷으로 갈아입으며 안느를 힐끔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녁을 먹을 때부터 세상이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우울해하는 것을 보면…….
‘욕탕에서 주인님한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건가?’
안느가 욕탕에서 주인님하고 마주친 건 알고 있다.
그야 장을 보고 돌아온 뒤에 안느가 욕실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옷가지를 챙겨서 빨래 바구니에 넣은 것은 자신이니까. 그 뒤 주인님도 욕탕에 들어가셨고.
그러게 빨리 씻으라니까, 미적거리니까 주인님이랑 욕실에서 마주치잖아.
주인님이 주신 용돈으로 산 고급 빗, 이걸로 머리카락을 빗으면 머리카락이 잘 안 끊어지고 윤이 반들반들 난다고 해서 산 빗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빗으며 쪼그려 앉은 안느의 뒷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주인님한테 알몸을 보여서 우울해하는 걸까? 아니면 고백했다가 주인님한테 차였을까?’
왠지 백곰이 풀 죽어서 쪼그려 앉아 있는 것 같아서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던 이실리테는 조심스럽게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혹시 주인님한테…… 안 좋은 말이라도 들었어?=
=…….=
말을 걸자 안느가 이실리테를 돌아보곤 훌쩍, 눈물을 글썽이면서 입술을 삐죽거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놀란 이실리테는 빗을 내려두고 안느의 옆에 다가가 물었다.
=주인님이 진짜 나쁜 말이라도 하셨어?=
그런 게 아니라면? 설마 진짜 고백했다가 차인 거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안느는 담요를 끌고 와서 머리 위에 뒤집어쓴다. 그리고는 잔뜩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슬아…… 미안해…….=
=……??=
=나…… 나도 도령을 좋아하게 되어버렸어……. 널 응원해서 도령하고 널 이어주려고 했는데…… 으으….=
……어, 그러니까 양심의 가책하고 죄책감 때문에 이러고 있다는 거네?
이실리테는 가슴 속에 한숨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하아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숨에 반응한 것처럼 움찔거리는 담요 뭉치를 보다가 머리 부분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뭐 언제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했어. 주인님이 좀 멋있어야지.=
=…….=
=이야기해줄래? 어쩌다가 주인님한테 반해버렸는지.=
일단 어떤 점에 반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자신은 주인님의 능력, 성격, 그리고 약간이지만 외모 때문이었다. 물론 아베트가 주인님 곁에 꼭 붙어있으라고 한 것도 이유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6급의 희소 직업자인 안느는? 돈도 많고 힘도 쎄고 교단을 움직일 수도 있는 배경을 가진 안느는 어떤 점에 반했을까.
=……도령은 날 여자로 봐주고 있어. 나한테는 나만의 매력이 있다고…….=
=어, 음. 나도 널 여자로 보고 있는데?=
=…….=
=미안, 농담이야. 인상 쓰지 마.=
후으, 습기 섞인 한숨을 작게 내쉰 안느는 가슴 속에 담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날 여자로 봐준 남자는 과거에 단 한 명도 없었어. 도령을 빼면 미래에도 없겠지……. 난…… 도령 앞에서만 여자일 수 있는 거야.=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를 이실리테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남자 친구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온갖 종족을 다 찾아다녔다는 이야기. 그리고 모든 종족에게 거부당했다는 이야기.
그에 좌절해 몇 년간 로맨스 관련 유흥 서적과 도색 서적에 빠져 폐인처럼 지냈던 이야기.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남자 여자 구분 없이 그저 사람인 안느로 십몇 년을 살아온 이야기…….
이실리테는 안느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안느의 외모에 대한 고민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진한 슬픔과 회한에 잠겨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반성했다. 자신은 안느를 그저 겉으로만 보고 있었구나, 하고.
이실리테는 곰처럼 웅크리고 있는 안느의 등을 살짝 안으면서 단단한 것 같기도 하고 폭신한 것 같기도 한 듬직한 어깨를 토닥였다.
=너도 참 바보같이 착하네. 나였다면 그냥 남자를 빼앗았을 텐데.=
=……응?=
=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 착해. 그야 전직 도적 두목인걸.=
이번에는 안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도적 두목? 입 다물고 얌전히 있으면 규중처녀 같은 이실리테가?
이어진 이실리테의 이야기는 안느에게도 가슴 먹먹해지는 이야기였다.
괴롭고 힘든 어린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용을 쓰다가 우연히 각성한 일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최하급 용병단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사선을 건너며 살아온 이야기, 자신의 이름을 딴 용병단을 만들었지만 가진 놈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모든 걸 잃고 도적단이 되어버린 이야기.
그리고 환인을 만나 그런 도적단도 잃었지만, 환인을 만나면서 구원받게 된 이야기…….
안느와 이실리테는 서로에게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고통의 종류는 다르지만 서로 과거에 벗어나기 힘든 삶의 굴레와 족쇄를 달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오다가 환인을 만나 구원받게 되었다는 점이 같았기 때문.
두 여자는 상대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안느도 이실리테도 그걸 잡고 상대방을 흔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더욱 깊게 이해하며 친밀감이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환인의 예상보다 더욱 깊게 말이다.
‘이제 준비가 되었나.’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듯 벽 너머로 두런두런 들려오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환인은 그녀들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한 최종 단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