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81화 (181/813)

〈 181화 〉 막간­유르파

* * *

=아이고오…….=

=아가씨이. 흑흑.=

=빌어먹을 크라버리 놈들 때문에… 죄 없는 아가씨가 어린나이에……!=

파르히스트의 1번 대로로 알려진 왕복 10차선 중앙 도로, 도시를 둥글게 가로지르는 중심 도로에는 수천 명의 운구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평범한 도시였다면 제아무리 성주 혈족의 사망사고라 해도 이제 20살이 채 안 된 호족의 죽음에 이만한 행렬을 만드는 건 다소 지나치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성주의 인망이 낮은 곳이라면 안 좋게 보는 시선까지 나왔을 정도.

그러나 파르히스트의 시민들은 생업조차 미루고 회백색의 옷을 입고 자의로 나와 선두의 운구차를 따라가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

현 성주 펜리=후스티오=파르히스트의 삼녀이자 파르히스트 빈민 출신의 아이돌이자 우상 같은 존재.

선량하고 상냥하며 온화한데다 도덕적이기까지 한 약관의 처녀는 7살 때부터 사는 게 어려웠거나 힘든 사람을 찾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요나가 처음 손길을 내밀게 된 이유는 비교적 흔했다.

부모님을 따라 도시를 방문한 유명 가극단의 가극을 보고 돌아오던 중 길가에 쓰러져있는 아이를 보고 어린아이 특유의 충동으로 구해준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냥 불쌍해서요…….=

하지만 그 충동의 결과는 요나에게 7살의 상식이라는 것을 깨부수는 기회가 되었다.

왜 저 사람들은 밥을 못 먹는 거지?

왜 저 사람들은 아픈데 치료를 못 받는 거지?

왜 저 사람들은 추운데 옷을 얇게 입는 거지?

왜 저 사람들은 공부를 안 하고 일만 하는 거지……?

요나는 호위와 수행원을 데리고 밝고 아름답고 예쁜 우리 도시라고 생각했던 파르히스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언제나 하얗게 예쁘기만 하던 도시가 마냥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퀴퀴하고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구석에서 다친 몸을 이끌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오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음식 쓰레기 산에서 먹을 것을 찾는 아이들.

일하고 싶지만 꾀죄죄한 몰골 탓에 어디에도 일을 구하지 못해 부랑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천성이 선하고 착하던 요나는 그 충격적인 광경에 모아둔 자기 용돈과 사랑하는 아빠, 엄마에게 받는 용돈을 모두 써서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삶을 바꾸고 싶지만 사소한 계기, 자그마한 도움이 없어 유리 천장을 뚫고 올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잡아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돈 많은 호족 자녀의 일탈로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록 그 행위가 이어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자 변화는 극적으로 이어졌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고는 싶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을 어떻게 돕냐…….’ 이런 생각에 지켜만 보던 사람들을 앞으로 나서게 했으며, ‘저렇게 어린아이도 애를 쓰는데 어른인 나는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에 비록 돈은 없지만, 몸으로 사람들을 돕기 시작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한 것.

다소 마음이 팍팍한 사람은 참 할 짓 없다며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작지만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요나를 돕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한 선행과 구호가 이어지고 호응까지 일어나니 성주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루먹고 노력과 의지도 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의외로 자그마한 도움을 줬더니 쓸만한 인력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력은 곧 돈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성주는 이미 큰 인망을 얻은 셋째 딸을 대외적인 마스코트로 내세워 집안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제하기 시작했다.

내민 도움의 손길은 별거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규모 밭의 개간과 축산 구역 형성 등으로 인력이 나름 필요한 시기였기에 도시 평균 최저 임금을 책정해 대규모 채용을 진행한 정도였다.

효과는 대단했다.

거렁뱅이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이 돈이 생기자 조금씩 사람처럼 살아가기 시작하는게 눈에 띌 정도였다.

성주는 지원에 좀 더 박차를 가했다. 모집 요강에 먹고살기 어려운 팍팍한 이들을 올렸으며 개간과 구역 형성을 통해 발생한 수익 일부를 떼어내슬럼화되어가는 구역의 청소와 미화를 진행했다.

그런 환경 미화 작업에도 빈민들을 고용하니 효과는 2배가 되었다.

빈민들은 버젓한 시민으로 변해갔고 꼴보기 싫던 도시의 슬럼도 점차 사라져갔다. 도시의 재정은 눈에 확 띌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탄탄한 기반이 형성되며 안정적으로 변모해갔다.

이 모든게 고작 7살 남짓하던 소녀가 만들어낸 선순환이었다.

그리고 이 선순환을 만들어낸 착한 소녀를 13년간 보아왔던 시민들에게, 특히 빈민가 출신들에게 여신이나 다름없는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불협화음과 불안의 씨앗이 널리 퍼져가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흠모하고 존경하던 아가씨의 죽음에 슬퍼하고 애도하며 자진해서 운구 행렬에 참여했다.

분노하는건 분노하는 것이고 당장은 죽은 아가씨를 위해 애도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운구 행렬이 중앙 도로를 1/5정도 돌았을 때 그 숫자는 물경 5천 명에 육박했으며 줄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늘어갔다.

마녀의 비행 빗자루를 탄 유르파가 도착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라니?=

카턴 마을의 기반을 모두 정리하고 그이를 쫓아 파르히스트로 돌아온 유르파는 뜬금없는 운구 행렬과 마주하곤 살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행렬이 길기도 하다. 성주가 죽기라도 했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하얀 마녀 모자를 푹 뒤집어쓴 유르파는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옆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들었고, 어이가 없어서 백색에서 아주 약간 회색으로 변해가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요나라면 성주 일족의 착한 아가씨잖아. 그런데 그 아가씨가 죽었다고? 미궁에서? 어쩌다가?

유르파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요나 정도 되는 아가씨라면 5급, 6급 호위가 언제나 지키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던 것.

‘뭐,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내 님은 어디에 계실까~.

요나의 사망보다 환인을 찾는 게 더 중요한 유르파였다.

비록 아는 거라곤 님의 외모뿐이었지만, 그런 외모가 이 세상에 드문 편이라는 걸 잘 아는 유르파는 그를 찾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플뢰 종족처럼 체모가 적은 종족.거기다 남자다운 잘생긴 외모.

키는 대충 180 중반? 검은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썹과 검은색 눈동자. 그리고 동그란 귀에 나이는 대략 20대 중반.

이 정도 단서만 있으면 추적자 클랜이나 엽사 조합에 의뢰해 하루 이틀이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장담하는 유르파였다.

=사랑하는 자기, 유르파가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이제 완연히 회색을 띠고 있는 머리카락을 하얀 마녀 모자로 감춘 유르파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남부 파르히스트의 아는 언니 가게로 향했다.

샤라난 그 언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남자가 바람피우다 걸려서 이혼했다곤 들었는데…… 언니라면 잘 지내고 있겠지. 근황도 들을 겸 며칠만 좀 신세 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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