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176 성도 파르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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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과 1마리가 먹는 것 치고는 성대한 저녁 만찬을 먹은 환인은 아루루를 돌려보낸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구름에 달이 가려져 세상이 까맣게 변했을 때, 일행을 데리고 도시를 가로질러 남쪽 출입문으로 향했다.
약속한 장소에 있던 3급 엽사 아우라의 얼룩 고양이 귀 여자, 갈롯의 조수가 환인을 향해 손을 흔든다.
=어, 여기예요~! 네네, 확인차 질문할게요. 의뢰인 이름과 수주인 이름, 의뢰 내용을 말씀해주세요.=
“의뢰인 환인, 의뢰 수주인 갈롯. 추방자 제하 메샤의 추적 의뢰를 넣었습니다.”
=확인했어요. 여기 계약서 보시고 사인해주세요.=
며칠 전에 갈롯과 한 계약서와 한치도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싸인한 환인은 자신을 너드라라고 소개한 엽사 여자의 뒤를 쫓아 성문을 나섰다.
나서기 전에 간단한 검문이 있었는데, 엽사 조합증과 함께 추방자 추적이라고 목적을 밝히자 어려움 없이 통과되었다.
도시를 나오자 불빛도 사라지고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졌지만, 이실리테와 안느는 물론 비상도 큰 어려움 없이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밤눈이 인간보다 비상하게 밝은 건가.’
그렇게 도시에서 한참을 멀어진 너드라는 밭을 가로질러 저 멀리 키 큰 나무들로 숲이 형성된 곳을 향해 이동하며 입을 열었다.
=고객님들 말고도 제하 메샤를 추적하는 사람이 몇몇 더 있어요. 요 며칠 분위기가 좀 불온하던데 어쩌면 낮 사이에 목표물이 죽었을 가능성도 있을 거예요.=
“적이 많았나 봅니다.”
=네. 누가 밤까마귀 조인족 아니랄까 봐 반짝이는 걸 엄청나게 좋아했거든요. 그거 때문에 마찰도 많이 빚었고 근위대 안에서도 몇 번 경고하고 징계도 받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 주제에 머리는 나쁘고 또 힘은 세서…… 원한을 많이 샀죠.=
=아니 근위 무사씩이나 되면서 그렇게 속물적이란 거야?=
=종족 특징이니까요. 그래서 이전에 저질렀던 일까지 전부 불거져서 추방당한 거죠.=
=…….=
안느는 이해가 안 되는지 연신 얼굴을 불편하게 찡그렸다.
그렇게 안느가 입을 다물자 이실리테가 묻는다.
=6급 조인족이면 작심하고 싸운다 했을 때 상대하기 엄청 까다롭겠네요.=
=그쵸. 불리하면 날아서 도망가버려도 되고 하늘에서 공격해도 되고 6급이라 몸도 엄청 딴딴하니 육탄돌격 최적화기도 하고. 그런데 여러분들은 뭐 때문에 그 망종을 추적하시는 거예요?=
“그쪽 때문에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빚을 졌으니 갚아야지요.”
=아. 그건 꼭 갚아야죠.”
그러고는 안느를 힐끔 돌아본다. 제하=메샤와 같은 급인 6급이라 안느가 싸우겠다고 생각하는 눈치.
환인은 그런 너드라의 눈이 고양이처럼 번쩍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여자들의 밤눈이 밝은 것을 이해했다.
반사 세포 때문이겠지. 고양이과인 너드라만큼은 아니지만 이실리테도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고.
너드라가 경고한다.
=조심하셔야 할 거에요. 조인족은 원한을 잘 잊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이번에 놓치면 밤에 잠자리가 되게 불편해질걸요.=
“놓아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이동하던 일행은 숲 초입에서부터 좀 더 조용히 이동을 시작했다.
두께가 5m나 되는 굵고 긴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당연히도 바깥보다 더욱 어두웠다.
이실리테와 안느의 눈도 이전보다 절반 정도밖에 밝지 않았고, 숲 밑바닥은 마치 어둠이 안개처럼 깔려 음침함까지 느껴진다.
혹시라도 장비에 빛이 반사될까, 무기에는 천을 감쌌고 이실리테와 안느는 후드 로브까지 뒤집어썼다.
그렇게 나무 사이사이 땅 위로 올라온 커다란 뿌리를 넘어 이동하던 너드라는 옆에서 움직이고 있는 환인을 보며 눈에 이채를 발했다.
=환인 님은 은밀 행동 기술을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이상합니까.”
=아뇨아뇨. 그 반대에요. 은밀 행동이 꼭 푸른 표범처럼 아름다워서요. 저도 꼭 배우고 싶어질 정도라서.=
“푸른 표범에게 배웠습니다.”
=아하하하.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요?=
농담인 줄 알고 웃었던 너드라는 정색했다. 아니, 동물의 움직임을 보고 배운다고? 루크랑도 아니면서? 그게 가능해?
푸른 표범 영혼의 강령을 통해 배웠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환인이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너드라는 =나도 숲으로 들어가야 하나…….= 중얼거리다가 저 앞을 가리켰다.
=저기예요.=
너드라가 가리킨 곳은 비트, 잠적호처럼 땅을 파고 그 위를 풀과 이파리 등으로 위장한 곳이었다.
환인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영혼 시야에 연녹색의 사람 그림자가 얼핏 보였기 때문.
환인 일행을 발견했는지 위장막을 바로 걷어내더니 안에서 위장복을 입은 갈롯이 뛰쳐나왔다.
=오셨네요. 바로 가죠.=
풀과 흙냄새가 물씬 나는 게 저 안에서 꽤 오랫동안 있었던 듯 하다.
갈롯은 환인의 옆에서 걸으며 짧게 상황을 브리핑한다.
=10분 전쯤에 일단의 무리가 제하 메샤를 향해 이동했어요. 작은 소음이 들렸었는데 그들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제하 메샤가 이겼다는 거겠죠.=
“용감하군요. 추방당했으면서도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것도 그렇고.”
=사실 성주님이 추방한 이유가 그거 때문이에요. 너같이 더러운 년은 내 손으로 치는 것도 싫으니 나가서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한테 평생 추적당하다 죽어라! 이거죠.=
“…….”
=제하 메샤도 그걸 알고 있어서 이 숲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예요.=
설명을 듣던 이실리테가 잘 이해가 안 간다며 묻는다.
=제하 메샤는 조인 족이잖아요. 날아서 도망가면 안 되나요?=
=그년은 수납형 날개 보유자예요.=
=아.=
수납형이 뭐 어떻다는 건가. 날개를 몸 안에 넣고 빼는 쪽은 비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건가?
그런 추측이 맞는다는 듯이 갈롯의 말에 안느가 이실리테에게 설명해준다
=하늘을 날아가면 추적자들이 우르르 몰릴 테고 얼마 날지 못하고 내려오면 그땐 포위된 채 싸워야 할 테니까. 이렇게 크고 높은 나무의 숲이 있으면 그년 실력에 좀 오래 버틸 수 있겠지.=
=맞아요. 그렇게 지내며 찾아오는 추적자를 죽이면서 자신의 유명세를 높이는 거죠.=
=파르히스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많으니까.=
=그 유명세를 들은 새 고용주가 찾아올 때까지 말이에요. 하지만 환인 님과 동료 분들이 오셨으니 그건 어렵겠죠.=
=뭐 그런거지. 저쪽도 우리한테 원한을 불태우고 있을거고 우리도 놓아줄 생각 없고.=
안느의 중얼거림에 갈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앞을 가리켰다.
=아, 다 왔네요. 피 냄새가 나요. 저기 저 앞의 나무 사이를 지나가시면 보일 거예요.=
갈롯과 너드라는 더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나무 뒤쪽에 숨으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시길 짐승신께 기도할게요.=
“고맙습니다. 남은 함정 훈련은 내일부터 조합에서 받기로 하죠.”
=아하하. 그 자신감 멋있네요. 네, 내일 봐요.=
인사를 마친 갈롯과 너드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잽싸게 돌아가 버렸다.
환인은 갈롯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제하=메샤가 있다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이야기했다.
“제하 메샤의 상대는 나 혼자 하지.”
=네.=
=응. 그래도 위험할 거 같으면 나설 거야.=
안느의 걱정에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저 멀리, 대략 60m 거리에서 인간으로 보이는 연녹색 빛이 땅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홀로 서 있는 걸 보면 저게 제하=메샤겠지.
머리 부분으로 생각되는 것이 이쪽을 향한다. 밤까마귀 조인족이랬나. 밤눈도 무척 밝은가 보군.
제하=메샤라고 확신한 환인은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며 걸음을 계속 옮겼지만, 상대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을 뿐 기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환인은 허리춤에 매어둔 1세제곱미터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빛 막대를 꺼내들었다.
‘아공간 주머니가 있으니 편하긴 하군.’
3*3*3m와 2*2*2m 아공간 가방, 주머니는 이실리테에게 주고 1세제곱미터 주머니만 챙겼는 데 굉장히 유용하다.
공간의 양을 체계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편의상 가로세로와 높이를 쓰지, 실제는 주머니처럼 형태가 변한다.
즉 1*1*1m 주머니라 하더라도 2m짜리 창을 안에 넣어둘 수도 있다는 뜻.
공간 술법의 상호 충돌 현상 때문에 공간 주머니 안에 다른 공간 주머니를 못 넣지만, 그 정도 단점은 단점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수준이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이실리테와 안느, 비상을 대기시켜놓은 환인은 빛 막대를 켰다.
화악
눈부시지 않은 회색 빛이 퍼져나가며 40m 가까이 주변이 밝아진다. 그사이 좁아진 거리 탓에 여자가 광원 안으로 들어왔다.
녹색 머리카락과 녹색 깃털 귀. 허리가 아니라 등에 난 녹색 날개.
제하=메샤다.
그동안 숲에서 아무것도 없이 노숙 생활했는지 허름한 회색 셔츠와 회색 바지가 꼬질꼬질하다. 게다가 묻은 지 얼마 안 되는듯한 피까지.
환인은 그런 정보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제하=메샤의 등에 붙어있는 사람 크기만 한 날개 한 쌍을 바라보았다.
회의실에는 안 보이던 날개다. 수납하고 있던 날개를 꺼낸 걸 보면 조금 전투가 어려웠던 건가.
저만한 질량을 어떻게 몸 안에 넣어두는지 궁금해졌지만, 의문은 접어두고 계속 제하=메샤에게 다가간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 사이에서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자신을 주시하는 제하=메샤가 무료한 듯이 입을 열었다.
=너희도 내 목숨을 노리고 왔나?=
환인은 대답 없이 후드 망토의 후드를 젖혔다. 그러자 날카로운 느낌의 미녀 얼굴이 표독하게 변했다.
=너. 그렇지 않아도 너만큼은 죽이고 싶었는데, 알아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군. 그럼 저것들은…….=
멀리 떨어진 이실리테와 안느를 본 제하=메샤는 다시 환인에게 시선을 주며 살기를 일으켰다.
이만한 거리면 저것들이 달려오기전에 찢어죽일 수 있다.
보아하니 좀 자신감이 있나본데,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지를 잘라 죽여주지.
“멍청한 년. 실수를 뉘우치고 반성할 줄 아는 성격이었다면 오늘 죽지는 않았을텐데.”
=죽는건 너다.=
제하=메샤의 살기어린 선언을 무시한 환인은 빛 막대를 던져 광원을 만들어놓는다.
이어 아공간 주머니에서 흑창을 꺼낸 환인은 동시에 어젯 밤, 도축장에서 챙긴 스테고사우루스를 닮은 짐승의 영혼을 몸에 강령했다.
후욱, 심장에서 열기가 번져가며 단단한 힘과 체력이 몸에 깃드는게 느껴진다.
제하=메샤는 창을 꺼내들더니 심호흡하는 환인을 보고 도끼눈으로 하 코웃음 치고는 검을 뽑았다.
환인은 가볍게 이죽였다.
“그때 차고 있던 마도기가 아니군. 옷차림도 추레하고…… 재산 전부를 몰수당한 건가.”
=죽어.=
말도 나누기 싫었는지 제하=메샤는 녹색 날개를 활짝 펼쳐 번개같이 환인을 향해 쇄도했다. 그와 동시에 환인의 집중력도 극한까지 발휘되며 그의 사고 시간이 평소의 10배로 빨라진다.
‘날갯짓 소리가 없다. 무게가 가볍나?’
수납 식이라면 몸의 피와 살을 밖으로 꺼내 날개로 변형시키는 걸지도.
몸무게가 70~80kg 남짓하다면 충격량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힘과 체력 특화 영혼을 강령하기까지 했으니 버틸 수 있을 거다.
느릿하게 날아오는 제하=메샤를 똑바로 응시하는 환인의 눈에 제하=메샤의 잔영 수십 개가 각종 공격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환인의 눈이 그런 희미한 그림자 하나하나를 자세히 파악하며 세 가지 빈틈을 발견한다.
그순간 제하=메샤의 검 끝에 은은한 녹색 기운이 맺혔고 빈틈이 모두 사라졌다.
‘이래서 6급이라는 건가.’
환인은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창극이 땅으로 향하게끔 자연스럽게 내렸다.
이 한 가지 자세에서 17가지로 파생되는 공격이 가능하다. 직후 몇 미터 앞까지 도달한 제하=메샤의 잔영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환인이 일부러 내비친 빈틈 하나를 찌르기 위해 동작이 제한되었고, 그 결과 잔영의 가짓수가 대폭 줄어든 것.
남은 것은 환인의 반격을 대비해 후퇴를 염두에 둔 4종의 잔영뿐이다.
환인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안느와 다르게 맞서 싸울 재미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식하고 단순한 돌격이라 흥미가 사라진 것이다.
‘저주.’
제하=메샤가 날아오는 궤적과 겹치도록 정령으로 최하급 저주를 뿌린다.
저주에 당한 제하=메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고, 비행 속도도 처음보다 20%가량 줄었다. 움직임 또한 굳으며 후퇴를 대비하던 4종의 잔영이 사라진다.
환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살짝 숙이며 제하=메샤가 머리 위를 지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제하=메샤의 신형이 바로 머리 위를 지나치려하는 그 순간. 흑창을 제하=메샤의 배꼽에 찔렀다.
푹 뚜드득, 추왁—!
배에 흑창을 꽂은 채로 지나가 버린 제하=메샤.
흑창의 날에 내장이, 골반의 엉치뼈와 두덩뼈가 갈라지는 느낌과 함께 정신 집중이 해제되며 세상이 원래 속도로 흘러간다.
이어 제하=메샤의 가랑이가 음부를 중심선으로 좌우로 쩍 갈라지며 토막 난 내장과 반으로 베어진 자궁, 질이 피와 똥오줌과 함께 추확 소리를 내며 쏟아져나왔다.
쿵, 터덕, 좌자자작…….
=끄— 아아아아악~!!=
슬라이딩하듯 땅에 10m 정도 미끄러진 제하=메샤는 갈라진 사타구니로 내장을 꼬리처럼 길게 늘어트린 채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경기를 일으키듯 허우적거릴 때마다 내장과 정체 모를 투명한 액체가 피에 섞여 흘러나오고 내장도 꾸역꾸역 밀려난다.
경기를 일으키는 정령의 저주가 죽음을 재촉하는 발버둥을 계속 치게 만든다.
=너……!! 법사… 아닌……!=
생기가 빠져나가는 두 눈으로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제하=메샤의 모습에 근처까지 다가온 환인은 말없이 그녀의 턱 밑을 흑창으로 찔렀다.
투둑 가벼운 저항과 함께 녹색 머리카락의 정수리로 흑창의 날이 삐죽 솟아나고, 녹색 눈동자가 눈꺼풀 위로 사라진 제하=메샤의 경련이 멈추었다.
10일에 걸쳐 이어졌던 파르히스트 사태가 환인의 마음속에서 완벽하게 정리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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