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175 성도 파르히스트
* * *
방으로 돌아온 이실리테는 뜬금없는 6급 새 사냥이라는 말에 의아함을 드러내면서도 숙소를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짐이야 언제든 신전의 숙소를 나갈 수 있도록 정리해놓고 있었기에 준비는 금방 끝났다.
중요한 것은 새 사냥 준비.
무려 6급의 새를 사냥하는 일이다. 얼마나 강한 괴물일지 이실리테는 짐작이 가지 않아 짐가방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생각에 잠겨 들었다.
우르거보다 등급이 높으니 힘은 더 세겠지? 하늘도 날 테니까 위험하기도 할 테고……. 밧줄도 준비해야 하나? 밧줄 사놓은 건 있지만 6급의 힘을 버틸만한 건 없을 텐데.
‘주인님에게 필요한 건 잠깐의 틈일 테니까 그걸 만들어줄 정도면……. 마수 힘줄을 꼬아서 만든 밧줄이면 될까?’
마수 소재 도구 상점이 북부 9번 상점가에 있다고 아루루한테 들었는데 한번 가봐야겠네.
으음, 미간을 살짝 찡그린 이실리테는 침대에 앉아 자이언트 워 해머의 머리 부분을 닦고 있는 안느에게 물었다.
=안느. 비행 괴수의 날개를 잠시라도 묶으려면 밧줄 강도가 마수 힘줄 정도면 되겠지?=
=……밧줄을 걸어서 잡아당기기보단 네가 대검으로 내려치는 게 더 효과적일걸?=
=아.=
=그리고 비행형 괴물들은 보통 날개 힘으로 잘 날지 않아. 비상이만 봐도 바람의 힘으로 날아다니는데 6급이면 날개라기보단 흉기로 더 자주 쓰일 거야, 아마.=
안느의 설명에 이실리테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6급이면 크기도 클 테니까 날개는 더 크겠지. 차라리 때려서 잘 날지 못하게 만드는 게 좋겠다.
비상이와 대련 경험, 카턴 마을에서 조인족 루아르다와 대결해본 경험을 떠올린 이실리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님이 사주신 3*3*3m 사이즈 아공간 가방에 짐을 마저 꾸렸다.
안느는 그러는 이실리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얌전하게 무릎을 꿇은 이실리테의 뒷모습.
올려묶어 흔들리는 꽁지 머리와 하얀색 블라우스, 그리고 끝단이 찰랑이듯 움직이는 하이웨스트 스커트를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안느는 환인 앞에서 실수하지 말라고 이실리테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령이 잡으려고 하는 건 6급의 괴물이 아니라 제하 메샤 그 양아치 년을 말하는 거야.=
=……!=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운듯한 이실리테의 귀여운 표정에 안느가 뒤에서 와락 안으며 킥킥 웃는다.
=너 도령이 진짜 새 잡으러 가는 줄 알았어?=
=으응……. 그, 그런데 그 여자는 추방당했다고 했잖아. 한참 전에 쫓겨났을 텐데 어떻게 찾으시려는 거지?=
“갈롯 씨를 통해 엽사 조합에 추적을 의뢰했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동시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방 입구에는 환인이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담배를 물면 어울릴듯한 복장의 법사 차림으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다녀.=
안느의 투정에 환인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가서 앉는다.
요즘 환인은 감옥 미궁에서 은신으로 숨어있던 사람을 본 뒤부터 삼림형 미궁에서 푸른 표범 영혼을 강령하고 얻은 은밀 행동을 연마하고 있었다.
혹시 이렇게 연마하다 보면 자신의 영혼 화살, 영혼 폭발 같은 일종의 기술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
그전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이 바뀐 데는 이유가 있었다.
중핵을 잡은 뒤 이실리테의 중철 대검이 마도기화 한 것도 있고 허공에 뿌리면 불을 뿜는 종이 같은 마도기도 있고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기는 기술이나 맨손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기술도 있는데, 은밀 기술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이실리테를 놓아준 안느는 환인이 앉아있는 의자 맞은편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언제 그런 의뢰를 했대?=
“찾고 싶은 인간이 있어서 갈롯 씨에게 물어보았더니 엽사 조합은 추적 의뢰도 받는다더군. 그때 넣으면서 제하 메샤의 추적 의뢰도 같이 넣었다.”
=……분명 그 갈롯이라는 엽사는 여기 숙소에 들어온 뒤부터 왔었지? 그땐 제하 메샤가 제명 추방당하기 전이었는데…… 설마 그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바로 처형당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예측했을 뿐이다.”
=처형?=
“크라버리와 작당해서 성주의 명예를 실추시킨 인간이다. 스파이 혐의로 처형할 거로 생각했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더군.”
처형하지 않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제하=메샤는 크라버리와 정말 별거 아닌 인연이었다는 것.
“멍청하게도 선택지를 잘못 고른데다 판단 또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는 거지.”
=아, 그래서 그냥 도시에서 내친 거구나.=
“십중팔구는 그렇겠지. 그래서 갈롯 씨에게 제하 메샤의 추적을 의뢰한 거다.”
환인의 대답에 안느의 뺨이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도령은 괴물인가? 무슨 행동 하나를 하는데 저렇게 생각하고 예측하는 거지?
혹시 미궁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걸 전부 예상하고 있었던거 아냐?
안느는 진지하게 환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저 머릿속에 작은 도령 수십 명이 막 서로 토론하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실리테. 아루루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니 준비 끝나면 바로 말하도록.”
=네. 금방 마무리돼요.=
안느의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환인이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주황색 위상석을 어떻게 쓸지 고민에 잠겼다.
환인은 성물방을 관리하는 수석 신관에게 주황색 위상석에 관해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알아보니 주황색 원기 회복 관련 위상석은 그다지 인기가 없는 편에 속했다.
물론 재산에 여유가 있는 모험가들은 활력도 중요하게 여기기에 크고 작은 원기 회복 마도구나 마도기를 하나씩 들고 다닌다.
중요하다지만 2급이나 3급 정도 되는 위상석이면 효과는 충분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얻은 6급처럼 거대한 위상석까지는 필요 없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었던 것.
하지만 환인에게는 무엇보다 유용한 물건이다.
이번에 얻은 주황색 위상석은 무려 6급이다. 그러다 보니 회복량이 3급과 비교가 안 된다. 즉…….
‘이게 있다면 원기 방출을 통해 동료들의 원기를 보충해줄 수 있다는 것.’
그전에 위상류를 빨리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알고 봤더니 위상류가 위상석의 효과를 저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위상류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면 이 6급 위상석을 스태프나 오브 스틱으로 가공해서 들고 다니면 크게 유용할 것이다.
아니면 가공해서 마도구 천칭에 장식해도 되고.
‘공격 술법을 빨리 알아봐야 할 텐데.’
숙소에 들어온 이후 밤마다 안느를 방에 불러 성술을 받았지만, 위상류가 자극받는 일은 이후로도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안느를 통해 위상력을 조절한 주먹질을 맞아봤지만, 그것도 수행에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육체적 고통이 위상류의 감지를 방해하는 것이다.
결국 피해를 거의 주지 못하는 약한 공격 술법, 예를 들면 길레스=벡슬이 던졌던 화염 부적 같은 게 필요한데…….
=주인님.=
“음. 그럼 갈까.”
아공간 가방을 등에 메고 있는 이실리테를 보며 환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루루가 이번에 안내한 곳은 목조와 석조를 반반씩 섞어놓은 펜션 느낌의 1층 주택이었다.
방 3개와 생활에 필요한 공간이 모두 마련된 곳으로, 듣자 하니 신혼 부부가 쓰려고 만들었다가 사정상 매물로 내놓은 곳을 소장원으로 사들였다고.
구조는 이전에 머물렀던 소장원과 비슷했는데 욕실은 2배는 더 컸고 정원도 3배는 더 넓어 대련과 훈련도 마음 놓고 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환인의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근처에 식자재 종합 유통상점도 있어 장보기도 편할 테니…….
=대축제가 가까워지면서 외부의 방문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이 집도 얼마 안 가 대여될 가능성이 크답니다.=
어제도 2명이 와서 보고 갔다는 복덕방 여사장의 이야기에 내부를 꼼꼼히 살펴본 환인은 고개를 끄덕여 계약 의사를 내비쳤다.
=10일 선불 결제하시면 5% 할인도 해드려요. 30일 결제하시면 10% 할인이고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마침 30일은 머무를 생각이었기에 환인은 망설이지 않고 30일 대여를 선택했다.
계약을 마친 복덕방 사장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던 이실리테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긴 꽤 좋은 곳 같은데 왜 10%나 할인해주는 걸까요?=
“여행객들이 선호하지 않을 테니까.”
=……?=
=여기 가격은 방 세 개 호텔하고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호텔은 여러 가지 부가 무료 서비스를 해주는데 여긴 그런 게 없으니까요.=
아루루가 말한 그대로였다.
파르히스트까지 여행와서 하루 숙박에 2은화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좀 더 편히 지낼 수 있고 교통이나 유흥이 편한 번화가를 선택할 것이다.
어찌어찌 2은화를 겨우 낼 수 있을 재력의 사람이라면 하녀나 노예를 둘 정도는 아닐 텐데, 그러면 식사에서부터 목욕 준비까지 전부 자기가 해야 한다.
놀러 온 곳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다.
=장기 체류하는 사람도 얼마 없을 테고 집을 비워둘 시간에 차라리 할인을 줘서라도 손님을 붙잡는 게 더 이득이니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예요. 10% 할인하면 호텔보다 아주 약간 싼 수준이거든요.=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인 이실리테는 수건과 걸레를 가져와 집안에 살짝 쌓인 먼지를 쓸고 닦고 청소하기 시작한다.
=이슬이 언니, 저도 도와드릴게요!=
=나도 도와줄게.=
=고마워. 앗! 주인님은 편히 쉬세요. 저희끼리 할게요.=
“음.”
다가오려는 환인의 등을 살짝 밀어서 정원으로 내보낸 이실리테에게 안느의 투정이 쏟아졌다.
=와, 도령은 쉬라고 하고 난 일 시키고…… 이슬이 너 차별 너무하는 거 아냐?=
=넌 친구잖아. 그리고 주인님한테 일 시키는 하녀가 어딨어.=
=…….=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가 좀 찜찜한 안느였다.
이슬이랑 친구먹었으니까 그럼 나도 도령한테 하녀 비슷한 포지션이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이실리테가 청소 끝나면 맛있는 거 해주겠다는 이야기에 안느는 언제 얼굴을 찡그렸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이실리테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