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78화 (178/813)

〈 178화 〉 174 성도 파르히스트

* * *

요 2주간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지만, 파르히스트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길레스=벡슬 감옥 미궁 소동은 몇 가지 발표와 장례 행사로 흐지부지 묻혀갔다.

아마도 크라버리의 사절과 입을 맞춘 거겠지.

일단 파르히스트 성주의 삼녀 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의 사망은 ‘대외적으로’ 미궁 성장으로 인한 이유 불명의 중핵 이탈 사건과 맞물려 벌어진 불행한 ‘사고’로 공표되었다.

이어서 길레스=벡슬의 파르히스트 방문은 그저 한달 뒤에 있을 대축제를 즐기기 위한 방문이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지만…….

=그걸 누가 믿어.=

=빌어먹을 크라버리 자식들. 우리가 잘나가니까 아주 배알이 꼴려서는.=

=불쌍한 우리 요나님 어떻게 해…….=

=성주님이 지금 제일 억장이 무너지고 계실텐데…….=

사람들은 겉으로는 믿는 척, 속으로는 크라버리를 향한 불만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었다.

이미 불신이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 것이다.

‘이런 불만과 분노가 지역 갈등의 시초가 되는 거지.’

환인은 땅신 교단의 사제, 신관 숙소 옥상 선베드에 누워 밑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 사건으로 크라버리를 향한 불신이 깊게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불만을 품고 있을 뿐이지만, 비슷한 일이 더 벌어지거나 크라버리에서 문제 될만한 행동을 저지른다면 감정의 골은 더더욱 깊어져 종래에는 전화戰火로 불타오르겠지.

아무튼, 시민들의 속내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파르히스트 행정부에서는 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의 장례 일정을 빠르게 발표했다.

시민들의 관심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자꾸만 길레스=벡슬과 크라버리에 집중할수록 성주의 실태가 조명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파르히스트 성주의 검이라고 알려진 근위 무사단은 총 30명.

그중 9명이나 타 도시 성주,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호족과 이른바 밀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파르히스트 성주로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셈이다. 더불어 체면과 위엄에 손상을 입었을 테고.

이런 와중에 시민들이 크라버리를 향해 분노를 불태우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식으로 성주의 실태가 까발려지면 이래저래 문제가 된다.

아무튼, 장례 일정이 발표되자 크라버리의 만행에 분노하던 시민들은 미궁에서 사고를 당한 삼녀의 장례를 어떻게 치르겠다는 것인지 궁금증을 품었다.

장례라는 것은 죽은자의 시신을 땅으로 돌려보내는 예식이다. 미궁에서 사고를 당했다면 시체도 찾지 못했을 텐데?

시민들은 본성 앞 중심가의 천년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행정부는 광장을 채운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그런 의문을 말끔히 해소해주었다.

‘정의로운 마음’을 지닌 모험가들이 미궁의 성장이라는 위험 속에서 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의 시신을 수습해온 덕분에 무사히 땅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며, 수천 송이 꽃으로 채워진 관에 예장한 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의 시신을 공개한 것.

그리고 그 정의로운 마음을 지닌 모험가는 다름 아닌 땅신 교단의 관련자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사람들은 과연 미궁의 수호자라고 알려진 땅신 교단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길 망설이지 않았으며, 시민들의 의식은 단번에 크라버리를 향한 분노에서 정체불명의 ‘정의로운 마음씨’를 지닌 모험가로 향했다.

알려진 것은 땅신 교단과 관련되어있는 모험가라는 사실 하나뿐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신전을 방문해서 물어보면 되니까.

사람들은 즉시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땅신 교단의 신전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일부는 직접 신전을 방문해 헌금을 내면서 은근슬쩍 정의로운 마음씨의 모험가에 관해서 물었지만.

=당사자들께서는 그저 어린아이들이 희생당한 것이 안타까워 행했을 뿐이라며 공개를 극구 사양하셨기에……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사제와 신관들은 그러한 질문을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환인 일행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덕분에 땅신 교단의 신전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이길 반복하며 평소보다 인구 밀도가 3배가량 늘어난 상태.

환인이 옥상에서 선베드에 누워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모인 사람들이 알아서 정보를 날라다 주고 있었던 거다.

땅신 교단 신전의 숙소는 1~3층이 대다수인 파르히스트에서 드물게 5층 높이.

이곳 옥상에 누워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기에 환인은 시간만 나면 옥상으로 올라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우리 가게 고용주는 진짜 너무한다니까.=

=왜? 또 무슨 일 있어?=

=아니이. 내일 요나 님의 장례 행사가 있잖아. 거기 참가하고 싶은데 내가 빠지면 일이 안 돌아간다면서 애걸복걸하는데 어휴…….=

=킥킥킥. 그러길래 적당히 잘해야지. 너무 잘하면 너만 피곤해진다니까.=

=그래도 열심히 한 만큼 급료는 주신다고.=

‘내일이 장례식인가.’

아래에서 얼굴 모를 여자들이 나누는 대화에 환인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보이는 파르히스트 성으로 시선을 주었다.

성에도 어느 정도 여론 조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환인에게는 어딘가 어설픔이 느껴지는 수준이다. 주민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의도가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시민들이 의도적으로 크라버리에 불신하도록 유도한다기보단 정말 크라버리와 관련된 소문을 종식하려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라면…….

‘아니, 생각해봤자 무의미하지.’

괜한 일로 신경을 쓰기보단 선베드에 누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따스한 햇볕을 즐긴다.

고층 빌딩이 없다 보니 시야 가득 푸른 하늘과 양떼구름만 보인다.

도심 속의 망중한을 즐기는 기분. 지난 2주간 사람들과 부대끼고 치이며 깎여나가던 인내심과 쌓이던 짜증이 점차 회복되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저, 형제님…….=

그때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쪽에서 들려온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준 환인은 잘 다려진 호박색의 신관복을 입은, 이마와 머리의 경계선에 유니콘의 뿔 같은 게 난 여성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숙소에 머무르는 자신들을 위해 이리저리 잔심부름 등을 해주는 신관 아가씨다.

“엘메스 님.”

=저어기…… 신전장님께서 찾으……셔요.=

“아, 말씀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즉시 내려가 보겠습니다.”

=네, 네엣!=

선베드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화들짝 놀란 엘메스가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

왜 매번 다가가려 하면 도망가는 걸까.

멀리서는 그나마 대화를 나누지만, 지금처럼 가까이 다하려 하거나 하면 겁많은 고양이처럼 여지없이 도망가버리는 게 조금 신경 쓰이는 환인이었다.

자신이 뭔가 실례되는 행동을 했다면 이해하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숫기가 없어 소통 장애가 있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실리테와 안느 두 사람하고는 곧잘 웃고 떠들면서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고 보니….

‘이실리테가 엘메스 신관의 뿔은 유니콘의 뿔이라고 했었지.’

정말로 그 유니콘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건가? 그렇다면 엘메스 신관이 자길 피하는 이유는…….

엘메스 신관의 눈에 자신은 수백 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한 엄청난 오물 덩어리로 보여서겠지.

‘어째서 엘메스 신관이 결혼하지 못하는 신관이 된건지 이해가 가는군.’

동정남을 찾기란 이 세상에서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을 거다.

환인은 피식 웃으며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외부인은 출입하지 못하는 통로를 통해 신전의 후면으로 들어온 환인은 신전 안쪽 신자석과 트랜셉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신전장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들려오는 소리 중 태반은 정의로운 모험가를 궁금해하는 목소리다.

높은 담벼락과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통로 덕에 아직 ‘정의로운 마음씨’를 가진 모험가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대로 계속 머문다면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슬슬 사태도 일단락되었고 분위기도 다시 대축제 쪽으로 쏠리는 것 같으니…….

‘안느와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군.’

생각을 정리하며 신전장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환인은 문을 두드리려다 문이 스스로 열리는 모습에 멈칫했다.

열린 문 너머에는 안느가 서 있었다. 안느도 문 앞에 선 환인을 보곤 멈칫했다가 웃으며 비켜선다.

=마침 부르러 가려 했는데 알아서 찾아왔네. 들어와.=

“음.”

안느가 비켜주는 곳으로 들어가자 석회색의 돌로 만들어진 삭막한 집무실이 환인을 반겼다.

책장 두 개, 응접용 테이블과 소파, 그리고 집무를 위한 책상뿐인 건조한 풍경 속에서 곱게 늙은 여성이 살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오세요, 환인 님.=

“절 찾으셨다고요.”

뿔은 없지만, 눈동자가 염소처럼 가로로 찢어진 금발의 인양족 신전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한다.

=네. 두 가지 용무가 생겼거든요. 우선 하얀 성의 총집사님이 이야기했던 성주님의 성의와 친필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저것입니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고급스러운 보석 상자를 보며 묻자 신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 방에는 아클라멘토의 학장님이 기다리고 계시지요. 환인 님께 간곡히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라기보다는 사과겠지요.”

신전장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환인은 신전장, 안느와 함께 응접 소파에 앉았고, 신전장이 자신 쪽으로 슬며시 밀어놓는 보석 상자를 잠시 살펴보았다.

모피를 연상케 하는 황금의 무늬가 백색 아치형 뚜껑을 수놓고, 뚜껑의 중앙에 박힌 청색의 주먹만 한 보석이 창문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인다.

몸체도 미궁산 목재로 보이는 것을 사용했는지 질감이 매우 고급스러운데 여백을 놀리지 않고 황금을 조각해 붙여놓아 판화처럼 일종의 연속 그림을 만들고 있다.

상자 가장자리를 따라 다이아몬드인지 수정인지 모를 작은 알갱이가 빼곡하게 박혀 천박하지 않은 고급스러움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술품의 경지에 다다른 보석상자다.

“…….”

딸칵, 뚜껑을 열자 자주색 벨벳으로 채워진 내부에 청포도색과 치자색 벨벳 주머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 주머니 두 개가 전부다.

치자색 벨벳 주머니를 꺼내 들자 천 너머로 기묘한 느낌이 전달되는 것이 느껴진다.

“……?”

설마 하며 주둥이를 열어본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야, 꽤 큰데?=

=6급은 되는 위상석이군요. 주황색이라…… 기력과 원기 관련이겠습니다.=

신관장의 포근한 목소리에 환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맨손으로 위상석을 쥐어본다. 그러자 찌릿­ 하는 느낌과 함께 핏빛 위상석과는 약간 다른, 나른하던 느낌이 한 번에 달아날 정도의 원기가 샘솟았다.

‘과연, 6급 정도면 얇은 천 너머로도 효과를 받을 수 있는 건가. 그보다 6급 위상석이면 싯가로 200금화가 넘을 텐데.’

2급은 32은화, 4급은 약 7.5금화, 5급은 37금화.

웨이포드에서 알아본 위상석의 시세다.

자신이 가진 핏빛 위상석은 3급으로 보통 2금화지만 상처, 체력 재생 관련이라 약 10금화정도 하며, 진주색 위상석은 4.5급 정도로 기술 위력 증폭 효과라서 12금화 정도다.

=성주님이 꽤 성의를 크게 썼는걸.=

안느에게 주황색 위상석을 넘겨주고 이번에는 청포도색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금화가 약 50장 정도 들어있었다. 주머니도 아공간 동전 주머니인지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환인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청포도색 주머니를 다시 조여 맨 후 신전장의 앞에 정중히 밀어주었다.

그에 신전장의 금색 눈동자가 살짝 커졌고 안느도 위상석을 돌멩이처럼 던졌다 받다가 순간 떨어트릴 뻔하곤 허우적거렸다.

=환인 님, 이것은…….=

“땅신 교단이 보여준 우호에 감동하여 땅신님께 바치는 헌금이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위상석도 내놓고 싶으나 아무래도 성주님이 특별한 의미로 주신 듯 하여…….”

50금화. 매우 큰 돈이다.

하지만 그것도 땅신 교단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비싼 값은 아니었기에 환인은 선뜻 헌금으로 내놓았다.

물론 고마움에 50금화나 되는 돈을 낸 것은 아니었다.

비록 안느가 도움을 요청했고 저쪽에 과실이 있어 일이 쉽게 해결됐다곤 하지만, 힘이 있어야 항의도 할 수 있고 사과도 요구할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이 영혼사라는 것을 밝히고 머리를 쥐어짜내서 대응했어야 이 정도 보상과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겠지.

물론 그 뒤에는 온갖 귀찮은 일이 덤으로 따라왔을 거다.

하지만 땅신 교단이 무려 성도급 도시의 교구장을 움직여준 덕분에 이후 후환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사건은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

이런 도움을 금화로 지급해서 받으려 했다면 못해도 수백 닢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공짜만큼 무서운 것은 없지.’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고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고작 50금화를 아끼자고 ‘도움을 줬는데 답례도 하지 않는 후레자식’이란 꼬리표, 그것도 made in 땅신 교단 본단의 직인이 찍힌 꼬리표가 달리는 것은 사양이다.

더욱이 이 행동도 신전장의 보고서를 통해 윗줄로 올라갈 것이다.

안느의 평판은 물론 자신의 평판도 어느 정도 올라가겠지.

신전장은 환인이 밀어준 돈주머니를 두 손으로 소중히 쥔 채 환인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안느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안느. 파티라면 질색하던 그대가 이분을 따르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네요.=

=아 진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주책 부릴 거면 우리 가버릴 거니까.=

안느는 질색했지만, 신전장은 웃음을 거두지 않는다.

=후후후. 창피해하는 안느를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에요.=

=윤 여사!=

안느가 바락 고함 지르지만, 신전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환인에게 부탁했다.

=환인 님. 우리 안느, 잘 부탁해요. 겉보기에는 천상 고릴라지만 속은 착하고 따뜻한 여자아이랍니다.=

=이익!=

말로 해서는 안 통하니 급기야 손을 뻗어 신전장의 입을 막아버린다. 손이 커서 입을 막았다기보단 얼굴을 틀어쥔 모양새지만 아무튼.

살짝 웃은 환인은 보석 상자와 주황색 위상석을 챙기며 말했다.

“마침 안느도 있으니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군요. 이제 도시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진정되었으니 그만 숙소를 나갈까 합니다.”

=어머. 좀 더 머무르셔도 되는데요.=

=맞아. 더 머물러도 돼. 한두 달, 반년씩 지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야.=

신전장의 얼굴을 놓아준 안느가 언제 흥분했냐는 듯이 말을 거든다.

“아닙니다. 더 머물다간 저희 정체가 들킬 것 같기도 하고 조만간 미궁도 재개방한다는 듯 하니 안느의 의무를 돕기 위해 다시 활동을 시작해야지요.”

=아, 하긴. 요즘 신전 방문객들 엄청나게 많아졌지?=

=그만큼 헌금과 기부금도 많아졌고요. 확실히 여러분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니 환인 님 말씀대로 하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뺨에 살짝 손을 얹은 신전장이 연륜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쉽네요. 환인 님이 아이들에게 아기를 안겨주셨으면 했는데요.=

환인은 대답하지 않고 웃음만 지어 보였다.

신전장과 면담을 끝낸 환인은 이실리테도 불러 안느까지 셋이서 아클라멘토 사람들을 만났다.

찾아온 사람은 문더 학장 외 1명. 그날 회의실에서 자신의 정체를 추측했을 사람이었다.

별 말은 오가지 않았다.

=미흡한 확인으로 의로운 분께 씻기 힘든 무례를 저지른 점, 마음 깊이 사죄드립니다.=

“그날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아클라멘토에서 학식 있기를 따지면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분들이 그런 아쉬운 판단을 내리시다니요. 거기에 사과도 때가 늦어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는 시기에 오셔서 저의를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침울한 모습으로 대답하는 몬더 학장의 모습에 환인은 힐난하는 듯한 자세를 거두고 짐짓 한숨을 작게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일로 여러분들도 적지 않은 패널티를 받으셨을 테니 저도 이 이상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몬더 학장과 다른 교수는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하얀 성에서 나온 인사가 아클라멘토를 방문해 크게 질타했단 소식은 알음알음 퍼져있었다.

‘질타도 그냥 말로 끝내지 않았겠지.’

무언가 제재가 들어갔음이 틀림없을 거다. 거기에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정의로운 마음씨`의 모험가를 아클라멘토의 교수들이 압박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명예까지 땅에 떨어진 사람을 강하게 비난하면 뒷맛이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

적당한 수준에서 따지는 걸 끝낸 환인은 그들에게 보란 듯이 안느를 쳐다보았다.

=……?=

=…….=

=…….=

안느는 왜 자길 쳐다보냐는 듯이 환인을 바라보았지만, 몬더 학장과 교수들은 플뢰 족의 특징인 안느의 긴 귀를 보곤 다시 얼굴 안색을 흐렸다.

=염려 마십시오. 환인 님의 정체가 외부에 발설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릭시위니 게르거 교수도 함부로 타인의 기밀을 발설한 죄목으로 제재가 들어갔으며…….=

환인이 직업자임을 눈치챈 것까진 좋은데 함부로 말을 흘려 이 사달을 벌인 릭시위니=게르거, 고슴도치 머리의 남자는 연봉 삭감에 자택 구금에 경력 삭제까지, 화려한 제재를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어 조심스레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몬더 학장은 소울 스틱과 형태가 비슷한 지팡이 하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범상치 않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묵빛 스틱이다.

=모든 속성에 친화 효과가 있는 마도기, 천칭입니다. 손잡이의 홈에 위상석을 끼우면 강도 강화와 내구 수복 기능을 발동시킬 수 있는 명품이지요. 저희의 사죄와 성의라 생각해주시고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걸 받아야 할지 환인은 일순간 고민했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받아야 하지만, 역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성주에게 성의를 받고 이들에게도 보상을 삥뜯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게 왜 문제인가 하면, 파르히스트의 모든 것은 성주의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땅은 물론 집도, 시민도,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성주의 재산인 셈.

즉, 몬더 학장에게 사과의 성의를 받는다면 성주에게 이중으로 보상을 타내는 꼴이 되는 것이다.

환인의 고민이 보였는지 안느가 슬쩍 티 나지 않게 환인의 발을 건드렸다.

안느가 이렇게 나섰다는 것은 아는 게 있다는 거겠지. 환인은 손을 뻗어 소울 스틱과 비슷한 길이에 형태의 지팡이를 잡았다.

그리고 손에서 소울 스틱을 잡았을 때처럼 미묘한 온기와 한기가 손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것도 영혼술에 쓸 수 있는 건가. 환인은 살짝 목례했다.

“요긴하게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감사드립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고 학장은 한결 시름을 덜었다는 모습으로 신전을 떠나갔다.

창가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환인은 어쩌면 사고 직후 바로 달려오지 않은 것은 사죄의 선물을 마련하고 또 사죄를 전달할 틈을 보다가 늦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갖 생각이 들었겠지.’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건드린 자의 옆에 땅신 교단을 움직이는 거물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환인은 썩 마음에 드는 색의 마도기, 천칭을 이실리테와 함께 살펴보는 안느에게 물었다.

“그걸 받으라고 한 이유가 있나?”

=받을까 말까 고민했었지? 그 사죄의 선물을 거절하면 그때부터 너랑 나랑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신호가 돼. 당연히 받아야지.=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걸 받으면 성주의 성의까지 해서 중복으로 받는 셈이지 않나.”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이건 방금 그 짜리몽땅 할배가 자기 사비로 준비한 선물일 테니까.=

“…….”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천칭을 건네받아 자세히 살폈다. 이름이 천칭인 이유는 뭘까. 모든 속성을 저울처럼 공평하게 상승시켜주어서?

아무튼, 마도기를 챙긴 환인이 안느에게 작게 웃어주었다.

“알려줘서 고맙다.”

쉽게 듣지 못할 인사라고 느낀 안느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흠흠, 헛기침하며 입가의 미소를 다스린 안느가 묻는다.

=이제 어쩔 거야?=

“숙소를 나가서 새로 머물 곳을 잡는다. 잠시 후에 아루루 양이 찾아올 테니 그때까지 짐을 싸도록. 그리고…….”

=그리고?=

“오늘 밤은 잠시 성 밖으로 외출 좀 하지.”

=성 밖이요?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이때까지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던 이실리테가 살짝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래. 6급의 새 사냥을 할 시간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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