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173 성도 파르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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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 상태가 된 제하=메샤가 여전히 손을 들어 올린 상태로 입을 열었다.
=이제 반론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크라버리의 첩자가 아니라 무명의 모험가 시절 인연이 계기가 되어…… 지원이…… 하지만 지금은 파르히스트의…… 존경하는 성주님…….=
=그때 받은 지원의 대가로 성주님의 신변 정보를 유출…… 이번처럼 파르히스트에 해가 되고 크라버리에 득이 되는 판단을…… 이는 곧 성주님에 대한 배신…….=
제하=메샤와 아클라멘토 교수가 자기들끼리 간증을 펼친다.
그게 환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파르히스트의 성주 직속 근위 무사가 다른 도시의 호족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게 포착된 상황이다. 당장 체포하거나 포박해서 보안부, 보안행정부에 넘겨 조사를 진행해야 할게 아닌가.
그보다 감정적으로 접근하자면 자신에게 사과부터 해야 할 텐데, 서로 자기 행동과 주장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펼치는 꼴을 보자니 환인은 비웃음이 지어지려 했다.
‘생활상이 근현대에 가까울 정도라곤 해도 역시 귀족 위주 사회라는 건가.’
들어보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억지 변명 뿐인 대화지만, 대화 속에 파르히스트의 정권과 대립, 분위기 등을 읽을 수도 있기에 환인은 한 귀로 귀담아들으며 교단과 통신을 하려는 안느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안느. 네 분노는 이해하지만, 감정에 치우쳐서 홧김에 저지르는 식은 안된다.”
=……그럼?=
“제하 메샤라는 파르히스트의 근위 무사로 인해 미궁에서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동료가 받게 되었다. 누명을 씌우려는 대상은 파르히스트 성주 휘하 최상위 무력 집단, 상황이 가볍지 않으니 교단을 통한 지원이 필요하다. 이 정도만 해도 된다. 파르히스트의 호족에게 항의를 촉구할 필요는 없다.”
=정말 그 정도로 돼? 나 본단의 추기경하고 되게 친해. 말만 하면 본단의 뜻이라는 의견까지 받을 수 있어. 그도 그럴 게 잘못은 전부 저쪽에 있잖아. 게다가…….=
여기에서 벌어진 일이 내면의 분노를 크게 자극했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문제를 크게 만들어도 된다는 설득을 펼치는 안느.
=그러니까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어.=
말은 안 했지만, ‘대장은 상급 영혼사니까 문제로 비화시키려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고 눈빛으로 말하는 중이다.
그래서는 안될 일이기에 환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직접 당한 거라면 교단의 체면이 걸린 일이라 허투루 대응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이 일은 나와 저 조인족 여자를 통해 벌어진 일종의 대리전 양상이다. 제하 메샤 저 여자도 아마 그런 이유로 널 떼어놓으려 했겠지. 그러한 만큼…….”
수집한 정보로 나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타당한 가설을 내세운 환인이었지만 이번에는 틀렸다.
환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제하=메샤의 행동은 그렇게 주변 권력의 역학을 계산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환인이 직업자로 보인다는 릭시위니 아클라멘토 교수의 추측성 발언을 듣고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건 나쁜 의도가 있다는 거겠지. 거기다 아가씨의 시체를 가져온 당사자니까 그 점을 물고 넘어지면 크라버리가 지원의 대가로서 요구한 시간 벌이를 들어줄 수 있겠다.’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며 움직였던 것.
말 그대로 단면적인 행동의 표본이지만, 환인은 6급이나 되는 근위무사가 그렇게 단세포적인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런 판단을 내렸다.
살짝 오판하긴 했지만, 대응으로 보자면 정석 중의 정석이기에 오판했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수준.
환인은 안느가 마음을 고쳐먹도록 계속 설득했다.
“만약 네 요청으로 땅신 교단이 파르히스트 성주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게 되면, 그 건은 성주라고 해도 무시하지 못하겠지.”
=물론이지. 땅신 교단은 대륙 5대 종교 중 한 곳이자 메리아놀 종족 연합 전체가 신앙하는 종교인걸. 종족 연합 대표 종교라고.=
“그래서 문제라는 거다. 근위 무사는 성주 직속이기도 하니 그렇게 직접적인 항의를 받게 되면…….”
환인의 설명에 안느도 그제야 뭐가 문제인지 눈치챘다.
=……자신의 수족이 저지른 일이니까 명예가 땅에 떨어지겠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으니까 엄청 분노할 거야.=
“그때부터는 말 그대로 상처 입은 짐승이 날뛰는 사태가 된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테고 누구 하나 다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되면 매우, 엄청나게 성가신 일로 번진다.
가장 심각한 경우는 그때 일에 조금이라도 관계된 자는 죄다 호출해서 호족의 힘으로 찍어누르며 범죄자, 비범죄자 가리지 않고 사정의 칼날을 마구 휘두를 경우다.
이에 따른 계산의 가짓수만 해도 수백, 수천 가지.
하나의 행동을 하는 데 변수만으로 수백, 수천 번 생각을 검토해야 하는 일은 환인 입장에서 절대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가장 좋은 일은 성주가 자신의 체면을 지킬 수 있도록 물러날 구멍을 마련해주는 것. 그리고 선심을 쓰듯이 자비를 베풀어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
물론 이것은 성주도 딸을 잃은 피해자라는 걸 확신하고 있기에 내놓은 결정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환인도 파르히스트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크라버리와 파르히스트, 그 도시에 소속된 시민들까지 죄다 죽는 몰살 시나리오를 말이다.
물론 거기에 환인은 없을 테고.
이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쪽이 본론이다.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교단 내에서도 알력과 파벌이 존재할 것이 당연한 일이지.’
세력 구도는 모르지만, 환인은 될 수 있으면 안느가 교단에서 그 영향력을 유지하길 바랐다. 그래야 훗날 자신의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도움을 받아낼 수 있지 않겠나.
고작 이 정도 일에 대륙 5대 종교 중 한 곳의 힘을 `본격적으로` 빌려 쓰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
=응……. 알았어. 땅신 교단이라고 해도 성도급 도시의 주인과 싸우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니까.=
“저 여자가 알아서 자폭해버렸으니 저 여자를 지목하고 근위 무사의 일탈과 독단이라는 식으로 꾸미면 될 거다.”
=응.=
그리고 안느가 마저 위상력을 밀어 넣었는지 무색투명한 수정구가 옅은 황토빛을 뿜어내며 회의실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통신은 입체 홀로그램 방식이었다.
허공에 투사된 영상을 통해 쌍방이 영상과 음성을 교환하는, 지구의 영상통화보다도 2배는 뛰어난 기술에 환인이 살짝 놀라는 사이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본단의 추기경과 친하다는 안느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는지, 본단과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통신 담당 성술사가 안느를 알아보더니 즉시 지인이라는 추기경을 연결하려 했지만.
=아니야. 르아웬하고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게. 대신 대외교부서랑 연결해줄래?=
[즉시 연결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앤 성투사님.]
그 자리에서 외교부서와 연결된 안느는 환인이 이야기한 대로 일단의 과정을 육하원칙에 맞춰서 설명한 뒤 동료의 누명을 벗기 위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요청 접수했습니다. 사안이 명백하며 그 내용이 가볍지 않은바, 교단에서 즉각 대응에 나설 것이니 안느 성투사님께서는 가까운 교단으로 이동하시어 신변의 보호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예상대로 이런 요청은 교단 차원에서 전체 신도에게 해주는 일종의 보호 업무였다.
물론 안느는 교단의 자유 성투사이니 좀 더 편의를 봐주었겠지만, 그걸로 영향력이 소모될 일은 없겠지.
환인이 속으로 한결 안도하는 사이 그 과정을 경악한 얼굴로 지켜보던 아클라멘토 교수진과 나크룩스, 제하=메샤는 통신이 종료되자마자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쪽은 그쪽들끼리 옳음과 믿음을 두고 떠들어. 우리는 우리대로 대응할 테니까.=
자기들끼리 옳고 그름을 따지며 떠들던 것에 분노했는지 안느는 살벌한 태도로 대화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뒤, 환인과 이실리테, 비상을 데리고 아클라멘토 대학원을 빠져나왔다.
그 후에는 도시의 서쪽, 땅신 교단의 신전에서 며칠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생활은 불편함이 없었다. 세 명과 한 마리에게 내어준 장소는 사제들과 신관들이 지내는 기숙사와 비슷한 숙소였는데 시설 수준이 웨이포드에서 머물렀던 호텔 수준이었기 때문.
땅신 교단이 누명 사건을 해결할 동안 안느와 이실리테는 그곳에서 검술 수련과 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환인은 신전장과 갈롯 함정사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숙소에서 함정 기술의 이론을 배우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물론 일의 경과와 진행 과정은 답답하지 않게 즉각적으로 전달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당일, 파르히스트의 땅신 교단 신전장이 직접 절차를 밟아 `성주가 아닌` 근위 무사단 단장에게 제하=메샤의 ‘유감스러운’ 행동에 대한 항의와 교정 요청을 서한으로 정중히 작성해 보냈다.
그후 ‘우연히’ 그 항의 서한을 접하게 된 파르히스트의 성주, 펜리 후스티오 파르히스트는 즉시 아랫것들의 ‘실수’를 확인 후 인정, 교단의 성투사가 보았을 정신적 충격과 피해에 진심 어린 사과를 보낸다는 답장을 보내주었다.
이 답장도 평범한 전령을 통한 전달이 아니라 파르히스트 성주 가문의 집사부??? 총집사장이 직접 방문해 두 손으로 안느에게 전달해주었다.
일반 집사도 아닌 가문을 총괄하는 총집사장이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파르히스트 성주가 일을 가볍게 보고 있지 않으며 성의를 다해 처리하겠다는 의사표현.
환인은 안느에게 건네받은 편지를 열어 속독으로 빠르게 읽었다.
“흠.”
=뭐라고 적혀있어?=
앞에 앉아 궁금함을 내비치는 안느와 이실리테에게 환인은 편지의 내용을 요약해서 전해주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진데에 대한 사과, 그리고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손을 써서 조처하겠다는 이야기와, 조처가 끝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겠다는 내용이다.”
=흐음~.=
“문구에 숨겨진 속내를 읽는다면, 이쪽이 그렇게 성의를 보여줄 테니 부디 안 좋은 일은 잊고 서로 건설적인 만남을 추구할 수 있도록 상호간 이해와 배려를 통해…….”
=잠깐, 잠깐. 그런 문자 쓰지 말고 간단하게 말해줘. 머리 복잡해진다고.=
“……‘내가 이렇게 신경 써줄 테니까 이쪽의 실수는 잊어줘. 서로 묵은 감정 가지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 이 정도다.”
=그러니까 항복 선언인 거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다 해결됐네.=
안느는 성주가 직접 사과와 함께 항복 선언을 편지로 보냈다는 거에 만족한듯했고 이실리테는 그냥 일이 잘 풀린 거 같아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실리테는 급이 낮은 호족 가문에게 쫓긴 적이 있기 때문인지 며칠 걱정을 얼굴에 드러내놓고 다니더니, 그 걱정이 모두 사라진 얼굴이다.
환인은 지구의 종이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고급스러운 편지지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성주가 우리 파티에 관심을 가진듯하지만…… 안느도 있고 우리 뒤에 땅신 교단이 있는 걸 알게 됐으니 따로 수작을 부리지는 않겠지.’
그 증거로 아직도 자신에 대해 말이 없는 점을 들 수 있다.
아클라멘토의 학장은 자신이 차원 방랑자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관련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성주가 직접 함구를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시사하니까.
‘아니면 학장이 입을 다물었던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그후 이틀 정도의 공백이 있었다.
별다른 소식도 없었고 소문도 들리지 않았지만 방심하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 때 크라버리의 사절이 도착하는 날이 다가왔고…….
=왠 소란이야?=
=크라버리의 사절 겸 조사단이 도착했는데 파르히스트 시민들과 병사, 기사들이 분노를 드러내면서 도시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대.=
파르히스트 시민들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혀 파르히스트에 입성조차 하지 못해 쫓겨났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다.
또한 파르히스트 성주도 그 사절단에게 ‘극심한 유감’을 표명해 자신의 딸이 사망한 데에는 크라버리의 책임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전했다고.
결국 크라버리의 사절단은 도시에 입장조차 못 하고 성밖에 야영지를 꾸렸고(이야기에 따르면 4급 이상 직업자 30명을 포함, 150명 규모였다고 한다), 파르히스트와 크라버리 사절 간의 대화가 그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던데 자세한 내용은 환인이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신전장이 직접 찾아와 간략히 요약을 들려주었는데.
=길레스 벡슬이 파르히스트의 미궁에서 강도질과 함께 살인을 저질렀단 증거가 제출되었다고 합니다. 길레스 벡슬의 사망은 미궁의 성장 과정에 따른 이형종 대량 발생으로 인한 사망으로 결정 났으며…….=
요나 아슬리드 파르히스트의 사망에 길레스=벡슬이 관여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져 크라버리 사절도 그 사실을 인정, 그에 대한 손해배상과 사죄를 하기로 결정되었다고.
그 후 크라버리의 사절단은 말썽 피우지 않고 얌전히 되돌아갔고 다시 사흘의 공백이 있은 뒤, 성주 가문의 수석 집사(집사부 서열 3위)가 찾아와 크라버리와 일종의 커넥션을 형성한 이들을 색출 및 파면과 추방 조처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파면 및 추방자 명단에는 제하=메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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