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172 성도 파르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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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성도 파르히스트
워 해머가 회의실 바닥을 때린 충격은 바닥의 타일을 모조리 깨부쉈고 그 위에 있던 책상과 의자 등도 산산이 조각냈다.
그 위력 시범에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안느에게 집중했다.
거기서 이어지는 안느의 폭언.
“…….”
환인은 나크룩스, 제하=메샤, 문더 학장을 비롯한 교수진을 상대로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버럭거리는 안느를 바라보았다.
들어오자마자 회의실을 뒤집어버리고 자신이 탱커임을 증명하듯 회의실의 모든 사람을 상대로 어그로를 끄는 모습.
솔직히 의외였다.
아무리 캐미가 좋았다곤 해도 자신들의 인연은 이제야 보름 남짓.
그랬기에 파르히스트의 상류층 인사들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환인의 주관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기었기 떄문이다.
자기 일처럼 화내는 안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인은 그녀가 진심으로 분노한 것을 눈치채고 그녀에 대한 평가를 일부 수정했다.
6급 희소 직업자이며 타고난 장사 체질, 거기에 땅신 교단의 본단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7급 호족을 상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정도의 신분.
거기에 동료를 아끼는 모습까지.
안느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열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옆에서 도끼눈을 뜨고 아클라멘토의 교수들을 노려보는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비상이 너희를 데리러 갔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아듣긴 어려웠을 텐데.”
=안느 덕분이었어요. 성술 중에는 동물과 대화하는 술법도 있는데 안느가 비상이랑 이야기해보려고 그걸 기억해두었다고 했거든요. 게다가…….=
나크룩스와 제하=메샤가 오전 중에 집을 방문했다고.
=안느하고 토너먼트 대비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찾아와서 다짜고짜 주인님 어디 갔냐고 묻더라구요. 특히 저 검은 코트 여자는 우리를 심문하듯이 쳐다보기도 했었구요. 그래서 좋은 뜻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고 안느와 의견이 일치했어요.=
“그렇군. 그래서 무장을 챙기고 바로 달려온 건가.”
=네. 전부 비상이 덕분이에요. 저 두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면서, 주인님이 나쁜 사람하고 큰 건물에 들어갔으니까 구하러 가야 한다고 했어요.=
나크룩스와 제하=메샤를 가리키는 이실리테의 행동에 아직도 자신을 보호하듯 두 날개로 감싸고 있는 비상을 돌아보며 칭찬했다.
“잘했다.”
목을 쓰다듬어주며 칭찬한 환인은 자신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좋아하는 비상에게 조금 의외라는 시선을 주었다.
‘제하 메샤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다니.’
나쁘다는 기준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정확성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게 동물의 육감이라는 걸까.
그때 안느의 사자후가 터졌다.
=미친거 아냐?!! 내가 있는 파티에서, 그것도 미궁에서 사람을 습격해 죽인다고!? 지금 땅신 교단에 전쟁 걸고 있는 거로 간주해도 정당방위인 이야기인 건 알고나 하는 소리얏!!!=
그에 문더 학장이란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어라 말했지만, 오히려 안느의 분노만 더 부채질한듯하다.
=그게 말이야 방귀야!!! 저쪽 기사단 흰색 코트를 입은 사람한테 다 조사까지 받았는데!! 내가 성투사라는 것까지 밝히고 미궁에 들어간 이유까지 밝혔는데 뭐?!! 오해가 있는 거 같다고!!?=
……!
=지금 장난해?!! 입은 삐뚤어졌어도 선후관계를 똑바로 따져야지! 우리 도령이 직업자인걸 숨긴 것보다 내가! 미궁 입구에서! 출입 전에 신분과 의도까지 밝혔다고 했잖아!! 거기다 미궁에서 퇴장한 뒤에도!! 이걸 최우선으로 가정해야지 우리 도령이 직업을 감춘 게 뭐가 대수인데!! 그게 이런 짓을 해도 될 만큼 죽일 죄야?!!=
……! ……!!
이번에는 조금 나이 든 교수 쪽이 식은땀을 흘리는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한다. 그러자 안느가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데, 척 봐도 분노가 임계치에 도달한 것으로 보였다.
이대로 뒀다간 안느가 성질이 뻗쳐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아니, 대충은 알겠지만, 분노에 급발진해버리는 것은 곤란하다.
환인은 바로 그 순간에 나섰다.
“안느. 참아라.”
=도령.=
환인의 개입에 안느가 진정하는 모양새를 보이자 교수들이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안느는 진정한 것이 아니었다. 손을 내린 안느의 은색 눈동자에는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평소 가볍고 포근하던 눈빛 대신 분노가 가득 들어찬 상태.
환인도 여기서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그만하라는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조지더라도 제대로 된 적을 조져야지, 어어 하다가 휘말린 인물들을 상대로 화풀이해봤자 적만 더 늘릴 뿐이다.
환인은 교수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 아클라멘토 교수들은 무언가에 눈이 가려져 진실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저들에게 잘못은 없을 테지.”
안느가 ‘정말이야?’ 묻듯이 분노로 일렁이는 시선을 보내자 몬더 학장이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안느가 후우우, 가슴 속의 분노를 토해내듯 긴 한숨을 내쉰다. 그런 안느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지금 본단과 연락할 수단이 있나?”
=있어.=
대답한 안느는 품에 손을 넣더니 안느의 주먹만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연락해라.”
=……잘못 없는데 연락하라고?=
“그래. 저들은 잘못이 없다. 잘못이라면 제대로 사정 파악도 하지 않고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게 잘못이겠지.”
=으음…….=
어떤 교수의 신음이 들렸지만 무시하고 계속 말한다.
“문제는 다른 곳이다. 내가 교단의 성투사가 가입한 파티의 일원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궁에서 살인을 저질렀단 누명을 씌우려 한 곳이 있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집단이 파르히스트의 어떤 인물들일까.”
말하며 제하=메샤를 바라보자 안느도 석고상처럼 경직된 얼굴로 녹색 머리의 조인족 여자를 쳐다보고 교수진도, 제하=메샤의 녹색 눈동자에도 당혹이 스며들고 있다.
갑작스레 일변한 상황이 적응 안되는 듯, 제하=메샤가 사고와 육체가 서로 마찰을 빚는지 손끝을 꿈틀, 어깨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절반 정도는 공격을 위한 준비 행동이라고 보이는 몸짓. 환인은 그런 제하=메샤를 응시하며 계속 말했다.
“이 사건은 너나 내가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준을 벗어난 상태다. 해결하려면 그에 걸맞은 체급의 지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어.”
=그 걸맞은 체구가 땅신 교단의 본단이란 말이지? 알았어.=
안느도 그제야 제대로 된 원흉을 깨닫고 수정 구슬을 들어 올린다. 제하=메샤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잠시 기다…… 큭?!=
안느가 수정 구슬을 쓰려는 것을 일단 멈추게 하려던 제하=메샤는 정신 차리고 보니 스틱이 자신의 목젖을 누르고 있음을 깨닫고 흠칫, 몸을 떨었다.
어, 어느 틈에?
이게 만약 칼이나 창이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거란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키며 스틱을 들고 있는 환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환인은 순간 빈틈이 보였기에 내질렀지만, 후회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하 메샤 경. 부디 오해할만한 행동은 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러는 건 당신에게 하등 도움 되지 않는 행위입니다.=
“글쎄요. 제게 도움이 안 되는 행위일지, 아니면 당신과 당신의 라인에 도움이 안 되는 행위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
제하=메샤의 눈가에 희미한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걸 포착한 환인은 한층 가늘어진 눈으로 말했다.
“제가 직업자임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었지, 파르히스트에 문제나 분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숨긴 의도 자체가 문제…….=
“짐승신님과 땅신님의 존재에 맹세코, 제가 직업을 숨긴 의도는 이 파르히스트에 해악을 끼치기 위해서가 아님을 선언합니다.”
술렁…….
회의실의 공기가 경악과 두려움으로 술렁였다.
아니,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의 이름에 맹세한다고?
환인은 이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죄가, 문제가 없다면 이런 치트에 가까운 믿음을 주는 맹세는 적극 사용해야 하지 않는가.
뭐가 문제라고 다들 쉬쉬하고 언급하길 꺼리는지 모르겠다.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비단 맹세 때문만은 아닙니다. 직업을 숨겼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요나 아슬리드 파르히스트 영애의 살해 용의자로 몰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기사단에서는 진범을 특징지어놓았을 텐데요. 그런데도 이미 참고인 조사까지 끝낸 절 용의자로 다시 모는 건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걸 드러내는 행동이지 않습니까.”
=…….=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만큼 굳어진 제하=메샤에게 모두의 시선이 향한다.
환인은 제하=메샤가 크라버리와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인 행동에 의하면 크라버리의 연락받고 시간을 벌기 위한 희생양으로 자신을 선택한 모양새인 거다.
중요한 것은 저 행동이 제하=메샤의 독단인가, 아니면 근위 무사단 상부의 의사인가 하는 것.
“말씀해주십시오. 왜 저를 살해 사건 용의자로 만들려 하신 겁니까.”
=……환인, 지금 당신은 파르히스트에 큰 분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유치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협박이자 주제 돌리기지만, 환인은 웃으면서 그 수작에 넘어가 주었다.
“그렇다고 얌전히 앉아서 죽여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죽인다니, 과장이 심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크라버리에 용의자로 인도되면 제가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으리라고? 길레스=벡슬의 사망을 제 탓으로 돌리며 절 죽인 다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을 거란 보장을 할 수 있습니까?”
=…….=
대답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깐 빠지는 제하=메샤의 모습에 환인이 어이없어하며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건 이 자리에 함께한 아클라멘토의 교수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침묵을 한다는 것은 환인이 한 말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 아닙니다, 제가 왜 크라버리에……!=
그걸 뒤늦게 깨달은 제하=메샤가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늦었다.
‘제가? 그러면 저 여자의 독단이란 말인데. 생각보다 더 멍청한 여자였군.’
환인이 작게 감탄하는 사이 안느는 눈썹 끝을 치켜든 채 수정구를 들어 본단에 연락하기 위해 위상력을 밀어 넣기 시작했고, 4급에서 7급 사이의 교수들도 눈을 서슬처럼 빛내며 제하=메샤를 제압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근위 무사인 제하=메샤가 직위를 남용해 자신들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교수들도 확신한 거다.
위압에 가까운 기세를 흘리는 교수들의 행동에 망했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은 제하=메샤가 입술을 씹더니 한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시길 부탁드립니다. 비무장 상태가 될 테니 제가 반론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자처해서 무장을 해제하겠다는 이야기에 몬더 학장이 나크룩스를 향해 부탁한다.
=나크룩스 경.=
몬더 학장의 말과 동시에 나크룩스가 번개 같은 손동작으로 제하=메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허리에 걸린 소드벨트를 검집째 떼어내고 허벅지 안쪽과 코트 안쪽을 더듬어 단검과 너클 등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을 모두 회수한다.
그리고 더는 무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몬더 학장에게 끄덕, 고갯짓하는 나크룩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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