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75화 (175/813)

〈 175화 〉 171 성도 파르히스트

* * *

테스트받느라 시기를 놓친 점심을 엽사 조합의 인근 레스토랑에서 해결한 환인은 식당을 나오면서 흑색과 백색의 코트를 입은 기사 차림의 두 여자와 마주쳤다.

지나가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앞에 선 두 명과 시선을 마주치자 백색 코트의 여기사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환인 님.=

아는 얼굴이었다.

나크룩스, 나흘 전 아클라멘토 성립 대학원의 학생 사망 사건과 관련해 참조인 자격으로 소환 조사를 요청받았고, 그때 담당자라면서 만난 사람이다.

‘흑색 코트는 처음 보는군.’

백색은 알고 있고 청색도 기사단 본부에서 보았지만 흑색은 처음본다.

백색과 청색하고는 질이 다른 옷감, 거기에 아우라의 농도는 6급과 7급 사이.

직감적으로 파르히스트 성주 직속의 근위 무사라는 걸 눈치챘지만, 환인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여자 대신 안면이 있는 나크룩스에게 먼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흘만이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나크룩스 양.=

=아하하…….=

예의 삼아 물은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어두운 안색으로 웃는 것을 보면 빈말로도 잘 지내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는 중에 나크룩스가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레 찾아뵌 무례를 양해 부탁드릴게요.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날 이후 저도 들은 게 있다 보니 언제고 다시 찾아오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칫솔질 대신 씹는다는 아르드렘 풀을 씹던 환인은 입안이 개운해진 것을 느끼며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뱉은 뒤 흑색 코트의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분은?”

=성주님 직속 근위 무사이신 제하 메샤 님이세요. 제하 님, 이분은 환인, 성이 환이시고 이름이 인이십니다. 시라크 부대장님께서…….=

=들어서 알고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하 메샤입니다. 귀하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을 수배해두었습니다. 이쪽으로.=

따라간다고 한 적도 없는데.

환인은 더더욱 안 좋은 예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거절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주변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비상을 가리킨다.

“제 친구도 같이 갔으면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제하=메샤가 비상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 마차 뒤를 따라와라. 할 수 있지?”

쿠엣.

도로 가장자리에 세워진 흑색 마차에 오르는 제하=메샤를 따라 환인도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나크룩스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녹색 머리카락에 녹색 날개귀, 조인족이었지만 등에 날개가 보이지 않는 제하=메샤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제하=메샤를 대신해 나크룩스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환인에게 근황 이야기를 물었다.

=함정 기술을 배우려고 엽사 조합을 방문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예. 동료들과 감옥 미궁을 방문했을 때 함정 문을 보았더니 기술을 배워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통은 직업자를 동료로 구할 텐데…….=

“실은 저도 동료들에게 괜히 기술을 배워보겠다고 한 게 아닐까 조금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행정관에서 임시로 동료분을 구하면 됐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환인의 자그마한 엄살에 나크룩스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매번 동료를 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제 직업상 많은 분과 함께 행동하기 어려운지라, 그 때문에 기술이라도 배워두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긴 거지요.”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이해합니다. 믿을 수 있는 동료란 쉽게 늘릴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법술을 익히시는 와중에 함정술까지 배우려 하신다니, 그 학구열에는 감탄밖에 들지 않는군요.=

“법술 쪽은 공부가 아닌 정신 집중으로 발현하는 쪽이라, 만약 그쪽도 공부를 통해 머리를 써야 하는 계열이었다면 저도 무모하게 두 가지 기술을 배우겠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환인은 나크룩스와 제하=메샤가 찾아온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하며 여러 가지 가정을 통해 자신을 행동으로 변호할만한 이야기를 근황 형식으로 꾸려나간다.

‘근위 무사가 찾아왔다는 것은 나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 의문은 가볍게 여기지 못하는 계열이라는 뜻이다.’

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의 죽음에 자신이 관여되어있다는 의심은 받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시체를 목격했고, 그것을 측은한 마음에 수습해 나와서 미궁 관리부대에 인계했다는 것을 시라크 부대장과 릭시위니 아클라멘토 교수를 통해 이야기를 퍼트렸다.

거기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어느 모험가가 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의 시신을 선의의 마음에 수습해왔다는 것도 널리 알린 상황.

이들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자신을 함부로 가두거나 행동에 제약을 주면 파르히스트라는 이름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다른 쪽의 의심일 텐데…….

길레스=벡슬과 연관되어있는 게 알려졌을까? 하지만 미궁 강도는 세 팀이었고 한 팀은 지하 1층에서, 나머지 두 팀은 지상 1층에서 모두 해치웠다.

숫자도 빠지지 않았고 그날 죽인 강도들의 영혼을 통해 강도떼를 모두 죽였다고 확인까지 했는데 어디서 문제가 생겼을까.

=도착했습니다.=

나크룩스의 나지막한 말과 함께 마차가 멈춰 선 곳은 21세기 현대의 미의식 수준을 가진 환인의 눈에도 웅장하게 느껴지는 백색 기조의 성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복잡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외벽을 채우고 있으면서도 담쟁이덩굴이 세월의 고풍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성.

멀리서만 봤던 아클라멘토 대학원이다.

=들어가시죠.=

제하=메샤가 말하고 앞서 대학원 안으로 걸어간다. 환인도 비상을 데리고 나크룩스와 함께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정문을 통과해 학원 부지 안으로 들어섰다.

환인은 제하=메샤의 검은 코트 뒷모습을 바라보며 얕게 생각에 잠겼다.

‘내가 영혼사라는 게 밝혀진 건가.’

타당한 추측을 떠올렸지만 그럴 가능성은 작다. 일단 영혼사라는 걸 알았다면 제하=메샤도, 나크룩스도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면 무슨 이유지?

이리저리 생각하는 중에 제하=메샤는 도서관 같은 외형의 건물에 먼저 걸어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쿠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도둑질을 할 사람도 없으니 입구에 쿠에를 세워놓고 같이 들어가시죠.=

“알겠습니다. 비상, 다녀올 테니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쿠에~.

뭔가 분위기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비상은 환인에게 칭얼대지 않고 근처 잔디밭에 올라가 주저앉는다.

그리고 제하=메샤, 나크룩스와 함께 건물 안에 들어가 이리저리 복도를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은 10명의 남녀, 그것도 최소 4급 이상에 최대 7급의 직업자가 모여있는 청문회장 같은 회의실이었다.

=오셨습니까, 제하=메샤 경.=

상석에 앉은 백발과 산타클로스 같은 수염이 잔뜩 난, 얼핏 땅의 정령 노움gnome 같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쪽을 바라보자 제하=메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한발 비켜선다.

=양해를 구하고 그를 데려왔습니다.=

덕분에 환인은 아클라멘토의 교수가 입는 로브보다 조금 더 화려한 로브를 입은 노인을 볼 수 있었다.

‘날 신문하는 듯한 구조군.’

회의실 내부를 둘러본 환인은 약간의 불쾌함을 느꼈다. 얕은 물웅덩이를 밟아 아끼던 하얀 신발이 더러워졌을 때 느낄법한 수준의 불쾌감.

그 순간이었다.

=…….=

“…….”

눈썹까지 가린 하얀 앞머리 사이로 노인의 눈이 한차례 빛났다고 느낀 환인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의미 없이 빛난 게 아니라 자신을 살펴보았다는 느낌을 받은 것.

자기 감각을 신뢰하는 환인은 조금 전의 불쾌감에 더해 힐난의 뜻을 담아 나크룩스에게 말했다.

“제하 메샤 님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곳이라고 하셨는데, 이야기가 다름 아닌 취조입니까? 시간을 내달라고 하신 것은 참고인 조사가 아니라 청문회를 할 장소로 이동하기 위한 것이었고요?”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방금 저분께서 절 간파하는 술법을 쓰신 듯한데 아클라멘토에서는 무고한 사람을 대상으로 멋대로 술법으로 조사하는 게 합법적인 행위인가 봅니다.”

실제로는 별로 불쾌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는 그게 이 상황에 도움 되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제하=메샤는 환인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에게 물었다.

=몬더 학장님. 어떻습니까.=

=으으음……. 자네가 예상한 대로일세. 그도 직업자이군.=

나크룩스에게 항의 시선을 보내던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환인의 시선이 노인을 향할 때 나크룩스는 찡그린 표정을, 제하=메샤와 아클라멘토의 교수로 보이는 이들은 눈에 확연한 의심을 담아 환인을 바라본다.

‘직업자를 판별하는 술법이었나.’

그런 술법이 있을 거라고 이엘카타를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짐작하고는 있었다.

작은 주문으로 영혼사임을 알아보는 술법이 있는데 직업자를 구분할 술법이 없는 것도 말이 안되지 않은가.

다만 의외인 건 7급으로 보이는 노인이 그 술법을 펼쳤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7급은 되어야 직업자를 분간하는 술법을 쓸 수 있는 건가. 지금 반응을 보면 내가 영혼사라는 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듯 한데, 단순히 각성 여부만 확인하는 술법?’

모두의 의심에 찬 시선이 환인에게 쏟아지는 가운데 나크룩스는 곤란함에 미간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환인 님. 시라크 부대장님도 그러셨고 환인 님을 참고인 조사한 저도 환인 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다릅니다. 그러니 부디 솔직히 대답해주십시오. 어째서…… 직업자라는 것을 숨기셨습니까?=

환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을 이어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열 명의 교수진의 반응이 점차 날이 서기 시작한다.

요나=아슬리드=파르히스트가 죽은 데에 환인이 원흉이라고 여기는 분위기. 일반인이라면 견디기 힘들 침묵 속에 몬더 학장이라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래저래 결례를 저지르는 마당에 한 가지만 더 결례를 저지르겠소. 환인 공, 후드를 벗어주시지 않겠소이까?=

환인은 그런 분위기가 극에 다다르기를 기다리려 했지만, 몬더 학장의 발언에 환인을 신문하려는 분위기가 일부 흐지부지되는 것을 느꼈다.

일부러 노린 거겠지.

환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 환인은 너희들에게 매우 실망했다.’는 느낌을 팍팍 풍기면서 후드를 벗었다.

=으음.=

=엇…….=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정체를 학장을 비롯한 두 명이 눈치챈 듯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이 말을 하기 전에 환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제가 요나 아슬리드 파르히스트 님을 죽인 용의자가 아닌가 의심하고 계시는 거군요.”

=환인 님. 지난 4일간 파르히스트 근위 무사님들과 기사단, 그리고 아클라멘토의 직원분들까지 합쳐 총 500명이 미궁을 샅샅이 수색했습니다. 그리고 주력 용의자로 꼽고 있던 길레스=벡슬 크라버리 1급 호족의 사망을 단정 지었습니다. 환인 님이라면 의심의 시선이 이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크룩스가 어서 숨기고 있는 것을 밝혀 당신의 억울함을 증명하라고 호소한다.

‘길레스 벡슬이 나오지 않으니 무식하게 인력으로 미궁 전체를 조사한 건가.’

그녀가 말하는 사이 환인은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해결 방법을 세 가지 정도 추릴 수 있었다.

하나는 시두르가 준 루비 브로치를 쓰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영혼사임을 밝히는 것. 마지막으로 저들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

루비 브로치를 이런 일에 쓰는 건 아깝다. 영혼사라는 걸 밝히는 것도 앞으로의 여행에 지장이 생긴다.

자신이 차원 방랑자임을 몬더 학장과 학장보다 덜 늙어 보이는 여자가 눈치채긴 했지만, 안느의 반응에서 추정해보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터.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주어진 정보와 상황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내게 주모자의 의심이 옮겨올 수 있다고 어느 정도 가정은 하고 있었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고 생각했는데. 성가신 경우가 전부 찾아왔군.’

이 경우를 확률로 따지면 0.3%미만이다.

자신이 직업자라는 것을 의심할 경우.

길레스=벡슬의 사망을 단정 짓고 그의 행위로 알려진 소문과 증거를 무시, 용의자로 다른 사람을 지목할 경우.

그 용의자로 요나 아슬리드 파르히스트의 시신을 수습해서 나온 자신을 지목할 경우.

그러는 과정에서 발생할 억지와 이치를 무시하는 행동.

500명이나 동원해 미궁을 수색할 인력이면 길레스=벡슬이 크라버리에서 활동하는 집단과 함께 행동했다는 상황 증거까지 탐문을 통해 확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했다는 것은 직업자임을 숨기고 법사로 위장했다는 이유 하나, 이를테면 트집인 셈이며…….

“…….”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갔다는 뜻.

하지만 저들이 간과한 게 있으니, 환인은 법사라고 말 한적도 주장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궁 입장과 퇴장 때 무엇보다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놨다.

시간으로 따지면 3초 남짓한 시간.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한 환인이 반격을 위해 입을 열었다.

“나크룩스 양. 정말 실망했습니다.”

=예, 예?=

“저는 나크룩스 양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 참고인 조사를 치렀습니다. 당시 제 동료가 누구인지 밝혔고 미궁 입장과 퇴장 때도 적극적으로 협조했었지요. 그런 선의의 결과가 의심과 추궁이라니, 매우 불쾌하군요.”

매우 자존심 상했고 프라이드에도 상처받았다는 기색을 어필하자 회의실 내의 교수들은 물론 나크룩스도 살짝 당황한다.

이런 식의 자존심 어필은 일반인이 아니라 고족이나 호족이 할 법한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나크룩스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들며 말하려 한다.

=그것은…….=

“더욱이 저는 무직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헌데 이런 식으로 정체를 숨겼다는 둥 상황을 몰아 위협하듯 설명하라 강요하다니, 대체 이런 상황이 어째서 벌어지게 된 것인지 그 저의부터 알고 싶습니다. 설마 펜리 후스티오 파르히스트 성주님의 뜻입니까?”

자신에게 혐의가 없음을 확신하고 대신 대변해주려 하던 나크룩스였기에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어 말하니 몬더 학장이 관심을 가지고 조심스레 끼어든다.

=나크룩스 경. 환인 씨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환인 님의 동료분 중에는 땅신 교단의 자유 성투사님이 계십니다. 이번 감옥 미궁 입장도 그분의 신성한 의무를 돕기 위한 입장이었습니다.=

나크룩스의 힘없는 대답에 몬더 학장이 붓처럼 하얀 눈썹을 팍 찡그리며 허어! 탄식을 터트린다.

=어째서 그 말씀을 먼저 하지 않으셨습니까?=

몬더 학장이 기막혀하고 교수진도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역시.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그쪽을 바라보는 대신 환인은 제하=메샤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표정이 뭔가 일이 잘 안 풀릴 때의 그것처럼 살짝 찌푸려져 가는 중이었다.

=…….=

나크룩스는 무뚝뚝하게 서 있는 제하=메샤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게 왜 이런 짓을 벌이느냐는 의미가 담긴 답답한 시선. 그 시선에 환인은 나머지 퍼즐 조각을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거군.’

저 여자는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하는 중이다.

덕분에 말로만 이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한다는 것에 위험 부담이 대폭 늘었다.

제하=메샤. 이유는 어쨌든 일단은 6급이다. 말로 억누르려다가 분노한 저 여자가 자신을 습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가진 무기라곤 소울 스틱 뿐인데 제하=메샤의 허리춤에 매인 검은 척 봐도 마도기로 보이는 무기.

맞붙는다면 높은 확률로 크게 다칠 것이다.

직업을 밝히거나 시두르의 루비 브로치를 꺼내들면 일은 일단 해결되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서 최소 6급인 저 여자가 지금 습격할 가능성이 없진다는 뜻은 아니다.

저 교수들도 브로치를 보여준다 해서 당장 자신을 지켜줄 거란 보장도 없고.

일단은 여자를 주시하며 경계한다. 경계하며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끊임없이 굴리던 환인은 속으로 짜증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일이 어떻게 해결되든 간에 이 일로 제하=메샤가 자신에게 원망이나 분노의 감정을 품을 일이 대폭 늘었다.

근위 무사 집단 전체가 적이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하는 상황.

‘문제는 저 여자의 행동과 태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저 행동을 설명하려면 크라버리와 연계성뿐인데…….’

자신을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 얻을 것이 뭐가 있나 생각해보면 크라버리 밖에 답이 안 나온다.

그 말은 성주 직속 근위 무사대가 크라버리의 입김이 닿아있다는 뜻.

‘말과 반론, 논파만으로 상황을 반전시켜 여론이 저 여자를 죽일 년으로 조성하는 것은 쉽지만 안전 확보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루비 브로치를 써야 하나.’

이런 일에 쓰는 건 아까운데. 그렇게 생각하며 환인이 미간에 살짝 힘을 주었을 때였다.

쿵… 쿵쿵…… 쿵쿵쿵…….

문밖에서 거인의 발걸음 소리 같은 것과 소란이 회의실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서, 성투사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진정하시고!]

[큐삣!]

[제발! 제발 멈추시고 이야기 좀 들어주십시오! 성투사님!]

[쀼삐삣! 큐우~!]

[으아악! 안돼! 저 새 막아! 못 들어가게 막으란 말이야!!]

[안 됩니다! 거기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됩……!!]

직후 콰앙­!! 문짝이 부서져나 갈듯이 크게 열리며 분기탱천한 풀 장비의 안느가 몸에 일단의 대학원 직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들어왔다.

그리고 브레스를 뿜을 듯이 크왁­ 고함 질렀다.

=도령을 여기서 강제로 끌고 갔다며?! 우리 도령 어디 있어, 당장 내놧!!!=

회의실 집기가 덜덜 떨릴 정도의 우렁찬 고성에 교수들은 물론이고 나크룩스도, 제하=메샤도 순간 당황해서 안느를 돌아보았다.

환인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반색했다.

그녀가 어떻게 찾아온 건지는 둘째치고 활로가 열렸기 때문.

쿠엣!

그 틈에 안느의 뒤에서 튀어나온 비상이 파다닥 날아서 환인의 곁에 착지하고 그를 지키듯 날개를 펼쳐 감싼다. 이어 이실리테도 당장 대검을 뽑을 듯이 살짝 기울인 채 달려왔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음.”

환인이 평소와는 전혀 다른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걸 다르게 해석한 이실리테가 쌍심지를 켜고 사자후를 터트렸다.

=당신들은 뭔데 죄 없는 주인님을 핍박하는 거죠?!! 파르히스트의 법도는 선량한 시민과 여행자를 핍박하는 것인가요!!=

=아, 아니 저기.=

그리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다가온 안느는 앞을 가로막는 나크룩스의 어깨를 잡더니 미닫이문처럼 쭈욱 밀어버리고는 환인을 살피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찾는다.

=도령, 괜찮아? 나쁜 짓 안 당했어?=

도령?

“아직은 괜찮다. 용의자 취급받았지만 확정하진 않은 듯 하…….”

용의자. 이 단어가 주는 뉘앙스에 안느는 환인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폭발해버렸다.

=용의자아?!! 이…! 너네들 내가 이 일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마!! 땅신 교단의 본단에 연락 넣어서 파르히스트 성주님한테 항의하라고 요청할 거니까!! 우리 도령이 측은하게 여겨서 고깃덩어리가 된 애들 수습해서 데리고 나왔더니 뭐, 살해 용의자?! 이런 씨발!!=

콰아아앙!!

분노가 실린 자이언트 워 해머가 땅을 내려쳤고 회의실이 발칵 뒤집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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