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71화 (171/813)

〈 171화 〉 167 성도 파르히스트

* * *

“……인거다.”

설명은 길지 않았다. 여성의 몸에 영기가 보이고, 그 영기를 흡수하면 미약하지만 조금씩 강해진다는 것.

그래서 촌락에 들르면 성불행을 한 다음 아기를 원하며 다가오는 여자를 품에 안는 대신 자신은 그런 여자의 영기 일부 흡수하며, 도시에 들어오면 창관을 방문해 여자를 안아 영기를 모은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다 들은 안느는 눈썹을 지그시 모으고 땅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연 것은 차 한잔을 마실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날 믿고 그걸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대장의 이야기를 남들 앞에서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수련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해준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이다.

파티에 가입한 지 얼마 안되는 자신에게 그러한 신뢰를 보이는 대장에게 안느 또한 믿음이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생겨났다.

생각해보면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 숨기고 있던 직업과 능력까지 보여준 대장이 아닌가. 거기다 차원 방랑자라는 출신까지.

‘그런데 난 돈으로 믿음을 사려고 하기나 하고……. 어휴.’

먼저 신뢰를 보인 사람에게 그와 같은 신뢰로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느는 좀 더 마음을 열고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감정 일부를 내보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묻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안느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긴장감이 없네. 연모하는 주인님의 사랑을 차지하려면 적극적으로 나서도 모자랄 판에…….

=난 영혼사가 그렇게 힘을 모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거든.=

“네가 듣지 못한 게 아니고 아예 없다는 뜻인가.”

안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땅신 교단의 성투사잖아. 승룡천제는 해당 지역의 신전과 연계해 이루어지는 일이 많으니까 이런저런 일로 영혼사를 많이 볼 수 있었어. 덕분에 이야기도 나름대로 많이 나눠봤고.=

“흠.”

=그런데 대장이 말한 것처럼 섹스를 통해서 영기를 흡수해 힘을 쌓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어. 남자든 여자든 말이야. 영혼사가 축복을 내릴 수 있다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고.=

환인도 눈치채고는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영혼사와는 좀 많이 다르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대장의 능력은 영혼사가 아니면 못 할 능력도 있단 말이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집안으로 자릴 옮긴 환인은 문이 다 닫혀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두 손을 모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평온의 파동을 쏘았다.

화아아아…….

=……?!=

=와아.=

파동도 건물에 막힌다는 건 신전에서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쏘는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회백색의 포근한 빛무리가 파도처럼 집 안을 몰아치자 안느가 기겁하며 소릴 질렀다.

=어, 어! 그거, 그거! 평온의 파동이잖아!?=

=……?=

이실리테와 안느의 상반된 반응을 보고 있자니 슬쩍 웃음이 나오는 환인이었다. 외형도 상반되어있어 대비 효과처럼 극명하다고 할까.

안느가 세상 복잡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다.

=아…… 진짜 뭐지?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넌 뭐라고 생각했었지?”

=영혼사와 다른 직업의 혼합직. 아니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특수 직업이라고 생각했지.=

=광분한 광전사나 다섯 장막의 주시자, 은빛의 수호자 같은 거?=

이실리테가 용병 생활하며 주워들은 유명한 특수직, 희귀직을 언급하자 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대장은 그쪽 출신이잖아. 출신에 따라 각성하는 직업이 조금씩 차이 난다는 건 유명하니까…….=

안느의 고민은 잠깐이었다.

=하아아, 어쨌든 좋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게 온갖 고민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야.=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파동의 빛무리 속에서 나른함을 만끽하던 안느와 이실리테. 환인도 그걸 배려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님. 이 빛이 평온의 파동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평온을 주고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주는 빛이라더군. 나도 쓸수 있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와.=

이실리테는 별생각 없이 그저 감탄만 할 뿐이지만, 안느는 파동의 효과가 사라져가자 다시 진지한 모습으로 변했다.

=영기 흡수는 상급 영혼사가 얻게 되는 힘일지도 모르겠어. 나도 상급 영혼사는 한 번도 못 봤으니 각성 돌파로 얻는 새 능력이라고 하면 말이 되거든.=

“그 상급 영혼사라는건 구분을 어떻게 짓는 거지?”

=초혼.=

“영혼을 남들이 볼 수 있도록 불러내면 상급 영혼사로 본다는 건가.”

=어.=

“흠.”

하급, 중급, 상급 최소 세 가지 등급 중 상급이다. 뭔가 능력적으로 특출나거나 한 경우에 상급이라는 등급을 붙이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닌 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중 안느가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아니야. 그냥 조금 아쉬워서.=

“표정은 불만이 있다는 느낌인데.”

=대장은 만난 지 이제 10일 정도밖에 안 된 나도 인정할 정도야. 게다가 날 그렇게나 신뢰해주는 데 불만이 있을 리 없지.=

감옥 미궁에 들어가 고작 하루 만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벌어들인 환인이다.

미궁 강도를 털어서 얻은 보석 약 22금화어치, 여기에 주머니의 28금화 33열은화 236은화…… 퉁쳐서 53금화. 그리고 해골 거인 부산물 매각 대금인 6금화와 개당 12은화 가량 하는 1급 위상석 9개 및 자잘한 녹슨 무기와 귀금속, 구겨진 은화와 동화 약간.

다 합쳐서 약 60금화 가량인데 아무리 수입의 80%가량이 미궁 강도를 털어 얻은 거라지만, 강도를 턴게 아니더라도 해골 거인의 부산물과 이형종을 해치우고 획득한 위상석의 값어치를 다하면 그것만으로도 8금화 정도 된다.

그걸 모두 주머니에 꿰찬 것도 아니고 수입의 10%를 따로 떼서 머릿수대로 나누어 용돈으로 분배했다. 1인당 2금화. 거기에 예외는 없었다.

공평하고 합리적이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자신의 가치관을 따르라고 강요하지도,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융통성까지 발휘한다.

안느는 정말로 환인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다만…….

=그냥 좀, 아쉬운 거야.=

말하면서 이실리테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힐끔 쳐다보는 모습에 환인은 미간을 약간 좁혔다.

뭐가 아쉽다는 걸까.

부러운 거면 이해한다. 외모로 사람을 가리지 않는 수준이 일반인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는 환인이지만,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한다는 감정은 지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가지지 못한 여성스러운 매력을 가진 이실리테를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러운 게 아니라 아쉽다고?

잠깐 생각에 잠겼던 환인은 안느의 행동에서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정답에 가깝게 도출해냈다.

자신이 창관을 다니는 데 대한 의아함. 그리고 이실리테를 바라보는 호감과 호의. 자신에게 내비치는 아쉬움.

“…….”

그랬더니 더욱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이실리테와 잠자리하지 않는 것을 왜 아쉬워하는 거지.’

어째서? 욕망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이실리테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에 아쉬움이 아니라 기쁨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닌가?

일단 말은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실리테만 따로 보내놓는다.

“이실리테. 커피 한 잔 부탁하지.”

=어 나도 베링 차 부탁해.=

=네~.=

쿠우!

=뭐니. 또 우유 마시고 싶어?=

쿠엣!

=알았어. 설탕도 넣어줄까?=

쿠엣!!

이실리테가 비상과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환인은 안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안느. 네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실리테를 안지 않는 것은 그녀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여자라면 나도 망설이지 않고 품에 안았을 거다. 영기의 꾸준한 확보는 내게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이실리테는 앞으로도 같은 길을 함께, 오랫동안 걸어갈 동반자다. 함부로 건드릴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안느였지만, 환인의 설명에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대장도 이슬이 마음을 알고 있을 거 아냐. 대장이 쑥맥도 아니고.=

“…….”

=그런 거라면 오히려 이슬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받아주는 게 좋지 않아?=

“이실리테가 그 일을 두고 괴로워하거나 고통을 품는다면 나도 다시 생각했을 거다.”

그러고는 안느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묻는다.

“너도 여자니까 같은 여자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있겠지. 이실리테의 마음이 흠모인지 사랑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나? 나는 잘 모르겠다만.”

그렇게 말하니 안느도 살짝 헷갈렸다.

어, 흠모하고 사랑하고 어떤 차이가 있더라? 사랑은 말 그대로고 흠모는…… 존경하고 비슷한 거던가. 이슬이는 둘 다 해당하는 거 같은데.

=주인님, 커피에요. 이번에는 조금 진하게 볶은 뒤에 물 온도를 조절해봤어요.=

“고맙다.”

향긋한 냄새를 사방으로 퍼트리는 커피를 받아 서 들고 이실리테에게 작게 인사한 환인은 자기 앞에 차가 놓인 줄도 모른 채 머릴 감싸 쥐고 고민하는 안느를 응시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를 보면 재미 삼아 이실리테의 마음에 참견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어디가 그렇게 죽이 잘 맞는지 매일 밤 같은 방에서 자는 안느와 이실리테다. 그런 안느의 참견은 친구로서 충분히 할만한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깊게 생각하려는 것을 멈추었다.

‘저렇게 이실리테의 사랑을 신경 쓰는 것을 보면 동성애는 아닌가.’

환인은 뇌세포를 일깨우는듯한 커피의 자극을 음미하며 안느의 고민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안느는 다 식은 차를 코로 마시는지 입으로 마시는지 모를 정도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

그러다 찻잔이 빈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린 뒤 시선을 거실로 돌렸다.

이슬이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책을 가져와 거실 구석, 따끈따끈한 햇볕이 드는 자리에서 졸고 있는 비상의 곁에 앉아 글공부에 열심이다.

대장은…… 뾰족뾰족하고 각져서 전투적으로 느껴지는 글자로 무언가를 가볍게 적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은 아니다. 지난 5일간 거실에 앉아 틈만 나면 저 글로 앞으로의 일정과 계획을 적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면 호기심에 직접 대장에게 물었었다. 그 글자는 어디 언어고 무엇을 적는 거냐고.

‘고향의 언어다. 머릿속의 이후 계획을 글로 정리하는 거지.’

안느는 금색에 가까운 햇볕을 받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글을 적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능력은…… 계속 같은 생각만 반복해서 좀 그렇긴 한데, 대장의 능력은 정말로 출중했다.

어느 한 면이 아니라 거의 두루두루 잘했다.

사람과도 두루 잘 사귀고 화술도 뛰어나 대화하다 보면 대장의 말발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머리도 좋다. 지난 5일간 대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 파르히스트에서 화제가 되는 주요 주제는 미궁과 길레스=벡슬, 중급 도시 크라버리, 아클라멘토 대학원과 죽은 성주의 혈족이었다.

그 사건에 엮인 자신이 생각해봐도 아클라멘토의 학생들이 죽은 것은 길레스=벡슬 때문이라고 생각할 정도인데 자세한 연유를 모르는 일반인은 어떨까.

‘파르히스트 성도 지금 그 일로 엄청 날카로워져 있을 거야.’

하지만 자신들은 안전하다. 조사관들도 무혐의라고 여기면서 돌아간 마당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우리들은 아무것도 몰라요~.’하고 생활하면 미궁 안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염시? 능력으로 시체에 깃든 과거를 읽어도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하겠지. 종족 재능인 진실의 주시자를 극한까지 연마한 주시자의 눈도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멍청하다면 결코 못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싸움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잘하고 성격도 저 정도면 신사적이고 훌륭한 축이다. 거기에 얼굴도 잘생겼고 목소리도 좋고 몸도 좋고…….

안느의 시선이 목깃 사이로 얼핏 보이는 환인의 쇄골로 향했다.

=…….=

솔직히 말해서 환인은 안느가 꿈꾸던 왕자님의 모습에 매우 근접했다.

백마 탄 금발의 잘생기고 따스한 왕자님이 아니라 녹색 쿠에를 탄 흑발의 냉철하고 샤프한 군주님 같지만 아무튼.

‘이실리테를 그냥 하녀나 호위 정도로 여기는 줄 알았는데…….’

이실리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니. 더욱이 소중하게 생각해서(환인은 그렇게 말한 적 없다) 함부로 손대지 않고 아끼고(다시 말하지만 안느의 착각이다) 있다니.

역시 서로를 좋아하고 있는 거잖아?

배시시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안느는 황급히 양 뺨을 가렸다.

큰 손 탓에 뺨이 아니라 옆머리까지 완벽하게 가리는 모양새가 됐지만 어쨌든. 대장을 사모하는 이실리테와 그런 이실리테를 소중히 생각하는 대장.

‘으흐흐흐.’

속으로 실실 웃던 안느는 정색했다.

그렇다면 이슬이를 부추길 게 아니라 대장을 부추겨야 하나? 하지만 대장 성격에 부추긴다고 해도 이론이나 이치에 맞지 않으면 거부할 것 같은데.

안느는 아쉬웠다. 동시에 좀 마음에 안 들었다.

이실리테라는 예쁘고 착하고 참하고 훌륭한 아가씨가 바로 옆에 있는데 쓸데없이 창관에서 돈을 낭비하고. 이것도 남자라서 그런가?

‘……아니야. 대장은 이슬이가 자신을 좋아…… 사랑하게 되면 다시 생각해본다고 했어. 역시 이슬이를 부추기는 게 맞아.’

=안느, 배고파?=

=……어? 갑자기?=

한참을 생각하던 안느는 갑자기 들려온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부터 계속 눈에 힘주고 바라보길래 배고픈가 해서. 아직 식사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간식이라도 만들어줄까?=

……응. 이거다. 별로 배고프진 않지만 둘이서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다.

=진짜로? 그럼 저녁 전에 간단히 먹을만한 거로 해줘. 대장도 먹을 거지?=

“그래.”

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씨익 웃자 그 웃음을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는 미소라 생각한 이실리테도 살짝 웃으면서 일어난다.

‘이슬아. 내가 너랑 대장이 맺어질 수 있도록 힘낼게!’

이슬이와 대장이 맺어지면 이슬이는 사모하는 분과 함께해서 좋고, 대장은 대장대로 창관에 돈을 쓰지 않아도 될 테니 좋고, 자신은 그런 둘을 곁에서 구경하며 실시간 로맨스 드라마를 직관해서 좋고.

응. 서로에게 좋은 일뿐이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실리테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던 안느는 환인이 뒤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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