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67화 (167/813)

〈 167화 〉 163 성도 파르히스트

* * *

막다른 방에 몰아놓은 미궁 강도의 시체 20구는 약 7시간 뒤, 쌓아둔 장비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얌전히 앉아있던 비상이 갑자기 어깨며 등에 머리를 비비며 칭얼거리기에 혹시나 확인해보니 텅 비어있었던 것.

=미궁이 시체를 삼키는 데 7시간이 걸리는 건가?=

방이 텅 빈 것을 본 안느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파티에 없었다. 그것은 미궁에 몇 번씩 시체를 유기한 범죄자 정도나 알 수 있는 정보였으니까.

소울 스틱으로 바닥을 쿡쿡 찔러봤지만, 딱딱 소리 나는 평범한 돌바닥이다.

도무지 미궁이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현실감이지만, 실제로 시체와 짐 더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궁에 대한 이런저런 가설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도, 수단도 없기에 한쪽에 접어두고 안느에게 묻는다.

“이형종은 얼마나 정화했지.”

=142마리. 중간부터는 지도를 들고 함정 문이나 비밀 문이 없는 방까지 돌아다닌 덕분에 꽤 많이 잡았어.=

“이 추세대로라면 1,000마리는 금방 달성하겠군.”

=응. 빨리 정리하면 좋지. 냄새도 그렇고 공기도 별로 안 좋으니까. 중핵이 지상과 가까운 층에 나타난 것도 신경 쓰이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되돌아와 캠프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탐사는 여기까지 하지. 정리하고 돌아간다.”

미궁에 들어올 때 2박 3일간 머무르기로 정하고 들어왔지만, 세부적으로 세운 목표는 1회 입장에 100마리는 정화하고 이실리테의 실전 경험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2박 3일이라는 시간은 채우지 못했지만, 나머지는 초과 달성한 상태다.

미궁 강도와 전투를 벌였고 중핵과도 싸웠으며 이실리테의 무기가 마도기화 하는 성과까지 얻었으니까.

더해서 보물 상자도 3개를 더 찾았고 약 30은화에 해당되는 값어치의 녹슨 철제 무기와 방어구, 구겨진 은화와 동화까지 챙겼으며 위상석도 1급으로 9개나 채집할 수 있었다.

위상석의 가치만 합해도 1금화 17은화나 된다. 1계층의 성과치고는 매우 훌륭한 셈.

=그나저나 사람들이 별로 안 지나다니던걸. 지하 2층에서 사냥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건가?=

안느가 이실리테에게 아공간 주머니를 받아서 비상의 등에 올리며 말하자 이실리테가 대꾸한다.

=이형종이 많아서 여기까지 안 들어온 거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7시간 동안 100마리를 넘게 사냥한 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하긴…… 거기에 심층이 목표라면 계단과 멀리 떨어진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고.=

7시간 동안 캠핑하며 본 파티는 하나뿐이었다.

분위기를 보면 막다른 방인 3번 방을 노리고 온 모습이었는데 환인 일행이 캠프 자리를 잡은 모습에 멈칫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른 방으로 이동해버렸다.

그후 찾아온 파티는 없었다. 이실리테와 안느도 주변의 방을 돌아다녔지만 마주친 파티도 없었고.

=대장은 어떻게 생각해?=

캠프 장소를 정리한 안느가 무기와 방패를 챙기며 묻는다. 환인은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말했다.

“이실리테의 의견과 일부 일치한다.”

=어떻게?=

“미궁이 성장할 준비를 하느라 이형종이 갑자기 대량으로 생성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 현상에 미궁의 이변을 느낀 사람들이 들어오다가 되돌아나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흠…….=

“어쩌면 병사들이 입장을 막고 있을 수도 있고, 확실한 것은 돌아나가면 알 수 있겠지.”

출발 준비를 끝마친 환인은 마지막으로 막다른 방을 한 번 살펴본 뒤 이실리테와 비상, 안느를 데리고 위층을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돌아나가는 길에도 이형종과 끊임없이 마주쳤다. 통로든 방이든 두 마리에서 네 마리 사이로 우글거리고 있었던 거다.

“…….”

더욱이 지하 1층으로 올라온 환인 일행은 지상 1층으로 가는 최단 거리를 이동하던 중, 계단 바로 옆 7번 방에 작은 해골 하마와 해골 늑대, 그리고 시체 다섯 구로 이루어진 이형종 무리와 마주쳤다.

환인의 눈빛이 더욱 깊어지고 안느도 이형종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1층으로 올라가려면 이 방을 지나쳐야 하잖아. 우리가 올 때까지 최소 1시간은 아무도 안 지나갔단 뜻인가?=

환인의 영혼 화살에 다섯 구의 시체는 머리가 꿰뚫려 쓰러졌고 두 마리의 해골은 실전을 통해 움직임을 꽤 가다듬은 이실리테의 대검에 순식간에 박살 난다.

뼈다귀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이실리테가 조금 불안해했다.

=뭔가 조금 불안하네요. 어쩐지 벽이랑 천장에서 흘러나오는 빛도 깜빡깜빡 하는 것 같고…… 주인님,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안느, 서둘러라.”

=응.=

안느는 시체를 정화하고 이실리테는 탐지 도구로 위상석을 찾고.

1분도 지나지 않아 확인과 정화 작업을 끝낸 환인 일행은 곧장 숨겨진 문을 잡아당겨 연 뒤에 1층으로 올라갔고, 거기서도 방마다, 통로마다 이형종과 마주쳤다.

=우와. 1층인데도 이형종이 막 모여있네. 진짜 대장 말대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진 건가? 설마 출입구가 막힌 건 아니겠지?=

안느의 발언에 이실리테의 안색이 흐려진다.

=안느 너어……. 그런 불길한 말은 하는 거 아니야. 식량도 보존식까지 다 해서 5일치 밖에 없는데.=

쿠우!

=……미, 미안.=

이실리테와 비상의 항의에 안느도 살짝 불안해하며 사과한다.

환인도 조금 껄끄러운 기분을 느꼈다.

삼림형 미궁을 헤맬 때와는 다른 원초적인 긴장감이다.

하다못해 일반 미궁이라면 출현하는 이형종을 잡아먹어서라도 버틸 수 있겠지만, 이곳 감옥 미궁처럼 등장하는 이형종이 시체와 뼈다귀뿐이라면 식량 수급에서부터 큰 문제가 발생하니까.

그리고 출구에 도착했을 때, 세 사람과 한 마리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어둠이 밀도 있게 뭉쳐져 물처럼 일렁이는 출입구의 벽이 건재했던 것.

“나가지.”

일행은 망설이지 않고 검은 띠의 막을 통과한다.

그리고 미궁을 나왔을 때, 환인은 해가 지기 직전의 검푸른 하늘과 불장대가 잔뜩 세워져 광장을 훤히 밝히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굳은 얼굴로 잔뜩 모인 수백 명의 병사와 도시 소속의 직업자들도.

미궁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던 환인은 병사들의 시선과 백색 코트 같은 것을 걸친 직업자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시선은 아니었다. 평범했다면 지금처럼 계속 주시하고 있지 않을 테니까.

이실리테와 안느는 쏟아지는 시선에 약간 긴장했지만, 환인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태연했기에 그녀들도 안정을 유지하며 환인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명부 같은 것을 들고 있던 하얀색 코트에 슬림한 금속 갑옷을 차려입은 직업자, 기사 같은 차림의 여자가 다가와 살짝 목례한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환인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금발에 고양잇과 귀를 한 여기사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궁 관리부대의 시라크 페인닐이라고 합니다. 명단 대조를 위해 본인 확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파티 리더인 환인입니다. 이쪽은 이실리테, 안느, 비상, 셋입니다.”

환인이 내민 신분패와 명단을 번갈아 보던 여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분패를 돌려준다.

=확인했습니다. 금일 오전 일찍 입장하셨다가 지금 퇴장하셨군요.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평상시의 입장과 퇴장 형식에 맞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현재 마주하고 있는 직업자의 태도는 정중했고 상황도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환인도 신중하게 대답했다.

“미궁 내부에서 평범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듯 해서입니다. 오늘이 감옥 미궁 첫날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형종의 출현 횟수가 비정상적입니다.”

=비정상적이라면 어느 정도였는지?=

“7시간 동안 180마리에 가까운 이형종을 잡았습니다. 그것도 지하 2층에서였습니다. 더욱이 중핵으로 판단되는 이형종도 상층에서 등장했기에 일단 물러난 겁니다.”

여기사의 금색 고양이 귀가 쫑긋하고 선다.

=방금 중핵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여기사는 뒤에 서있는 이실리테와 안느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환인에게 묻는다.

=혹시 사냥에 성공하셨는지?=

“…….”

환인이 대답하지 않고 여기사를 응시하자 여기사가 작게 웃으면서 명부판을 든 손으로 살짝 손사래를 친다.

=전리품을 빼앗는다거나 불이익을 주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음…….=

=부대장님. 그걸 말씀드리는 건 좀.=

금발 여기사의 뒤에 서 있던 스핑크스 고양이 머리의 남자 기사가 슬쩍 끼어들었지만, 여기사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환인이라 자길 소개한 남자의 뒤에 있는 저 거구는 척 봐도 희소 직업자다. 거기다 아우라의 농도만 보자면 자신보다 높은 6급.

그런데도 저 직업자가 아닌 눈앞의 아우라도 없는 법사가 리더를 맡고 있다. 그 말은…….

여기사는 환인에게 짧게 설명했다.

=나올 때 보셔서 아시겠지만, 현재 우둔 고트모그의 감옥 미궁에 입장 통제가 내려졌습니다. 나오는 분들께는 약간의 사정 청취를 받고 있지요. 그 이유는 지하 20층에서 중핵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랬군요.”

환인은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환인과 부대장이라 불린 여기사의 대화가 길어지자 비슷한 차림의 직업자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모여들고 있었다.

위협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모여든 분위기.

‘모두 장비 수준이 훌륭하군. 코트도 일반 천이나 가죽이 아니라 마수 가죽인 듯 하고……’

병사들과 파르히스트 소속으로 보이는 직업자들이 대량으로 모여있는 데서 환인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이 같은 코트 복장의 직업자들은 같은 미궁관리 소속일테고…… 아마도 19층에 진지를 구축한 뒤 20층에 있는 미궁의 심장을 지키던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데 갑자기 중핵이 사라졌고 미궁에 이형종이 늘어나자 병력을 동원해 입장을 막고 미궁에서 퇴장하는 사람을 붙잡아 조사를 시작한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상을 향해 손짓했다.

쿠우.

비상이 옆에 붙자 이실리테가 눈치 빠르게 비상식량의 등짐에서 해골 거인의 부산물이 담긴 아공간 주머니와 자루를 내렸다.

그 행동이 뜻하는 바에 부대장은 고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환인에게 눈빛으로 허락을 구했고,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지시해서 자루를 열었다.

그리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온 반동강 난 거대한 두개골.

=야. 저거 중핵의 두개골 아냐?=

=맞아. 저 크기면 확실해. 그런데 반동강이 났네…….=

=누가 했지? 저 덩치는 워 해머를 착용 중인데 설마 저 4급 전사가?=

주위가 웅성거리는 중에 부대장도 표정이 굳어져서는 스핑크스 고양이 머리의 기사에게 확인을 구했다.

=……부관. 맞지?=

=예. 중핵이 맞습니다.=

부대장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가린 채 반으로 깨끗하게 쪼개진 두개골을 응시하다가 자기 키보다 더 큰 대검을 비켜 맨 이실리테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 두개골을 쪼갠 게 4급 전사라고?’

부관에게 시선을 돌린 여기사가 쪼개진 두개골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시선으로 물었다. 너라면 이렇게 할 수 있겠냐고.

‘하고자 하면 할 수야 있겠지만 쉽지 않겠죠. 일단 성공 확률은 10% 미만일 겁니다.’

‘정황을 보면 저 4급 전사가 그걸 해냈다는 건데 이해가 돼?’

‘글쎄요. 무기도 마도기인거 같고 리더인 남자도 법사 같으니 뭐, 운이 좋았겠죠. 6급 희소 직업자도 있고요.’

부대장과 부관의 눈짓 대화를 바라보던 환인은 눈앞의 여기사가 상당한 직급을 가졌으며 성격도 그렇고 품성도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면 여기서는…….

즉각적으로 몇 가지 계획의 변동을 주었다. 줄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퇴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명단을 대조한다면 다른 이유는 둘째치고 신상이 특정된다. 길레스=벡슬의 죽음으로 인한 소란이 벌어질 때 특정된 신상은 이쪽에 불리하게 작용할 터.

환인은 속으로 계획의 태반을 갈아엎으며 입을 열었다.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기사님이라고 하면 됩니까?”

=아, 예.=

“저희가 이 해골 거인과 마주친 건 지하 2층이었습니다. 지도로 보자면 5번 방이겠군요.”

부대장과 그 부관, 이야기를 들은 주변의 기사들 표정이 굳어진다.

=부관, 지도.=

즉시 지도를 가져와 위치를 확인하는 부대장에게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6번 방에는 희생자분들이 계셨습니다. 소지품을 보니 아클라멘토 성립 대학원의 학생들인 거 같던데…….”

=뭐라고요!?=

매우 놀라는 부대장의 모습에 환인은 속으로 미소를 그렸다.

당첨이다.

“시신은 수습해왔습니다만, 평범한 모험가인 저희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병사님들께 인계해드리려 했습니다만.”

이실리테에게 손짓해 다섯 명의 시신이 담긴 자루 다섯 개를 내려놓는다.

그 과정에서 챙긴 피에 젖은 소지품을 부대장에게 건네주자 부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밑부분이 피에 젖은 다섯 개의 자루와 건네받은 피 묻은 소지품들.

=……하아아.=

짙은 한숨을 내쉬고 어두워진 하늘을 잠시 바라본 부대장은 구경 중인 기사 몇을 불러 아클라멘토 대학원에 소식을 넣으라 지시했다.

그리고 환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귀하의 정의로운 행동에 짐승신님도 만족을 표하실 겁니다. 저 역시 후배들을 수습해 미궁에 먹히지 않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미궁이 시신을 먹고 성장하는 것을 막아주신 것에 미궁 관리부대의 부대장으로서도 감사드립니다.=

허리를 숙인 부대장의 정수리를 보는 환인의 눈빛이 재차 깊어졌다.

단순히 시체를 가져 나왔다고 보여주는 예의라고 보기엔 과하다. 마찬가지로 미궁 관리부대의 측면에서도.

‘후배라고 했었지. 아클라멘토의 졸업생이라면 소지품에서 후배들의 신상을 어느 정도 유추했다는 건가.’

그 말은 저 죽은 다섯 명의 신분이 절대 낮지 않다는 뜻이 된다.

환인은 시라크 여기사에게 유감을 표시했다.

“후배분들이 당한 횡액에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의적절한 품위 어린 표현에 시라크는 속으로 살짝 당혹감을 느꼈다.

이 남자, 신분이 높은 사람인가? 언행도 그렇고 말하는 데 있어 어색함이 없다. 이런 말투를 자주 썼음이 느껴진다.

부대장의 눈빛이 바뀌는 걸 간파한 환인은 본격적으로 적당한 연기를 시작했다.

“이걸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 가지가 우려된다는 듯이 주위를 슬쩍 훑으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시라크는 또 뭔가 더 있나 싶어 모여든 기사들을 물리고 부관만 남긴다.

환인도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잠시 물러나라고 한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후배분들의 사망에는 타의가 조작되어있는 듯했습니다.”

길레스=벡슬의 어리숙한 연기가 아니라 일부나마 진심이 담겨있는 연기 아닌 연기. 지금까지 이 연기를 간파한 사람은 지구와 니오네브레스 양쪽을 합쳐 1명도 없다.

미궁 관리부대의 부대장인 시라크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후배들이 미궁에서 죽은 것만 해도 큰 문제인데, 뭐? 살해당했다고?

시라크는 연이어 몰려오는 충격적인 사실에 두통이 살짝 생기는 것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평소였다면 저의를 의심했겠지만, 눈앞의 남자는 미궁 안에서 벌어진 사고를 외면하지 않고 직접 수습해서 나온 선량한 사람이다.

머리가 복잡해지던 중 환인이 품에서 꺼낸 1층의 지도 뒷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시라크는 미간을 더욱 좁혔다.

언행도 그렇고 그림까지? 시라크는 환인이 고족이나 호족에 버금가는 신분이라고 착각하는 한편 코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기에 미궁 실습을 나온 아이들이라면 나름 관직을 차지한 사람들의 자식일 텐데 살해당했다니. 적지 않은 소란이 벌어지겠군.

그렇게 생각하던 중 시라크는 환인이 내민 종이를 받아들였고, 검회색 늑대 머리의 남자가 그려진 것을 본 시라크의 얼굴은 숫제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워졌다.

옆에서 그림을 들여다본 부관의 얼굴 주름도 극심하게 진다.

환인은 그런 두 명의 반응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미궁 강도로 추측되는 자들과 함께 행동하던 남자입니다. 입고 있는 옷이 범상치 않아서 자세히 살펴보았었습니다.”

=부대장님. 이 사람…….=

=캅셀. 입 다물어.=

부관의 입을 다물게 한 시라크는 재차 입을 가리고 심각한 표정을 만든다.

=이 사람을 본 게 확실합니까?=

“예. 해골 거인을 사냥한 뒤 저희 주변을 맴도는 듯 행동하더군요. 방심하지 않고 주의와 경계를 기울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습니다만, 그 행동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겠지요.”

시라크는 참을 수 없는 짜증과 곤란함, 곤혹스러움, 성가심이 묻어나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찰랑거리는 금발을 벅벅 긁었다.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준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정말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죄송합니다만, 이걸 이 자리에서 말씀해주시는 저의에 저는……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법사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게 정상이지요. 하지만 저희는 결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안느, 잠시 이리로.”

안느를 불러서 그녀가 땅신 교단의 자유 성투사라는 걸 인증하자 시라크와 부관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땅신 교단은 미궁을 신의 성역으로 여기는 곳이다. 미궁 내부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하고 증오하는 이들.

그런 교단의 성투사라면 더더욱 범죄와 연관이 없지.

=의심으로 인해 불쾌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오해를 풀어주셔서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제야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주신 것이 이해되는군요. =

고개를 숙여 사과와 감사를 표시한 시라크는 이어서 팔짱을 끼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잠시 후 맑아진 눈으로 환인을 응시하며 경고했다.

=이건 후배들의 시신을 수습해오신 모험가님께 호의로 드리는 경고이자 조언입니다. 부디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다른 곳에도 이야기를 퍼트리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알려진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모험가님이실 테니까요.=

“……경청하겠습니다.”

=모험가님이 그린 인상착의의 주인은 인근 도시의 문제아라고 알려진 사람입니다. 얼마 전 파르히스트에 입도하였다고 알려져 성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는 분이시지요. 모험가님은 현명하신듯하니…… 이쯤 되면 제가 무얼 말씀드리려 하는지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짐작이 갑니다. 제가 입을 연다면 적지 않은 분들이 곤란을 겪으시겠군요.”

=그건 저희의 업무이니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제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 모험가님께서 곤란을 겪으실 거라는 겁니다. 특히 크라버리는…… 아무리 꾸며도 살기 좋다고 할 곳은 아니니까요.=

환인은 대답 대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모든 사건과 사고를 길레스=벡슬을 위주로 해서 소문을 꾸며 엮으려 했는데 길레스=벡슬의 평판은 이미 개차반이었고 파르히스트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니.

이러면 일은 더 간단해진다.

=그래서 모험가님이 알려주신 이 정보는 표면적으로 묻으려 합니다. 모험가님께서도 이 남자를 미궁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잊으시길 바랍니다. 동료분께도 단단히 말씀드리시는 게 좋을 거고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리되면 수사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희 파르히스트 기사단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자신감을 드러내는 시라크를 보며 환인은 살짝 웃었다.

이 부대장, 정말 사람이 좋다. 이렇게까지 이쪽을 보호해주려 하다니. 아마도 시신을 수습해서 가져나온 것과 안느의 정체로 인해 이쪽에 좋은 이미지를 가진 거겠지.

이렇게 되면…….

‘죽은 저 다섯 명의 여자 신분이 적당히 높으면 좋을 텐데.’

너무 높아도 곤란하다. 신분이 너무 높으면 오히려 더 큰 소란으로 번질 테니까. 그저 적당히…… 고족 직계 정도면 좋을 텐데.

그때 인파를 헤치고 하얀색에 같은 무늬의 휘장을 새긴 로브 차림의 여러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들을 목격한 시라크가 슬쩍 귀띔해준다.

=아클라멘토의 교수들입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려 할 테니…….=

“동료들에게 가봐야겠군요. 기사님의 조언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예. 협조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환인의 이야기에 부대장이 조금 큰 목소리로 들으란 듯이 대답하자 아클라멘토의 교수들이 즉각 이쪽으로 시선을 준다.

그 틈에 환인은 이실리테와 안느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면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지. 그때까지 아무 말 하지 말고 조용히 있도록.”

=네, 주인님.=

=응.=

두 명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뻑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때마침 수달을 닮은 머리의 아클라멘토 교수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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