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162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길레스 벡슬. 크라버리의 성도 쓰지 못하는 것을 보면 호족의 말단 중의 말단이겠지요.’
「…….」
‘높게 쳐줘도 본가의 방계 중의 방계 정도일까. 보아하니 행실도 별로 좋지 않고 머리도 똑똑하지 못한듯하니 가문에서 중요하지 않은 식충이 포지션이겠군요.’
환인의 촌철살인에 길레스=벡슬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환인은 점차 인신공격의 수위를 높여갔다.
‘하는 짓거리도 저열하고 품위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으레 느껴질 인간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개차반이니,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혈족 내에서도 내놓은 사생아 취급을 받았을 것 같은데, 틀린 점이 있습니까?’
검회색 늑대 머리의 입 주변이 경련을 일으키듯 꿈틀거린다.
거짓말로 자신을 꾸미려 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면 전부 정답이라는 거겠지.
환인은 덤덤한 척 말을 이어 나갔다.
‘말은 1급 호족이라지만 당신의 언행에서 추측해보자면 당신 대, 혹은 당신의 자식 대에서 고족으로 강등당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능해 보입니다. 나쁜 짓도 똑똑해야 잘 할 텐데 이거야 원, 미궁 강도떼를 데리고 1층에서 강도질이라니, 제정신입니까? 하긴, 제정신이 아니니 이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를 한 거겠지요.’
「…….」
‘후환을 신경 쓰고 조처를 했다고 했습니까? 이건 조치가 아니라 제발로 함정에 걸어가는 수준입니다. 당신이 입장한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을 조사한다고 하셨지요. 크라버리가 그럴 수 있을 만큼 파르히스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을 조사한다면 당신이 부린 미궁 강도들의 정체 또한 들통날 테고 그런 당신들의 모습을 본 사람도 있을 텐데 그들 입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미궁 강도들과 당신 사이의 밀약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당신의 행동이 은밀했습니까?’
밀약이 은밀했고 남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숨기는 게 완벽했다 해도 지금처럼 대놓고 지적받으면 `혹시?` 하게 되는 게 사람이다.
환인은 눈썹마저 꿈틀거리는 길레스=벡슬의 반응을 지켜보며 말을 쏟아붓는다.
‘후환을 신경 써서 후드 등으로 모습을 감출 생각도 안 했더군요. 신분패와 현금거래 증서 또한 몸에 지니고 있었고요. 왜입니까? 자신의 신분을 알아봐달라고 자랑하기 위해서입니까? 후환을 대비한다고 했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대놓고 행동하며 정체를 완벽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당신의 신분과 함께 당신이 미궁 강도와 함께 행동하는 게 밝혀지면 크라버리는 기뻐서 날뛸 겁니다. "이런 머저리 병신 새끼가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다니!", "이런 벌레 같은 새끼가 집안을 먹칠하는군!" 하면서요.’
환인은 큭큭, 머저리도 이런 머저리가 없다는 의미로 비웃는다. 그러자 길레스=벡슬이 눈알을 부라리며 거친 숨을 토해내듯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한다.
‘당신 같은 방계의 사망에 본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일단은 호족이니 말입니다.’
「희망을 품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가진 희망을 더 해서 절망이 되돌아올 테니까요.」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환인의 이야기를 끊기 위해 길레스=벡슬은 참기 어려운 분노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애써 호족의 품위를 억지로 끌어낸다.
그 반응을 환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연극 같아 실소가 흘러나올 지경이다.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한 채 부리는 거만한 태도는 볼썽사납기 그지없으니까.
환인은 길레스=벡슬의 반박에 잠시 그가 한 말과 행동을 차근히 되짚어보았지만, 역시 문제 될 것은 없다. 오히려 저 말대로라면 자기가 만든 함정에 자기가 빠진 모양새가 될 거다.
결론을 내린 환인은 머릿속으로 정리해둔 계획을 차분히 읊기 시작했다.
‘저는 미궁을 나가면 소문을 조작해 퍼트릴 생각입니다. 흑색선전이라 해도 괜찮겠군요. "크라버리의 한 호족이 파르히스트의 미궁에서 강도짓을 하는 것 같다", 꽤 관심 받을 것 같지 않습니까?’
「…….」
‘물론 대놓고 소문을 퍼트릴 생각은 없습니다. 숨어서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체계적으로 퍼트릴 겁니다. 누구는 그 강도가 검회색 인랑족이었다고 할 것이며 누구는 크라버리의 평판 나쁜 용병들과 어울리더란 말을 흘릴 겁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도 나왔다는 식의 루머가 퍼지겠죠. 증거? 당신들이 죽인 사람이 증거가 될 겁니다.’
환인의 시선이 다섯 자루의 시체 주머니로 향했다. 길레스=벡슬의 시선도 아클라멘토 성립 대학원의 학생들이었던 것이 담긴 주머니로 향한다.
죽은 사람의 증거는 아클라멘토 성립 대학원의 졸업반 학생들 다섯이 될 거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조사 끝에 자멸할 테지만, 그 조사 과정에 자신이 주목받는 것도 원치 않고 좀 더 일이 급진적으로 진행되길 바라기에 일부러 자극적으로 손을 쓸 생각인 것.
‘그뿐만 아니라 학원생을 살해한 것은 당신과 당신이 이끄는 미궁 강도일 거란 루머도 퍼질 겁니다. 이미 수십 명이 미궁 강도에게 당했단 근거 없는 루머는 덤일 거고요.’
실상은 해골 거인에게 살해당한 거지만 소문이란 으레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가십인 ‘카더라’를 통한 자극적인 기사의 확대가 주목적이니까.
그 소문의 진원지는 물론 불특정 다수가 모이고 흩어지는 주점이 될 거다.
대학원 근처의 주점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흐르기 시작하겠지.
도시에는 한동안 후드 로브를 입고 돌아다니며 은밀한 소문을 퍼트리는 남자가 활개 칠 것이다.
현재 대축제 준비 기간이긴 해도 이런 연루설이라면 가십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하는 이 세상에서 꽤 큰 반향을 일으키겠지.
그 부정적인 소문이 파르히스트 호족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웨이포드와 파르히스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존재하는 것을 고려하면 파르히스트 성주도 한 성격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가 도시에 퍼지기 시작하고, 그런 소문의 진위를 확정해주는 듯이 크라버리에서 조사단이 파견된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파티가 들락거리는 곳이 감옥 미궁이다.
헌데 15일 전에 파르히스트에 도착해 미궁에서 살해당한 호족이 미궁에 진입하기 전의 파티를 전부 조사한다고? 더욱이 자기들 영역도 아닌 상급 도시인 성도의 미궁을?
듣자 하니 파르히스트 성주와 혈연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걸어서 한 달 거리가 있는 도시의 호족이?
호족 간에 기본 스탠스는 존중과 협조라지만, 그 조사를 허락하는 것은 다른 일이며 상급 도시 영주로서 자존심이 그 일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100번 양보해서 파르히스트 성주가 그 조사에 협조한다고 가정하자.
조사했더니 크라버리의 호족이 그쪽 출신 미궁 강도와 손잡고 자기 도시의 근본인 미궁에서 인간 사냥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즉시 전쟁이다.
환인은 계속 말했다.
‘크라버리가 실행한 전수조사로 크라버리의 호족이 저지른 미궁 강도짓이 알려진다……. 당연히 파르히스트 성주인 펜리 후스티오 파르히스트의 귀에도 들어갈 텐데, 장담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지요. 전쟁이라던가.’
「…….」
‘이 일련의 사건 용의자는 당연히 당신입니다. 그 소문을 부정하거나 정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하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가문은 당신의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크라버리를 말아먹은 희대의 병신 쓰레기 새끼라고 자자손손 이야기를 전하겠지요.’
길레스=벡슬은 순간적으로 무표정을 보였다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척 손뼉 치는 모습을 보였다.
「대단합니다. 훌륭해요. 그런 식으로 인식을 조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그 치밀한 계획과 조각조각 흩어져있는 진실과 정보를 조합해 입맛대로 가공하겠다니, 당신은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졌군요! 저도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참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정리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한 사실을 두고 아는 척 떠벌리는 것만큼 흉한 것은 없습니다, 길레스.’
「…….」
‘무엇보다 당신은 그걸 보지 못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을 담아 말씀하십니까?」
‘그때 너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환인의 섬뜩한 대답에 길레스=벡슬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용무는 끝났다. 영혼 구슬로 만들어 42시간 동안 유지해두면 써먹을 일이 몇 가지 있지만, 그건 자신이 영혼사임을 밝혀야 하는 계획이 수반된다.
거기에 더해 이 작자는 미련과 한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진다. 카턴 마을의 악령화한 여자 영혼을 떠올려보면 이 작자도 혼재를 넘어 어떤 이레귤러가 될지 모른다.
더욱이 42시간이 지나 영혼 구슬 상태에서 영혼이 된 사람이 그대로 성불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만약 그때 관리 미숙으로 놓치기라도 하면 강제력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 뒤 어떤 일을 저지를지도 미지수.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환인에게 조금도 없었다. 무엇보다 길레스=벡슬을 상대로 실험 중인 요소도 있고.
그 실험의 끝을 보기 위해 왼손에 진주색 위상석을 쥐고 오른손으로 소울 스틱을 들어 영혼 화살 한 발을 장전한다.
영혼이기 때문에 영혼 화살이 보이는지 자기 머리를 조준한 화살의 모습에 길레스=벡슬이 티가 날 정도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남은 다 죽고 사라져도 괜찮지만, 자신은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라도 있는 걸까.
「영혼사이면서 영혼을…… 해쳐도 괜찮은 겁니까!?」
‘넌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을 해쳤지. 그건 괜찮은 건가?’
「그자들은 죽어도 지장 없는 천민이었습니다! 고귀한 혈통에게 유흥을 제공해 죽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한 거란 말입니다!」
‘너도 내게 천민이나 다름없다. 영혼사라는 고귀한 직업자에게 마음의 평안과 안녕을 제공하기 위해 소멸당하는 거다. 무쓸모에 밥버러지인 네게 있어 무한한 영광이 아닌가.’
「……!」
자신이 한 말이 그대로 돌아오자 길레스=벡슬의 눈이 한차례 크게 떨렸다.
‘멈춰라.’
「……!!」
도망치려던 길레스=벡슬은 그 순간 날아든 강제력에 손가락 하나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육체 없는 영혼이 되었지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미궁 안의 어둠이 눈동자에 집중된 것처럼, 영혼사의 새까만 동공이 자신을 영혼째 집어삼키는 듯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채우는 중에 실체 없는 육신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목소리가 쏟아진다.
‘겁도 없고 공포도 없으며 두려움도 없다 하며 떠벌리던 길레스=벡슬이, 겁먹고 공포에 떨며 두려움 속에서 달아나려 하는군. 이게 네가 말하는 명예롭고 고귀하다는 호족의 실체인가. 참으로 하잘것없고 비루먹은 실체구나.’
고, 공포? 이게 공포심이라고? 내가 비천한 하층민들이나 느낄 감정을…… 겪고 있다고!?
‘그렇다.’
그럴리 없어! 나는 호족이다! 선택받은 인간이란 말이다!! 이런 내가 공포를 느끼면서…… 영혼마저 소멸당할 리 없어!!
‘아니. 너는 저 빈민가의 하수구 속을 기어 다니는 구더기만도 못한 버러지 그 자체다. 공포를 느끼면서 죽기 싫어 발악하다 추하게 소멸하는 것, 그게 바로 너에게 어울리는 종말이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이건, 이 상황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전부 사실이다. 너는 이제 소멸당해 결코 신의 정원에 들어가는 일 없이 허무로 돌아가는 거다.’
아니야!!! 그래서는 안 돼. 나는, 죽어서 신의 정원에 들어가 더욱 더!! 우월한 성족으로 다시 태어날 운명이 있단 말이다아악!!!
환인은 길레스=벡슬이 발광할수록 회백색 영혼이 적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설마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이야.
‘안됐군. 그럴 일은 없다.’
끄아아아아아……!!!
환인은 이제 뚜렷한 적색을 띠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길레스 벡슬의 머리에 영혼 화살을 쏘았다.
피슛
으, 어어어, 어어버버어어어
미간에 작은 구멍이 생긴 길레스=벡슬의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마치 폭탄이 터지기 직전처럼 괴기스럽기 그지없는 장면. 그러나 폭발하는 일 없이 풍선이 터지듯 퍽 소릴 내며 터졌다.
이어서 적색으로 물들어가던 영체의 몸뚱이도 버둥거리듯 타이어 인간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주변의 무언가를 빠르게 흡수하면서 작아지더니…….
파악!
……짧고 강한 빛의 파동을 뿜어내고는 그대로 소멸했다.
=응? 뭐지.=
=왜 그래?=
=아니 방금 뭔가 공기가 살짝 떨린 것 같아서…… 기분 탓인가?=
=난 못 느꼈는데.=
안느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실리테가 동의해주지 않으니 기분 탓이었나보다 하며 넘어간다.
빛가루가 오후의 햇살 속을 날아다니는 작은 먼지처럼 떠다니는 가운데 환인은 입가의 미소를 감추고 그 빛가루를 응시했다.
‘역시 혼재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군.’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서 잠깐 상상했던 것이 떠올라 실행에 옮겨봤는데 결과가 기대 이상이다. 이 정도면 혼재 테러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슬아. 슬슬 한 바퀴 더 돌아볼까?=
=그러자. 주인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받은 지도를 펼쳐 들고 안느와 짝을 이뤄 서쪽 방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에는 5번하고 9번 방으로 가보자.=
=18번 방은?=
=거긴 함정 문이라고 주인님이 말씀하셨잖아. 9번에서 7번으로 넘어갔다가 14번으로 가면 될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이 옆방으로 넘어간 뒤 환인은 길레스=벡슬이 소멸한 장소를 다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혼재 테러를 실행하는 건 곤란해.’
자신 말고 다른 영혼사가 혼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테러는 자신이 한 짓이라는 게 대번에 들통난다.
물론 들키지 않게 두건을 쓰고 후드도 쓰고 마스크도 하고 이런저런 조치를 곁들일 테지만, 일부러 위험에 뛰어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
테러는 정말 최후의 최후에 쓸 비장의 수단이다.
환인은 주머니에서 핏빛 위상석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조금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보다 정화하지 않고 소멸시켜서일까, 아니면 혼재가 되어가는 와중에 소멸시켜서일까.
길레스=벡슬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쉬운 환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