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161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이실리테가 정성껏 준비한 요리로 허기를 채운 환인 일행은 틈틈이 6번 방과 인접한 5번과 7번 방, 조금 멀리 나가서 9번과 14번 방을 돌며 생성되는 이형종을 사냥해나갔다.
처음에는 모두가 함께 움직였다. 중핵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상층에 출현한 이상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생각해보면 안느와 환인은 홀로 중핵을 해치울 실력자이고 이실리테도 그만한 힘이 있음을 증명했다.
일행이 모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사람들이 시체를 넣어놓은 방에 접근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환인은 비상과 함께 6번 방에서 대기했고 이실리테는 안느와 움직이며 이형종을 잡아나갔다.
=하앗!=
콰자작!
약간 붉은 기운이 맴도는 중철 대검으로 돼지를 닮은 해골의 두개골을 박살 낸 이실리테가 안느를 돌아보며 묻는다.
=이걸로 48마리째지?=
=응. 생각보다 이형종이 많이 나오네. 이 속도면 10일도 안 걸리겠어.=
바닥에 흩어진 이형종의 해골에 징표를 갖다 대 정화하고 돌아온 안느가 묻는다.
=무기는 어때?=
=확실히 더 단단해졌어. 자루와 날의 이음매에서 느껴지던 미묘한 흔들림이 사라지고…… 마치 쇠를 통짜로 만든 것처럼 느껴져.=
해골 거인을 해치우며 마도기화 한 중철 대검의 효과를 실감하는 것은 빨랐다. 대검을 든 순간 뭔가 손이 연장된 것 같은 일체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경화인가 보네. 단순하면서도 좋은 기능이지만 그거 하나밖에 효과가 없진 않을 거 같은데.=
=그런 거야?=
=중핵의 위상석이잖아. 못해도 최소 4급 위상석일텐데 그 정도면 효과가 두 개 정도 붙는 게 일반적이거든. 거기다…….=
보통은 효과에 따라 장비의 색이 정해지기 마련이라며 경화는 주로 회색이나 옅은 갈색이지 적색이 아니라고 설명해주는 안느.
=음…….=
이실리테는 안느의 설명을 들으며 마도기가 된 자신의 중철 대검을 살펴봤다.
경화 효과를 톡톡히 실감 중이었는데 이것 말고 또 다른 효과가 있다고?
대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실리테가 물었다.
=마도기의 숨겨진 기능을 끌어내는 건 어떻게 하는지 알아?=
=임의 발동형이면 무기에 위상력을 밀어 넣는 게 보통인데…….=
그 말에 두 손으로 중철 대검을 쥐고 현재 보낼 수 있는 수준의 위상력을 무기로 찔끔찔끔 흘려보내본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발동이 안 되는지, 아니면 발동형이 아닌지 무기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무기를 내린 이실리테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위상력을 조금 밀어 넣어봤는데 반응이 없네.=
=네가 아직 4급이라서 그럴 거야. 5급이 되어서 다룰 수 있는 위상력이 많아지면 그때 발동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무기 마도기화에 사용한 위상석의 급수에 따라 먹는 위상력의 양이 달라지거든.=
=그럼 네가 한 번 발동해보면 안 돼?=
=안돼.=
작은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는 모습에 이실리테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 모습에 안느가 웃으며 설명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마도기의 경우에는 특수 기술을 쓸 때면 가끔 귀속 현상이 일어나기도 해. 그러면 그때 기술을 쓴 사람 말고는 기술을 발동시킬 수 없어. 혹시라도 귀속 현상이 일어나면 너도 곤란하지?=
=그, 그러네.=
이 중철 대검, 레드릭이라고 이름 붙인 대검은 주인님이 자신에게 선물해준 것이다. 그것을 자기가 다룰 수 없게 되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
=앞으로도 꾸준히 무기에 위상력을 밀어 넣는 걸 연습해.=
=응? 왜?=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고 찡긋 윙크하는 안느의 행동에 이실리테도 눈치챘다. 그건 위상력의 통을 늘릴 수 있는 훈련이며, 함부로 전수해주지 않는 특별한 훈련법이라고.
=고마워.=
=…….=
감사 인사도 못 들은 척 하는 안느의 태도에 확실하다고 생각한 이실리테는 일부러 주제를 돌렸다.
=이제 앞으로 952마리 남았지? 1,000마리를 다 정화하면 그 뒤에는 뭐 할 거야?=
=익스퍼트 토너먼트 준비해야지. 넌 어쩔 건데? 너도 출전할 거야?=
=응. 적어도 16강 안에는 들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훈련삼아 이형종과 싸우는 거지만, 뭔가 싸우는 맛이 밋밋하다. 주인님이 대련해주시는 게 훨씬 좋은데 말이야.
주인님과 비상이 있는 6번 방으로 돌아가며 속으로 중얼거리니 그 옆에서 안느가 히죽 웃는다.
=흐흐흐. 그 맘 알아. 연모하는 주인님께 잘 보이고 싶은 거지?=
=…아니…….=
=아니야? 대장한테 나쁘게 보여도 돼?=
=그, 그렇게는 말 안 했거든.=
=그래그래. 미궁을 나가면 나도 훈련을 도와줄 테니까, 같이 힘내자?=
=……응.=
듣기로 플뢰는 다들 진지하거나 담백하거나 상냥한 성격이라던데. 안느는 듣던 것과 달라서 조금 당혹스럽다. 왠지 유들유들한 게…….
6번 방으로 돌아온 이실리테는 가장 먼저 주인님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깔개를 깔아놓고 그 위에 배를 깔고 앉은 비상. 그리고 그 곁에 양반다리로 앉아 먼 곳을 응시하며 명상 중이신 주인님.
=…….=
옆머리에 시선이 닿는 게 느껴져 돌아보니 안느가 청순한 얼굴에 맞지 않는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주먹으로 허리를 툭 때리자 안느는 소리 없이 킬킬 웃으며 방 중간에 피워놓은 모닥불 근처로 가서 앉는다.
이실리테도 안느의 곁에 앉으며 무기 손질 도구를 꺼내 대검 상태를 살피고 대검에 묻은 시체의 얼룩을 닦으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처음 안느가 동료로 들어올 때만 해도 이실리테는 걱정했었다.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마찰을 빚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그러나 안느의 성격은 특별히 모난 곳 없이 무난했기에 시름을 덜었고, 친근감이 넘치는 성격이었기에 금방 친해져서 안심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동료와 분쟁을 일으켜 주인님께 폐를 끼치기 싫었으니까.
문제는 다른 부분에서 곤란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님과 단둘이 있을 때는 하루에 몇 번, 주인님을 은근슬쩍 유혹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행이 늘어났더니 그런 기회가 대폭 줄어든 것.
이건 안느 탓이 아니라 다른 동료였어도 같았겠지. 오히려 안느는 자신이 주인님과 맺어지는 걸 바라는 듯 이것저것 연애담을 들려주며 은근히 용기를 내길 부추기는데…….
솔직히 난감하고 곤란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평생 사귀어본 적 없는 동성의 친구 같다고 할까?
=후우.=
근처 방을 한 바퀴 돌았으니 이형종이 다시 나타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무기 손질을 끝내고 모닥불에서 좀 떨어진 장소에 선 이실리테는 자세를 잡고 중철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자투리 시간을 놀아서 뭐 할까. 자신은 주인님보다 약한 것은 당연하고 안느보다도 훨씬 약하다.
주인님과 안느를 따라잡으려면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
붕 붕 붕
환인은 육중한 대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릴 들으며 앞에서 흐릿하게 미소 짓고 있는 길레스=벡슬의 영혼을 계속 응시했다.
「그렇게 노려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조치는 당신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아니라 만약을 생각하며 보복을 짜놓은 계획이었으니까요.」
“…….”
이실리테와 안느를 돌아다니게 해놓고 환인은 길레스=벡슬의 영혼을 불러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과 동류라는 것에 호기심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안전에 관한 걱정은 없었다.
자신은 영혼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우위에 설 수 있는 강제력이 있고, 길레스=벡슬은 이제 죽은 몸이기에 현실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기 때문.
후자의 경우 자신이 모르는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자신은 영혼도 소멸시킬 수 있다.
허튼짓 거리를 한다면 바로 머리를 날려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불러낸 길레스=벡슬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환인을 보곤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 평범한 영혼사가 아니었군요.’
라고.
그리고는 살인마들의 과시욕, 현시욕처럼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다고, 당신의 과단성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고. 자기는 이때까지 수백 명을 재미 삼아 죽여왔지만, 당신처럼 자기가 원흉임을 즉각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고.
‘내가 자신과 동류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가.’
길레스=벡슬의 태도는 환인을 자신처럼 사이코패스라고 알아본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강제력으로 대답을 강요했다. 내가 너와 같은 사이코패스인지 알고 있었냐고.
‘사이코패스? 저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입니까? 그 말은 당신도 저와 같은 사람이라는 거군요. 이거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살아있었다면 당신과 친해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헛소리라고 일축하자 길레스=벡슬은 눈치 못 챌 수가 없는 어리숙한 연기를 선보였다.
‘친해질 수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단정하시니 슬프군요. ……하하! 그것도 눈치채셨습니까? 정답입니다. 슬픈 것은 살아서 당신을 괴롭히는 희열 느낄 수 없다는 게 슬픈 겁니다.’
그 후로 한참을 떠벌리던 길레스=벡슬의 모습은 알려진 사이코패스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었다.
뻔뻔하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 거짓말이 들통나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른 거짓말을 하고, 양심의 가책 등이 전혀 발동되지 않은 가증스러운 범죄자의 모습.
그랬기에 미궁 강도들을 조종하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람들을 해쳐왔던 거겠지.
말 그대로 반사회성 인격장애. 환인은 길레스=벡슬이 자신의 거울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의 교육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었을 자신의 다른 모습 말이다.
그랬기에 길레스=벡슬을 잠시 지켜보았고, 또다른 자신을 본다는 기분에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졌을 때, 환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죽었으니 이제 제 가문이 당신을 쫓을 겁니다. 맞습니다. 크라버리입니다.’
즉시 강제력을 동원해 그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밝혔는데 사실이었다.
호족은 생사를 판단할 수 있는 주술을 상시 몸에 걸고 다니며 그것은 본가의 안실??과 이어져 철두철미하게 관리된다고.
‘저는 파르히스트의 관광 여행을 떠난다고 본가에 알리고 왔습니다. 제가 죽었으니 본가에서 이제 움직이기 시작하겠죠. 어제 미궁에 들어온다고 위치 기록까지 했으니, 제가 파르히스트에 도착한 날짜부터 죽기 전에 진입한 모든 파티를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수사를 개시할 겁니다. 즉, 당신은 얼마 안 가 크라버리의 파견조사관에게 잡힐 거라는 뜻이지요.’
이 세계에서 호족의 권위를 생각해보면 말이 수사지, 납치 감금 폭행이 이어질 게 뻔한 일.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동시에 협박과 압박을 가하는 길레스=벡슬이지만, 협박받는 대상이 별달리 태도의 변화, 감정의 변화 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자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협박을 들으면 오금이 저린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단체의 접근에 불안을 표시해야 하는데?
뭐, 아직 실감하지 못해서겠지. 간단히 생각한 길레스=벡슬은 다시금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기대됩니다. 영혼사가 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가문에 천벌이 내려져 부모님과 조부모님, 형제와 누이들, 본가의 인물들도 모두 떼죽음을 당할까요? 영혼사인 당신도 죽으면 영혼이 되는 걸까요? 아니면 그분께서 직접 나타나 당신을 거두어들일까요?」
흥분된단 듯이 살짝 떠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환인은 검회색 늑대 머리 남자의 처분을 결정하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비웃음과 함께 코웃음을 치자 길레스=벡슬이 즉시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왜 그런 반응입니까?」
이기적이고 남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정신병, 거기에 선민의식이 생기기 쉬운 호족이라는 높은 신분.그 조합이 자신을 비웃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마저도 우습기 그지없는 환인이었다.
지금 자신의 말에 커다란 모순과 오류가 가득한데 그것마저도 눈치채지 못하다니,이 인간은 생각보다 더 멍청하군.
환인은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