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164화 (164/813)

〈 164화 〉 160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 * *

160 우둔=고트모그의 감옥 미궁

약간 눈 부신 빛이 방안을 한차례 물들이고 사라졌을 때, 이실리테의 아우라는 한층 더 짙어진 상태였다.

저 정도면 4급 중에서도 중간은 가는 농도다. 스사의 연위인 브릴릿보다 한층 더 짙은 수준.

‘그동안 대련의 성과가 중핵과 싸워 이기는 거로 개화한 건가.’

영혼 시야로 해골 거인의 뼈 무더기를 응시하자 기존의 흑회색이 무색으로 변해있었다.

잠시 뼈 무더기를 응시하며 기다렸지만, 영혼이 빠져나온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캉캉캉­

안느가 건틀릿을 낀 손으로 손뼉을 치며 얼떨떨해하는 이실리테에게 축하를 건넨다.

=급수가 오른 거 축하해. 이야, 단번에 4급의 초입을 건너뛰고 중견까지 오르다니, 그동안 노력 엄청 했나 봐?=

=어, 어어? 으응. 응…….=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해골 무더기를 바라보던 이실리테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겁고 심장도 터질 것처럼 뛰는 것을 느꼈다.

중핵과 싸워 이긴 것뿐만 아니라 4급으로 성장하다니.

이실리테는 환한 얼굴로 환인에게 달려가 넙죽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부 주인님 덕분이에요!=

“네 노력이 있어서지. 잘했다. 그리고 4급에 오른 것도 축하한다.”

환인의 치하에 이실리테는 콧잔등과 눈 밑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허리를 재차 깊게 숙였다.

그 모습에 환인은 방금 전투에서 체크해놓았던 미흡한 점을 이야기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감동을 파괴해서 호감도를 떨어트릴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서, 4급이 된 느낌은 어떻지? 뭔가 얻은 힘이나 기술이 있나.”

=잘 모르겠지만, 크게 변한 것은 없는 거 같아요.=

=4급은 별거 없어. 이슬이라면 좀 더 힘이 강해지고 몸이 튼튼해지고 재생력이 늘어나는 정도? 5급은 돼야 선천 직업 능력 하나 정도 더 늘어날걸.=

해골 거인의 뼈 무더기를 뒤지며 대답한 안느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의아해한다.

=뭐야. 위상석도 없고 장비품도 없잖아.=

“중핵을 죽이면 뭔가 아이템 같은 것이 떨어지나?”

=응. 심핵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기운을 많이 받아서 위상석은 거의 열 중 아홉은 들고 있지. 짐승이나 야수 형태는 뭘 가진 경우가 거의 없지만 이놈처럼 인간형의 경우에는 간간이 소지품을 하나둘씩 떨어트리기도 하거든. 그런 장비는 일반적인 마도기보다 성능이 좋아서 비싸게 거래돼.=

“하지만 없다는 거군.”

=어어. 뭔가 이상하긴 해. 중핵이 이런 곳에 출몰한 것도 그렇고 위상석도 없고.=

“미궁이 성장하려는 것과 관계가 있을 수 있겠지.”

환인의 지적에 순간 멈칫한 안느는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보다 이 해골은 어떻게, 돈이 되는 것들인가.”

=중핵의 뼈다귀니까 가지고 나가면 금화 단위의 돈은 나올걸? 시약의 재료든 뭐든 쓰겠지.=

“그러면 장작은 다 버리고 거기에 채우도록 하지.”

비상을 불러 장작만 채워놓은 아공간 주머니를 내리자 격해진 감정을 겨우 가라앉힌 이실리테가 다가와서 물었다.

=주인님. 여기서 사흘간 캠핑하실 건가요?=

“아니. 미궁 강도들의 시체만 정리하고 바로 빠져나간다.”

이런저런 일이 많이 있었다. 곤란한 일이기도 했기에 안느는 몰라도 이실리테는 미궁 침해를 신경 써야 할 상황일 터.

고개를 끄덕인 이실리테는 비상의 등짐 중 장작을 채운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다 뿌리고 해골 거인의 뼈를 주섬주섬 담기 시작한다.

안느도 정화를 끝내고 해골 회수를 돕기 시작했고 환인도 비상에게 주변 경계를 지시한 뒤 해골 거인의 뼛조각 회수에 동참했다.

그렇게 2/3가량의 뼈다귀를 회수했을 때.

“……?”

환인은 이실리테가 잠시 내려놓은 중철 대검으로 시선을 주었고 눈썹을 작게 찌푸렸다.

“이실리테, 안느.”

=네, 주인님.=

=응?=

“내 눈에는 중철 대검의 색이 조금 변한 것 같은데. 너희가 보기에는 어떻지.”

대검의 색이 변했다고? 이실리테와 안느가 중철 대검을 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살짝 커졌다.

=앗. 정말 색이 조금 생겼어요.=

=뭐야. 중철 대검이 마도기화 한 거야? 이슬아, 탐지 도구 좀 줘봐.=

마도기화? 듣기에도 뭔가 있는 단어에 이실리테가 얼른 위상석 탐지 도구를 꺼내 넘겨주었다.

검은색 막대기를 받은 안느는 즉시 작동시켜 중철 대검에 가져다 댔고, 검은색 봉의 끄트머리에 약한 적색 빛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실리테의 몸 이곳저곳에 대본다.

그리고 살짝 아쉬워하며 말했다.

=갑옷에는 아무 일 없네. 맞아, 중철 대검이 마도기가 됐어.=

=정말? 우와.=

=가끔 위상석이 기운으로 변해 무기에 깃드는 경우가 있다곤 들었는데 나도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네.=

신기해하며 2.3m의 중철 대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잠깐 생각에 잠겼던 환인은 작업을 재촉했다.

“일단 정리하고 다음 방으로 넘어가지.”

=어, 응.=

=넵.=

안느가 제공해준 아공간 주머니는 2세제곱미터 용량이나 됐지만, 해골 거인의 뼈를 전부 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3m에 가까운 키의 해골이었다. 인간처럼 세로로 길쭉한 것도 아니고 오랑우탄과 고릴라처럼 앞과 옆으로 벌어진 체격이다. 다 들어갈 리 없다.

그러나 혹시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했던 이실리테는 미리 100리터 쌀 포대 같은 자루를 몇 장 더 사두었고, 200kg은 거뜬히 짊어질 수 있는 비상 덕분에 해골 거인의 뼈를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잘 준비했다.”

=에헤헤…….=

그렇게 전리품을 정리한 환인 일행은 아치형 문을 지나 6번 방으로 넘어간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뭉개진 사람의 육편. 다져진 사람의 흔적. 잡혀 뜯겨나간 팔다리와 비틀려 찢어진 사람의 파편.

사방에 널린 내장과 뼈, 살점의 피바다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중핵한테 살해당했나 보네.=

=…….=

주인을 잃은 유방 한 짝이 피가 고인 바닥에서 푸딩처럼 탱글거리는 것을 바라보던 환인이 고개를 들었다.

다섯 명의 여자 영혼이 각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모습으로 허공에 둥둥 떠서 기운 빠진 눈물을 흘리는 게 보인다.

“……시신을 수습하지.”

=이, 이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딴 데 다녀오면 미궁이 먹어 치울 텐데?=

안느가 기겁했지만, 환인은 대꾸 없이 장갑을 벗고 소매도 걷어 올린 뒤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 사람의 흔적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이실리테도 건틀릿을 벗은 뒤 환인을 따라 뒷수습을 시작했고 안느는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두 손만 허우적거렸다.

이게 평범한 반응이다. 일반적인 사람은 차에 치이거나 바퀴에 깔려 죽은 동물의 시체도 손댈 엄두를 못 내니까.

환인은 그런 안느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안느 넌 문에서 이형종이 넘어오지 않는지 지켜봐라. 비상, 너도 오지 말고 거기 얌전히 있어라.”

쿠엣.

=…….=

피 웅덩이를 돌아다니며 피부색과 영혼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다섯 명 분의 살점을 분류해서 모은 환인은 주머니마다 따로 담았다.

그렇게 작업을 끝내자 안느가 못내 미안한 눈치로 다가와 수건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수건으로 손의 피를 닦은 환인은 자신과 이실리테를 바라보는 다섯 영혼과 마주했다.

루크랑으로만 이루어진 다섯 여성은 엉망진창이 된 자기 시체를 수습해준 환인과 이실리테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보내는 중이었다.

“…….”

그녀들의 드러난 알몸에서 미성숙한 가슴과 발달이 채 끝나지 않은 골반을 보고 아직 어린 나이임을 감지한 환인은 머릿속으로 표현을 정리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정상 여러분들의 시신을 이 이상 수습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

「아…….」

「호, 혹시…….」

“예. 저는 영혼사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과 만나게 된 것도 짐승신님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안느는 재차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대장이 허공에다 대고 혼잣말하는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저곳에 영혼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대장은 끔찍한 모양새의 시신을 수습하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인도하는데 자신은 혐오스럽다고 손도 대지 않고…….

「아아아, 아아아…….」

「으아앙…… 엄마아….」

「엄마, 아빠아…….」

영혼사라는 이야기에 죽음을 재확인한 소녀들이 펑펑 우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남기실 말이 있다면 하십시오.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여러분들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저, 저희는 아클라멘토 성립 대학원의 졸업반 학원생이에요. 졸업 시험 때문에 들어왔다가 커다란 해골한테…….」

다섯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렇다고 해도 이제 대학 신입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입을 열자 소녀들이 울음을 억누르고 작게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 해골이라면 옆방에서 해치웠습니다. 땅신 교단의 성투사가 정화까지 했지요.”

이실리테에게 손짓하자 둘로 쪼개진 해골 거인의 두개골을 꺼낸다.

해골 거인을 물리쳤단 증거에 소녀들의 영혼이 더욱 크게 흐느낀다. 그런데 그 반응이 점차 흐릿해져 가며 모습이 조금씩 뿌옇게 변해간다.

성불의 징조다.

「아아…….」

자신을 죽인 이형종이 토벌되었다는 소식과 증거에 미련이 사라졌는지 다섯 중 가장 어린 소녀가 눈물 한 방울을 떨어트리고는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고마웠어요, 영혼사님…….」

「엄마. 아빠. 죄송해요….」

「흑흑…….」

친구의 성불 모습에 3명이 차례대로 성불한다. 마지막 남은 여자도 성불의 징조를 보이며 눈물 젖은 미소로 환인에게 부탁했다.

「저희 시체를…… 병사님들께…… 대학원에 소식…… 전달…… 부탁…….」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마지막 여자도 퍼져나가는 빛무리와 함께 성불하고, 피 냄새가 가득한 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

환인이 여자와 소녀들의 시체를 모아주고 성불을 도운 것은 측은지심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참혹하게 짓이겨진 다섯 구의 시체. 그리고 해골 거인. 마지막으로 미궁 강도들.

여자들의 사망을 검회색 인랑족이 한 짓으로 꾸미려는 의도였던 거다.

환인은 아직 인랑족을 취조하지 않았지만, 그자의 뒷배가 존재할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시체라면 특정 정보 교란을 위해 얼마든지 가공할 수 있는만큼 만약을 대비한 수단으로 확보한 것.

물론 자신들이 한 짓으로 의심할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쪽에는 땅신 교단의 자유 성투사가 있다. 의심은 간단히 일축할 수 있다.

덤덤한 표정으로 변한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횃불을 켜도록 지시한 뒤 방의 1시 방향의 막다른 방 입구에 다가가 열쇠로 잠긴 문을 열었다.

크왁!

문이 열리자마자 좀비 한 마리가 왁­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환인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영혼 폭발로 방 안쪽으로 날려버린 뒤 영혼 화살을 쏘아 머리를 박살 내주었다.

“비상은 거기서 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지켜보다가 누가 접근하면 알려라. 안느는 미궁 강도들의 시체를 담은 가방을 가져오고.”

그리고 미궁 강도의 시체를 방 가운데 쏟아붓기 시작했고 이실리테도 옆에서 돕는다.

안느도 그 작업을 거든 뒤 후우,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사과했다.

=대장,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시신 수습을 혐오스러워하면서 돕지 않은 거…….=

“생리적인 혐오감으로 움직이지 못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방금의 그 광경은 어지간히 담이 강한 사람도 손을 쓰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니.”

이실리테도 주인인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움직이니까 옆에서 도운 거지, 정리하는 도중에 몇 번이나 안색이 파리해졌었고 목울대가 가끔 꿀렁였다. 욕지기를 참느라 그랬던 거겠지.

그러나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안느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슬이는 도왔잖아…….=

=저는 사람 시체를 많이 봤으니까요. 그래도…… 그 광경은 조금 힘들었지만요.=

“완전히 신경 쓰지 말라 고는 안 하겠지만, 이번에 못 한 것이 신경 쓰인다면 다른 일로 파티에 기여하면 된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응. 알았어. 그럴게.=

안느의 어두워져 있던 안색이 그제야 펴졌다.

=그럼, 미궁 강도들을 털어볼까?=

총 스무 개의 시체.

남녀 섞여 쓰레기처럼 땅을 뒹구는 모습에 섬뜩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이실리테도 안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체를 뒤져 돈주머니만 따로 챙기기 시작했다.

=주인님. 이번에도 장비는 다 놔둘까요?=

“그래. 앞으로도 장물로 취급될 것은 회수하지 않는다.”

=네.=

=어? 대장. 이건 아공간 주머니야.=

“흠. 사람들을 꽤 많이 털었나 보군.”

동전용 주머니 같은 특이 용도를 제외한 아공간 주머니는 최소 1세제곱미터부터 제작되며 가격도 10금화부터 시작한다.

거기서 가로세로 높이가 1미터씩 늘어날 때마다 가격이 대폭 증가하는 식. 주로 가로세로 폭보다 높이로 인한 가격 상승이 크다.

그런데 안느가 두목이라고 가리킨 사자 귀의 여자 품에서 나온 갈색 마수 가죽 주머니는 무려 2세제곱미터 공간에 무게감소 35%와 방수 기능의 주머니였다.

가격으로 따지면 약 31금화짜리.

아공간 주머니 안에는 침낭 마도구, 정화와 재생 기능이 담긴 소형 수통 마도구와 세면도구, 그 외에 몇몇 손도 대지 않은 건량과 건조식품이 있었고 각종 응급처치 도구가 든 구급상자, 회복약이 종류별로 5병씩, 병도 안 딴 술병, 옷가지, 야한 속옷, 장비 손질 도구 등이 있었고 돈주머니와 보석 주머니도 있었다.

일단 돈만 모아보니 28금화, 33열은화, 236은화, 115열동화, 374동화가 나왔다. 철화는 너무 많아서 제외.

거기에 독으로 짐작되는 하얀 공에 갈색 약병에 용도 불명의 약초와 온갖 물건들이 쏟아져나왔으며 약 22금화 가치의 보석 주머니도 나왔다.

=…동전과 보석으로만 금화 55닢 분량이네요.=

=이 자식들 진짜 사람들 많이 사냥했나 보네…….=

이실리테는 사람을 사냥하는 게 이렇게 돈을 많이 버니 세상에 도적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안느는 그저 미궁에서 개짓거리를 많이 했다는데에만 분노했지만.

“…….”

환인에게는 그저 좋은 부수입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일이었다.

‘현상금 사냥꾼이 있는 이유가 이래서겠지. 아무튼 아공간 주머니를 주문하면서 쓴 돈이 채워졌다. 이걸로…….’

함정 관련 기술을 배우는 데 쓸까, 아니면 방어 쪽으로 특화된 마도 방어구를 알아볼까.

환인은 아공간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살피는 안느와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내용물은 다 버리고 주머니만 챙기지.”

=넷?=

=……응? 이거 약하고 마도구도 있어서 정리하면 3금화 정도는 나올 텐데?=

“강도들이 부대끼며 쓰던 물건이다. 죽은 자의 저주 같은 게 물건에 들러붙어 있을지 누가 알겠나.”

영혼도 존재하는 마당에 영혼의 저주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생각 같아서는 손때가 묻은 아공간 주머니도 버리고 싶지만, 30금화가 넘는 마도구라서 찜찜함을 참는다.

대신 다음 마을이나 도시에서 가방을 처분하고 다른 것을 구매하거나 주문 제작할 생각인 환인이었다.

=영혼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엄청나게 그러네.=

=그럼 다 버릴게요.=

그렇게 전리품의 정리를 대강 해놓은 환인은 마지막으로 검회색 인랑족의 사체를 살폈다.

옷은 의복과 갑옷의 그 중간 즈음 되는 가죽제품으로, 올 때도 살펴봤지만 꽤 고급스러운 재질에 마감도 꼼꼼해 평범한 사람들이 입을만한 옷이 아니다.

=이 자식이 신경 쓰인다는 그놈이야?=

“그래. 사고방식도 그렇고 나와 비슷한 부류로 느껴졌다.”

=…….=

잠깐 환인이 적으로 등장한다고 생각해본 안느와 이실리테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주인님/대장과 비슷한 타입이라고? 절대 싸우고 싶지 않은데.

인랑족의 품을 뒤지던 환인은 신분패를 발견했다. 직사각형의 작은 쇳조각 뒷면에 적힌 글자를 읽는다.

“이름은 길레스=벡슬. 크라버리의…… 1급 호족.”

=호족…….=

=…….=

안느와 이실리테의 표정이 구겨진다. 환인은 예상대로였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섯 여자의 시체를 보존해놓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신분패를 구겨서 바지 주머니 속에 넣은 환인은 재차 길레스=벡슬의 시체를 뒤진다.

=크라버리의 성주는 5급이니까 1급 호족이면 성주의 먼 방계나 다름없을 텐데…… 더러운 자식. 호족이면서 이딴 개짓거리나 하고. 잘 뒤졌다.=

안느의 으르렁거리는 소릴 들으며 다시 품을 뒤져보던 환인은 신용카드와 비슷한 크기의 금속 조각을 하나 더 찾았다.

이건 각 도시 행정관의 현금 입출금을 담당하는 증표다. 타인은 쓸 수도 없고 이것도 나름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었기에 신분패처럼 똑같이 구긴 뒤에 따로 챙긴다.

이것들은 미궁을 나가면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 땅에 파묻어버릴 생각이었다.

그 후 재차 신분을 증명할만한 물건이 없는지 뒤져봤지만 더 나오는 것이 없는 것을 확인한 환인은 그제서야 손을 털고 일어섰다.

‘이제 죽었다가 언데드가 되어서 일어나더라도 소지품에 의해 신분이 알려지는 일은 없겠지.’

미궁 안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일어난 언데드는 생전의 소지품을 지닌다고 들었다.

남자고 여자고 모두 발가벗겨 탈탈 털어버린데다 미궁 강도 19인의 몸에서는 신분패가 나오지 않았다.

좀비가 되어 일어나더라도 오늘 있었던 일이 알려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한쪽 구석에 쌓인 강도들의 장비가 보물상자로 변해 미궁 곳곳에 흩어지더라도 문제없다. 그렇게 출토된 물품을 추적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는 것은 지구에서도 불가능할 테니까.

막다른 방의 문을 닫고 나온 환인은 바닥에 고여있던 5인분의 핏물이 다 사라진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미궁 강도의 시체를 터느라 시간을 조금 썼다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사이 수십 리터는 될법한 피가 모두 사라지다니.

다섯 여자의 시체가 담겨있는 자루 다섯 개는 멀쩡하다. 미궁이 피만 빨아들인 걸까.

쿠웃, 쿠우우.

환인이 나오자 시체 자루를 지키고 있던 비상이 다가와 여기 이상하다며 칭얼거린다. 바닥에 고여있던 피가 갑작스레 사라지는 걸 목격했기 때문인 듯 하다.

=어, 피가 다 사라졌네. 이러면 여기서 쉴 수 있겠는걸.=

=흔적이 원래 이렇게 빠르게 정리돼?=

=때에 따라 다른데 액체는 금방 사라지는 편이야. 이슬이랑 대장이 시신을 수습해서 더 빨리 정리된 걸지도 몰라.=

그러면서 옆방으로 건너간 안느는 버렸던 장작을 가져와 방 한편에 차곡차곡 쌓으며 말한다.

=배 안고파?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거 같은데 뭐라도 먹자.=

=식사 준비할까요?=

“그래. 저 방의 시체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여기서 하룻밤 정도는 보내야겠지.”

환인은 비상을 막다른 방문 앞으로 자리를 옮긴 뒤 등짐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네. 안느, 지금 성역 펼쳐줄 수 있어?=

=바로 준비하게?=

=응.=

=알았어.=

자이언트 워 해머와 자이언트 타워 실드를 옆에 내려놓은 안느는 방 한가운데 주저앉았고, 별다른 주문을 외우지 않고 토파즈보다 조금 옅은 색의 보호막 같은 것을 펼쳤다.

범위는 방을 전부 뒤덮는 수준.

=됐어. 내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한 90분은 지속될 거야.=

=와아.=

잠시 성역을 둘러본 이실리테는 곧바로 장작을 준비해 불을 피우고 식사 준비를 시작했고, 환인은 이형종이 언제 출몰해도 바로 요격할 수 있도록 비상의 안장에서 흑창을 가져와 옆에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바다였고 시체가 널려있던 장소였지만, 환인은 물론이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았다.

괴물과 이형종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서 죽음과 마주하는 일은 일상이었기 때문.

환인은 장작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연기 한 줄기가 선향 같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생각을 점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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