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149 안느
* * *
환인은 땀과 흙먼지가 묻은 안느에게 욕실을 내어주고 자신은 뒤뜰로 가서 옷을 털고 수돗가에서 머리만 감았다.
그 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옆구리를 확인했는데, 푸르딩딩하게 멍이 든 것이 바르둘에게 걷어차였던 때가 생각날 정도로 비슷한 형태였다.
‘이번에는 회복제를 마셨으니 멍은 더 빨리 사라지겠지.’
거실로 들어가자 귀신의 얼굴이 보일 것 같은 근육질의 우람한 등짝이 환인의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에 뒤돌아선 안느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묻는다.
=뭐야. 너 어디서 씻었어?=
“뒤뜰에 수돗가가 있다.”
안느는 평범한 리넨 바지와 회색에서 하늘색으로 바뀐 탱크탑을 위에 걸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탱크탑이 안느의 여성성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로 보였다.
=그럴 거면 그냥 같이 씻지.=
“너도 여자다. 몸가짐은 단정하게 하는 게 좋지.”
환인의 담담한 대답에 순간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안느는 피식, 약간 자조 어린 코웃음을 흘리며 장의자에 앉아 물었다.
=내가 여자로 보여?=
“얼굴도, 목소리도 여자다. 보여주는 행동은 사내 같은 구석이 있지만 그 정도는 다른 여자들도 어느 정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환인도 수건을 대충 접어놓고 안느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자기 몸에 자격지심이 있나.”
=이런 몸뚱이로 살아오다보니까.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심할 때는 죽고 싶을 정도였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마음에도 없는 말이 아니라 진담인 거 같은데 너도 비정상인 부분이 있어?=
“나는 선천적으로 감정이 다른 사람에 비해 결핍되어있다. 다른 사람의 보편적인 마음은 공감하지 못하지. 지식으로서 ‘이해’만 할 뿐이다.”
이실리테가 주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자신의 비밀 중 하나를 공개하자 중국집 웍 같은 냄비에 볶음 우동을 산처럼 담아오던 이실리테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안느도 비슷한 표정을 하다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며 묻는다.
=감정이 결핍되어있다는 게 조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대표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래?=
“……옆집의 가족이 소중하게 키우고 있는 애완동물이 있다고 가정하지. 그 동물을 만약 네가 실수로 죽였다. 어떤 감정을 느낄 것 같나.”
=음. 심사가 복잡하겠지. 침울해지거나 심란해질 거야. 죄책감도 느낄 거고.=
“그래.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나도 부모님께 그리 가르침을 받았고. 하지만 나는 먼저 손해배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생각부터 먼저 할 거다. 잘못은 이쪽에 있으니 미안해하는 척도 할 테지. 그들이 느낄법한 진정성 있는 사과도 할 테지만, 네가 말한 감정은 못 느낀다. 사과하고 배상하는 게 사회적 도의니까 하는 것일 뿐이지.”
=그거 좀…… 미친놈 같은데? 아무런 죄책감을 못 느낀다는 거잖아. 사람을 죽여도 그렇다는 거 아냐?=
“내가 살던 곳에서는 그런 사람을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고 부르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 증상이 가벼운 편이었고 부모님은 날 정상인처럼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셨다.”
=훌륭하신 부모님이네.=
“유일하게 존경했던 분들이다.”
=……과거형이라는 건.=
“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어, 음.=
남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히 이어가는 환인의 이야기에 안느는 문득 환인도 자신과 다르지만 비슷하게 힘든 시절을 보내왔겠다고 했다.
환인은 이실리테가 탁자 위에 철판 냄비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조금씩 바뀌는걸 느끼고 있다.”
=응? 그건 치료되고 있다는 말이야?=
“선천적인 뇌의 문제이기에 치료법은 없다. 오른팔이 없이 태어난 사람의 몸에 오른팔이 돋아나는 걸 치료라고 하지 않으니까.”
탱글탱글한 면발이 고기와 채소하고 같이 볶아진 면 요리를 이실리테가 접시에 담아 나누어주며 묻는다.
=그런데 여기 오셔서 바뀌고 계신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예요?=
“성불행을 할 때는 영혼과 감응을 한다. 영혼이 가진 고통과 미련을 읽고 그걸 해소해주어 성불로 이끄는 거지. 그렇게 감응할 때면 영혼이 가진 여러 감정이 내게도 흘러들어오는데 그것이 내 감정을 자극하는 거라고 판단하고 있다.”
=호오.=
“아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횟수지만, 이제껏 살아오며 느끼지 못한 감정을 조금씩 맛보고 있다는 게 증거겠지.”
=네가 성불행을 하는 이유도 그거 때문이야?=
자기 몫의 볶음 우동 접시를 받아든 안느가 이실리테에게 고갯짓으로 감사를 표시하고 환인에게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이 너에게 말하려 했던 것과 이어진다. 일단 음식부터 들지. 이실리테, 잘 먹으마.”
=어어. 이슬아, 잘 먹을게.=
=넵. 주인님도, 안느 씨도 맛있게 드세요.=
고개를 끄덕인 안느는 냄새부터 맡아본다.
‘흐음…….’
일단 냄새는 합격이다. 수쯔, 평범한 서민의 음식이지만 안느도 가끔씩 별미로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고기는 적당히 조미료로만 첨가되고 식물성 소스에 채소를 듬뿍 넣어 만드는 곡물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쯔를 굉장히 잘 만드는 가게도 방문해본 적이 있는데, 이슬이의 수쯔는 그것의 냄새에 버금가고 있었다.
손 접시에 면을 덜어 호로록, 빨아들이고 우물거리자 통통한 면발이 입 안에서 춤을 추듯 탱글거린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간장 소스의 짭짤하면서도 약간 새콤달콤한 맛과 함께 아삭거리는 피망과 양배추의 식감까지.
=……맛있는데?=
=다행이네요.=
=아니, 체면치레가 아니고 진짜야. 면의 익기, 간장 소스의 숨은 맛하고 그 소스가 면에 배어든 정도, 양념의 농도까지 맛의 균형이 절묘해.=
기다란 젓가락으로 크게 말아서 채소와 함께 한입 더 먹자 으흥, 콧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간단한 토핑이지만 오히려 토핑이 간단했기에 이런 심플하면서도 조화로운 맛의 볶음우동이 나왔다고 안느는 생각했다.
그러한 감상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안느를 보며 이실리테도 속으로 안느와 동료가 된다면 잘 지낼 수 있겠다고 느꼈다.
혹시 배배 꼬이거나 위험한 사람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사람은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식사를 끝낸 안느는 3인분이나 먹은 것으로 절대 보이지 않는 배를 툭툭 두드리며 만족스러워했다.
=이야, 엄청 잘 먹었어. 인이 한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네. 다른 음식도 이 정도 수준이면 호텔 주방장이나 호족 가문의 요리사로 들어가도 될 정도야.=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칭찬하자 이실리테가 의식적으로 웃는다.
=칭찬 고마워요. 그래도 그런 일을 할 일은 없을 테지만요.=
=그거 좋은 소식인데. 같은 파티가 되면 앞으로 이런 음식을 자주 먹을 수 있다는 거지?=
=안느 씨는 못 먹는 것이 뭐가 있나요? 주인님이나 저는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어요.=
=응? 어, 난 채소 요리면 다 좋아하고 고기도 끼니때마다 한주먹 정도까진 먹을 수 있어. 육즙 같은 것도 부담 없고.=
=네. 참고해서 식사를 준비할게요.=
=그래 준다니 고마운데…… 아직 파티에 가입한다고는 하지 않았는걸?=
=이러면 가입에 아주 약간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실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서로를 보며 웃는 모습에 환인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느가 숨긴 신분은 못 해도 플뢰 족의 호족 급일 가능성이 크다고 점치는 환인이다.
당연히 인성 확인도 범주에 넣어두었고 그 결과 괜찮겠다고 평가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만큼 계속 주시하며 분석했는데…….
‘선민의식이 없군.’
이실리테는 자신을 모시는 하녀다. 모시는 주인의 직위에 따라 하녀의 신분도 정해지는 만큼 일반인인 자신의 신분 때문에 이실리테를 아래로 보지 않을까 했지만, 안느는 이실리테를 마음으로 대하고 있었다.
트러블은 생기지 않겠지.
환인은 다소 장황한 설명에도 안느가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던 것을 생각하며 이번에도 안느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분위기 조성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지. 이실리테도 같이 들어라.”
식기를 정리하던 이실리테가 웍과 접시를 옆으로 치워두고 안느 옆에 앉고, 안느도 자세를 바로 하며 묻는다.
=식사 후라서 입이 좀 텁텁한데. 차랑 같이하면 안 될까?=
“……이실리테, 차 부탁하지.”
=네.=
작게 웃은 이실리테가 녹차 비슷한 차를 내오고서야 이야기가 진행됐다.
“이실리테의 여행 목적은 나와의 동행뿐이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일정은 나 혼자서 정하고 있었지.”
=너희 둘이 만나게 된 계기도 궁금한데 그건 나중에 들을 기회가 있겠지. 그래서?=
“내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종족 연합 도시이고 거기서 누군가를 찾는 게 목표다. 그 과정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촌락과 마을 그리고 도시를 가리지 않는 영혼의 성불행이다.”
=참고로 주인님은 이미 혼재를 둘이나 성불시켰어요. 소멸이 아니라 성불이요.=
=상급 영혼사님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응, 안 놀랐어.=
=안 놀란 것 치고는 눈매가 조금 떨렸는데요?=
=상급 영혼사라는 걸 몰랐으면 지금보다 10배는 더 놀랐을 거야.=
아까 영혼을 초혼하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런 도시에 소문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하고 말이다.
“다른 하나는 미궁 탐사와 탐험이다.”
=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굳이 위험한 미궁을 찾아가는 이유가 있어?=
“강해지기 위해서다. 안느, 너는 플뢰 족이고 숨긴 신분이 낮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날 보고 뭔가 떠올린 것 없나.”
=……혹시 했는데 너 진짜 차원 방랑자야?=
긴가민가하며 묻는 안느에게 환인은 에두른 표현 없이 긍정했다.
이 때문에 아까 비밀 유지 약속을 요구했구나. 그렇게 생각한 안느의 귀에 환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성불행을 하면 영적인 힘이 강해지는 걸 느낀다. 이 힘을 끌어올려 호족이라도 얕보지 못할 만큼 강해지는 것이 목표다. 그러기 위해 성불행을 하며 사람들을 돕고, 내 인지도를 올리고, 인맥 형성을 위한 단계를 밟아가는 거지.”
방랑자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인정하는 것을 보며 안느가 미간을 찡그렸다.
=강해지려는 이유가 혹시 부스러기 같은 자식들이 시비 거는걸 막으려고 하는 거야?=
“맞다.”
=네가 상급 영혼사라는 것만 알려도 그런 사람 대부분은 사라질 텐데…….=
“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명예로 인한 지위는 모래 위에 세워진 성만큼이나 불안정하지. 자신의 뜻을 관철할 힘이 있어야 신분 고저를 가리지 않는 존중을 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건 그래. 고족, 호족, 성족의 꼴통 비율은 일반인보다 더 높은 편이니까. 으음.=
허리를 곧추세우고 팔짱을 낀 안느가 다시 미간을 찡그린다.
=날 영입하려는 이유도 알겠어. 미궁 탐사에 튼튼하고 강력한 전위가 필요한 거지?=
“후방지원 겸 견제, 잠재적인 대검 공격자도 있다. 튼튼한 전위와 파티의 회복을 담당할 성술사 두 명 정도를 모집할 생각이었는데 그때 네가 나타난 거지.”
=내가 좀 사람들의 러브콜을 많이 받긴 해. 아무튼 넌 할 말 다 했어?=
“묻고 싶은 게 있다면 해도 된다.”
환인의 긍정에 안느가 눈을 똑바로 뜨고 환인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환인은 그런 안느의 은색 눈동자가 옅게 빛났음을 느꼈다.
‘종족 재능인가.’
=환인. 죄 없는 사람을 죽인다거나 괴롭히는 일은 안 할 거지?=
“나를, 이실리테를, 나아가 내 파티와 내 영역을 건드리는 놈은 유죄다.”
유죄guilty를 언급하는 환인의 목소리와 표정은 살인도 불사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기에 머리를 벅벅 긁은 안느가 재차 물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내 말은 네가 네 사욕을 위해 주도적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거냐고 묻는 거야. 너희가 아직 내 힘을 다 못 봐서 피부에 와닿지 않나 본 데 나, 땅신 교단의 자유 성투사거든? 나쁜 짓은 못 해.=
“그런 거라면 안심해도 좋다. 나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숲속에서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싶은 사람이니까. 날 이용하려 드는 놈들은 찾아가서 도끼로 머리통을 쪼개버릴 테지만, 그렇지 않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생각은 없다.”
=그거 다행이네.=
찡그렸던 표정을 푼 안느는 으음, 침음을 흘리며 눈 앞의 검은 머리 남자를 응시했다.
그가 어째서 프로 사기꾼 같은 기질을 가졌으면서 야수 같은 모습도 지닐 수 있었는지 의아했는데, 고백 아닌 고백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사이코패스? 조금 새로운 곡절이긴 한데 그런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면 이해는 돼.’
그가 보여준 성불행도 약간의 이기적인 요소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타적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지만 계속 성불행을 하다 보면 틀림없이 선한 면을 깨우친 선량한 사람이 되겠지.
거기다 이때까지 한 말은 전부 사실과 진실에 기반한 이야기였다.
즉 문제 될만한 것은 없다.
건들지 않으면 얌전하지만, 건들고 선 넘는 놈들은 끝장내버린다는 것도 문제 될 것 없다.오히려 안느에게는 강한 플러스 요소다. 병신 호구처럼 헤헤 웃으면서 타인의 악의에 휘둘리다 몸도 마음도 다치는 경험은 더는 하기 싫으니까.
=응.=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던 안느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잘 들었어. 그러면 이쪽 이야기를 할 차롄가? 난 아까 말했다시피 땅신님을 모시는 교단에서 성술을 배우고 직업으로 승화해서 성투사가 된 안느야. 대체로 교리나 설법에서 자유로운 속가 신분이지만 그래도 성투사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거든.=
“나쁜 짓은 하지 마라 같은 것 말고 주도적으로 해야 할 의뢰나 임무가 있나 보군.”
=어어. 내가 파르히스트에 방문한 이유도 이번 의무와 연관이 있어서야.=
“우둔 고트모그의 감옥에서 시체를 토벌하거나 재료를 모으는 건가.”
=……뭐야. 너 성투사에 관한 걸 알고 있었어?=
“아니. 성투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널 만난 이후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번 임무를 알고 있는 건데?=
성투사나 성전사는 많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뭔가 자신이 미처 짚어내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건?
“네 말과 행동에 다 나와 있었으니까.”
=……?=
어리둥절해하는 안느에게 환인은 자신이 그녀를 통해 읽어낸 것을 설명했다.
성투사라는 직업에 대한 특징성. 홀로 이 도시에 왔다는 행동. 가이드를 구한 것과 안느가 흘린 푸념에 미궁의 파티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
그리고 언데드가 출몰하는 미궁과 해야 한다는 의무 발언까지.
눈을 두어 차례 끔뻑인 안느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옆에 앉아있는 이실리테에게 물었다.
=그랬어?=
=보통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몰랐으니까요. 주인님이라서 읽으신 게 아닐까요?=
으음, 하고 입술을 오물거린 안느는 곧 인상을 펴며 중얼거렸다.
=뭐 파티의 리더가 우수한 것을 불만 가질 이유는 없겠지. 맞아. 올해 성투사로서의 의무는 죽음에서 일어난 자 1,000마리를 정화하는 거야. 내가 파티에 가입하게 되면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마다 이런 의무를 받아서 이행해야 해. 즉 이행 시기에는 파티 활동을 못 하거나 너희가 나랑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거지. 그래도 괜찮다면 나도 합류할게.=
“받아들이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조건이다. 환인이 일어서서 손을 내밀자 안느가 짙은 웃음을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해, 대장.=
씩 웃으며 환인과 악수를 한 안느는 이실리테와도 악수를 나누며 흐흐 웃었다.
=이슬이도 이제야 웃네?=
=……그전에도 웃었는데요.=
=그건 억지로 분위기를 위해서 웃는 웃음이었잖아.=
=그야 새로운 동료가 생길지 말지 결정되는 자리였잖아요. 긴장되는 게 당연하죠.=
새초롬하게 대답한 이실리테는 다시 웃으며 안느를 환영했다.
=동료가 되신 걸 환영해요.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나야말로 잘 부탁해야지. 앞으로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줘?=
=물론이에요.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연습해서라도 해드릴게요. 그보다 안느 씨.=
=이제 동료인데 그냥 편히 불러도 돼. 왜?=
=성투사시면 성술도 쓰실 수 있는 거죠?=
=응. 효과는 성술사보다 못하지만, 기본적인 치유나 정화는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면 주인님 옆구리 좀 치료해주세요. 회복제를 드셨지만, 상처가 다 아물지 않고 있으세요.=
=……아, 깜빡했다.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아서 잊고 있었어.=
멋쩍게 웃은 안느는 환인에게 다가가 스스럼없이 환인의 옷자락을 들춰보았다.
그리고 몇 초 정도 조각상처럼 매끈하고 깨끗한 복근에 넋이 나갔다.
‘……핫!’
정신 차린 안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환인의 옆구리에 물들어있는 피멍을 살폈다.
남자 맨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던가……? 그보다 역시 플뢰가 아닌 다른 종족은 근육도 적당히 잡히는구나.
와, 내 철판 같은 근육하고 다르게 보기도 좋네. 나도 이 정도였으면 행복했을 텐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린 안느는 위상력과 의지를 그 손바닥에 집중했다.
우우우웅——
희미한 빛이 손바닥에 모여들더니 젤리처럼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맺힌 것을 환부에 펴서 바르는데, 안느는 손바닥에 닿는 남자 피부의 부드러움에 몸서리가 쳐질 것만 같았다.
그간 남자와 인연이 없는 인생이었다. 남자의 맨살을 만져볼 기회조차 없었는데 이렇게…….
안느가 속으로 회한 아닌 회한을 느끼고 있을 때 환인은 빛이 닿은 부분에서 파스를 바르거나 뜨거운 탕에 들어간 것처럼 뜨거움과 시원함이 공존하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다만 그 강도는 보통의 1/4 정도로 미약한 수준? 감질난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자극이었다.
‘이걸로 체질 감지 훈련을 대체할 수 있겠는데…… 음.’
순간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은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실리테도 공격에 위상력을 담을 수 있나? 그게 된다면 위상력을 담은 손과 접촉하는 것도 체질 훈련의 일환이 되지 않을까.’
이실리테가 못한다면 안느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환인이 새로운 훈련 방식을 생각해내는 사이 안느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이 정도 상처면 결리는 수준까진 금방 나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치유가 늦지?=
“내 체질 때문이다. 위상력이 담긴 것은 공격이든 보조든 회복이든 내게는 잘 통하지 않아.”
이제 됐다며 자신의 옆구리를 미묘한 손길로 쓰다듬는 안느의 손을 떼어내고 옷을 내리자 안느가 재차 기막혀했다.
=뭔…… 아우라도 안 보여, 영혼사에다 축복도 쓸 수 있고 선천적인 병을 앓는 데다 무술은 최상급 교관 수준에 차원 방랑자? 거기에 위상류 체질까지 있어? 무슨 특이점도 아니고.=
이 체질을 위상류라고 하는 건가.
“그렇게 나열하니 내 인생도 기구한 것 같군. 애초에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다는 것 자체가 시련 같지만.”
표정을 고친 안느가 은근한 시선으로 환인을 바라본다.
산만한 덩치로 그렇게 쳐다보니 웅녀가 응시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환인은 이어진 안느의 이야기에 피식 웃었다.
=너 진짜 정체 잘 숨기고 다녀야겠다. 그게 전부 알려지면 널 해부해보고 싶어 하는 년들이 많을 거야.=
“알려지면 네 소행이라고 생각하지.”
=어? 왜 나야! 이슬이도 있잖아!=
“이실리테는 그런 짓 안 한다.”
=와, 이거 편애지? 파티 리더의 멤버 편애 맞지?=
억울하다며 자기 팔을 잡고 흔드는 안느의 행동에 이실리테가 작게 웃으면서 손을 잡고 주제를 전환한다.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서 자고 가세요. 2층에 방도 하나 비어있으니까 거기를 안느가 쓰면 될 거예요.=
=그럴까? 이슬이도 같이 잘래? 못된 대장은 혼자 자게 두고 여자들끼리 이야기나 좀 하자고.=
=네? 어…… 전 주인님이랑 아직 동침한 적이…….=
=……너, 혹시 아랫도리가 부실해?=
남성성을 의심하는 질문이었지만, 환인은 후 작은 웃음으로 흘려넘길 뿐이었다.
그 반응을 재미없어하던 안느는 이실리테와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이실리테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간다.
다 식은 차를 조금씩 마시며 안느의 손에 잡혀 끌려가면서도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 않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사이가 금세 좋아졌군.’
안느가 뒤로 음흉한 흉계를 꾸미는 성격도 아닌듯하고 이실리테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아니니까 계속해서 사이가 좋아질 거다.
문득 여자들의 동성애가 생각난 환인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여자 x 여자의 커플링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이실리테와 안느가 커플이 되더라도 문제될 건 없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이실리테라면 안느와 사귄다 하더라도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을 테니까.
* * *